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사도행전 28장 1-10절
바울은 원래 예수님을 몰랐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힘과 열심을 다해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기도 했지요. 그러던 어느날 자신을 찾아오신 예수님을 만나 그 동안 자신이 메시야를 핍박했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깨닫게 되고 그 때부터는 그 예수님을 위해서 평생을 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때부터 바울은 성령충만하여 복음을 전하는 일에만 전념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바울은 비뚤어진 인생의 방향을 온전히 바로 잡을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만 보면 이 때부터 바울의 삶은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거침 없는 항로를 항해하게 되어야 마땅합니다. 그렇지만 실제의 바울의 삶은 전혀 그렇지가 못했습니다. 그 때부터 그의 삶은 우리기 흔히 쓰는 말로 완전히 꼬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부터 그는 그렇게 사랑했던 동족들에게 쫓기고 핍박받으며 계속해서 사선을 넘나들어야만 하는 그런 모양이 되었습니다. 물론 그는 가는 곳마다 교회를 세우고 또 수많은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돌아오게 했습니다. 병든 사람을 고치고 죽은 사람을 살리기도 했구요. 그렇지만 우리가 이런 일들에만 정신이 빼앗겨 있어서 그렇지 이런 일들은 항상 일어나는 일들도 아니었고 또한 이런 일들이 바울에게 영광을 가져다 주거나 어떤 이익을 가져다 준 적은 거의 없었습니다. 게다가 바울의 사역이 종반으로 다가갈수록 그런 일들은 점점 드물어 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가 사역초기에 돌에 맞아 죽었을 때, 그를 살려주신 일을 제외하면 그가 당하는 그 어떤 핍박 속에서도 그를 도와주신 적이 없었습니다. 매를 맞는데도 상처가 나질 않거나, 난파당해 물에 빠졌는데도 그의 옷이 젖지 않거나, 굶주려도 배가 고프지 않도록 해 주신 적이 없으셨습니다. 이것은 사실 이해하기 쉽지 않은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이 남을 위해서는 하나님의 능력을 사용하게 하셨지만 정작 그가 어려움을 당할 때는 그 모든 능력이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하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가 온전히 하나님을 섬기려고 할 수록 더 많은 어려움을 겪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의 일을 방해 없이 좀 더 잘 해보려고 자기 질병을 붙들고 기도했을 때도 하나님께서는 ‘내가 너에게 준 은혜가 너에게는 충분하다’는 대답만 들려 주셨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바울의 삶을 왜 이런 식으로 인도해 가셨을까요? 저는 하나님께서 바울의 삶을 통해서 다시 한 번 예수님의 십자가를 드러내시려는 계획이 있으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도 그러셨습니다. 이 땅에 계실 때, 수많은 사람들을 고치고 살리셨고 또 기적으로 먹이셨지만, 예수님은 정말 단 한 번도 자신을 위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사용하신 적이 없으셨습니다. 마지막 순간에는 충분히 십자가에서 내려 오실 수 있으셨지만 그 고통과 죽음마저도 한 사람의 무기력한 인간으로 묵묵히 다 받아내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렇게 사시면서도 십자가를 닮은 삶을 사셨고, 또 마지막 순간 십자가를 짊어지셨기 때문에 예수님의 생명은 수많은 사람에게 영생을 주는 그런 값지고 능력있는 생명이 될 수 있었습니다.
