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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오후

2016.08.28. 주일오후 전교인 기도회 - 네가 강한 자를 밟았도다(사사기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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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 2016년 8월 28일

본문 : 사사기 5장 13-23절

목적 : 하나님의 도전에 대한 올바른 반응을 알게 한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일생이 편한하고 유복하기를 바랍니다. 그 누구도 자신의 삶이 어려운 일 투성이가 되고, 괴로움으로 채워진 삶이 되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바램이 어떻든지 인생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습니다. 항상 어려움이 있고, 괴로움이 있습니다. 


아놀드 토인비라는 영국의 역사학자는 ‘도전과 응전’이라는 책을 써서 인류의 역사가 다름 아닌 도전에 대한 응전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주장한 적이 있습니다. 인류의 역사 뿐만 아니라, 개인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개인의 역사도 난관이라는 도전과 그에 따르는 개인의 반응이라는 응전으로 이루어 집니다. 난관과 어려움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하느냐가 그 사람이 개인적인 역사의 향방을 결정하게 되어 있습니다. 일상적인 삶뿐만 아니라,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인들은 누구나 자신의 신앙생활이 항상 잔잔한 호수같이 평온하기만을 원하지만, 우리의 신앙은 항상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신앙의 방향과 열매는 결국 그러한 도전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 어떠했느냐 하는 것이 결정짓게 됩니다. 우리가 평생 그렇게 맺은 열매들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서게 된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우리가 보이는 반응 하나 하나의 가치는 결코 작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스라엘과 하솔 왕 야빈과의 전쟁은 겉으로 보면, 이스라엘과 하솔과의 전쟁이지만, 엄밀하게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서, 이스라엘을 전쟁에 끌어들이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앞설 테니 너희들은 나를 따르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13절은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용사를 치시려고 강림하셨도다”라고 말합니다. 시스라가 이끄는 군대는 오합지졸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다 용사였습니다. 객관적으로 보면 이스라엘은 완전히 약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이 용사들의 군대를 치라고 명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도전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시스라가 도전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도전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영적인 전쟁이 가지고 있는 진짜 모습입니다.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은 물론 사탄입니다. 그들의 지배를 받고 있는 사람들과 세속적인 방법이 우리들의 대적입니다. 그러나, 그 싸움을 우리에게 명하신 것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 도전은 바로 하나님의 도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반응은 결국 사탄의 도전에 대한 반응인 동시에 하나님의 도전에 대한 반응이기도 합니다. 


드보라와 바락은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용사를 치시려고 강림하셨도다”라고 고백합니다. 도전은 거셉니다. 그냥 싸우면 승산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싸움은 질 수 없는 싸움입니다. 내가 믿음으로 개입하면 하나님께서 나를 앞서 나가 먼저 싸우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용사를 치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도전은 하나였지만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들이 전부 다 똑같은 반응을 내놓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12지파로 이루어진 이스라엘은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지파 별로 결정을 내리고 행동했습니다. 이번 전쟁에서도 그렇게 했습니다. 그런데, 그 결정이 모두 같지는 않았습니다. 가나안 족속의 도전에 대해서, 하나님의 도전에 대해서 즐거운 헌신으로 반응한 지파가 있었던 반면에 그렇지 않은 지파들도 있었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참전요구에 대해서 즐겁게 헌신한 지파들이 있었습니다. 에브라임, 베냐민, 마길 그러니까 므낫세, 스불론, 잇사갈, 납달리 지파가 그들이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스불론과 납달리는 가장 헌신적으로 전쟁을 치렀습니다. 베냐민은 야전 지도자들을 내 놓았고, 므낫세는 장교들을, 스불론 지파 중에서는 사령관급의 지도자들을 내 놓았습니다. 잇사갈 지파에서는 족장의 가족들이 직접 드보라와 바락을 도왔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위치나 이익을 돌보지 않고 오히려 바락과 한 마음이 되어서 전쟁에 헌신했습니다. 각 지파에서 이들만 나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각 지파에서 나왔겠지만, 그것이 무엇이건 간에 각자에게 맡겨진 임무에 충실하면서 전쟁을 치러냈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도전, 신앙적인 도전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헌신하는 사람들의 특징을 보게 됩니다. 첫째, 이들은 ‘움직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참전명령이 떨어지자 즉각 움직였습니다. 누가 하나님을 기쁘게 합니까? 누가 참된 헌신자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움직이는 자입니다. 순종은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행동이 아닙니다. 순종은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행동입니다. 스스로 움직이지 않으면 헌신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순종과 헌신을 요구합니다. 그 말씀에 대한 적극적인 개입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들은 사람은 책임이 있습니다. 그 말씀에 순종하고 헌신해야 할 책임을 가지게 있습니다. 그리고, 그 책임을 자신의 책임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아름다운 헌신자가 될 수 있습니다.  


