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6.08.07. 주일오전 - 하나님을 본 받는 자가 되고4(에베소서 29)


20160807SM (#1).mp3.zip





설교본문 : 에베소서 5장 1절-2절





어떤 사람이 정말 어렵게 아이를 얻었습니다. 마음이 어떨까요? 너무 너무 기분이 좋겠죠? 정말 기쁘겠죠? 그런데, 처음에도 그랬지만, 아이가 자라나면서 점점 자신을 닮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는 딴판이 되어 갑니다. 생긴 것 뿐만 아니라 성품까지도 정반대 방향으로 갑니다. 다른 사람들이 아이와 함께 있는 것을 보면 “왜 아버지하고 아이가 이렇게 달라요?”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러다 좀 더 알게 되면, “아이구, 성격도 성품도 아버지하고 완전히 딴판이네요.”라고 말합니다. 이제 이 사람의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아마 정말 괴롭고 화가 날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이 한 사람을 알게 되고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알면 알아 갈수록 이 사람의 성품이며 됨됨이 그리고 살아가는 모습이 너무 아름답고 귀합니다. 그러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그 사람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자연스럽게 영향을 받게 되고, 서서히 그 사람을 닮아갈 것입니다. 행동이며, 됨됨이가 사랑하는 사람과 비슷해져 갈 것이고, 어딘지 모르게 겉으로 풍기는 것도 비슷해져 갈 것입니다. 


자녀가 자라가면서 자기 부모를 닮아가는 것, 그리고 사람이 자신이 사랑하고 존경하는 아름다운 사람을 닮아가는 것은 정말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그렇게 하라고 강요하지 않아도 그렇게 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하나님을 믿는 우리가 하나님을 닮아가는 일은 우리에게는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은  그 때부터 하나님을 점점 더 많이 알게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라는 분은 알면 알수록 더욱 더 사랑스러운 분이십니다. 알게 되면 반할 수 밖에 없는 아름다운 성품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알게 된 사람은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닮고 싶어 집니다. 그러니 시간이 흐르면서 그 사람에게서 하나님을 닮은 모습들이 하나씩 둘씩 더 분명하게 드러나게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지요? 실제로 우리가 하나님을 닮아가는 일은 자연스러운 일도 아니고 또 그리 쉬운 일도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흉내내고 닮아가는 일을 방해하는 아주 강력한 두 가지 방해물이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 우리의 ‘이기심’이 우리가 하나님을 흉내는 일을 방해하고, 둘째 이기적인 방식으로 흘러가는 ‘이 세상’이 우리가 하나님처럼 살아가는 일을 방해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실제로 하나님을 닮아가려면, 우리의 결단과 노력도 꼭 필요하지만 이런 안팎의 장애물들을 넘게 해 줄 수 있는 하나님이 주시는 강한 은혜가 필요합니다. 사실 하나님을 닮아가는 일은 우리의 힘이 아니라 그 은혜에 의지할 때만 가능한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본문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닮아가는 과정에서 만나는 장애물을 넘기 위해서 꼭 붙들어야만 하는 은혜가 무엇인지를 함께 살펴 보겠습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하나님을 흉내내면서 살도록 우리를 이끌어 주고 힘 주는 첫번째 은혜는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5장 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 받는 자가 되고…” 이 말씀의 의미는 분명합니다. “너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하나님의 자녀다. 그러니까 너희는 당연히 하나님을 흉내내고 하나님을 닮아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자녀다운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아주 어렸을 때, 아버지를 잃어버린 아이가 있었습니다. 아버지를 잃어버렸으니까 혼자 힘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그른지 가르쳐 주는 사람조차 없었고, 모든 필요를 혼자서 채우고 해결하느라고 고생스러운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상처와 아픔도 많았고, 비뚤어진 마음과 잘못된 습관도 많이 가지게 되었지요. 그런데, 어느 날 이 아이가 잃어버렸던 아버지, 있는 줄도 몰랐던 아버지를 되찾았습니다. 그 날 부터 그 아이는 혼자가 아니라 아버지와 함께, 아버지가 모든 것을 책임져 주는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아이는 비로소 아버지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아버지와 함께 살면서 아버지가 얼마나 좋은 분인지도 알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성품과 행동 하나 하나까지 그렇게 멋지고 사랑스러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 아이는 아버지를 좋아하게 되었고, 또 깊이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기 시작할 때, 우리는 잃어버렸던 아버지를 되찾게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리고, 그 때부터 아버지가 모두 책임져 주시는 든든한 삶을 살게 됩니다. 뿐만 아닙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함께 살고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면서 하나님이 얼마나 좋은 분인지, 얼마나 사랑스럽고 멋진 아버지인지를 알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그 사랑이 점점 커지게 됩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이 됩니다.


