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일 : 2016년 8월 8일 월요일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온 세상에서 유일하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들의 신앙은 아주 오랜 세월 동안 조금씩 조금씩 방향이 틀어져 왔고, 그 결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그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가장 멀리해야 하고 반드시 버려야 할 것들을 붙들고 있으면서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잘 믿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바로 ‘외식’ 그러니까 ‘위선’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아주 위험한 바리새인의 누룩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다른 단어를 다 놔두고 ‘누룩’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셨는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누룩은 아주 작은 양, 거의 눈에 보이지 않는 양이 들어가도 아무리 큰 반죽도 전부 발효시켜 버립니다. 그만큼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고 그만큼 위험한 것입니다. 예수님 보시기에 ‘외식’이라는 것, ‘위선’이라는 것이 신앙과 한 사람의 영혼에게 그만큼 위험한 것이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누룩’이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위선이란 아닌데 그런 척 하는 것입니다. 없으면서 있는 척 하는 것입니다. 아닌 것을, 없는 것을 그럴 듯한 겉모습으로 매꿔넣고서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며, 오히려 그렇게 그럴 듯한 겉모습을 자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들은 이런 ‘외식’을 이런 ‘위선’을 별 것 아닌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신앙에 있어서는 이 위선보다 더 위험한 것은 없습니다. 그것은 신앙에 위선이 끼어들 때, 신앙은 그야 말로 껍데기만 남고 알맹이는 텅 비어버린 조개 껍데기 같이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진짜가 아닌 것, 알맹이가 없는 것은 언젠가 다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언제 그렇게 될까요? 우선 신앙 때문에 손해를 보고 위험을 각오해야 할 때, 위선적인 신앙은 본 모습을 드러냅니다. 위선적인 신앙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대신에 사람들을 두려워하고 사람들이 주거나 빼앗을 수 있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 믿음을 시인하고 또 고백해야 할 때 뒤로 물러 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신앙은 항상 그 관심이 다른데 가 있습니다. 마치 예수님께 자기 형과 아버지의 유산을 나누는 일을 해결해 달라고 찾아온 사람처럼 도무지 예수님께 무엇을 구해야 하는지, 예수님이 무엇 때문에 이 세상에 오신 분인지를 알지 못하고 그런 것에는 관심도 없습니다. 위선적인 신앙이 이런 모양이 되는 것은 그 속에 참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참 믿음이란 어떤 것입니까? 참 믿음이란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고서 그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참 믿음의 가장 기초적인 모습입니다. 왜 여전히 예수님께 유산을 분배하는 문제같은 것들이나 가지고 오나요? 왜 항상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그런 것만 걱정하면서, 또 그런 것들이 없으면 어떻게 하나 하는 두려움에 빠져 살아가지요?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고서 나머지 문제들은 다 그 아버지께 맡기고 자신은 아버지께서 맡기신 삶을 살아갈만큼의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믿고 나서도 계속해서 예전에 붙들고 있었던 것 그대로 붙들고 살아가고, 예전에 두려워하고 근심했던 것 그대로 두려워하고 근심하며 살아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바리새인의 누룩’을 주의하라는 우리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껍데기가 아니라 알맹이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가르침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껍데기와 위선은 하나님께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그 분께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정말로 하나님을 믿느냐, 그리고 실제로 그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항상 바리새인의 누룩을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신앙의 알맹이가 비어가고 껍데기만 더 단단해져 가지 않도록 주의하시고 또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믿음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또 하나님을 사랑하며 진실로 하나님을 신뢰하며 살아가는 진짜배기의 믿음, 바리새인의 누룩이 들어 있지 않는 순전한 믿음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