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6.09.07. 새벽예배 - 성경읽기와 묵상(요한복음 10장)


* 오늘은 녹음파일이 없습니다. 





설교일 : 2016년 9월 7일 수요일




예수님께서는 10장에서도 9장에서 하셨던 말씀과 동일한 맥락의 말씀을 계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는 조금 더 친밀한 관계에 있는 목자와 양의 관계에 빗대어 그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사실 이 말씀 자체가 예수님께는 많이 가슴 아픈 이야기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원래 목자와 양의 관계는 언제나 왕과 그의 백성의 관계를 나타내는 비유였고, 그런 점에서 예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과의 관계를 보여주는 비유일 수 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원래 자기 양이고 또 자기 백성인 그들을 향해서 그저 이스라엘 백성이고 아브라함의 혈통이기 때문에 저절로 예수님의 양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이 말씀은 그래서 예수님의 양과 그렇지 않은 다른 사람의 양,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가르고 나누기 위해서 하신 말씀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군가를 배제하과 제외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듣는 사람들 모두에게 충격을 주기 위해서 이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말씀의 요지는 분명했습니다. 예수님은 양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선한 목자인데,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는 양이 아닌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주님의 백성이 되고 또 주님의 양이 되는 것은 은혜로 되는 것이라고만 생각합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선택에 의해서 되는 일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이 된 이후에, 백성이 된 이후에 그런 사람들에게는 일종의 표시가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주님의 양이 되고 백성이 되는 것은 그저 어떤 상태가 되거나 새로운 신분을 얻는 것이 아니라 두 분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연인이 아니었을 때와 연인일 때, 결혼하기 전과 결혼한 후, 가족일 때와 가족이 아닐 때, 서로에 대한 반응과 태도가 전혀 다르듯이 우리가 주님의 양이 된 이후와 그 이전에 주님이 우리를 대하는 태도와 우리가 주님께 보이는 반응은 같을 수가 없습니다. 이제 그 이전과는 전혀 다른 관계가 되었으니까요. 


그래서, 우리가 주님의 양이라는 증거는 그  어느 곳에서 보다도 우선 우리 자신에게서 나타납니다. 그리고 실은 그것이 우리가 주님의 양이라는 가장 명확한 증거입니다. 우선 주님의 양은 주님의 양이기 때문에 주님의 음성을 알고 그 음성에만 반응합니다. 주님의 음성이 들려오면 그 음성을 듣고 그 음성을 따라 갑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음성에는 전혀 반응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음성이 들려오면 오히려 불안해 하면서 절대로 그 음성을 따라 움직이지 않습니다. 양들은 시력이 좋지 않습니다. 지독한 근시안이어서 1-2미터 앞에 있는 것 밖에 보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청력은 아주 발달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양들은 자기 시력이 아니라 청력에 의지해서 자기 주인을 구별합니다. 그런데, 양들이 자기 주인, 자기의 목자의 음성에만 반응하는 것은 이미 그 목자를 알고  신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분별력은 목자와의 관계로부터 생겨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것을 사용해서 어떤 사람이 예수님의 양인지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나의 양은 내 음성을 안다, 그래서 내가 그의 이름을 부르면 반응하며, 나를 따른다. 그렇지만 내 양이 아닌 양은 내가 아무리 불러도 반응하지 않는다,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부르면 반응한다고 말이지요. 어떤 사람이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분별하지 못하며, 또 믿고 따르지 않는 것은 그가 예수님의 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관계가 없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께서 ‘목자의 음성’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말씀인 즉, 만약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속한 사람이라면 어떤 것이 예수님의 말씀인지 아닌지 스스로 분별할 수 있고, 또 예수님의 말씀에만 순종하게 되어 있다는 뜻이었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과 인격적인 관계가 형성되어 있고, 그 사람을 아주 잘 알고 있다면, 다른 사람이 와서 그 사람이 이렇게 저렇게 말하더라라고 이야기할 때, 그 말을 전해주는 사람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 금새 분간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가 형성되어 있는 사람들은 어떤 말을 들으면 그게 정말 예수님의 말씀인지 아닌지를 금새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이미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있기 때문이지요. 이런 분별력이 없다는 것은 그가 아직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알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양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주님의 양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확신이 우리를 주님의 양이 되게 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주님과의 깊고 풍성한 인격적인 관계입니다. 그 분의 음성과 그렇지 않은 것을 명확하게 분별할 수 있게 해 줄 정도로, 아무리 그럴 듯하게 들려도 주님의 말씀이 아니면 반응하지 않고, 또 따라가지 않을 수 있을 정도로 그만큼 우리 주님을 잘 알아야 합니다. 그런 분별력 자체가 우리를 주님의 양이 되게 해 주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우리가 주님께 속한 주님의 양이라는 증거가 된다는 것만큼은 틀림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런 분별력이 없는 상태에서 우리가 그저 주님의 양이라고 믿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저 아브라함의 자녀라는 혈통만으로 자신이 하나님 나라 백성이라고 확신했던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주님의 양은 주님을 알게 되어 있습니다. 아니 주님을 아는 일에 열심을 낼 수 밖에 없습니다. 주님의 음성을 분별해야 살 수 있고, 안전할 수 있으며, 양의 우리에 드나들면서 기름진 꼴을 먹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 세상을 가득 채운 소음과 같은 목소리와 주장들 속에서 참으로 예수님의 음성을 알아듣고 따르는 주님의 양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