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 에베소서 4장 25절-5장 2절
순 우리말 단어 중에 ‘꼴’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단순하게는 ‘모양’이라는 뜻으로 쓰이는 말이지만, 때에 따라서는 무언가를 담아내고 그 진짜 모습을 드러내 주는 그릇이라는 의미도 지니고 있습니다. ‘얼굴’이라는 말은 원래 ‘얼’과 ‘꼴’이 합해져서 만들어진 말이라고 합니다. 얼은 그 사람의 속 모습입니다. 그리고 꼴은 그 속모습을 담아서 표현해 내는 그릇인 셈이지요. 그래서 옛 어른들은 사람 나이 사십이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그 얼굴에 자기 자신의 본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게 되니까요.
사람들은 사실 추상적인 것은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특히 자신이 모르는 것들 중에서 구체적이지 않은 것들, 그러니까 눈에 보이거나 손으로 만져지거나 하지 않는 것들은 그것에 대해서 설명해 주어도 잘 모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을 설명해 주어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보여줄 수 있는 ‘꼴’을 준비하셨습니다. 그 ‘꼴’이 바로 교회와 성도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믿지 않고, 그래서 설명만으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 저와 여러분을 하나님을 담아 보여주고 전해 줄 수 있는 그릇, 그러니까 ‘하나님꼴’로 선택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이라면 싫든 좋든 받아들여야만 하는 자신의 역할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꼴’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우리 자신을 하나님을 담아내는 그릇, 그렇게 해서 세상에 하나님을 전달하는 그릇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사실 이것은 우리들의 소명일 뿐만 아니라 우리들만이 누리를 수 있는 특별한 복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꼴’이 될 때, 그 안에는 하나님이 제대로 담기게 되고, 그 충만함과 온전함은 그 어떤 사람의 것도 아닌 우리 자신의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피조물이 되어서 그 안에 창조주를 담고, 사람이 되어서 그 안에 하나님을 담을 수 있다는 것보다 더 큰 복은 없을 것입니다.
지난 주일 본문은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끝났었는데요. 오늘 본문에서는 그 뒷 이야기 그렇다면 우리가 벗어버려야 할 옛 사람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대신에 입어야 하는 새 사람이 무엇인지에 대한 조금은 구체적인 설명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본문말씀이 그것을 항목별로 하나씩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들도 이번 주일부터 시간이 허락되는 대로 본문을 따라 그렇게 따라가 보기로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말씀을 하나씩 살필 때마다 이 말씀 속에서 마땅히 벗어버려야 할 옛 사람을 벗어버리게 하시고, 또 마땅히 입어야 할 새 사람으로 옷 입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첫째, 바울은 거짓을 버리고 각각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거짓을 가장 먼저 벗어 버려야 하는 대표적인 옛 옷으로 지목한 것입니다. 바울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는 너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 바울은 지금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에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물론 거짓말을 하는 것은 그 대상이 누가 되었든지 악한 일입니다. 거짓이라는 것은 결국 다른 사람을 속여서라도 내가 원하는 것을 얻으려는 욕심에서 나오는 것이니까요. 그렇지만 교회 안에서는 이것이 훨씬 더 나쁩니다. 교회 안의 성도들은 단순히 서로를 인간적으로만 만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의 지체된 사람들로 만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각각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라는 이 말씀은 스가랴 8장 18절의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그런데, 스가랴서를 보면 이 말씀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벌을 내리시고, 다시 회복시켜 주실 것을 약속해 주신 다음에 ‘그러니까 너희는 이렇게 해라’라고 하신 하나님의 명령들 속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이 문맥 속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이스라엘의 회복과 그들의 진실함 속에는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즉, 내가 너희를 회복시키고 번영하게 할 때, 너희가 서로에게 정직하지 못하고 다시 이전처럼 서로에게 거짓말을 하게 된다면 그런 은혜 조차 소용이 없어질 것이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 참 많은 나라들이 있지만 그래도 살기 좋은 나라라고 평가받고, 거기 사는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말하는 나라는 그래도 비교적 정직한 나라들입니다. 그래도 다른 나라에 비해서 거짓이 덜 만연되어 있는 나라들입니다. 어느 사회건 거짓이 많은 사회, 거짓말이 당연히 여겨지는 사회는 번성할 수 없습니다. 거기사는 사람들이 행복할 수 없습니다. 거짓이 서로를 불안하게 만들고 서로를 피해자로 만들어 번영도 행복도 빼앗가 버리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더 잘 먹고 더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택하는 거짓이 결국 사회 전체를 망가뜨려서 모두를 불행하게 한다는 것은 커다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더욱 더 그렇습니다. 거짓은 교회의 하나됨을 깨뜨립니다. 하나가 될 수 없게 만듭니다. 그런데 교회는 하나일 때만 은혜로 충만한 공동체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일 때만 예수님의 충만하심을 담는 좋은 그릇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교회 안에 거짓이 끼어들면 그 교회는 잘 될 수가 없습니다.
