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사도행전 26장 24-31절
여러분은 어떠신지 모르지만 오늘 대부분의 성도들은 예수를 믿되 세련되게 믿는 것을 좋아합니다. 적당히, 스마트하게, 심플하고 투박하지 않게 남들이 보기에도 전혀 무리가 없는 그런 모습으로 예수를 믿기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신앙생활 할 수 있는 교회를 찾아갑니다. 일상생활 속에서도 그렇습니다. 너무도 자연스럽게 아무런 지장이나 이질감 없이 믿지 않는 사람들과 섞이고 어울립니다. 그런 모습을 바람직한 신앙인의 모습이라고 생각하고, 또 그렇게 칭찬해 주는 믿지 않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뻐합니다. 물론 우리는 우리가 예수를 믿기 때문에 믿지 않는 사람들과 물과 기름처럼 되어서도 안되고, 또 다른 이들을 배려하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대로만 하고 사는 그런 사람이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것은 지혜로운 것도 아니고 그들을 사랑하는 방법도 될 수 없으니까요.
제가 신학을 공부하기로 결정한 후에 저는 제 후배의 아버지이기도 한 저의 교회학교 은사님을 찾아갔습니다. 제가 그 선생님께 “선생님, 저 신학교에 가기로 했습니다.”라고 말씀드렸더니, 그 분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래? 그러면 미친 개가 되라. 예수님에게 미친, 미친 개처럼 되라”고 말입니다. 여러분은 이 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말이 적당한 말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너무 과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그 때 이 말이 조금은 과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제 정신으로 예수 믿어야지 왜 그렇게 예수 믿어야 하나 하고 말이지요. 그런데, 살면서 이 말을 실감하고 있습니다. 항상 문제는 제가 예수님께 너무 많이 미쳐있는 것이 아니라 충분히 미쳐있지 않은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의 문제는 무엇일까요? 왜 우리의 믿음은 이 세상은 고사하고 우리 자신의 삶 속에서도 그다지 놀라운 일을 일으키지 못하고 있고, 또 우리 자신의 삶과 인격을 새롭게 하는 일에도 그렇게 힘겨운 것이 되어 버렸을까요? 그것은 혹시 우리의 신앙이 너무 적당해서가 아닐까요? 우리가 신앙생활을 너무 무리 없는 모습으로 하려고 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본래 부터 예수 믿는 일이 그런 것이 아닌데 말이지요.
지난 주 금요일에도 살펴 보았지만 왕이 주재하는 재판에 피고로 서서 자기를 변호하게 된 바울은 자기를 변호하는 척하면서 결국 복음을 전했습니다.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예수님이야 말로 온 세상의 왕이시라는 것을 이야기했으며, 그러니까 빨리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바울의 입에서는 전혀 그 자리를 마련한 베스도가 듣고 싶어하던 그런 이야기가 흘러나오지 않았습니다. 바울의 입에서 흘러 나온 것은 복음이었습니다. 물론 간접적이기는 했지만 재판장인 아그립바 왕을 향해 회개를 요구하고 예수 믿을 것을 요구하는 복음이 흘러 나왔습니다. 지난 금요일에 말씀드린 것처럼 아그립바는 버니게와 동행하고 있었습니다. 이 버니게가 누구인가 하면 아그립바의 이복 누이였습니다. 그렇다면 아그립바는 왜 자기 누이와 동행하고 있었을까요? 그것은 그 당시 버니게는 사실상 아그립바의 부인이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당사자들은 항상 인정하지 않았지만, 그게 그 당시 그 둘 사이의 관계였습니다. 우리는 아그립바가 유대인이었다는 점을 잊으면 안됩니다. 이것은 당시 이방인들의 기준으로 보아도 그렇지만 유대인들의 기준으로 보면 정말 말이 안되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앞에서 회개에 대한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간파한 베스도는 소리를 지리며 바울의 이야기를 막아섰습니다.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하였도다” 사실 베스도의 입장에서 보면 상황도 상황이지만 바울을 이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정말 미치지 않고서야 자신에 대한 재판이 벌어지는 재판정에서 그것도 아그립바라는 거물 앞에서 그런 이야기를 그렇게 스스럼 없이 할 수는 없는 일이었으니까요.
