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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6.04.03. 주일오전 - 그리도와 함께(에베소서 13)


20160403SM (#1).mp3.zip





설교본문 : 에베소서 2장 1-7절




우리는 항상 이 세상에서 이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을 눈으로 보면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알고 있을 것 같지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우리가 바라 보면서 살아가는 이 세상의 모습은 그저 우리가 주로 생활하는 반경 안에서 우리의 눈에 들어오는 것이 전부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이 세상의 모습이라고 받아들입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살다가 제주도라도 다녀오는 길에 운 좋게 날씨 좋은 날을 만나, 하늘에서 자기가 살아온 ‘세상’을 내려다 보는 순간 여기가 진짜 내가 살던 곳이 맞는가 하는 생각에 자기도 모르게 “야! 멋있다!”라고 탄성을 지르게 됩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우리가 ‘구원’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데요. 사도 바울은 그 이야기를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이것은 아마도 구원이 무엇인가를 묻는 질문에 대한 가장 짧은 대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인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셨다는 것. 우리는 대개 구원이라는 단어를 생각할 때, 이 정도를 생각합니다. 조금 더 나가면 그래서 나중에 천국 가는 것까지를 생각합니다. 틀리지 않습니다. 이게 바로 구원입니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우리가 땅에서 바라보는 구원의 모습이지 하늘에서 바라보는 구원의 진면모가 아닙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그 두 가지 모습이 얼마나 다른지를 살펴보고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은혜와 소망을 나눠보려고 합니다. 


바울은 먼저 우리가 받은 구원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를 밝히기 위해서 우리가 구원을 받기 이전에 우리가 어떤 상태에 있다가 생명을 얻었는지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기 전  우리는 모두 다 죄와 허물 속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 삶은 구체적으로 ‘세상풍조’를 따라서 살아가는 삶으로 나타났지요. 세상풍조를 따라 살아가는 것이 뭐가 그리 큰 죄인가 할 수 있지만, 성경에 나오는 세상풍조라는 말은 하나님을 거절하는 사람들이 모두 걷고 있는 삶의 방식을 말하는데, 그래서 이것은 하나님이 자신의 왕과 주인되어 주시는 삶을 거부하고 그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욕심내며 그것을 얻기 위해서 달려가는 자기 자신이 왕이 되어서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어떤 사람이 세상풍조를 따라 살아간다고 해서 그 사람이 항상 엄청나게 큰 죄만 짓고 사는 것은 아닙니다. 대개는 그저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보기에 이렇게 사는 사람은 그저 평범하게만 보입니다. 전혀 죄스럽게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여러분, 어떤 것이 죄냐 아니냐를 결정하는 것은 하나님이지 인간이 아닙니다. 온 세상을 만드시고 모든 사람들이 지켜야 할 법을 정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다들 그렇게 살고 있기 때문에 사람의 눈에는 세상풍조를 따르는 것이 평범하고 당연하게 보입니다. 그래서 당신이 죄인이라고 하면 화를 내는 것이지요. 그렇지만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그것은 사탄을 따라 살아가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 사람은 지금 하나님을 거부하고 자신이 왕이 되어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모든 죄를 다 용서해 주실 수 있으시지요? 그런데 하나님도 용서하지 않으시는 죄가 딱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죄가 이렇게 큰 죄가 되는 것은 이것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만물과 이 세상의 질서를 완전히 뒤집어 엎는 것이고, 하나님을 아얘 무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기 이전에 우리 삶이 이랬습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이 없었습니다. 무엇을 하든 세상풍조를 따라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사느라고 살아도 결국 사탄에게 순종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오히려 열심히 사는 만큼 더 하나님께는 죄를 짓게 되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런 죄인들에게 쏟아 부으시는 하나님의 분노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여기 우리가 주의깊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성경이 이러한 우리의 상태를 말할 때 ’죽을 너희를’이라는 말이 아니라 ‘죽었던 너희를’ 이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실 때, 물에 빠져 죽어가는 우리, 그냥 내버려 두면 죽게 될 우리를 건져 주신 것이 아니라 이미 숨이 끊어져 죽어있는 우리를 살리셨다고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 믿기 전에 우리가 죽어 있었습니까? 아닙니다. 살아 있었습니다. 잘만 살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우리를 향해 “죽었던 너희”라고 말할 때, 그 죽음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죽음이라고 하면 주로 육체에서 생명이 완전히 빠져나가서 생명이 없는 육체만 남는 것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죽음은 하나님과의 연결이 끊어져 있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풍성한 생명을 누리지 못하는 상태, 그렇게 하나님 없이 살고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여기 두 장의 사진이 있습니다. 둘 중에 어느 꽃의 생명이 훨씬 화려하고 풍성하지요? 이 사진입니다. 그런데요. 시간이 흐르면 어떻게 될까요? 이 꽃병의 꽃들은 결국 시들어 썩어 버릴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빈약한 가지들은 자라나고 커져서 꽃과 열매를 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생명과 죽음에 대해서 말하는 방식입니다. 이미 죽은 생명 안에 조금 남아있는 생명으로 사는 것이기 때문에 성경은 그것을 ‘죽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꽃 병에 꽂혀 있는 꽃과 같았습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살아있지만 실제로는 이미 죽은 생명 안에 조금 남아 있는 생명으로 살아가고 있는 이미 죽어 있는 상태였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과거 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엄청난 반전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순간 하나님은 그렇게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습니다.’ 꽃병의 꽃을 빼서 화분으로 옮겨 심어 주셨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함께 일으키셨고’- 이것은 부활을 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런 은혜들을 모두 주셨습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이 우리의 구원에 대해서 우리에게 말해주는 내용들입니다. 