요한 크리소스톰이라는 분은 이런 재미있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눈이 뱀을 보았는데, 발을 속이겠느냐? 혀가 쓴 맛을 보았는데 배를 속이겠느냐?”고 말입니다. 그런 일은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몸은 해를 입고 위험에 빠지게 되니까요. 교회는 몸이기 때문에, 교회 안의 성도는 서로가 서로에게 속한 서로의 일부분이기 때문에 절대로 서로에게 거짓말을 해서는 안됩니다. 거짓은 성도가 벗어 버려야 할 첫번째 옛 사람입니다. 우리는 그 옷을 벗어 버리고 ‘참된 것’이라는 새 사람으로 옷 입어야 합니다. 여기 나오는 ‘참된 것’이라는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진리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둘째, ‘거짓되지 않은 것’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우선 성도들의 말은 언제나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시험을 통과해서 나온 말이어야 합니다. 내가 하는 말들, 특히 교회 안에서 공적으로 개인적으로 하는 말은 성경말씀의 지지를 받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말은 나를 지키고 공동체를 지켜주는 말이 될 수 있습니다. 둘째, 성도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말은 거짓되지 않아야 합니다. 또 거짓이 섞여 있어서도 안됩니다. 거짓은 언제나 과정보다, 그리고 지켜야할 가치보다 심지어는 사람이나 하나님보다도 내가 이루고 싶어하는 목적이나 얻고자 하는 이익이 우선될 때 그 수단으로 슬며시 끼어들어 옵니다. 그래서 말에 거짓이 없으려면, 말에 끼어들어오는 거짓을 최대한 줄이려면 목적이나 이익이 아니라 과정에 집중하고 가치에 집중해야 합니다. 또 ‘내 필요와 내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께’ 집중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집중한다는 말은 다른 뜻이 아닙니다. 만약 그게 꼭 필요한 것이라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루시고 또 채워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에게 이 믿음이 있을 때, 우리는 거짓을 거짓을 이기고 서로 참된 것을 말하는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두번째로 벗어버리라고 하는 옛 사람은 ‘분노’인데요. 그런데, 바울이 분노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조금 독특합니다. 절대로 화를 내면 안된다고 하지 않고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은 그래서 이 말씀을 보고 거 봐라 화 내도 되지 않느냐? 바울도 화를 내도 된다고 말하지 않았느냐?고 말하기도 합니다. 물론 화를 내는 것 자체가 무조건 나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도 화를 내셨고, 예수님도 화를 내셨으니까요. 그렇지만 바울이 ‘분을 내어도…’라고 말한다고 해서 성경이 모든 분노를 전부 다 선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31절로만 가 보아도 바울은 ‘분을 내어버리라’고 말하고 있고, 예수님께서는 형제에게 노하는 것이 바로 형제를 죽이는 것이라고 까지 말씀 하셨으니까요.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분노는 ‘불의에 대한 분노’ 한가지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옳바른 것이 깨어졌을 때, 약자들이 고통 당할 때, 또 하나님께서 멸시를 받을 때 성도들의 마음 속에서 솟아 오르는 분노만 정당한 것으로 평가하십니다.