제자란 스승을 흉내내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하도록 부름받은 사람이 제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의 삶도 십자가를 닮은 모양이 되어야만 했습니다. 그래야만 그의 삶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흘러갈 수 있으니까요. 바울은 할 수만 있다면 자기 삶은 물론이고 자기 몸에 까지도 그리스도의 고난의 흔적을 지니고 싶어했고 일부러 그렇게 하려고 애쓰기까지 했던 사람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위해서 헌신한 자신의 삶이 왜 그런 고난과 고통으로 점철되어야 하는지 이미 그 이유를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왜 남을 위해서는 하나님의 능력을 사용하면서도 자신을 위해서는 그럴 수 없는지, 그리고 왜 헌신의 시간이 더 많이 흐를수록 그 능력조차도 점점 사라져 가는지 그 이유도 분명히 이해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야만 자신의 인생이 약함을 통해 하나님의 강하심을 드러내는 십자가를 더 많이 닮아갈 수 있고, 십자가의 생명을 더 많이 흘러가게 할 수 있다는 십자가의 원리를 바울만큼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바울의 삶을 이렇게 훓어 보면서 꼭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도의 삶은 그 개인의 삶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십자가의 지혜와 생명을 드러내는 도구가 된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삶은 십자가를 많이 닮아있을수록 그만큼 더 영광스럽고 고상한 삶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를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오늘날 기독교회를 통해서 예수님의 풍성한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 것은 교회가 눈에 보이는 커다란 일을 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자신의 삶 속에 십자가를 담아내고 또 그렇게 십자가를 흉내내면서 살아가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줄어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슨 일이든 교회가 하는 일은 언제나 십자가를 흉내내고 담아내는 그릇과 도구가 되어야 하는데, 그 일들 속에서 십자가를 담아내는 일에 실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한국교회의 영적인 위기를 부르짓고 있습니다. 전혀 과장되거나 틀린 이야기가 아닙니다. 맞는 진단입니다. 저는 그 해결책은 한 가지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십자가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 삶이 십자가를 닮아가고, 또 우리 삶 속에 십자가를 담아내기 위해서 우리가 작은 손해와 불편함을 감수하기 시작할 때, 그런 우리들은 또다시 예수의 생명으로 살아나게 될 것이고, 또다시 세상에 예수의 생명을 전하는 귀한 역할을 다시 감당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드디어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해 말씀하신 대로 배에 탔던 모든 사람들이 단 한 사람도 죽거나 다치지 않고 멜리데라는 섬에 상륙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대로 배는 완전히 난파되고 말았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이 섬에 상륙한 일은 바울이 로마로 가기 전에 하나님께서 마지막으로 바울과 바울의 일행에게 주신 특별한 선물이었습니다.
우선 바울과 배에 탔던 사람들이 섬에 상륙하자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원래 섬 사람들이란 외지에서 온 사람들에게는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은 법입니다. 거의 항상 경계하고 멀리서 지켜보게 마련이지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멜리데 사람들은 바울과 함께 배에 탔던 사람들에게 ‘특별한 동정’ 그러니까 이례적인 친절을 베풀었습니다. 그들을 위해 직접 큰 모닥불을 피워준 것입니다. 특별한 것은 말 그대로 특별한 것입니다. 일반적으로는 그럴 수 없는 이상한 것입니다. 특히 성경에서 누군가가 다른 사람에게 이유 없이 베푸는 특별한 호의나 친절은 항상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때 베풀어집니다. 다윗과 요나단의 예를 보면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나단이 다윗을 특별하게 사랑했던 것은 자연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나단의 마음을 움직이셔서 그렇게 해 주셨던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바울과 일행들은 사람들이 자신의 본래 성향을 거슬러서 그런 친절을 베푸는 것은 자신들을 향한 하나님의 배려라는 것을 알아차렸을 것이고 그래서 하나님께 감사했을 것입니다. 그 모진 고생을 끝낸 바울과 일행이 그 세심한 하나님의 손길에 얼마나 감격하고 감동했을까요? 그들은 분명히 그 모닥불만큼이나 따뜻한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느끼며 앉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때 아주 위급한 일이 발생합니다. 바울이 나무더미를 한 더미 집어서 모닥불에 집어넣는 순간 그 더미 안에 숨어있던 독사가 뛰어 나와 바울의 팔을 물고 칭칭 감아 버린 것입니다. 그 일을 지켜보고 있던 섬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저 사람은 살인자가 틀림 없다고 그래서 바다에서는 목숨을 건질 수 있었지만 결국 정의가 저 사람에게 벌을 내린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아마 바울 덕에 목숨을 건진 배에 함께 탔던 사람들도 바울이 무언가 큰 죄를 지었을 것이 분명하다고 의심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누가 보아도 천벌이 분명했으니까요.