그런데요 성도 여러분, 가만히 보면 이 말씀이 참 이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새 생명을 얻고, 부활하고 하나님 우편에 앉는 모든 일들을 이미 과거에 끝난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죽었던 우리를 살리셨다는 말은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예수를 믿는 순간 우리는 새 생명을 얻었으니까요. 그런데, 우리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부활해서 하나님 우편에 앉는 일은 이미 일어난 과거의 일일 수가 없습니다. 죽어야 부활을 할 수 있고, 부활을 해야만 하나님 우편에 앉을 수 있는데, 우리는 부활을 경험하기는 커녕 죽은 적도 없으니까요. 그렇다면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이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는 ‘그리스도 안’이라는 말 속에 들어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예수님과 하나로 연합된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 안’이라는 말은 이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 성경이 즐겨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그런데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되기 때문에 그 후에 우리에게는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예수를 믿기 전에는 예수님께 일어난 일은 우리와 하나도 상관이 없습니다. 예수 밖에 있으니까요. 그런데, 우리가 예수를 믿는 순간부터 예수님께 해당되는 모든 일은 우리들에게도 그대로 해당되는 일이 됩니다. 우리가 예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지요? 그래서 그 부활은 예수님 안에 있는 우리의 부활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지요? 그래서 예수님 안에서 우리도 하나님 우편에 앉아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의 부활이, 그리고 하나님 우편에 앉는 일이 이미 일어난 과거의 일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같은 것이라도 하늘에서 보는 것과 땅에서 보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아얘 다른 것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도 그렇습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구원은 예수 믿고 죄 용서 받고 나중에 죽어서 천국 가는 것 정도일 때가 많습니다. 사실 그 정도만 확실히 믿고 살아도 훌륭하지요. 그렇지만 하늘에서 보는 우리 구원의 진짜 모습은 이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하늘에서 우리를 보면 우리는 이미 부활한 사람들입니다. 또 우리는 이미 하나님 우편에 그리스도와 함께 앉아있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우리 구원의 진짜 모습입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는 삶의 법칙이 하나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생각하는 자기 자신의 모습만큼만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함부로 법을 어깁니다. 이 사람은 왜 그렇게 할까요? 물론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근본적으로 보면 그 사람은 자기 자신을 그래도 괜찮은 수준의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누군가가 다른 사람을 함부로 대합니다. 이 사람은 왜 그렇게 할까요? 그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그런 행동이 자신에게 어울린다고 생각할만큼 스스로를 가치가 낮은 사람이라고 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 사람은 그런 일을 할 때면 굉장히 자존심 상해 할 것입니다. 스스로 자신의 가치에 어울리지 않는 행동을 했다는 사실 때문에 굉장히 속상해 할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생각하는 자기 자신의 모습만큼 살아갈 수 있을 뿐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성도로서 어떤 삶을 살아가느냐 하는 것은 우리가 예수 안에 있는 우리 자신을 정말로 어떤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눈에 보이는 우리의 모습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는 우리의 모습을 따라 우리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분이 보고계시는 모습을 따라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보시는 우리의 모습은 어떤가요? 