제가 얼마 전에 정말 오랜만에 친구 한 명과 전화통화를 했습니다. 그 친구도 저처럼 목사인데요. 이야기를 나누는 중간에 그 친구가 저에게 그렇게 말했습니다. “오랜만에 통화해 보니 그동안 많이 성화된 것 같다”고요. 제가 무슨 말이냐고 했더니 말투가 예전보다 많이 부드러워졌고, 말투에서 독이 많이 빠져 나간 것이 느껴진다는 것이었습니다. 분명히 칭찬이었지만 ‘그러면 내가 예전에는 도대체 어땠다는 말이지?’ 하는 생각이 들어서 살짝 기분이 상하기도 했습니다. 전화를 끊고나서 생각해 보니 정말 그랬습니다. 예전보다 화를 내는 횟수가 줄고 화를 내는 정도도 많이 약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그렇게 만드신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갑자기 화산처럼 솟아 오르는 분노는 여전히 잘 통제하지 못합니다. 오랫동안 분노를 잘 참아 냈을 수록 그 다음에 폭발되는 분노는 더 크고 엄청납니다. 한 번 그러고 나면 내가 사람인가, 짐승인가 싶을 정도입니다. 분노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아무리 싸우고 또 싸워도 여전히 우리 안에는 정당하지 않은 도에 넘치는 분노가 있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불의한 세상에서 불의한 사람들 틈에서 살아가고 있는 불의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분을 내어도…”라고, “피치 못하게 참지 못해서 혹시 화를 낼 수 밖에 없는 경우가 있다고 하더라도…”라고 말입니다. 화를 내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잘 하는 것도 아니지요. 그렇지만 그렇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도 분노의 문제는 다른 문제들보다 특히 더 통제하기 힘듭니다. ‘욱!’하고 ‘팩!’하고… 나도 모르게 이미 화를 내 버린 후에 자신이 과하게 화를 냈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가 완전히 화를 통제할 수 있는 수준이 되면 좋겠지만, 혹시 그러지 못해서 화가 난다면, 우리는 그 분노가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전에 잘 다스려야 합니다. 바울은 그것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고…” 분노는 분명히 분노 그 자체로도 작지 않은 문제입니다. 하지만 그 분노가 가지고 있는 진짜 큰 문제는 그것이 통제되지 못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면 반드시 더 심각한 다른 죄로 이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다른 사람에게 화를 내 봐서 잘 알지 않습니까? 누군가에게 분노를 품게 되면, 거의 대부분의 경우 그 감정은 그 사람에 대한 ‘미움’과 ‘멸시’로 이어지게 됩니다. 다른 사람에게 화를 내면서 그 사람을 한 사람을 나와 똑같은 가치를 가진 인격체로 인정하고 존중하며 화를 낼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분노는 자신이 당한대로 앙갚음을 하려는 복수심으로 발전하게 되고 실제로 복수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이 두 가지 ‘멸시’와 ‘복수’는 분노가 만들어 내는 대표적인 죄악들입니다. 우리는 때로 어쩔 수 없이 화를 내는 경우가 있더라도 그 분노가 사람에 대한 멸시와 복수라는 더 큰 죄로 발전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그 이전에 그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 버려야 합니다. 그것이 성경이 들려주는 첫번째 분노를 다루는 방법입니다.
그런데, 이 단단한 고리를 끊어버리려면 무엇보다 먼저 분노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일단 마음 속에서 분노가 일어나는 것을 느낀다면, 우선 우리는 그것을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대신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또 화가 나려고 하는구나. 내가 이 놈을 이번에도 또 바깥으로 나오게 하면 안된다.”하고 말입니다. 분노는 반드시 울타리 속에만 가두어 놓아야 하는 난폭한 짐승입니다. 일단 울타리 바깥으로 나오면 그 놈은 내 인격을 상하게 하고 다른 사람을 다치게 합니다. 모든 관계를 깨뜨리고 우리가 사는 세상을 망가 뜨립니다. 그래서 분노는 바깥으로 나오게 하면 안됩니다. 적어도 그렇게 하려고 애를 써야 합니다.