아이는 이렇게 자신의 아버지가 얼마나 사랑스러운 사람인지를 깨닫게 된 후부터 그 아버지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사랑스럽고 훌륭한 아버지를 흉내내고 아버지 처럼 되어 보기로 작정했습니다. 누가 시켜서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스러움을 알게 된 아이의 마음이 저절로 그렇게 움직여 갔고, 자신이 그렇게 멋진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자랑스러웠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때로는 사랑스럽지 않은 사람도 사랑하게 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사랑해도 그 사람의 사랑스럽지 않은 모습까지 닮고 싶어하지는 않지요. 그러나 자신이 사랑하게 된 사람이 가지고 있는 사랑스러운 모습은 자연스럽게 닮아가게 되고, 또 그렇게 되고 싶다는 소원을 품게 되어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 되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하나님을 닮고 싶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새롭게 알게된 아버지의 모습이 너무나 멋있고 매력적이기 때문에, 저절로 그런 소원을 품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사랑받는 자녀같이 하나님을 본 받는 자가 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아이는 자신의 바램을 이루기 위해서 애를 썼습니다. 비뚤어지고 어그러진 모든 성품과 습관을 없애고 아버지 처럼되려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렇지만 처음부터 잘 될 리가 없습니다. 성공할 때보다 실패할 때가 더 많았고, 되었다 싶으면 다시 제자리로 가 버린 자신의 모습을 본 것도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오랫동안 혼자 자기 마음대로 살아온 습관이 몸에 배어 있고, 또 그렇게 혼자 살아 가느라고 갖게 된 고집과 이기적인 마음이 너무 뿌리 깊게 박혀 있었으니까요. 아이는 너무 힘들었습니다. 좌절스러웠습니다. 무엇보다도 아버지에게 너무 죄스러웠습니다. 아버지는 그렇게 훌륭한데 자신은 너무 형편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힘들어 하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습니다. “괜찮다. 그래도 나는 널 사랑해. 내가 널 찾기 위해서 얼마나 값비싼 댓가를 치렀는지 아니? 물론 너는 지금보다 훌륭해 져야 하고, 또 훌륭해 질 수 있어. 그렇지만 너는 지금 그대로도 내가 사랑하는 내 아들이란다. 난 계속해서 널 사랑할 것이고 널 끝까지 기다릴거야.”라고 말입니다. 물론 그 이후에도 그 아이는 실패도 하고 좌절도 했습니다.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힘들 때도 많았습니다. 그렇지만 그럴 때마다 그 아이는 아버지의 말을 기억하고 또 기억하면서 힘을 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조금씩 조금씩 자기 안에서 진해지고 커져가는 아버지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변함 없는 사랑에 대한 확신이 그에게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이 되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누구나 하나님을 흉내내고 싶어하고 하나님을 닮고 싶어하는 소원을 품게 되어 있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사람들이고, 자신의 아버지가 얼마나 아름답고 매력적인 분인지를 아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소원이 값지고 아름다운 만큼 이 소원을 이루는 일은 그만큼 쉽지 않습니다. 아직 다 떨쳐내지 못한 옛 습관이 버티고 있고 또 그 일의 가치를 전혀 모르는 이 세상이 그 일을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닮고 싶어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아픔도 있고 좌절감도 있습니다. 또 다시 사랑하는 아버지를 실망시켰다는 쓰라린 마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성도들에게는 아버지가 있고, 변하지 않는 아버지의 다함 없는 사랑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하나님의 원수노릇을 하고 있을 때, 그 때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면, 우리가 그 사랑에 감동되어서 갑자기 하나님 보시기에 흠이 없고 충분히 사랑스럽고 또 하나님만 사랑하는 그런 사람으로 바뀔 것이라고 생각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사랑하신 것일까요? 그렇지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본질을 아십니다. 우리가 얼마나 변하기 어렵고 또 얼마나 쉽게 실패하는 약한 존재인지를 너무나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러면서도 독생자를 내어 주시는 그 엄청난 사랑으로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것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그래도 거룩하게 살고, 그래도 하나님을 닮기 위해서 애쓰다가 중간에 포기하게 되는 것을 보는데요. 가장 큰 이유는 좌절감입니다. 싸우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싸우고 또 싸웁니다. 그런데, 지기만 합니다. 백 번 싸워 한 두 번은 이기지만 나머지는 모두 패배로 끝납니다. 이럴 때 성도에게 찾아오는 좌절감과 낙심은 정말 정말 견디기 어렵습니다. 여기에다 자신이 또 하나님을 실망시켰다는 죄책감까지 더해지면 성도는 그 다음에는 죄 앞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고 맙니다. 싸워보겠다는 의지마저 잃어버리게 되지요. 이럴 때는 정말 백약이 소용이 없습니다. 기도도 안되고, 성경을 읽어도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마음을 추스릴 수도 없습니다. 벼룩이도 낮짝이 있지 더 이상 용서를 구하기도 힘듭니다. 그렇지만 참 염치 없게도 이럴 때 꼭 필요한 것이 바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변함 없는 사랑을 생각하고 그 사랑을 확신하는 일입니다. 