첫째, 하나님께 우리는 이미 부활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부활의 능력이 주어져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여기서 사는 것은 우리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그 능력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요즘 제가 경험하고 있는 정말 부끄럽고도 신기한 일이 있습니다. 저같은 스타일의 사람들이 예수 믿으면서 제일 힘들어 하는 일은 사실 사람을 사랑하고 용서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요즘들어  이 일이 조금씩 조금씩 진전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충분히 미워할 수 있는 사람인데, 미움보다는 안타까움이 더 큽니다. 충분히 정죄할 수 있는 사람인데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먼저 생겨납니다. 그래서 아주 안 미운 것은 아니고, 정죄하는 마음이 아주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그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사실 저에게는 기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까지 숫한 세월을 미움과 정죄와 싸우며 기도해 왔지만 이런 기특한 마음이 생겨난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은 제가 제 안에 이미 부활의 능력이 있다는 것을 확실히 깨닫고 그것을 사용하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였던 것 같습니다. 


우리가 나의 부활을 확신하면서 그 부활의 능력을 의지하면 그 능력은 분명히 우리의 삶 어느 부분에선가는 힘을 발휘하게 되어 있습니다. 부활의 능력은 무엇보다도 내가 가장 힘들어 하던 것, 그리고 나를 제일 많이 괴롭히던 문제로 부터 우리를 자유케 해 줍니다. 부활의 능력이란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것이고, 무에서 유를 만들어 내는 가장 큰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하나님 앞에서는 내가 이미 부활을 경험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시고 기도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가장 힘들어 하고 어려워 하는 문제에서 부활의 능력이 나타나게 해 달라고, 여러분을 통해 부활의 능력이 세상으로 흘러가게 해 달라고 구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그 능력이 나타날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께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하나님 우편에 앉아 있는 사람들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을 뿐 아니라 지금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믿습니까? 그러면요 여러분, 예수님은 거기 앉으셔서 무엇을 하고 계실까요? 그냥 쉬고 계실까요? 아니지요? 예수님은 지금 거기서 세상을 다스리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거기 앉아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거기서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놀라지 마십시요. 우리들도 예수님과 함께 세상을 다스리고 있습니다. 나중에 그렇게 될 것이 아니라 지금 그렇습니다. 혹시 살아가면서 내가 그런 삶을 살고 있다는 실감이 나십니까? 내가 주님과 함께 세상을 다스리고 있다는 것이 와 닿으십니까? 아마도 그렇지 않으실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렇습니다. 우리가 느끼고 있든 그렇지 못하든 우리 모두는 이미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제가 아주 감명 깊게 읽은 짧은 이야기 하나가 있어서 소개해 드리려고 합니다. 한 화가가 살고 있었습니다. 이 화가의 꿈은 완벽한 나무그림 하나를 그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부터 마음을 잡고 동네에 있는 높다란 벽에다 나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정말 최선을 다해서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런데, 정말 안타까운 일이 일어납니다. 완벽한 나무를 그리기 위해서 너무나 심혈을 기울인 나머지 겨우 겨우 나뭇잎 하나만 그려놓고 세상을 떠나게 된 것입니다. 그 화가는 너무 슬펐습니다. 너무 낙심하고 상심했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눈을 감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감았던 눈을 떴을 때, 그는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하늘에서 눈을 뜬 그의 눈에는 자신이 꿈에도 그리던 그 나무, 그렇지만 나뭇잎 하나 밖에 그리지 못했던 그 완벽한 나무의 그림이 들어왔고, 그 나무에 달려 찬란하게 빛을 발하고 있는 자신이 그린 나뭇잎을 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것이 바로 우리가 예수님이 이 세상을 그 분의 뜻대로 다스리시는 일에 함께 참여하는 방법입니다. 우리는 큰 일들을 통해서 주님의 다스림에 함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직장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일을 처리할 때,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 가정에서 자녀들을 돌보며 집안 일을 돌볼 때, 가게에서 손님들을 대하거나 고객에게 물건을 팔 때, 오늘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성도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눌 때, 이 모든 순간들이 우리에게는 예수님과 함께 이 세상을 다스리는 순간들입니다. 그 모든 순간에 우리는 우리가 그려야 할 나뭇잎 위에 점 하나를 찍고 획 하나를 더하는 것이니까요. 그 나뭇잎 하나가, 그리고 그 점 하나가 별 것 아닌 것 같아 보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점들 하나 하나, 그 나뭇잎 하나 하나가 모여 하나님 나라라는 큰 그림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 점이 없고 획이 없다면 그 완벽한 그림은 그려지지 않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전서 13장에서 우리가 지금 여기서 보는 것과 하나님 나라에서 보는 것의 차이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을 통하여 희미하게 보나 그때에는 얼굴을 마주 대하여 보며 내가 지금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시는 것 같이 나도 알리라.’ 지금은  아무리 잘 본다고 해도 그저 희미하게 볼 수 있을 뿐입니다. 지금은 아무리 잘 안다고 해도 부분적으로 아는 것 밖에 없습니다. 모든 것이 다 그렇지요. 나 자신도 그렇고, 내 남편이나 아내도 그렇고 내 옆에 앉아있는 성도들도 그렇습니다. 이 세상도 그렇고 하나님 나라도 그렇습니다. 심지어는 우리 주님도 그렇고 하나님도 그렇습니다. 그게 무엇이든 우리는 희미하고 부분적으로만 알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안타까운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정말 큰 소망이 되고 위로가 됩니다. 지금 내가 알고 있는 나의 모습,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옆 사람의 모습이 전부가 아니며,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모습이 다가 아니고 진짜 아름답고 제대로된 모습이 남아 있다는 뜻이니까요. 


