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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금요기도회

2016.05.13. 금요기도회 - 바울이 그들을 권하여(사도행전 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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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사도행전 27장 1-12절




2년인 넘는 바울의 가이사랴에서의 감금생활이 끝이 났습니다. 우리가 이미 살펴 보았듯이 바울이 이 도시에 이렇게 오랫동안 붙들려 있어야 했던 것은 그렇게 복잡한 이유 때문도 아니었고 중요한 이유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로마가 파견한 유대의 총독들이 유대 지도층의 눈치를 보아야 했고, 또 환심을 사려고 했기 때문에 바울은 그렇게 금쪽같은 세월을 거기서 허비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일이 이렇게 되도록 내버려 두셨을까요? 우리는 이 일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우리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에 속해 있고 또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움직여 간다고 믿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바울의 경험도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끝까지 그렇게 되도록 만드시고 조종하신 것이라고 생각해야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도 직접 악한 일을 행하지는 않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바울이 이렇게 된 것을 하나님이 직접 그렇게 하신 일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이런 경우에는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들이 일을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바울은 피해자가 된 것입니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이런 일들 또한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서 바울의 삶 속에 들어올 수 있었던 일들이고 또 하나님이 모르고 계신 일도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대개 우리가 경험하게 되는 일들 중에서 좋은 일들만을 내 인생의 일부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대개 그 반대가 되는 일들은 싫어하고 부정하며 나의 세계 밖으로 밀어내려고 하지요. 그렇지만, 우리는 우리 개인의 삶 속에서 경험하게 되는 모든 일들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셨기 때문에 내 삶 속으로 들어올 수 있었고, 그래서 그런 일들 또한 이미 하나님께서 이끌어 가시는 내 인생의 일부분이 되었다는 점을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일부러 선하지 않거나 어리석은 선택을 해서도 안되고,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악한 일들을 선한 일로 받아들여서는 안됩니다. 악을 악이 아닌 것처럼 생각해서도 안되구요. 분별은 분명하게 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쨋든 내 삶 속에서 일어난 일들이라면 그 다음부터는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비록 지금은 그 일 때문에 아프고 고통스러워도 결국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일이니 하나님께 의탁하면 하나님의 손에서 아름답고 선하게 사용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오히려 그런 일들을 통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그 속에서 더 크고 놀라운 은혜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심지어는 우리 스스로가 저지르는 잘못도 같은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 잘못을 정직하게 인정하고 회개하면, 그렇게 그 악한 일들의 쓴 뿌리를 끊어내면 그 때부터 그것은 하나님의 선한 도구가 됩니다. 


바울은 가이사랴에서 머문 2년동안, 당시 유대 땅에 사는 영향력 있는 사람들에 복음을 들려줄 수 있었습니다. 2년 동안의 시간이 바울에게는 참 억울하고 아까운 시간이었고, 불의한 시간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이런 악하고 억울한 시간을 사용하셔서 전혀 복음을 들을 수 없었던 사람들, 그리고 들으려는 의지도 없었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런 일들은 우리의 삶 속에서도 그대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자신의 인생을 생각할 때, 자꾸 잘못 생각하게 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내 인생을 의미있고 가치있게 만들어 준 것은 내가 기억에 남을만한 성공적인 삶을 살고, 가치있는 일을 하고 있었던 때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곰곰히 생각해 보면 실은 그 반대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 이 정도라도 인간다움을 유지하고 있고, 또 이만큼이라도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은 우리의 실패 덕분이며, 인생에서 빼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그런 아프고 힘든 일들 덕분입니다. 또 우리가 쓸데 없이 허비해 버렸다고 생각하는 그 시간들 덕분입니다. 그런 시간 안에서 하나님께서 오히려 더 열심히 일하고 계셨기 때문에 우리의 삶은 이런 역설적인 은혜들로 채워져 온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일하십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일을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이루어 가십니다. 우리를 더욱 더 아름다운 믿음의 사람이 되어가게 해 주시구요.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러한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고 기대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 믿음이 강하고 확실해질수록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해서 더 많은 일들을 하실 것이고 우리 또한 더 풍성하고 생생한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 바울은 드디어 로마로 향합니다. 다른 죄수들과 함께 배를 타고 이탈리아 지역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27장부터 그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는데요. 그런데, 우리는 27장이 시작되는 지점에서 갑자기 이야기의 주어가 “우리”로 바뀌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 동안 사도행전은 마치 다른 사람이 자기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관찰하여 적은 것처럼 그렇게 기록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갑자기 주어가 ‘우리’로 바뀌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여기서 바울과 자신을 ‘우리’라는 말로 묶고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그렇습니다. 사도행전을 적은 누가입니다. 누가는 그 동안 이야기에 거의 등장하지 않았지만 바울을 떠난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계속해서 바울과 함께했습니다. 심지어는 바울이 죄수의 신분으로 배를 타고 이탈리아 지역으로 향해 갈 때, 그 배에도 함께 올라 탔습니다. 우리가 바울을 보아도 알 수 있지만, 참으로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의 공통된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직하다는 것입니다. 한결같다는 것입니다. 상황에 따라 이렇게 저렇게 마음과 생각을 바꾸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바울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누가도 그랬습니다. 그저 바울과 함께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에서는 커다란 위험을 마다하지 않았고, 가이사랴에서는 지루한 2년을 함께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죄수가 되어 로마로 향하는 바울과 배 위에 함께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럴 필요가 있을까, 다른 선택을 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지 않았을까 싶지만 누가는 한 번 정한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바울도 말렸을 것 같습니다. 너는 이제 네가 가야할 길을 가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래도 누가는 끝까지 바울이 타는 배에 함께 올랐습니다. 