바울은 베스도의 그런 이야기를 듣고도 꿈쩍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미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참되고 온전한 말을 하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한 후에, 이번에는 아주 직접 아그립바를 전도하기 시작합니다. 바울은 예수의 사건이 어느 한 구석에서 아는 사람도 몇 없이 일어난 그런 사건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발합니다. 그래서 아그립바 왕도 이 일에 대해서 충분히 알고 있을 것이라고 그렇게 말합니다. 틀림 없는 사실이었습니다. 예수님과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던 사람들은 예수님 사건을 축소하고 싶어했습니다. 그저 유대 땅 한 구석에서 약간 비범한 사람이 일으킨 소동쯤으로 치부하고 싶어했습니다. 그렇지만 사실이 그렇지 않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었습니다. 왕궁에만 머물러 있던 아그립바까지도 그 사실을 자세하게 알고 있을 정도였으니까요.
바울의 이야기인 즉, 명백하게 만천하가 알 수 있을 정도로 공개적으로 일어난 일을 부인하지 말자는 것이었습니다. 일단 예수님 사건이 그런 일이라는 것을 인정한 후에 그 다음에 그렇다면 이 일이 진짜로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를 따져 보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유대인인 아그립바에게 선지자들의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이것은 곧 예수님 사건이 구약의 선지자들이 그토록 예언하고 또 예언했던 메시야에 대한 예언들을 성취한 사건이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였습니다.
바울이 선지자 이야기를 꺼내자 이제 아그립바도 상황을 파악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에게 이렇게 면박을 줍니다.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내가 말 몇 마디로 예수를 믿을 그런 호락 호락한 인물로 보이느냐는 그런 이야기였습니다. 그렇지만 이 말에도 바울은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바울의 대답은 거의 말꼬리를 잡는 수준이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우리는 지난 몇 주에 걸쳐서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시작해서 지금 가이사랴의 법정에 서기까지 그가 보낸 2년이 훨씬 넘는 세월을 추적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바울이 지금까지 걸어온 길은 그가 의도적으로 선택해서 걸어온 걸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가 겪은 모든 곤경과 어려움은 정말로 피하려고 했다면 충분히 피할 수 있는 그런 것들이었으니까요. 그런데 바울은 오히려 자신이 힘들어 지고 또 자신을 곤경으로 몰아넣는 그런 선택을 해 왔습니다. 지금 법정에서도 그렇게 하고 있구요. 그렇다면 바울은 왜 이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아니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우리는 이미 한 가지 이유를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그에게 맡기신 소명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소명은 그것이 바울에게는 굉장히 크고 중요한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런 선택을 하게 만든 이유의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어찌보면 진짜 중요한 이유가 한 가지 더 남아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바울을 생각할 때, 자꾸 그의 소명에만 집중하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나도 바울처럼 살기를 원한다고 말할 때는, 그 말 속에 자신도 바울처럼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을 따라 바울처럼 충성스럽게 살기를 바라는 마음만을 담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 한 가지가 있습니다. 바울은 결코 그런 선택을 하고 그런 삶을 살 때, 비장한 각오를 하고 무거운 마음으로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래야만 할 때가 아주 없지는 않았겠지만 사도행전이나 그가 쓴 서신서들을 보면 바울은 십자가를 닮은 자신의 고난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다 한 번도 비장한 마음으로 무겁고 어두운 심정으로 그렇게 한 적이 없습니다. 바울이 그런 이야기들을 할 때, 그는 예외 없이 소망으로 가득 차서, 기뻐하고 행복해 하면서 그렇게 했습니다.