조지 맥도날드라는 영국의 목사님은 “하나님은 우리를 쉽게 기뻐하시지만 우리에게 쉽게 만족하지는 않으신다”고 말했습니다. 말씀인 즉, 그러니까 자기 힘으로 하나님을 만족시키려고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상하게 들리실지 모르지만 그렇습니다. 우리는 절대로 완전하신 하나님을 만족시켜 드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완전하기 때문에, 완전할 때만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저 우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시고 기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보고 싶어하시는 모습은 우리의 완전한 모습이 아니라 우리가 애쓰는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의 모습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을 닮아가려는 여러분의 노력과 시도가 번번히 실패로 끝난다고 해도 절대 포기하지 마십시오. 그 때는 염치 없게 느껴져도 자기 자신에게 이렇게 말해 주십시오. ‘그래도 나는 하나님의 자녀고, 하나님은 여전히 나를 사랑하신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을 닮아갈 수 있고 또 닮아가야 한다’고 말입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건 여러분이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고 그 사랑에 대한 확신을 회복한다면 그 사랑의 능력으로 더욱 더 하나님을 닮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을 닮아가기 위해서 붙들어야 할 두 번째 은혜에 대해서 살펴 보겠는데요. 그 것은 바로 ‘십자가를 통해 보여주신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2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닮아간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이 가장 분명하고 확실하게 드러난 곳이 바로 예수님께서 달리신 십자가 였습니다. 십자가에서 드러난 예수님의 사랑의 크기가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의 크기였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하나님을 닮아가려면 십자가의 사랑을 붙들어야 한다고, 예수님처럼 사랑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되려면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살아가야 한다고 말이지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게 해 주는 힘은 우리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얼마나 추하고 더러운 죄인인지를 제대로 보게 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하나님께서 나를 얼마나 크고 이해할 수 없는 사랑으로 사랑하시는지를 깨닫게 될 때, 그 사랑에 감동되고 녹아버린 자아가 하나님 앞에 항복하게 될 때, 그 때 비로소 우리는 다른 이들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죄인됨을 정확하게 알고, 그 죄인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크기를 알 때, 우리는 거기서 사랑할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모르고 자꾸 자기 힘과 의지로 사랑하려고 하니까 사랑하는 일에 실패하게 되고 결국에는 아예 사랑하는 일을 포기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려고 애쓰다 보면 사랑하는 일이 힘겨워 지고, 더 이상 사랑할 이유도, 사랑할 힘도 없다고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 때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 자신을 십자가 앞에 세워야 합니다. 그리고 나대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나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대신 십자가 위에서 죽음을 당하셨고, 나는 그 덕분에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 일을 위해 내가 한 일이 있나요? 내가 선한 일을 했나요? 나에게 뭔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만한 것들이 있었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이 나를 위해 목숨을 내어주신 것입니까? 아닙니다. 나는 그 때, 내가 지금 죄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그 어떤 사람보다도 하나님 앞에서 더 크고 악한 죄인이었습니다. 십자가가 아니면 다른 방법이 없을 정도로 큰 죄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이 것을 잊는 순간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립니다. 하나님을 닮아갈 수 있는 힘을 빼앗기게 됩니다. 이 사실을 잊는 순간 나는 죄인의 자리에서 의인의 자리로 올라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 없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을 세워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서서 우리를 살리시고 하나님 자녀 되게 해 주시기 위해서 자신을 제물로 드리신 예수님을 바라 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우리 자신의 죄의 크기와 깊이를 다시 보게 되고, 예수님의 사랑의 깊이를 다시 깨닫게 될 때, 우리는 다시 다른 사람들을 사랑할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 덕분에 그 은혜를 얻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하면서 하나님을 닮아가야 합니다. 언제나 십자가를 바라 보십시오. 그리고 십자가에서 사랑할 힘을 얻어서 계속 하나님을 닮아가십시오. 사랑하는 일에 더 많이 실패하고 더 많이 낙심할수록 더욱 더 그렇게 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분명히 여러분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게 해 주실 것이고, 또 그렇게 하나님 아버지를 더 많이 닮은 자녀가 되게 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십자가의 사랑의 능력을 힘 입어 하나님처럼 다른 사람을 사랑하며 하나님을 닮아가는 아버지의 자녀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답게 하나님을 닮게 하소서. 
  2. 예수님의 사랑에 의지해서 더 많이 사랑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