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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6.03.16. 새벽기도 - 성경읽기와 묵상(에스겔 1821-19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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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일 : 2016년 3월 16일 수요일




교도소에 가면 억울하지 않은 죄인이 없고, 묘지에 가면 핑계없는 무덤이 없다고 합니다. 이것은 사람이 얼마나 자기를 합리화하기 좋아하는 성품을 가지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속설들이 아닌가 합니다. 안 그런 사람이 있는 것 같지만, 다 그렇습니다. 자기 잘못을 정확하게 알고 그것을 정직하게 인정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이 모두 죄성을 지닌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 죄성을 지닌 인간은 그렇게 두 가지 비틀어진 특징을 가집니다. 그래서 비록 자신이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을 알아도, 그만큼 잘못한 일은 없다느니 어쩔 수 없다느니 하는 말로 그래도 자신은 의롭다고 주장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과 유다백성들이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 바벨론에게 망하는 일을 그들은 과연 어떻게 느꼈을까요? 그들은 억울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들이 이런 일을 당할만큼 잘못한 일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은 정당하지만 하나님은 지나치고 부당하다고 그렇게 하나님을 비난했습니다. 사실 18장 전체는 그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만과 비난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변호하시는 내용을 되어 있습니다. 


먼저 18장 1절부터 21절까지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부모가 저지른 죄에 대한 형벌을 자녀게 내리신다는 유다 백성들의 비난에 대한 변호입니다. 사람들은 속담을 인용해서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그의 아들의 이가 시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지금 자신들이 당하는 고통과 어려움이 다 자기들의 잘못이 아니라 조상들과 부모대에서 저지른 잘못 때문에 자기들에게 덮어 씌워진 것이라는 뜻이었습니다. 그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그 사람의 죄는, 비록 가족관계에 있다고 하더라도 결코 다른 사람들에게 뒤집어 씌우는 일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부모가 죄를 지으면 부모가 벌을 받게하고, 자녀가 죄를 지으면 자녀가 벌을 받게 하신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유다백성들의 두번째 비난은 하나님은 용서하기를 싫어하시는 분이시고 벌을 주는 것을 즐기는 분이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아니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만일 악인이 그가 행한 모든 죄에서 돌이켜 떠나 내 모든 율례를 지키고 정의와 공의를 행하면 반드시 살고 죽지 아니할 것이라 그 범죄한 것이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행한 공의로 살리라” 하나님께서는 악한 사람 모두를 무차별적으로 벌 주시지 않습니다.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사람에 한 해서만 공의의 잣대를 들이 대십니다. 그 이전에 어떤 죄를 저질렀든 진심으로 회개하고 그 다음부터 공의로운 삶을 살면 그 사람은 그 이전의 죄가 아니라, 그가 그 이후에 행한 공의를 기준으로 평가를 받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불공평하다고 비난했습니다. 맞습니다. 하나님은 불공평합니다. 법 그대로, 공의로운 하나님의 성품을 그대로 적용하여 사람을 평가하신다면 사람은 단 한 번의 범죄로도 결코 구제받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사람이 회개하고 의로운 삶을 살기 시작하면 그 이전의 범죄들을 기억조차 하지 않으시고, 벌을  주시기 위한 공의로움이 아니라 상을 주시기 위한 공의로움을 적용하십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하나님은 정말 불공평한 분이십니다. 그렇지만 인간이 하나님의 이런 불공평을 비난할 수 는 없습니다. 이것은 오히려 감사하고 또 감사해야 하는 불공평이니까요. 그렇지만 유다백성들은 자기들의 잘못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그래서 하나님의 징계만 심하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벌 주는 일을 즐기신다고 비난했습니다. 


하나님이 진짜 어떤 마음을 품고 계신지는 18장 32절에 나와 있습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죽을 자가 죽는 것도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노니 너희는 스스로 돌이키고 살지니라” 이것이 죄인을 벌 주실 때, 그 뒤에 언제나 숨겨져 있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19장에는 이스라엘 고관들을 위한 하나님의 진노가 선언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사자새끼에 비유하시고 포도나무 가지 중에서 높고 튼튼한 가지에 비유하시면서 사자새끼들은 결국 이집트에 그리고 바벨론에게 잡혀가 더 이상 포악스럽게 살지 못하게 되었고, 그 가지는 뽑혀서 말라 버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자 새끼들은 커서 숫자가 같은 지도자가 되어야 하고, 포도가지는 왕의 지팡이가 되어야 하는데, 그러기도 전에 스스로 멸망을 자초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어느날 갑자기 아무런 예고도 없이 들이 닥치신 것이 아닙니다. 예고하고 경고하고, 호소도 하고… 이런 일을 수없이 반복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멸망당할 사람들이라고 해도 그들이 망하고 죽는 것을 원치 않으시니까요. 그런데, 이들은 끝까지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나라가 망하게 되고 자신들도 망하게 되었지만 죄에서 돌이키고 공의를 행하는 자리로 가지 않았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그런 그들에게 공의를 행하실 수 밖에 없으셨습니다. 더 이상 내버려 둘 수도, 또 참으실 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모두 기본적으로 자기 중심적입니다. 자기가 옳고 자기가 당하는 어려운 일은 다 이유가 없고 부당하기만 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정직하게 자신의 과거를 돌이켜 본다면 그는 자신이 그만큼의 어려움을 당하는 것이 얼마나 가벼운 것인지를 깨닫게 될 것이고, 더불어 하나님이 자신을 얼마나 참고 또 참으셨는지를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성도는 이런 감각을 잃어버리면 안됩니다. 그러면 자칫 기회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잘못은 저지를 수 있습니다. 죄도 지을 수 있지요. 그러나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고 얼마나 잘못했는지는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오해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자비하시고, 긍휼이 넘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모든 일들은 바로 그 자비와 긍휼 속에서 흘러나오는 은혜들입니다. 때로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아도 그게 하나님이십니다. 잘못된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판단입니다. 


언제나 우리가 죽을 자가 죽는 것도 기뻐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로우심 속에서 살고 있음을 확신하면서, 하나님 앞에 정직하고 겸손하게 서는 성도들로 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