가이사랴의 법정에 서 있는 바울은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행복했습니다. 비록 그 자리에 자신보다 낮은 신분의 사람이 없었고, 또 죄인의 신분으로 거기 와 있는 사람도 없었지만 그는 그 누구도 부럽지가 않았습니다. 그래서 거기 있는 그 누구처럼 되고 싶어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바울은 자신을 향해 미쳤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이렇게 묶여 있는 것 이외에는 여기 있는 여러분 모두가 다 나처럼 되기를 바랍니다. 나는 하나님께 그렇게 기도하고 있습니다”라고 말이지요.
바울은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베스도는 그런 바울을 향해 네가 미친 것이 분명하다고 말했던 것이지요. 미쳤다. 미친 것이 분명하다. 절대로 좋은 말이 아닙니다. 남에게 듣고 싶은 말도 아닙니다. 그렇지만, 예수 믿는 우리들은 한 번쯤은 꼭 들어야 할 말인 듯 싶습니다.
우리가 꼭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만약 전혀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볼 때, 그저 무난하게 받아들여지고 전부 이해가 된다면, 과연 그 사람은 예수를 제대로 믿고 있는 사람일까요? 혹시 그 반대는 아니겠습니까?
모든 사람들이 한 가지 음악에 맞춰서 노래를 부르며 똑같은 춤을 추고 있는데, 유독 어떤 한 사람만 다른 노래를 부르며 다른 춤을 추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비웃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그의 귀에는 이어폰이 끼어져 있었습니다. 그가 다른 노래를 부르며 다른 춤을 춘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습니다. 그는 혼자서 전혀 다른 박자의 다른 노래를 듣고 있었고 거기에 맞춰 노래하고 춤을 추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예수를 믿고 복음을 아는 우리들의 모습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 예수를 믿고서 산다는 것은 적어도 결정적인 부분에서는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박자와 리듬을 가진 다른 노래에 맞춰 춤을 추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이 주인이 된 이 세상의 노래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인이라고 노래하는 복음에 맞춰 춤을 추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제대로 예수를 믿는 사람들, 제대로 복음을 만난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알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기쁨이 있고 행복이 있습니다. 바로 그것 때문에 예수님께 속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고 차별됩니다. 때로는 그렇게 다른 모습 때문에 사람들에게 무시를 당하기도 하고 오해를 받기도 하지만 성도들은 그 행복을 알며 그 기쁨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바로 예수 믿는 사람들입니다.
“예수에 미쳤다”는 소리, “이해할 수가 없다”는 소리, “그렇지만 저 사람 안에는 뭔가 있다”는 이런 이야기. 오늘 예수 믿는 우리 이런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 살아야 하는 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서도 이런 이야기를 한 번 듣지 못했다는 것은 우리가 아직은 우리 안에 예수님께서 계시는 행복과 복음을 아는 즐거움을 모르고 있다는 뜻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바울이 누구나 다 이해할 수 있는 그런 모습으로 예수를 믿었다면 바울은 모든 사람들을 향해서 “당신들도 나처럼 되기를 바란다”고 당당하게 말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예수 믿는 행복을 안다면 우리들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을 향해서 ‘당신도 나처럼 되었으면 좋겠다’고, ‘나처럼 행복하고 나처럼 기뻐하는 그런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예수님을 예수 믿는 것 답게 믿고 있다는 증거가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도 꼭 한 번 예수님에게 미쳤다는 소리를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과하게 예수믿는다는 소리, 참 무식하게 예수믿는다는 소리 한 번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한 번 예수를 믿어 보시기 바랍니다.
발만 물에 담그면 발만 적실 수 있을 뿐입니다. 몸 전체를 담가야 그 물에서 헤엄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우리 삶 전체를 예수의 은혜에 담가서 그 은혜의 바다에서 헤엄치는 행복을 아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