그런데, 막상 뱀에 물린 당사자인 바울은 너무나 담담했습니다. 아무런 호들갑을 떨지 않았습니다. 그저 자기 팔을 물고 매달려 있는 뱀을, 마치 신발에 뭍은 흙덩어리 털어내듯이 불속으로 떨어낼 뿐이었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그 다음에 전혀 비상조치를 하지 않습니다. 모기에 물린 자리 만큼도 신경을 쓰지 않고 이렇게 한 번 쳐다보고는 그냥 내버려 둡니다. 다른 사람들은 몰랐어도 바울은 알았습니다. 자신이 거기서 죽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지요. 바울이 아는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었습니다. 로마로 가게 해 주시겠다는 약속을 지키시려고 두 주가 넘는 풍랑 속에서도 목숨을 지켜 주셨다가 갑자기 약속이 바뀌었다고 하시면서 목숨을 거둬가시는 그런 분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이 아는 하나님은 끝까지 약속을 지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래서 치명적인 독을 지닌 뱀에 물리고 나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대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바울이 분명히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독사에 물린 사람들이 모두 그렇듯이 물린 곳이 퉁퉁 부어 오르다가 몸을 부르를 떨고 쇼크사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모닥불에 뱀이 구워지는 고소한 냄새만 진동할 뿐 바울은 끄떡이 없었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자 이제 섬 사람들의 말이 바뀌고 태도가 바뀝니다. 갑자기 바울은 살인자에서 신이 됩니다. 독사에 물려도 죽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람일 수가 없고 사람이 아니라면 그들이 믿고 있듯이 그것은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난 신일 수 밖에 없으니까요. 이 일은 곧바로 섬의 추장인 보블리오라는 사람에게도 알려졌고 그 덕에 바울과 배에 탔던 모든 사람들은 보블리오의 공식적인 초청을 받은 아주 귀하디 귀한 손님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보블리오의 아버지가 열병과 이질을 앓고 있었습니다. 살 수 있을까요? 자연적으로는 회복될 수가 없습니다. 열병은 몰라도 이질이라는 병은 당시에 그런 병이었습니다. 또 전염될까 누구도 환자에게 가까이 가려고 하지 않는 그런 병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보블리오의 아버지에게로 들어갔고, 손을 얹고 기도합니다. 아마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당당하게 기도했겠지요. 그러자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저 죽음을 기다릴 수 밖에 없었던 나이 많은 노인이 자리를 털고 일어난 것입니다. 이 소식은 금새 섬 전체로 퍼져나갔고 수많은 병자들이 바울에게로 와서 병을 치료받는 기적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 일로 바울 뿐만이 아니라 바울과 함께 했던 모든 사람들은 그야 말로 VIP 대접을 받게 되었습니다. 섬에 머무는 석 달이 넘는 기간동안 융숭한 대접을 받았고 섬을 떠날 때, 필요한 물품들도 잔뜩 얻어가지고 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일, 그러니까 바울이 뱀에 물렸지만 아무런 해를 입지 않았던 것과 수많은 병자를 고치게 된 것은 그저 일어난 기적이 아니었습니다. 마가복음 16장 17절과 18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약속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 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 즉 나으리라” 성도 여러분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물론 다른 때도 그랬겠지만 그 날 예수님께서는 이 약속을 지키셨던 것이고 그래서 그 두 가지 놀라운 기적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 그 모든 사람들이 섬 사람들의 호의 가운데 겨울을 나고 로마로 향해 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약속에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약속을 반드시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물론 그 과정은 바울의 삶처럼 순탄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역경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에게 약속을 주시고 그 약속에 지키십니다.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이루어 가십니다. 바울의 모든 인생, 그리고 바울이 로마로 가기 전 마지막으로 겪었던 폭풍과 섬에서 뱀에 물린 일들은 바울과 그 일행들, 그리고 오늘 여기서 그 이야기를 읽고 있는 우리들에게 그런 하나님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예수를 믿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아도 우리 삶에는 폭풍을 만나는 것과 같은 위기와 뱀에 물리는 것과 같은 위험천만한 일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는 영원한 구원의 약속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 그 후에는 그런 일들이 전혀 없는 그 나라에 들어가게 해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이 세상 모든 일들은 불확실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도 저렇게도 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약속만큼은 절대로 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정말 하늘이 무너지더라도 이 두 가지 약속은 분명히 지키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신실하신 분이시니까요.
우리가 살아가면서 만나는 모든 어려움과 위기는 바울이 항해 중에 만난 폭풍우입니다. 섬에서 만난 독사입니다. 그게 아무리 치명적이고 위험하게 보여도 결국 지나갈 일들이고 내가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일을 방해할 수는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그런 일들은 그 영원한 약속이 이루어져 가는 과정에서 우리가 만나는 하나님의 능력과 신실함을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가 되는 것들입니다.
언제나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고 또 하나님의 영원한 약속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약속 안에서 폭풍을 대면하시고 독사를 대면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그 약속 안에 살아갈 때, 폭풍 속에서도, 독사에 물려서도 평안을 잃지 않았던 바울의 은혜를 누리며 정말로 약속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며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삶의 굴곡 때문에 믿음이 약해지고 흐려지는 것이 아니라 그 굴곡 속에서 오히려 더욱 더 진하게 하나님을 만나도 더 굳게 믿음을 세워가는 복된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