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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금요기도회

2016.06.17. 금요기도회 - 우리가 로마에 들어가니(사도행전 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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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사도행전 28장 11-16절




유대인들의 가장 큰 자랑거리는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복을 주셨는데, 자신들은 혈통적으로 볼 그 아브라함의 자손들이고 그래서 자신들은 하나님께 아주 특별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 생각 자체가 틀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아주 특별한 사람들이었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특별하게 대우해 주셨습니다. 온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백성이 되게 해 주셨고, 이들에게만 성경을 주셨으며, 직접 이들의 보호자와 인도자, 그리고 모든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시는 공급자가 되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런 특권을 주신 것은 이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처음 아브라함을 선택하셨을 때부터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아브라함을 통해서,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에 하나님을 드러내 보여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애초부터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하나님께서 선교적인 목적을 가지고 선택하시고 만들어 가신 그런 나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른 민족과 나라들은 전혀 누릴 수 없었던 특별한 복과 은혜를 주셨던 것입니다. 그런 특별한 복과 은혜가 없으면 이스라엘이 스스로 그런 역할을 해 낼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데 실패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복과 은혜를 마치 자신들이 특별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로 생각하고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했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을 드러내고 보여주기 보다는 다른 민족들을 무시하고 멸시할 수 있는 특권쯤으로 사용했습니다. 그렇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임무에 실패했다고 해서 하나님도 실패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해 이 땅에 새 이스라엘인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조금 특별한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는 첫째, 온 세상에 자신을 알리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이 맺은 열매였습니다. 그렇지만 교회는 둘째, 동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루지 못한 하나님의 목적을 넘겨 받아 이 세상에 하나님을 보여주고 알리는 역할을 하게 하려고 이 세상에 세워진 사람들의 공동체이기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 목적을 위해서 교회와 성도들에게 특별한 은혜와 복을 주시고, 성령을 보내 주시며 이 세상에 두신 것입니다. 


우리는 개인적으로나 혹은 교회적으로나 우리가 본질적으로 선교적인 목적으로 부름받았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됩니다. 그것이 우리가 예수를 믿는 특권과 은혜를 받는 순간 우리에게 함께 주어진 우리의 소명이니까요. 이것은 단순히 말로 복음을 전하고 해외선교를 나가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소명을 이루는데 있어서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삶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우리가 살게 되는 삶의 자리에서 그리고 만나는 모든 사람들 속에서 하나님을 드러내고 보여 주는 일을 염두에 두고, 또 할 수있는 한 그것을 가장 중요한 목표로 삼고 살아가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과 꽤 긴 여행을 함께 해 왔습니다. 그리고 오늘 바울이 그 목적지인 로마에 도착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바울은 본격적으로 로마로 여행하기 시작하면서도 부터 죄수의 신분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정확하게 표현하면 로마로 여행했던 것이 아니라 호송되고 있었습니다. 수많은 죄수들 틈에 섞여서 말이지요. 그는 중간에 어떤 이유로건 목숨을 잃거나 죽임을 당한다고 해도 누구하나 신경쓰지 않을 그런 처지가 되어 호송되고 있었습니다. 