하나님께서는 지금 우리가 보는 것과는 전혀 다른 밑그림을 그려놓고 그 그림을 그려가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그 밑그림의 어느 부분인가를 열심히 채워가고 있습니다. 그 때가 되어야 우리는 그림 전체를 보게 될 것입니다. 그 때가 되어야 우리는 우리 자신의 참 모습과 우리가 했던 모든 일들의 참된 가치를 알게 될 것입니다. 한번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 날이 되면 우리는 서로를 얼마나 기뻐하게 될까요? 내가 그린 나뭇잎이 김집사가 그린 나뭇잎 덕분에 더 빛나고, 김집사가 그린 나뭇잎이 내가 그린 나뭇잎 덕분에 더 도드라져 보일 때, 그리고 그것들이 어우러져 있는 것을 볼 때, 우리는 서로에게 얼마나 감사하게 될까요? 또 그렇게 그려진 그 완벽한 나무의 풍경은 우리를 얼마나 감격하게 할까요? 


사탄은 우리가 예수를 믿은 다음에도 여전히 우리 자신의 눈으로만 모든 것을 보게 하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우리를 우리 자신의 틀에 묶어 놓아야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삶을 사는 것을 막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서 보고 계시는 모습으로 보면서 살아갈 수 있는 시력을 회복해야 합니다. 지금은 희미한 그림이지만 그 그림에다 우리의 촛점을 맞추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지금 나의 모습이 어떻든지 간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나는 이미 새 생명을 얻었고, 이미 부활했고, 그리스도와 더불어 하나님 우편에 앉아 있다는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십시오, 바로 그 영광스러운 그림에 자신의 삶을 맞춰가십시오. 넘어지고 실수해도 괜찮습니다. 다시 또 그래도 괜찮습니다. 그 그림만 볼 수 있다면, 그 그림만 지워지지 않는다면 다 괜찮습니다. 


우리는 또한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같은 눈으로 보아야 합니다.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보면 맘에 드는 사람,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다. 아마 다섯 명만 모아 놓아도 그럴 것입니다. 또 교회 전체를 생각해도 그럴 것입니다. 괜찮은 것 같다가도 영 뭔가 못 마땅하고 맘에 들지 않고 그런 모습이 보일 것입니다. 그래서 가슴을 활짝 열어서 끌어 안지 못하는 것이겠지요. 그렇지만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는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닌 사람들입니다. 우리 속에는 이미 부활의 능력이 꿈틀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능력으로 주님과 함께 세상을 다스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그런 사람으로 바라보며 믿어주어야 합니다. 

  

언젠가 하늘과 땅이 하나로 만날 때, 그제서야 우리 눈 앞에는 온전한 그림이 나타날 것입니다. 너무나 뚜렷한 풍경이 드러날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내가 그리고 우리 성도들이 얼마나 귀한 사람이었는지를 제대로 보게 될 것입니다. 보잘 것 없어 보이는 내 작은 사랑과 친절이, 의미 없게만 여겨졌던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버둥거리며 살았던 나의 삶의 한 조각이 그 그림 속에서 밤하늘의 별처럼 빛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왕같은 제사장들입니다. 그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들의 본래 모습이고 진짜 모습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눈으로 나를 보고 서로를 보면서, 믿어주고 기다려 주십시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우리의 본 모습을 꺼내주실 때가지 서두르거나 조급해 하지 마십시다. 하나님께서는 죽은 우리들을 살리셔서 여기까지 데리고 오셨습니다. 그러니 결국 하나님께서 이루실 것입니다. 항상 이 믿음과 소망 가운데 서로가 서로를 믿고 격려하며 하나님 마음에 그린 한 그림을 바라보며 신앙생활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우리에게는 부활의 생명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주님과 더불어 이 세상을 다스리고 있습니다. 주님 주신 능력으로 이 일을 잘 감당하게 해 주소서.
  2. 이제는 서로 서로를, 그리고 주님의 교회를 하나님의 눈으로 보며 사랑하고 기다리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