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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금요기도회

2016.05.20. 금요기도회 - 이제는 안심하라(사도행전 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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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사도행전 27장 12-26절





우리가 어느 날 어떤 일을 하거나 어떤 상황 속에 있는데 갑자기 등에 소름이 돋는 경험을 할 때가 있습니다. 분명히 처음 하는 일인데도 그 일을 이전에도 했었다는 느낌이 들거나, 분명히 처음 있게되는 곳인데도 이전에도 여기 있었다는 느낌이 들 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경을 읽다가도 이런 비슷한 경험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냥 가볍게 읽을 때는 몰랐는데, 어느날 똑같은 곳을 찬찬히 읽거나 묵상할 때, 그것과 너무 비슷한 이야기가 성경의 다른 곳에도 또 있다는 생각이 나지요. 그래서 기억을 더듬어 가면서 성경 이곳 저곳을 뒤적거려 봅니다. 찾아보니 정말 있습니다. 비슷해도 너무 비슷한 이야기가 전혀 엉뚱한 곳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 곳을 발견하면 정말 숨겨놓은 보물이라도 찾은 듯이 기쁩니다. 그런데, 이것이 우연이 아닙니다. 원래부터 성경이라는 책이 그렇게 기록되어졌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특히 구약성경과 신약성경 속에는 비슷한 듯하지만 다르고 다른 것 같지만 비슷한 이야기가 짝으로 들어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경우, 구약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를 신약성경에서 짝을 이루는 이야기의 ‘모형’이라고 부르는데요. 그런 경우에 구약의 ‘모형’이 되는 이야기는 원래부터 하나님께서 신약의 이야기를 더 풍성하고 깊이있게, 그리고 제대로 깨닫게 해 주시려고 구약에 기록해 놓으신 것입니다. 


지난 주에 이어서 우리가 계속 살펴보는 바울의 로마로 가는 항해 이야기는 분명히 이 곳 사도행전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나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이 이야기가 어디서 많이 보던 것 같습니다. 어디서 보셨는지 생각이 나십니까? 그렇습니다. 이 이야기는 요나의 항해 이야기와 정말 많이 닮아 있습니다. 


첫째, 요나는 그 당시 이스라엘을 점령하고 다스리던 원수같은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로 보내집니다. 물론 멸망당할 위기에 처해 있는 니느웨 성을 살릴 메세지를 가지고서 말입니다. 사도 바울도 비슷합니다. 바울도 그 당시 유대 땅을 식민지삼아 다스리던 로마제국의 수도인 로마로 향합니다. 그들을 구원할 복음을 가지고 말입니다. 요나와 바울은 둘 다 이방선교, 그것도 원수를 구원하기 위한 선교사로 파송받았습니다. 


둘째, 이 두 사람이 탄 배는 항해 도중에 배가 깨질 정도의 심각한 풍랑을 만납니다. 그러는 와중에 선장이나 선원들, 그 누구도 그런 상황에 대처할 수 없었다는 것도 똑같습니다. 


세째, 마지막 결과도 거의 비슷합니다. 요나는 결국 니느웨에 도착했고 거기서 하나님의 메세지를 전했습니다. 그래서 멸망당할 니느웨를 살릴 수 있었습니다.  그 성읍에 있던 12만이 넘는 사람들과 가축들의 생명을 건졌습니다. 바울도 그랬습니다. 사도행전 마지막 장을 보면 바울이 로마에서 재판을 받기 전에 꽤 오랜 세월을 로마에 구금상태로 머물러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는데요. 그 때 그는 그렇게 로마에 머물면서 자신을 찾아오는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고, 그래서 그들에게 새 생명을 전해 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비슷한 부분은 여기까지입니다. 이렇게 큰 틀에서 보면 많이 닮아있는 두 이야기이지만 그 세부적인 내용에서는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부분이 바로 이 야이기들의 진짜 메세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첫째, 요나는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시는 니느웨가 아니라 정반대 방향에 있는 다시스로 도망가다가 풍랑을 만났습니다. 그렇지만 바울은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에 순종하여 로마로 가다가 풍랑을 만났습니다. 