여행의 시작점에서 바울의 위치는 그랬습니다. 그런데, 항해가 계속되면서 바울은 배 위에서, 그리고 함께 여행하던 모든 사람들 중에서 점점 더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어갔습니다. 처음 바울이 모든 상황을 헤아리고서 항해를 말렸을 때, 사람들은 그의 말을 무시했습니다. 그런데, 금새 상황이 바울의 말대로 되었습니다. 남풍이 순하게 불어서 항해를 시작했더니 곧바로 유라굴로라는 태풍을 만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상황은 절망적이었습니다. 도대체 배가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알 수 없을 정도의 폭풍이 몇날 며칠 계속되었고 그것 때문에 사람들은 점점 생존에 대한 희망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아무리 폭풍이 심해도 배에 탄 사람은 한 사람도 다치거나 목숨을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을 주셨고, 바울에게는 개인적으로 꼭 가이사 앞에 서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모든 사람에게 전했습니다. 분명히 한 섬에 걸리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까지 해 주었습니다. 사람들이 바울의 이야기를 믿었을까요? 태풍을 만난 일로 조금씩 조금씩 바울의 이야기를 무게 있게 듣기 시작했겠지만 아마도 이 때 바울의 이야기를 곧이 곧대로 믿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또 며칠이 흐르고 항해를 시작한 지 열 나흘째 되던 날 선원들은 직감적으로 땅이 가까와져 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바울은 그 동안 굶주린 사람들에게 다시 하나님의 뜻을 전하면서 그들을 격려하여 그들이 먹고 기운을 차리게 했고 그렇게 섬에 상륙할 준비를 시켰습니다. 물론 위기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이제 하나님의 모든 약속이 이루어질 찰라에 죄수들이 도망칠 것을 걱정한 병사들이 죄수들을 죽이려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백부장의 중재로 다시 한 번 위기를 넘어설 수 있었고, 결국 276명이라는 사람들이 단 한 사람 상처를 입은 사람도 없이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여기까지 바울과 함께 여행한 사람들은 어떤 느낌이었을까요? 우리가 그들 중의 한 사람이라면, 모든 일이 죄수 한 사람의 말대로 되어져 가고 결국 그의 말대로 배는 완전히 부숴졌는데도 불구하고 그 많은 사람은 한 사람도 다치지도 않은 채로 섬에 올라와 있는 것을 보면서 어떤 감정이 되었을까요? 물론 가장 큰 감정은 살았다는 안도감에서 오는 기쁨이었겠지만, 동시에 이게 정말 현실일까 하는 어안이 벙벙한 감정과 소름끼치는 두려움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상륙한 섬에서 그들이 계속 경험하게 되었던 일들은 지금까지 경험한 일들보다 더 놀라웠습니다. 독사에 물렸지만 상처조차 없이 멀쩡한 바울,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가까이 가려고 하지도 않는 중환자를 기도 한 번으로 고쳐낸 일, 그리고 그 덕분에 그 많은 외지인들이 석 달이 넘는 동안 귀빈 대접을 받으며 안전하게 지낸 일 등등. 그들이 바울과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도무지 자연적으로는 경험할 수 없는 일들을 연속적으로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경험들은 바울을 바라보는 그들의 시각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았고, 그것은 곧 그들에 대한 바울의 위치와 영향력을 크게 확대해 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바울이 그 여행을 통해서 그들 중에서 얼마나 중요한 사람이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예가 바로 보디올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보디올은 바울과 일행들이 로마에 가기 직전에 도착한 항구입니다.  바울과 일행은 거기서 부터는 걸어서 로마로 갔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보디올에 도착하자 소식을 들은 형제들이 바울을 맞이하러 나왔습니다. 그런데, 14절은 그 당시의 상황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합니다. “거기서 형제들을 만나 그들의 청함을 받아 이레를 함께 머무니라” 이 이야기가 별 것 아닌 것같지만, 실은 굉장한 이야기입니다. 바울은 호송되고 있는 죄수입니다. 그런데, 보디올의 형제들은 그 죄수를 만나러 온 것이구요. 그런데, 백부장을 비롯한 병사들이나 다른 사람들이 이들이 바울과 교제를 나눌 수 있도록 일주일간의 시간을 내주었던 것입니다. 호송되는 죄수에게 반 나절이나 하루쯤 말미를 주는 것도 정말 이례적인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일주일씩이나 그런 시간을 선뜻 내주었으니 이것은 그만큼 그 여행을 통해 바울이 그들 속에서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어갔다는 것을 뜻할 것입니다. 


