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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금요기도회

2016.07.29. 금요기도회 -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시편 3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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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시편 3편




서론 : 우리를 흔드는 사탄의 시험을 이기자. 


누구나 살다가 보면 크고 작은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어려움들은 모두 우리에게 고통을 주고 상처를 남깁니다. 그렇지만 아주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라면 이런 어려움들과 그런 어려움이 주는 고통 자체는 대부분 힘들어도 견딜만 합니다. 그런데, 이런 어려움들을 더 견디기 힘들게 만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변 사람들이 이렇게 또 저렇게 덧붙이는 말들입니다. 특히 평상시에 우리를 그리 곱지 않은 눈으로 보고 있던 사람들이 혀를 차면서 무심하게 때로는 악의를 가지고 던지는 말들은 당사자의 마음에 비수처럼 꽂히기가 쉽습니다. 


더욱이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있어서 섭리하시고 주관하신다는 것을 믿는 사람들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우리 삶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 특히 좋지 않은 일들을 생각할 때, 하나님과 연관을 지어서 생각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똑같은 일을 당할 때, ‘운이 없어서, 재수가 없어서’하면서 툴툴 털어버리기가 쉽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우리 삶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하나님께서 주시고 또 허락하신 것들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렇게 하기가 참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원망하든, 아니면 자신의 잘못을 깊이 뉘우치게 되든 간에 가볍게 넘겨 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다가 “너 하나님 믿는다며?”, “하나님이 너를 사랑한다며?”, “하나님 믿는 사람이 뭐 그래?”라는 말을 듣게 되면 그 고통은 더 견디기 힘들어 집니다. 우선 이런 말들은 겨우 겨우 붙들고 있는 우리의 믿음을 일순간에 흔들어 놓고, 또 나 때문에 하나님이 오해받고 또 하나님이 무시를 당한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 두 가지는 사탄이 우리를 시험하는 방식입니다. 사탄은 언제나 우리들을 어려움과 고통으로 한 번 시험하고, 또 사람들의 말이나 눈초리로 또 한 번 시험하고… 그렇게 해서 우리를 무너뜨리려고 합니다. 


오늘 시편 3편을 지을 때, 다윗은 일생 그 어떤 때보다도 더 수치스럽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아들 압살롬의 반역 때문에 왕궁을 버리고 도망치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로도 그렇고, 왕으로도 그렇고 이보다 더 견디기 힘든 일이 없을 것입니다. 물론 다윗은 이 일이 자신이 밧세바를 범하고 우리아를 죽인 죄 때문에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징계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그런 생각으로 묵묵히 버티고 있었지요.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다윗의 대적들은 그 어려움이 다윗이 사울로 부터 왕위를 빼앗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내리신 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쫓겨가는 다윗을 향해서 ‘하나님 안에 너를 위한 구원은 없다’고 ‘하나님이 너를 구원하실 리가 없다’고 말하면서 저주하고 욕을 퍼부었습니다. 그래도 평생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면서 살았던 다윗에게 이 말보다 더 견디기 힘든 말은 없었을 것입니다. 시편 3편은 이런 상황 속에서 다윗이 어떻게 죄책감과 좌절감을 극복하고 다시 믿음을 되찾을 수 있었는지 그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우리가 다윗에게서 그 비결을 한 번 배워 보려고 합니다. 


1. 다윗은 대적의 말에 휘둘리지 않았다. 


