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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금요기도회

2016.06.03. 금요기도회 - 백부장이 바울을 구하려 하여(사도행전 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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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사도행전 27장 39-44절




얼마전에 집사람과 중국집에 가서 짬뽕을 한 그릇 먹다가, 텔레비젼에서 아마도 이제 갓 시작한 듯한 드라마를 한 편 보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보니 그 드라마에는 그럴 듯한 남자 배우 두 사람이 출연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 날 본 이야기 안에는 둘 중에 누가 남자 주인공인지 알 수 있는 단서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둘 중에 누가 주인공인지 대번에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영화나 연극, 드라마의 중심에는 항상 주인공이 있습니다. 그 주인공이 이야기의 시작과 진행, 그리고 결말까지 모든 흐름을 주도하고 또 결론을 결정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영화나 연극에서는 이 주인공을 가장 유명하고 또 인기있는 배우를 씁니다. 그 날도 누가 더 인기있는 배우인지를 생각해 보니 대번에 누가 주인공인지 알 수 있었습니다. 


이렇다보니 모두들 드라마나 영화를 볼 때, 주인공이 누구인가 하는 것과 그 사람이 거기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에 집중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사실 그 영화나 드라마가 그렇게 재미있는 이야기가 되고 의미있는 이야기가 되는 이유는 그 주인공을 옆에서 돕는 조연이나 다른 등장인물들 덕분입니다. 그 사람들이 그 흐름 속에서 자기가 맡은 역할을 제대로 잘 감당해 주니까 주인공도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그리고 돋보이게 해 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볼 때도, 드라마나 영화를 볼 때와 비슷한 시각으로 보는 것 같습니다. 물론 성경의 모든 이야기의 진짜 주인공은 하나님이지만, 그 이야기 속에 나오는 겉으로 드러난 주인공을 중심으로 해서 그 이야기를 바라보지요. 그러다 보니 그 사람의 믿음, 그 사람이 행한 일 혹은 그 사람의 성품에 감동하게 되고, 또 그 사람을 본받고 싶어하게 되지요. 이것이 꼭 나쁜 것은 아닙니다만, 그러느라고 보지 못하고 그냥 넘어가게 되는 다른 사람들도 그 이야기 속에는 참 많습니다. 조연이나 혹은 그저 단순한 등장인물이지만 그 사람이 없었다면 그 이야기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을 사람, 그리고 주인공도 주인공 다운 역할을 할 수 없었을 그런 사람들 말입니다.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이 흥미진진한 이야기 속에도 그런 사람이 나옵니다. 그 사람은 바로 백부장 율리오입니다. 백부장은 사실 바울이 아니었다면 이 항해의 중심이 될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비록 선장이 따로 있고, 또 선주도 따로 있었지만 항해에 대한 모든 권한은 그가 쥐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처음에 미항에서 겨울을 날지, 아니면 좀 더 환경이 좋은 뵈닉스라는 곳으로 갈지 고민하고 있을 때, 바울의 이야기를 듣는 대신에 선장과 선주의 말에 따라 항해하기로 결정을 내린 것은 율리오였습니다. 그것은 뭔가 특별한 점은 있지만 그래도 여전히 한 사람의 죄수에 불과한 바울의 말보다는 배 위에서 잔뼈가 굵었고 또 지중해 바다라면 손바닥 들여다 보는 것처럼 훤히 알고 있을 선장과 선주의 이야기가 더 신뢰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었기 때문입니다. 율리오의 생각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의 판단은 지극히 상식적이고 논리적인 것이었습니다. 우리들도 그런 상황에 있었다면 분명히 그런 결정을 내렸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결국에 그것이 맞다고 증명된 것은 항해 전문가들의 말이 아니라 바울의 말이었습니다. 항해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배는 유라굴로라는 태풍을 만났습니다. 그 태풍에는 그 누구도 손을 쓸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도 해 보았고 저렇게도 해 보았겠지만, 선장이나 선주, 그리고 선원들 중 그 누구도 배를 컨트롤 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배에 탔던 모든 사람들은 모두 절망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 때 나서서 이 상황을 진정시킨 것이 바로 바울이었습니다. 바울의 이야기에 힘을 얻고 용기를 얻어 그들은 다시 태풍과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바울의 이야기가 맞다는 것이 어느 정도 증명되기 시작한 것은 항해를 시작한 지 열 나흘 째 되던 날이었습니다. 자정 쯤되어 선원들은 직감적으로 배가 육지로 가까이 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줄을 내려서 물의 깊이를 재어보니 물의 깊이가 점점 줄어들고 있었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선원들은 자기 살길만 찾기 시작했습니다. 이물, 그러니까 뱃머리 쪽에 닻을 내리는 척 하면서 거기에 구명정을 내려 그것을 타고 도망치려고 한 것입니다. 이것을 알아차린 사람은 바울이었습니다. 동시에 선원이 빠져 나간다면 배 전체가 난파될 수 밖에 없을 것이라는 것도 캐치했습니다. 