흔히들 동시대에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일컬어 ‘한 배를 탔다’는 표현을 하곤 합니다. 크게는 이 세계, 이 나라, 이 사회, 작게는 우리의 직장이나 지역사회, 그리고 교회나 가정 등이 모두 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타고 가는 ‘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실 이 배에 우리가 타고 싶어서 타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억지로 태워진 것일 수도 있습니다. 또 우리가 그 배 위에서 맡은 이런 저런 역할들과 자리들도 우리가 원치 않은 것일수도 있습니다. 어떤 분은 나는 좀 더 평범하고 소박한 역할을 맡고 싶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것이고 또 다른 분은 나는 지금보다 좀 더 빛나고 영광스러운 일을 맡고 싶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또 다른 분은 나는 지금 내가 맡은 역할에 만족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구요. 맡은 역할 뿐만 아니라 살고 있는 모습에 대해서도 똑같은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우리에게 주어진 그 자리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든지,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는 너무도 분명한, 움직일 수 없는 두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첫째로 내가 있는 자리가 어디이든, 내 삶의 조건이 어떻든, 그리고 그런 모든 것들에 대한 나의 생각이 어떻든 결국 이 배에 나를 태우고 그 자리에 나를 놓아두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때로는 그것이 내 욕심이나 죄의 결과로 나에게 주어진 일그러진 결과라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우리도 사람인지라 사실 이렇게 생각하고 인정하는 것이 쉽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그 일이 쉽지 않을 때마다 오히려 이런 ‘사실’을 다시 떠올리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상황이나 처지가 내 마음에 들지 않을 때, 그것을 그저 내가 어쩔 수 없이 거기 던져져 버린 것이라고 생각하면 전혀 답을 얻을 수 없어도, 그 곳에 나를 두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생각하고 또 믿을 수 있다면 우리는 그 자리에서 그 다음에 어디로 가야 할지 그 길을 찾을 수 있고, 길이 열릴 때까지 기다릴 수 있는 여유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두번째로 분명한 것은 이 세상이라는 배 위에서 나에게 주어진 자리와 역할이 어떻든지 간에 하나님께서는 내가 거기서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드러내고 보여주는 역할을 하기를 기대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내가 너를 로마로 보내주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정말로 로마로 가는 배에 태워보내셨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중간에 아무 일도 하지 않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이 로마로 가는 매순간 순간 모든 곳에서  하나님 자신을 드러내시고 알려 주셨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러한 일은 모두가 다 바울이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준 바울의 모습을 통해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에 뜻에 대해서 말하며, 당당하게 자신의 믿음을 표현하는 그의 모습, 그리고 그런 그의 말과 믿음에 어울리는 모습으로 살아내는 그의 행동 하나 하나… 거기에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덧붙여 졌을 때, 그들 속에서 바울의 영향력은 점점 더 커져갈 수 있었고, 그것은 곧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모르는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알리는 도구로 사용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흔히 우리는 우리가 앉아있는 자리의 크기와 높이가 세상에 대한 우리의 영향력을 결정한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높고 커져야 이 세상에 하나님을 드러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생각입니다. 여전히 세상적인 사고의 틀을 벗어버리지 못한 우리들의 생각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더 높고 더 큰 자리에 앉아있는 사람들도 사용하십니다. 그러나, 그 자리의 어떠함은 하나님께는 그리 중요한 조건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중요한 것은 그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과연 무엇에 관심을 두고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내게 주어진 그 자리가 나를 통해 하나님을 드러내고 보여주시려고 나에게 주신 나의 자리라는 것을 확실히 받아들이고 그 자리에서 우리에게 주신 소명에 걸맞는 삶을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세상에 대한 우리들의 영향력을 커지게 해 주시며, 스스로 우리를 통해 일하시면서 우리의 자리의 어떠함과 상관 없이 하나님을 세상에 드러내시고 보여주십니다. 


바울은 그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리고 그 지식과 믿음에 따라 살아갔기 때문에 죄수가 되어서도 당당할 수 있었고, 배에 함께 탔던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고 오늘 바울의 이야기를 읽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가장 분명하게 드러내 보여주는 그런 귀한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이 세상이라는 배 위에서 얻은 자리, 지금 내가 앉아있는 그 자리는 하나님께서 그 자리를 통해 하나님을 드러내고 보여주라고 앉혀놓으신 자리입니다. 때로 그 자리는 더 좋은 자리로 변경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은 자리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리가 어떻든, 그 자리에서 살아가는 내 삶의 모양이 어떻든 하나님께서 나에게 그 자리를 맡기신 이유는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드러내야 합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이 세상에 하나님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항상 그 소명을 이루기 위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그런 우리의 삶 자체가 우리의 영향력이 될 것이고 그 영향력을 통해서 우리는 이 세상을 이롭게 하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우리와 같은 배를 타고 가는 사람들이 나로 인해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께 놀라게 되는 그런 일들이 많이 일어나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그리고 자리에 상관 없이 내가 있는 그 자리에서 선한 영향력을 확대해 가는 우리들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언제나 하나님을 드러내고 보여주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사는 삶을 살아서 자신이 있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자신을 영광스럽게 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