먼저 다윗은 대적들의 말을 듣고 그 말에 휘둘리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자신의 상황을 있는 그대로 하나님께 말씀드렸습니다. 대적이 너무 많다고, 대적들이 다 일어나서 자신을 치고 있다고, 다들 ‘네가 믿었던 하나님은 너를 구원하실 리가 없다’고 말한다고, 그게 너무 힘들고 아프다고 있는 그대로 말씀드렸습니다. 대개 우리는 아프고 힘든 말을 들으면 자꾸 그 말을 생각하고 또 생각합니다. 저만 해도 자주 그러는 것 같습니다. 그 말을 생각하고, 그 말을 한 그 사람을 생각하고, 또 그 말을 들은 나를 생각하고… 그렇게 하면서 자꾸 그 말의 수렁에 빠지고 그 말을 한 사람들을 원망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탓합니다. 또 그렇지 않으면 그런 말을 한 사람들에게 말로 대항하거나 복수를 하려고 하게 됩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렇게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하는 대신에 자신이 들었던 말을 그대로 하나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이런 것을 ‘일러바치는 기도’라고 부르는데요. 성도는 이 ‘일러바치는 기도’를 꼭 배워야 합니다. 어린아이가 아빠에게 자기가 당한 일을 일러바치면, 그렇게 한 다음에는 절대로 자신이 그 일을 해결하려고 하고 자기가 끙끙대고 고민하지 않습니다. 그냥 일러 바쳤으니까 이젠 다 되었다고 생각하고 잊어버리지요. 어린 아이가 이럴 수 있는 것은 자기가 아빠에게 말하는 순간 그 일은 자기의 일이 아니라 아빠의 일이 되고, 그래서 아빠가 어떻게든 알아서 할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기도를 통해서 이 일을 해야 합니다. 혼자서 끙끙거리고 그 말의 늪에 빠져 허우적 거리지 말고 상황과 들었던 말 모두를 우리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모두 ‘일러 바치고’ 그저 맡겨 버리는 그 비결을 배워야 합니다. 그래야 말의 올가미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고 우리의 삶이 남들이 한 ‘말’때문에 허물어 지지 않게 할 수 있습니다. 


2. 다윗은 과거에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되돌아 보았다. 


다윗이 상황에 묶이고 또 말에 묶이지 않기 위해서 사용했던 첫번째 방법이 ‘일러바치는 기도’를 드린 것이라면, 두번째 방법은 바로 하나님께서 과거에 베풀어 주신 은혜를 돌아보고 그것을 현재와 미래의 믿음으로 연결 시킨 것이었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살면서 몇 번이나 사선을 넘나들었습니다. 정말 코 앞에 다가온 죽음의 냄새를 맡은 적도 있었습니다. 다윗은 그 때의 일들을 떠올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의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으심이로다” 우리 말 성경에서는 이 구절이 현재의 일로 표현되어 있지만 원래는 다윗이 과거를 돌아보면서 회상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과거에 다윗이 사울 때문에 절체절명의 위기를 만났을 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그저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그럴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도에 응답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응답이 무엇일까요? 여러가지 응답이 있었겠지만 다윗은 밤에 잠을 자고 다음 날 아침 잠을 깬 것이 가장 큰 응답이다고 고백합니다. 절대로 잠을 잘 수 있을만한 상황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마음이 평안합니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잠이 들고, 또 다음 날 아침 깨어납니다. 그런데, 이렇게 전날 밤에 잠이 들고 다음 날 아침 깨어났다는 것은 그것 자체가 어제의 위기가 이미 지나가 버렸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니, 그가 전날 잠이 들고 다음 날 잠에서 깨어난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생명 뿐만 아니라 그의 마음까지도 지키시고 보호해 주셨다는 증거가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다윗은 이런 은혜를 거듭해서 경험하고 또 경험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때를 돌아보면서 하나님을 향해서 “주님은 지금 나의 방패이십니다. 주님은 지금 나의 영광이십니다. 주님은 지금 나의 머리를 드시는 분이십니다.”라는 귀한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도 그러시지요? 다윗처럼 되돌아볼 은혜의 경험이 많이 있으시지요? 하나님께서 구원자가 되어 주시고, 보호자가 되어 주셨던 경험, 놀랍게도 마음과 생각까지 세밀하게 지켜 주셨던 경험을 많이 가지고 계시지요? 성도에게는 이런 경험들이 많으면 많을 수록 더 좋습니다. 그런 경험이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의 믿음은 더욱 더 풍성하고 견고해 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에게는 그런 경험들이 넘치도록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지금 그 경험을 떠올리면서 자신의 믿음을 추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그런 은혜로운 경험을 많이 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하나님께 부르짖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어김 없이 하나님을 부르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하나님께 부르짖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도 잘 모릅니다. 구한 적이 없으니 받아도 알아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르짖지 않는 사람들은 되돌아 볼 수 있는 은혜도 그만큼 적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되돌아 볼 은혜가 적다는 것은 성도에게는 작은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곧 그의 영혼을 그만큼 궁핍하게 만들고 믿음을 빈약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흔들리는 순간에 그 믿음을 붙들어 맬 말뚝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될 수 있는대로 많이 부르짖으며 사시기 바랍니다. 큰 일 뿐만이 아니라 사소해 보이는 작은 일을 가지고도 하나님을 부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해서 될 수 있는대로 꼭 필요한 순간에 되돌아 볼 수 있는 은혜의 기억을 많이 만드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그 은혜들은 평상시에는 우리들의 신앙생을 더 확신있고 풍성하게 해 줄 것이고, 유사시에는 흔들리고 낙심하기 쉬운 우리 영혼을 다시 일으켜 세워줄 것입니다. 