그래서 백부장과 군인들에게 만약 이 사람들이 배에 남아있지 않으면 모든 사람이 생명을 잃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의 이 말을 듣고서 백부장은 병사들을 시켜서 구명정에 매여 있던 밧줄을 끊어 버리게 했던 것 같은데요. 사실 이 일은 굉장히 놀라운 결정이었습니다. 그 구명정들은 여차하면 백부장과 로마 병사들 자신도 이용해야 할 비상수단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백부장과 병사들은 자신들의 생명을 구할 수 있는 비상수단을 버리는 선택을 하면서까지 바울의 말을 따랐다는 뜻이 됩니다. 배 안에서 바울이 얼마나 절대적인 신뢰를 얻어가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 아닌가 합니다. 약간은 곁다리 이야기이지만, 성도라는 사람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람들은 이런 사람들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자신과 다른 사람들이 함께 타고 있는 배가 위험에 처했을 때, 그 배에 함께 탄 사람들에게 점점 신뢰를 얻고 어떤 모습으로건 그들에게 좋은 길을 제시할 수 있는 사람 말입니다. 우리가 눈에 보이는 것만을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모든 일을 바라 볼 때, 끝까지 그런 모습을 지킬 때 우리들 또한 그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는 와중에 날이 밝아오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보니 배 위의 모든 사람들이 갑자기 만난 태풍과 싸우느라고 이미 두 주 동안이나 거의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러다가는 난파 당해 죽기 전에 굶어죽게 생겼으니 일단은 무엇이라도 먹어야 한다고 제안했고, 그제서야 약간 정신을 차린 사람들은 배에 실려 있던 밀을 배불리 먹고 나서 남은 것은 모두 바다에 던져 버렸습니다. 점점 물의 깊이가 낮아지고 있었기 때문에 배의 무게를 줄이지 않으면 배가 바닥에 닿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 돌보기에도 바쁩니다. 자기 생각만 하기에도 빠듯하지요. 그렇지만 상황을 믿음으로 하나님 안에서 바라볼 줄 아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배고픔까지 헤아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은 어려움 속에서도 다른 사람들을 돌보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우리들에게도 믿음이 가져다 주는 이런 여유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날이 완전히 밝자 사람들은 자신들이 어떤 항구에 굉장히 가까이 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14일 동안의 한치 앞도 내다 볼 수 없는 사투끝에 드디어 살아날 수 있다는 확실한 소망을 보게 되었으니 얼마나 기뻤을까요? 선원들은 서둘러서 항구로 다가갔습니다. 그런데, 얼마 못가서 배는 더 이상 타고 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앞 부분은 바닥에 걸리고, 배의 뒷부분은 큰 파도에 크게 부서져 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제 물 깊이가 무척 얕아져 있었기 때문에 충분히 수영을 해서 바닷가로 나갈만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때 갑자기 병사들은 죄수들을 모두 죽이려고 했습니다. 만약 죄수들 중의 하나라도 도망친다면 그 모든 책임을 자신들이 져야 했기 때문입니다. 죄수가 도망치는 일은 그 당시로서는 엄청나게 큰 일이었습니다. 우리가 바울이 실라와 함께 옥에 갇혔을 때, 두 사람이 도망친 줄 알고서 간수장이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했던 일을 기억하는데요. 그 당시 로마에서는 죄수가 도망치면 간수나 책임자들이 처형을 당해야 하는 그런 법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한 두 명도 아니고 다수의 죄수들이 도망쳐 버리면 병사들 전부가 어떤 일을 당할 줄 모르니, 그들의 입장에서는 그런 선택을 하는 것도 당연할 수 있지만, 그래도 그렇게 어렵게 살아남은 사람들을 그렇게 죽여버리려는 선택을 했다니, 게다가 그들 중에 자신들을 살게 해 준 바울까지 있었는데, 바울도 예외 없이 그렇게 하려고 했다니 인간은 정말 얼마나 철저히 자기 중심적인 존재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 때, 율리오가 그 앞을 가로 막고 나섰습니다. 바울을 살려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율리오는 바울만 살린 것이 아닙니다. 헤엄칠 줄 아는 모든 사람들에게 명령을 내려서 바다에 뛰어들게 육지로 나가게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말씀은 그대로 이루어지고 모든 사람들은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모든 일은 위태로운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뜻대로, 그리고 바울이 이끄는 대로 잘 움직여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의 뜻이 다 이루어지고, 모든 사람이 목숨을 구하게 되는 마지막 단계에서 하나님의 뜻이 모두 망쳐질 위기를 만났습니다. 그 순간에 병사들의 이기적인 마음이 끼어들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너무 하나님의 뜻은 무조건 다 이루어지게 되어 있다는 사실 자체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물론 틀린 생각은 아니지요. 하나님의 계획과 뜻은 결국 이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계획과 뜻이 이루어져 가는 과정 속에 있는 사람은 의지도 생각도 없이 움직이는 로봇이 아닙니다. 사람은 언제나 그렇게 이루어져 가는 하나님의 뜻 속에서 하나님과 같은 방향으로 움직여 갈 수도 있고,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방해하는 역할을 할 수도 있습니다. 


