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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금요기도회

2016.04.29. 금요기도회 - 바울이 손을 들어 변명하되(사도행전 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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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사도행전 26장 1-23절




드디어 바울은 아그립바 왕 앞에서 자신을 변호할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이런 기회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베스도가 로마로 보낼 고소장을 꾸밀 때, 바울이 황제에게 상소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알아내서 그것을 적어넣기 위해서 였습니다. 바울도 그 이유를 모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미리 그런 이야기를 해야한다고 언지를 받았겠지요. 아그립바가 자신을 변호할 기회를 주자 바울은 아주 겸손하고 진중하게 자신에 대한 변호를 시작합니다. 물론 전체적인 틀은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지만 그 안에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기신 일에 대한 설명과 어떻게 해서 그 일을 맡게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 그리고 복음의 핵심적인 이야기들이 모두 들어 있었습니다. 


사실 일반적으로 보면 이렇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유대인들이 자신을 고소한 일에 대해서 간략하고 분명하게 자기 자신의 결백함을 증명해 내기만 하면 되었고 사실 그렇게 하는 것이 가장 현명하고 지혜로운 일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지난 주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가이사랴와 지금 바울이 서 있는 법정은 그저 그가 억울하게 붙들려 있었던 장소나 자신의 결백함을 주장해야 할 그런 장소가 아니었습니다. 바울에게는 가이사랴가 또 하나의 로마였고 그 법정 안은 복음을 전해야 하는 소명의 자리였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부르심, 그러니까 우리가 ‘소명’이라고 부르는 것에는 아주 독특한 특징이 있습니다. 잠시 제 이야기를 들려드리는 것이 소명이라는 것을 이해하는데 약간은 도움이 될 것같니다. 저는 선천적으로 의지도 약하고 마음도 굉장히 여린 사람입니다. 그래서 저도 처음 목회자로 부르심을 받았을 때, 그것이 가장 먼저 걱정이 되었습니다. 이런 내가 과연 목회를 할 수 있을까 솔직히 걱정이 아니라 겁이 났습니다. 제가 첫번째로 사역했던 곳은 경기도 일산의 외곽지역에 있는 작은 교회였습니다. 저는 거기 중고등부 전도사로 가게 되었었는데요. 아이들 중에서 정말로 제 마음을 힘들게 하는 놈들이 몇 있어서, 사역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눈물을 흘린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습니다. 모세처럼 ‘내가 이 아이들을 낳은 것도 아닌데, 왜 내가 이런 고생을 해야 하느냐’고 하나님께 항변하는 기도도 여러 번 드린 기억이 납니다. 사실 이 정도 되면요. 저는 이미 그 일을 내려 놓아야 합니다. 그게 그 이전의 저의 모습이었으니까요. 그런데, 그 때 저는 참 이상한 경험을 했습니다. 그렇게 힘들고 아파하면서도 이상하게 그 일을 그만두어야 하겠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던 것입니다.  


한 사람이 소명을 받기 전에는 그 소명은 마치 자기 마음대로 그 소명을 이렇게도 할 수 있고, 저렇게도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마 이것은 그 소명을 받지 않은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기에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한 번 그 사람이 소명을 받아들이면 그 때부터 그 소명은 그 사람 전체보다도 더 커지고 중요해 집니다. 그 소명에 붙들리게 되고, 자신이 소명을 컨트롤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소명이 자신을 움직여 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 소명을 거두어 가시기 전에는 그 소명을 빼놓고서 자신을 생각할 수 없는 그런 상태가 됩니다. 적어도 힘들고 싫어서 그 일을 그만둘 생각은 들지 않게 됩니다. 