두번째로, 이들은 하나가 되었습니다. 서로의 눈치를 보거나, 세력다툼을 하지 않았습니다. 누구라서 높은 자리에 앉고 싶지 않겠습니까? 누구라서 지도자가 되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이들은 그러한 욕심을 누르고 각자의 능력에 맞는 대로 위치를 부여 받았고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각자 위치의 경중이 있었을 것입니다. 높고 낮음이 있었겠지요. 누군가는 명령을 하고 누군가는 그 명령을 따라야 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자신의 역할의 경중 보다는 하나님께서 명하신 하나님의 전쟁에만 한 마음으로 헌신하였습니다. 하나님 편에 서는 참된 헌신자들은 자기의 위치나 유익, 체면을 먼저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를 먼저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중심을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자신들이 왜, 무엇 때문에 거기에 있는가를 망각하고 부수적인 것이 한눈 팔지 않습니다. 가장 중요하고 본질적인 것을 붙들고 있기 때문에, 부수적인 것에 집착할 여유와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하나되지 못하고 자꾸 인간적인 갈등으로 몸살을 앓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성도들이 교회가 왜 있어야 하는지, 자신은 그것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 사람인지 하는 것을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바라보아야 할 것을 바라보지 않으니 보면 안될 것을 보면서 그것을 붙들 수 밖에 없고, 그렇게 바라보는 것이 다 다르니 결국 갈등이 있고, 다툼이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쟁에 참여하기 위한 인간적인 조건은 하나됨입니다. 자신의 입장이나 이익을 다 내려놓고 교회라는 큰 그림, 하나님 나라라는 큰 그림을 볼 때, 이 하나됨은 이루어 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이런 사람들이 많아질 때 세워질 수 있고,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이렇게 마음을 합하여 헌신한 사람들만 있었으면 참 좋았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르우벤 지파는 망설이면서 자기 양 떼와 함께 앉아 있었습니다. 단 지파는 배 위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아셀 지파는 자기에게 주어진 비옥한 땅에 그냥 남아 있었습니다. 르우벤 지파는 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일에, 하나님의 전쟁에 헌신하지 못하는지 우리에게 그 근본적인 이유를 알려 줍니다. 16절을 보면 “르우벤 시냇가에서 큰 결심이 있었도다”라는 말이 나오는데, 말만 보면 르우벤 지파가 전쟁에 참전하기 위해서 큰 결심을 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 말은 원래 ‘이들이 자신의 마음을 크게 살폈다’는 그런 뜻입니다. 그리고 결단을 내렸다는 뜻이지요. 무슨 결단을 내렸을까요? 계속해서 시냇가에 자기 양 떼와 함께 앉아있기로 결단한 것입니다. 르우벤 족속은 자기 마음을 살폈습니다. 그것도 크게, 심하게 살핀 것입니다. 이것은 르우벤 지파가 자기의 본능, 그 본능에서 나온 생각에 집착했다는 뜻이고, 그것을 기준으로 결단을 내렸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손해 보는 것을 싫어합니다. 귀찮아지는 것을 싫어하고 위험해 지는 것을 싫어합니다. 모든 인간의 본능이지요. 그렇지만 우리가 이런 마음만을 크게 살펴면, 그렇게 그 마음에 붙들리면, 결국 욕심과 안일함만을 추구하는 못난 존재가 되고 맙니다. 