율리오는 하나님을 몰랐습니다. 하나님을 믿지도 않았습니다. 그런 점에서는 그 배에 타고 있던 다른 병사들과 다른 점이 없었지요. 그런 그가 다른 병사들과 다른 점이 있었다면 그는 자기 자신만 생각하면서, 자기 자신만을 위한 결정을 내리고 행동하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지금까지 겪어온 상황을 모두 생각하면서, 그리고 비록 죄수들이지만 그들의 목숨도 귀한 줄 아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자신이 내릴 수 있는 가장 상식적이고 올바른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비록 그 일이 후에 자신에게 어떤 어려움을 가져다 준다고 해도 그 결정을 따라 행동했습니다. 그런데, 율리오의 이런 결정과 행동이 결국 바울을 살리고 모든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죽거나 상하지 않고 살아남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실제로 유라굴로를 만난 일과 관련된 모든 이야기를 이렇게 해피엔딩으로 끝낸 것은 주연인 사도 바울이 아니라 조연인 율리오였습니다. 


 그렇다면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알고 또 믿는 우리가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의 본능이나 혹은 이익, 그리고 취향을 조금 더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먼저 헤아리고 그 뜻에 합당한 결정을 내리고 그 결정을 따라 행한다면 그 일이 하나님께 얼마나 가치있는 일이 되고, 또 하나님 나라를 위한 얼마나 귀한 도구가 되겠습니까? 그 일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유익하게 하고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영광스럽게 하는 일이 되겠습니까? 


하나님께는 누가 주인공이 되고, 중심인물이 되는 일이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는 자기 자리에서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고 그렇게 헤아린 하나님의 뜻대로 바르고 정직하게 살아가는 사람, 그렇게 사람을 아끼고 사랑할 줄 아는 조연들이 더 중요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역사는 한 사람의 주연과 영웅이 아니라 수많은 평범한 조연들이 만들어 가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우리만의 역할이 있습니다. 그 역할은 바울처럼 주연이 되는 것일수도 있고, 율리오처럼 조연이나 아니면 단역이 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아마 평생을 살다보면 때로는 이 역할, 때로는 저 역할을 한 번쯤은 다 맡게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어떤 역할을 맡기든 그 자리에서 하나님 나라를 연기하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 일이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이루며 하나님 앞에서 우리들을 영화롭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우리 모두 스스로가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는 하나님 나라의 배우라는 것을 기억하면서 말 한마디, 행동 하나라도 고상하고 영광스럽게 연기해 내는 그런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