바울이 지금 법정에서 자신을 변호할 기회에 이런 무리하고 어울리지 않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그가 받은 소명은 바울이 그 자리에서 해야 할 이야기의 내용을 결정할 정도로 바울에게는 절대적인 것이었던 것입니다. 맨발의 전도자로 불리웠던 고 최춘선 할아버지는 평생을 맨발로 다니면서 거치처럼 살았고, 그렇게 사람들을 돕고 전도했던 분으로 유명한데요. 그 분이 당신은 왜 그렇게 살아가느냐고 묻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신 적이 있습니다. “사명은 각자 각자…”라고 말입니다. 누구도 말릴 수 없고, 다른 사람이 그렇게 하라고 강요해서 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주신 소명은 그 사람에게는 가장 특별한 것입니다. 그것을 일반화시킬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왜 다른 사람처럼하지 않느냐, 굳이 그렇게 해야할 필요가 있느냐, 다르게 하면 안되겠느냐라고 묻는 것은 그 사람에게는 의미가 없는 질문입니다. 바울이 그랬습니다. 그게 바울이 받은 소명이었습니다. 그는 그 소명에 붙들려 있었고 그 소명 안에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소명이 그가 사는 집이었고, 그가 거하는 세상의 전부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상황이 아니라 소명에 따라 반응할 수 밖에 없었고, 그것 때문에 지금 상식적인 수준에서 보면 무리한 선택을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어떻게 해서 이 소명에 그렇게 완전히 붙들리게 된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그가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만난 예수님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흔히 ‘바울의 회심’이라고 부르는데요. 바울의 회심은 독특한 점이 있습니다. 바울은 유대인이었습니다. 이미 하나님을 믿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뿐만 아니라 열심히 약속된 메시야가 오실 것을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이구요.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었던 바울은 바울 자신이 말하고 있듯이 이런 점에서도 그 누구보다도 열심이 아주 특별했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또 율법을 지키는 일에 100퍼센트 헌신되어 있었구요. 그리고 기록을 보면 예수님 당시의 유대교 안에는 부활에 대한 소망이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고 합니다. 당연히 바울도 부활에 대한 믿음과 소망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인 예수를 추종하던 사람들이 죽었던 예수가 다시 살아았다고 주장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바울에게 정말 말도 안되는 이야기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죄인 중에서도 가장 큰 죄인인 예수를 정말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했다는 뜻이고, 또 한 가지 이 세상의 역사가 이제 종말의 시대로 접어들었다는 뜻이 되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입장에서는 이것보다 더 말이 안되는 주장은 없었습니다. 더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부터 그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가두고 죽이는 일에 앞장서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러던 어느 날 똑같은 일을 하기 위해서 다메섹으로 가다가 바울은 길에서 눈이 멀 정도로 밝은 빛을 보게 되고, 너는 왜 나를 핍박하느냐, 왜 그렇게 소가 뒷발로 가시달린 채찍을 차는 것 같은 일을 하느냐는 안타까운 음성을 듣습니다. 바울은 그 음성을 향해 묻습니다. “주여 누구십니까?” 그 때, 바울은 가장 충격적인 대답을 듣습니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그 말에 바울은 완전히 얼어붙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바울에게 예수님은 하나님을 모독하다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사람입니다. 그것으로 완전히 끝난 악질 이단입니다. 그런데, 그 목소리는 자신이 예수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이야기가 어떻게 됩니까? 지금 예수가 자신에게 말하고 있다면, 그 예수는 그 자신의 말대로, 또 사람들의 주장대로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게다가 자신이 믿는 바에 따르면, 부활은 드디어 이제까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오랜세월을 바라고 또 바랐던 가장 중요한 소망이 성취되는 그런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때,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고 바로 잡으시는 때가 왔다는 것을 알리는 결정적인 일이었습니다. 


바울의 모든 소망은 성취되었습니다. 그의 믿음은 이제 오실 메시야가 아니라 오신 메시야를 믿는 믿음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충성은 율법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을 향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런 바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너의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종과 증인을 삼으로 함이니…” 바울에게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일이 그가 가지고 있었던 모든 틀이 깨져 나가게 하기에 충분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바울에게 내가 이렇게 너에게 나타난 것은 너를 나의 부활과 앞으로 너에게 나타날 일들에 대한 증언으로 삼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시며 그에게 부활의 증인이 되는 소명을 맡기셨던 것입니다. 