오늘 이 시대는 예수를 믿는 사람들까지도 손해보는 선택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효율을 먼저 생각하고 자신에게 더 유익한 것이 무엇인지 그것을 우선적인 선택의 기준으로 생각합니다. 그런 성도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성도의 정상적인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를 믿는 사람으로 부름받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는 자리로 부름받는다는 것은 실은 손해 보면서 살아가는 자리로 부름받는다는 뜻입니다. 적어도 인간적이고 세속적인 기준에서 보면 분명히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곧 예수님의 방식이 맞다는 것을 인정하고 따르는 자리로 부름받는다는 뜻인데, 예수님은 언제나 손해보는 삶을 사셨고, 그렇게 손해를 보심으로써 다른 이들을 유익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일이 하나님이신 분이 인간이 되신 것이고, 또 그렇게 인간이 되셔서 우리를 위해서 목숨을 내어주신 일 아닙니까? 예수님께서 그렇게 손해보신 덕분에 구원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며, 지금도 하나님의 자녀된 은혜 가운데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개인적인 삶 뿐만 아니라 예수를 믿는 일에 있어서도 계속해서 계산하고 따지면서 살아가고 있다면 과연 그 사람이 정말로 그 은혜를 아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우리의 삶이 하나님 앞에서 가치있고 의미있어지는 때는, 우리가 계산하지 않을 때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그리고 교회나 이웃들을 위해서 계산하지 않고서 손해가 되는 선택을 하며 살아갈 때입니다. 누가는 손해보는 선택을 했습니다. 정말 바보같은 선택을 했습니다. 바울이 그렇게 했듯이 누가도 그렇게 했습니다. 누가는 그저 뒤에 숨어 있었습니다. 바울이 걸어가는 길을 동행하면서 뒤에서 그를 돕고 지원하며, 그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인생이 헛되었습니까? 그 인생이 낭비되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가 그런 삶을 살았기 때문에 지금 우리 손에는 사도행전이라는 성경이 들려 있습니다. 사도 바울과 함께 하시면서 일하신 하나님에 대한 생생한 증언을 들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흉내내어 바보같이 계산하지 않고서 손해 보면서 살아간 누가의 인생이 남긴 영광스러운 열매입니다. 우리가 누가처럼 조금 더 바보같고 조금더 손해보면서 살게 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 또한 누가의 삶과 같이 다른 누군가를 위해서 가치있고 영광스럽게 사용해 주실 것이고, 또 칭찬해 주실 것입니다.  