둘째, 요나는 자신이 만난 풍랑의 원인이 되었지만 바울은 오히려 항해가 시작되기 전에 태풍을 만나게 될 것을 확신하고서 항해를 말렸습니다. 그래서 요나는 자신이 탄 배와 그 위의 사람들을 죽음의 위기로 몰아 넣었지만 바울은 미리 그 위기를 피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요나는 풍랑때문에 두려워하는 배에 함께 타고 있었던 사람들을 위해서 아무 것도 해 주지 못했지만, 바울은 함께 탔던 사람들이 살아날 수 있다는 희망을 잃어버리고 절망에 빠져 있을 때, 그들 앞에 서서 아주 정확하고 자세한 하나님의 뜻을 확신있게 전해 주면서 그들을 위로 했습니다. 바울의 이야기는 분명히 신뢰를 얻었을 것이고 그들에게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 이전에 그들은 바울이 항해를 말릴 때, 그 이야기를 듣지 않았다가 그런 낭패를 당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요나도 아니고 바울도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는 하나님께서 두 사람에게 맡기셨던 소명은 성도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맡기신 소명과는 많이 다를 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탔던 배를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이라고 가정해 놓고서 두 사람의 이야기를 다시 한 번 읽고 묵상할 때,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떤 태도를 가지고 어떤 역할을 하며 살아가는 것이 마땅한가 하는데 대한 귀중한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첫째, 우리는 개인적인 감정이나 성향에 따라서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겨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 모두에게 햇빛과 비를 주는 하나님이니 너희도 그렇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또 구약성경의 율법을 보면 원수의 짐승이 구덩이에 빠지면 모르는 척 하지 말고 그 짐승을 구해 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은 이 원리에 따라서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는 민족과 나라의 원수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죄수의 신분이 되고 목숨을 거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요나는 죽으면 죽었지 그렇게는 못하겠다고 버텼습니다. 우리가 정말로 복음을 아는 사람이라면 우리는 적어도 요나같은 사고방식을 당연하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저 사람은 악한 사람이고 또 나에게도 해를 끼친 사람이니까 망하고 고통당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원수되었던 우리를 받아주시기 위해서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셨고 그 은혜 덕분에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아래서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이렇게 하는 것이 쉬워서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어렵기 때문에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 믿는 사람들은 자기 안에 있는 ‘앙심’과 끊임 없이 싸워야 하고 또 이겨내야 합니다. 맺힌 것은 풀어야 하고 그 굴레에서 빨리 빠져 나와야 합니다. 그래야 ‘나’라는 울타리를 벗어나서 하나님 나라를 위한 의미있는 일을 제대로 감당할 수 있습니다. 


둘째,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회, 그리고 이 세상을 하나의 배로 표현한다면, 우리는 우리 아닌 다른 사람들, 특히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과 한 배를 탄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우리는 무엇보다도 그 자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소명의 자리라는 것을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 일에 있어서도 요나와 바울의 대조적인 모습은 중요한 도움을 줍니다. 예수를 믿는 우리는 나는 일단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믿으니까 그 자체로 이 세상에 평안을 가져다 주고 사회를 이롭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습니다. 우리는 요나의 모습 속에서 그게 그렇지가 않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요나는 선지자입니다. 비록 울뚝빼기이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하고 어긋나갔을 때, 그는 자신과 함께 배를 타고 있던 사람들을 죽음의 위기 속으로 몰아넣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믿고 안다고 하는 사람의 죄가 그렇지 않은 사람의 죄보다 더 크고 무겁습니다. 모르고서 그렇게 한 것은 정상참작이라는 게 있지만 알면서 그렇게 하는 것은 정상참작이라는 게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죄가 무엇인지도 알고 반대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도 아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런 지식을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지식이 있다는 것은 그렇게 살아야 할 의무가 생겼다는 것을 뜻합니다. 최소한 그 방향으로 살기 위해서 애를 써야하는 그런 사람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어기면 그것은 하나님에게 뿐만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과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더 좋지 않은 결과를 남기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소명과는 정반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요나의 역할이 아니라 바울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알기 때문에 알지 못하고 위험 속으로 빠져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그 사실을 알리고 경고하며 안전한 곳으로 이끄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때로는 껄끄럽다고 해도 그들을 살리고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해야 할 이야기를 해야만 합니다. 그런 역할이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에서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맡겨진 아주 중요한 역할입니다. 말로 하기 어렵다면 삶으로 보여주려고 애써야 합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사는 것 답게 사는 것인지를 보여주고, 그것이 그들의 답 없는 삶에 대한 답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애써야 합니다. 