모든 감정이 다 그렇지만 정당하지 않은 분노는 그 자체로 악한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우리의 분노를 바라보는 기본적인 시각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분노에 대해서 항상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우리 안에서 불쑥 불쑥 튀어오르는 분노라는 놈을 훨씬 더 상대하기 쉬워질 것입니다. 우리가 분노를 통제하는 일을 힘들게 만드는 가장 큰 이유는 그 분노를 당연한 것으로, 그리고 마땅한 나의 권리로 여기는 우리의 생각일 때가 많으니까요. 여러분, 분노는 절대로 긍정적인 것이 아닙니다. 심리학자들은 그렇게 말할지 몰라도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분노의 편을 들어주면 안됩니다. 그렇게 되면 풀어놓게 됩니다. 그리고 일단 풀려나면 분노라는 놈은 나를 죄짓게 만들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상처를 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화가 나려고 할 때마다 의도적으로 이런 생각을 하면서 분노를 단순한 감정 단계에서 다스려야 합니다.
우리 교회 안에는 젊은 부부가 몇 쌍 있는데요. 제가 우리 교회 젊은 부부들과 가정생활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면서 알게 된 것이 있습니다. 부부 중 한 쪽이 다른 한 쪽에 대해서 화가 나 있을때 일방적으로 한쪽만 그렇게 화를 내고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이상하게도 거의 항상 한 쪽에서 화를 내고 있으면 다른 한 쪽에서도 상대방에게 화를 내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분노에 관한한 언제나 내가 피해자라고 생각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실이 아닙니다. 우리는 언제나 누군가에게 피해를 입는 피해자인 동시에 누군가에게는 피해를 입히는 가해자로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내가 특별히 이상해서가 아니라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분노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어떤 사람 때문에 화가 나 있다면, 아마도 그 사람은 그런 나 때문에 또 화가 나 있을 것입니다. 아니면 다른 사람이라도 그럴 것입니다. 우리가 언제나 겸손하게 이 사실을 인정하고 또 기억하면서 살 수 있다면 우리는 분노가 또다른 죄로 이어지는 문제를 정말 많이 해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부족함과 잘못을 알 때, 다른 이들의 부족함과 잘못에 대해서도 관대한 마음을 품게 되기 때문입니다. 내가 누군가 때문에 화가 날 때마다 ‘저 사람도 나 때문에 화가 나 있겠구나.’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분노를 감정단계에서 다스릴 수 있는 힘을 얻게 되실 것입니다. 이것이 분노를 감정단계에서 조절할 수 있는 두 번째 방법이 될 것입니다.
이제 이 분노 문제에 대한 바울의 두번째 충고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바울은 “화를 내더라도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사람이 분노를 해결하기 위해서 사용할 수 있는 방법 중에서 가장 어리석은 방법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그 분노를 계속해서 가슴 속에 품고 사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분노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오해가 있습니다. 그것은 분노의 문제도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 분노로 인해 부풀려진 거품같은 감정은 어느 정도 누그러질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해결되지 않은 분노 그 자체는 사라지지 않고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더 마음 속으로 파고 들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마치 주머니 속의 송곳처럼 숨어 있다가 언젠가는 반드시 문제를 일으킵니다. 해결되지 못한 분노는 마치 눌러 놓은 폭탄과도 같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여러분 속에 해결되지 않은 분노가 있다면 그것을 그냥 품고 계시지 마시고 꼭 해결하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오래된 분노라고 하더라도 꼭 풀고 가시기 바랍니다. 우선 사람들과 해결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 사람을 찾아가 힘들더라도 꼭 풀어버리시기 바랍니다. 또 사람이 해결할 수 없는 것이라면 그것을 가지고 부지런히 하나님께 기도로 나아가고 또 나아가서 아뢰십시오. 하나님께서 분명히 여러분을 도와 주실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고 했는데요. 