배는 일단 항해를 시작했지만 과정은 순탄치가 않았습니다. 가이사랴에서 배를 탄 바울 일행은 일단 시돈까지 갔고 거기서 얼마간 머물다가 출발했는데, 바람이 심해서 겨우 겨우 해안을 따라 항해하다가 길리기아의 무라라는 항구에 도착합니다. 그리고 거기서 다시 이달리야로 가는 알렉산드리라 배로 갈아탔습니다. 계속해서 바람이 심하게 불어서 이번에도 천천히 갈 수 밖에 없었고 간신히 그레데 섬의 미항이라는 항구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그러는 동안에 시간이 많이 흘러서 9절이 말해 주듯이 ‘금식하는 절기’가 훨씬 지나버리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금식하는 날이란 대속죄일을 가리키는 것인데, 바울이 배를 타고 이달리야로 항해했던 서기 59년도의 대속죄일은 10월 5일이었습니다. 그 당시 지중해 북쪽에서는 기후 때문에 9월 중순부터는 항해하는 일이 위험해 지고, 11월 중순 이후로는 아예 배를 띠우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이 그 당시를 ‘금식하는 절기’라는 절기를 기준으로 기록하고 있는 이유는 그 때는 이미 기후적인 문제로 항해를 계속하는 일이 굉장히 어려운 시기가 되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입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바울이 입을 열었습니다. “여러분, 내가 보니 이번 항해가 물건과 배 뿐만이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를 끼치게 될 것 같습니다.”라고 말입니다. 사실 이 일은 정말 어이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호송되어지고 있는 일개 죄수가, 그것도 항해와는 전혀 상관 없는 사람이 항해에 대해서 심지어는 뱃사람들을 지도하려고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일에 대한 결정권은 죄수들의 호송을 맡은 백부장에게 있었습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백부장은 바울의 말이 아니라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믿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백부장이 보기에 바울은 항해에는 완전히 문외한이고, 두 사람은 전문가였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불행하게도 배에 탔던 사람들 중의 다수가 미항이 겨울을 지내기에는 불편한 것이 많다는 이유로 뵈닉스라는 항구로 옮길 것을 재촉하고 있었으니 백부장이 바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래야 귀를 기울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바울은 그들의 생각과는 달리 항해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미 전도 여행을 위해서, 수차례, 그것도 아주 먼 거리를 항해한 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동안 얼마나 긴 시간을 뱃 사람들과 함께 했고, 그들과 항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겠습니까? 게다가 바울이 항해한 곳이 지금 바울이 항해하고 있는 지중해였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그 동안 바울이 뱃사람들에게 전해 들은 항해에 대한 이야기들은 바로 그 바다에 대한 이야기들이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뿐만 아닙니다. 바울은 항해에 적절하지 않은 계절에 자연을 거스르고 항해하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고린도 후서 11장 25절에 보면 그는 항해 도중에 세번이나 난파를 당한 적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중에서 한 번은 하루 밤낮을 통나무 같은 것을 붙들고 바다에서 표류한 적도 있었다고 말합니다. 아마도 그렇게 이야기하는 바울의 머리 속에는 그 동안 겪었던 그 끔찍한 경험에 대한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을 것입니다. 


바울의 말은 사람을 살릴 수 있는 말이었습니다. 그만큼 가치있고 중요한 말이었습니다. 그것은 그의 직접적인 경험에서 얻은 지식에서 나온 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런 지식을 얻을 수 있었고, 또 따르기만 했더라면 엄청나게 도움이 되는 그런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그 동안 복음과 예수님을 위해서 바보같이 손해보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값진 지식 또한 그러 삶의 결과물이었던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십자가는 단순히 우리 죄를 용서받게 하고 우리에게 새 생명을 준 은혜의 상징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언제나 사람들을 돕고 살리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입니다. 그래서 어느 곳에서나 다른 이들에게 큰 유익을 끼치고 다른 이들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일이 일어나는 곳에서는 십자가를 따라 흉내내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흔적이 발견됩니다. 누군가가 십자가를 흉내내는 삶을 살기로 결단할 때, 예수님처럼 바보같이 손해 보는 삶을 살기로 작정하고 한 걸음 한 걸음 그 길을 갈 때, 그것이 다른 사람들을 돕고 살리는 놀라운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누가와 바울의 모습은 우리에게 어떻게 하면 우리의 이 짧은 인생이 다른 이들에게 참된 도움이 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값지고 영광스러운 인생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바울은 죄수였고 누가는 그 죄수와 동행하는 사람에 불과했지만, 그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자리에서 묵묵히 예수님을 흉내내며 살았을 때, 그들은 많은 사람들을 유익하게 하고 또 살릴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 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십가를 닮은 두 사람의 삶을 그렇게 가치있고 능력있게 사용하셨습니다. 


십자가는 능력이고 십자가는 지혜입니다. 사람들을 살리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이 세상 최고의 지혜와 능력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언제나 이것을 믿고 그 믿음에 따라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언제나 이 십자가를 믿는 믿음으로, 십자가를 흉내내는 삶을 살아서 그 삶을 통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복되고 영광스러운 삶을 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