세번째, 바울이 그랬듯이 우리 성도들은 이 불안하고 위로가 없는 세상에서 위로자의 역할을 해 주어야 합니다. 풍랑을 만난 사람들을 평안하게 해 주며, 길을 잃은 사람들에게 길을 알려주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저는 우리 예수믿는 사람들이 환경에 너무 민감한 것은 별로 바람직한 모습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나서서 마치 그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나라가 망하고 사회가 무너질 것같은 극단적인 태도를 보이고, 그것을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결과저긍로 위기와 불안을 조장하는 역할을 하는 것을 볼 때가 있는데, 저는 이것이 하나님을 믿고 아는 우리들에게는 참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회와 나라, 그리고 이 세상의 운명은 누구 손에 있습니까?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실제로 믿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물론 경제도 중요하고 정치와 안보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손에 들린 도구에 불과합니다. 이 사회와 이 세상의 운명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들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물론 우리는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하며, 그 일들의 옳고 그름을 분명히 분별해야 합니다. 그리고, 문제가 있고 어려움이 있을 때는 그것을 분명히 인식하고 그것을 위해서 진지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또 무언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때는 책임을 가지고 행동해야 합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이미 일어난 일들, 사회를 어렵게 하고 불안하게 하는 일들에 대해서 너무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호들갑을 떨면 안됩니다. 


저는 분명히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일이 악화되고 힘들어지게 두신다면 하나님께서는 언제든지 그 일을 제자리로 되돌릴 수 있으시다고 말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뜻을 알았고 또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했기 때문에, 모두가 다 두려워하고 절망한 상황 속에서도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계속 견디어 낼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었습니다. 물론 우리는 우리가 사는 세상에 대해서 사도 바울처럼 세세하고 정확하게 알고 있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모든 상황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믿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실을 정말로 믿는다면, 우리는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호들갑을 떨고 더 두려워하고 더 걱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마치 웨슬레가 탔던 배가 풍랑을 만났을 때, 그 배 위에서 평온하게 기도하며 찬양했던 모라비아 형제들처럼 두려움과 근심에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 위로와 소망을 전해주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바울처럼 ‘이제 안심하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평강을 위한 하나님의 전령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에서나 사회에서나 우리는 그저 개인이 아닙니다. 나 아닌 다른 사람들과 같은 배를 타고 가는 사람들입니다. 그 배 위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소명의 자리이지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요나에 가깝습니까, 아니면 바울에 가깝습니까? 우리의 삶과 태도는 이 세상과 교회에 플러스가 되고 있습니까, 아니면 마이너스가 되고 있습니까? 우리는 때로 폭풍을 만난 배처럼 흔들리는 이 세상에서 사람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평안을 주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함께 불안해 하며 오히려 더 두려워하는 그런 사람들입니까? 


성도인 우리는 요나처럼 살아갈 수도 있고, 바울처럼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언제나 다른 사람들과 한 배를 탄 사람들로서 교회에서 그리고 사회 안에서 의롭게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면서 다른 이들을 위한 든든한 위로자와 격려자의 역할을 감당하는 참 믿음의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