유대인들에게 하루는 해질 때 끝나기 때문에 실상 이 말은 분노를 하루 이상 품고 있으면 안된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그렇게 하면 마귀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 되기 때문에 그렇게 하면 안된다고 말합니다. 문제가 되는 분노는 주로 인간관계 속에서 생겨납니다. 그리고 분노의 문제를 풀기가 어려운 것은 그 사람을 오늘도 보고 다음에도 보고 계속해서 만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분노를 풀지 못하면 어떻게 됩니까? 내일 그 사람을 만나 그 감정을 또 품어야 합니다. 모래도 또 그래야 합니다. 과연 그런 식으로 분노의 문제가 해결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만남이 계속되고 시간이 흐를 수록 분노는 미움이 되고, 멸시가 되며 원한이 됩니다. 그 사람을 향한 악감정이 되고 복수심으로 변해 버립니다. 그리고, 그렇게 거칠어진 감정은 엉뚱한 피해자를 만들어 냅니다. 사람이란 한강에서 빰을 맞으면 종로에 와서라도 화풀이를 해야 직성이 풀리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런 악순환이 우리가 우리 안에 생겨난 분노를 하루 동안에 해결하지 못해서 생겨나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 하루라는 시간을 우리가 분노를 풀어내야 하는 가장 중요한 기회로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하루의 분노는 그저 하루의 일이 되게 하려고 최선을 다해서 힘써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오늘의 분노가 내일의 죄가 되고, 다음 날 우리의 삶 속에 사탄이 틈타는 공간이 되는 일을 많이 방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에게 거짓말을 하신 적이 없으셨습니다. 항상 우리에게 진실하셨고 참된 것만 주셨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거짓되신 분이라면, 거짓말을 하셨고 거짓된 것을 주신 적이 있다면 과연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 그런 분이셨다면 우리의 신앙은 신뢰가 아니라 의심이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또 우리를 향해 화 내기를 더디하셨습니다. 죄인인 우리들을 향한 하나님의 분노는 너무나 정당한 것이고, 그 분이 항상 우리에게 화만 내셔도 우리는 할 말이 없지만 그래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오래 참고 기다리시며 화내기를 더디하셨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자주 분노하셨다면, 화를 내도 좋다고 생각하실 때마다 화를 내셨다면 우리의 신앙은 신뢰가 아니라 두려움이 되었을 것이고, 우리의 삶은 상처와 절망으로 얼룩져 있을 것입니다. 그 분을 믿는 일 자체가 축복이 아니라 저주가 되었을 것입니다.
오늘은 우리 각자와 교회, 그리고 우리 관계 속을 가득 채워야 하는 하나님의 두 가지 성품을 함께 살펴 보았습니다. 그것은 서로에게 진실한 것과 서로에게 화를 내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개인의 삶 속에서도 그러셔야 하지만 무엇보다도 우선 교회에서 항상 참된 것을 말하시고, 성경이 옳다고 하는 것을 말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 거짓이 없게 하시기 바랍니다. 또 서로에게 화 내지 마십시오. 그 화를 함부로 바깥으로 내놓지 마시고, 속에서 다스릴 수 있는 실력을 키우시기 바랍니다. 화가 나는 일이 있거든 꼭 그 날 해결하고 넘어 가셔서, 사탄에게 기회를 주지 마십시오.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을 담는 ‘하나님꼴’이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들도 하나님의 충만함으로 충만해 질 수 있고,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에 하나님을 아는 복을 전하는 귀한 역할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그 꼴 중에서 두 가지를 함께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진실하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 분을 우리를 향해 더디 노하셨습니다. 우리도 그래야 합니다. 우리도 진실하고 우리도 더디 노해야 합니다. 다가오는 한 주간도 이 두 가지 하나님의 형상을 자신의 삶 속에 더 많이 담아내어 ‘하나님의 꼴’로 풍성한 삶을 살며 세상에 하나님을 보여주는 역할을 감당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내가, 그리고 우리 광현교회가 하나님을 담는 ‘하나님의 꼴’이 되게 하소서.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덧입게 하소서.
- 특히 내 안에서 거짓이 없어지게 하시고 우리 안에 위선이 없게 하소서. 또 우리가 하나님처럼 더디 화내고, 화를 내더라도 죄를 짓지 않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