세상에 가치있고 의미있는 일들 중에서 쉬운 일이 없습니다. 어떤 일이 가치있고 의미있는 이유는 그 일이 쉽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하려고 나서는 사람이 적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치있고 의미있는 일을 하려는 사람은 자기의 본능적인 마음과 생각을 다스리고 이겨낼 줄 알아야 합니다. 쉽게 말씀드려서 그저 하고 싶은대로 하면서 살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과연 르우벤 지파가 그 전쟁이 하나님의 전쟁이고, 그래서 그 전쟁은 결국 이기는 전쟁이라는 것을 믿지 못했을까요? 아닙니다. 알고 있었습니다.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단 지파, 아셀 지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너무 자신들의 마음을 크게 살폈습니다. 본능에 집착했습니다. 그래서, 자기 땅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 중심적이고 본능에 충실한 신앙이 가지는 한계입니다. 이런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결코 자기 자신이라는 굴레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래서 신앙의 능력도 경험하지 못하고 하나님 앞에서 영광스럽게 살다가 주님 주시는 승리를 맛보지도 못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앙이 무엇입니까? 신앙은 나를 벗어나 하나님을 바라보는 눈입니다. 나 중심성을 벗어나 하나님을 중심으로 삼아 인생의 원, 세상의 원을 다시 그리는 것이 신앙입니다. 만약 우리의 신앙이 우리를 본능적인 욕심과 욕구로부터 자유롭게 해 주지 못한다면 우리가 그 신앙에서 무슨 능력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르우벤처럼 자기 마음만 지나치게 크게 살피는 사람은 언제나 계산하며 주저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결코 하나님의 싸움에 헌신하여 그 승리의 기쁨과 영광을 함께 누리는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드보라와 바락은 21절 뒤쪽에서 이렇게 노래 합니다. “내 영혼아 네가 힘 있는 자를 밟았도다”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적이었는데 이겼습니다. 하나님께서 비와 강을 동원하셔서 시스라를 완전히 박살내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한 없이 약한 자이면서도, 아무 능력도 없는 자이면서도 강한 자를 밟았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약자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신앙인으로 남아있기로 결심했다면 우리는 결코 세상에서, 세상이 요구하는 모습대로의 강자는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항상 이리 가운데의 양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약자도 강자를 밟을 수 있습니다. 양이라도 이리를 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싸우라는 싸움에 기꺼이 헌신하고 그래서, 그 분의 승리를 나누어 받는다면 충분이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이것을 믿을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섰을 때에, 우리의 삶에도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메로스를 저주하라 너희가 거듭거급 그 주민들을 저주할 것은 그들이 와서 여호와를 돕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도와 용사를 치지 아니함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싸움에 헌신하는 사람들, 그 거룩한 싸움에 즐겁게 헌신하는 사람들은 다 승리의 영광을 누릴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자에게 남는 것은 안타깝게도 하나님의 저주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그런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저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도전을 받고 거룩한 삶의 전쟁, 진실하고 정직한 삶의 전쟁에 기쁘게 헌신한 사람과 자기 중심적인 신앙을 벗어나지 못하고 자기 마음만을 크게 살피며 살았던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서 누리게 될 영광의 크기는 확연히 다르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좋은 것들이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고 믿으며, 그래서 하나님께 감사하며 삽니다. 그런데 만약 르우벤의 양떼처럼, 단의 배들처럼, 아셀의 옥토처럼 그 좋은 것들이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께 더 깊고 온전히 헌신하는 것을 방해하는 방해물이 된다면 그런 것들이 우리에게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성도는 싸우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현실적인 유익과 우리의 안이함을 넘어서서 주님을 위한 싸움에 나서라고 계속해서 우리에게 도전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너무 자신의 마음만 크게 살피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도전에 응할 수가 없습니다. 절대로 우리 앞에 있는 강한 자들을 밟을 수 없습니다. 언제나 주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이 싸우라시는 싸움에 나서서 주님과 함께 승리의 기쁨을 맛보는 주님의 용사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