3. 기도에는 확실한 능력이 있다. 


그 모든 기도의 길을 달려온 후에 다윗은 이제 이렇게 고백합니다.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이것은 허세가 아니었습니다. 자신을 달래고 힘을 내기 위해서 그저 한 말도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다시 회복된 다윗의 믿음에서 나온 진실된 고백이었습니다.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이제 다윗은 당당하게 하나님을 재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간구합니다.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주께서 나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셨나이다” 다윗은 이제 더 이상 탄식하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구원을 확신하면서 자신있게 구하고 있습니다. “구원은 하나님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 다윗이 얼마나 많이 변해 있습니까? 바람 앞에 풀잎처럼 흔들리던 다윗은 어디로 갔습니까? 그런데, 이것이 바로 기도의 진짜 위력입니다. 기도는 무엇보다도 기도드리는 사람의 영혼을 일으켜 세웁니다. 이것은 하나님 드리는 성도의 진솔한 기도만 가지고 있는 능력입니다. 


4. 결론 : 우리를 살리는 기도를 배우자. 


성도 여러분, 다윗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의 믿음도 언제나 한결 같지 않습니다. 상황에 따라, 우리의 마음 상태에 따라 이렇게 저렇게 흔들릴 수 있습니다. 특히 사람들 때문에 가장 쉽게, 그리고 가장 심하게 흔들릴 수 있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기도입니다. 다윗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흔들리는 순간에 드리는 우리의 기도가 낙심한 우리의 영혼을 일으키고 우리 믿음을 회복시키는데 효과적인 기도가 되게 하려면 기도에는 요령도 필요합니다. 


우선 우리는 하나님께 일러바치는 기도를 배워야 합니다. 아마 제대로 잘 일러바쳤다면 일단은 분명히 마음이 평안해 질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를 힘들게 하는 일로부터 거리를 둘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 다음에는 과거에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고백하면서 그 때 그 하나님이 지금도 나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믿는 믿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과거의 은혜가 풍성할 수록 이 회복은 빠르게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눈 앞의 상황은 변한 것이 없어도, 또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내 눈 앞에 있어도 우리는 탄식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믿음의 자리로 옮겨 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다윗이, 그리고 우리 믿음의 조상들이 흔들리는 상황 속에서 흔들리는 믿음을 회복하기 위해서 드렸던 기도였고, 흔들리는 자신을 추스려서 믿음의 제 자리로 돌아가기 위해 사용했던 방법이었습니다. 이 방법은 오늘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또 능력있습니다. 상황 때문에 힘들고, 사람 때문에 더 힘들 때, 이 기도의 길을 따라 기도하고 또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의 믿음은 회복될 것이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더욱 더 또렷하게 바라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아버지는 여전히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구원의 하나님은 변함 없이 구원의 하나님이십니다. 언제나 이 진리를 단단히 붙들고 회복시키시고 건지시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사는 우리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