이제 바울이 자신에 대한 변호를 시작하자 마자 거기 있는 사람들을 향해서 “당신들은 하나님이 죽은 사람을 살리심을 어찌하여 못 믿을 일로 여기나이까?”라고 안타깝게 이야기 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아시겠지요?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만남을 통해 이미 이 세상에 메시야가 왔으며, 온 세상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자신은 바로 그 소식을 세상에 전하기 위해서  다시 부름받았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그저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는 사실을 믿는다거나, 혹은 예수님께서 그렇게 다시 사셨기 때문에 우리들도 다시 살아나게 될 것만을 믿는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활에는 정말 중요한 두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부활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손을 번쩍 들어주신 사건이었습니다. 그 부활을 통해 예수님이 진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이 세상의 왕이시라는 것을 확증해 주신 것입니다. 둘째, 부활은 성경이 ‘새 창조’라고 말하는 하나님 나라가 진짜로 이 세상 속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리는 첫 나팔소리였습니다. 이것은 성경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이것은 이제 이 세상의 역사가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라는 마지막 단계만 남기고 있으며, 그 일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부활은 예수님이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야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부활은 무엇보다도 종말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나서 그 이전에 가지고 있던 모든 틀이 깨졌습니다. 그것은 그가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라는 소명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소명을 받는 일만으로도 삶이 완전히 달라지기에 충분한데, 그 소명이 이 세상 역사 속에서 일어났던 가장 중요하고 결정적인 사건이 이미 일어났다는 것과 그래서  아담의 타락으로부터 시작된 이 세상과 사람들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는 소식을 알리는 것이었기 때문에 바울이 가지고 있던 삶의 틀은 그 날을 기점으로 해서 완전히 깨어져 버렸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정말 특별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이 이미 일어나서 이제 하나님 나라의 완성만을 기다리고 있는 그런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런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부활을 아는 자 답게,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답게 사는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하며 어떤 모양의 삶을 살아가든지 말이지요. 이것은 결코 무리한 요구가 아닐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정말로 예수님의 부활의 의미를 알고 믿으며, 그래서 하나님 나라를 고대하면서 살아간다면 우리의 삶은 저절로 그 증거들을 내놓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것은 그 누구에게보다 우리에게 유익한 일이 될 것입니다. 우리를 얽매어 놓았던 수많은 일들로 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해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의 법정에서의 모습은 우리에게 부활을 믿고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며 사는 사람의 자유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부활과 하나님 나라를 참되고 믿고 소망한다면 우리의 삶 속에도 그런 자유가 주어질 것입니다. 기쁨과 설레임 속에서 살아가게 될 것은 물론이고 말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를 부활을 믿는 믿음과 분명히 임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으로 우리 삶을 새롭게 만드시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삶의 작은 근심이나 한 사람에 대한 정죄와 미움조차 해결하지 못해 불편하게 매여 있는 우리의 삶을 풀어 자유케 하셔서 우리를 삶으로 또 입술로 예수님의 부활과 하나님 나라를 전하는 당당하고 영광스러운 소명자로 만드시기를 바라십니다. 


눈을 크게 뜨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작은 일 하나, 그리고 어떤 사람 하나에 얽매여 있을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사탄의 일이지 부활하신 주님, 하나님 나라의 왕이신 우리 예수님이 하시는 일이 아닙니다. 모든 세대의 마지막 주자 답게 가슴에 하나님 나라를 품고 부활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크고 넓은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부활의 주님을 만나게 해 주시고, 이 작은 가슴에 하나님 나라를 품게 되는 큰 은혜를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비록 세상에  살지만 세상이나 사람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와 당당함 속에 살아가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 부활의 증인으로 사는 은혜를 누리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