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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6.09.08. 새벽예배 - 성경읽기와 묵상(요한복음 1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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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일 : 2016년 9월 8일 목요일




우리가 오늘 읽은 이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이야기 속에는 좀처럼 이해하기 힘든 예수님의 행동 두 가지가 나옵니다. 첫째는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죽을 병에 걸렸다는 것을 들으시고도 계시던 곳에 이틀이나 계시다가 나사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야 베다니로 가셨다는 것이고, 두번째는 나사로가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말씀하신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비통하게 여기시고 눈물을 흘리셨다는 것입니다. 


첫째, 예수님께서는 나사로가 죽을 병에 걸렸다는 것을 아시고도 이틀이나 지난 후에, 나사로가 죽은 다음에야 베다니로 가셨는데, 그것은 사실 그 누구도 나사로의 죽음을 부인할 수 없는 상황이 될 때까지 기다리신 것입니다. 아마 예수님께서 계시던 곳에서 베다니까지는 이틀거리였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그 소식을 듣고 이틀 후에 출발하셨는데 나사로가 죽은 다음 나흘 뒤에야 베다니에 도착하셨던 것이죠. 곧바로 출발하셨어도 나사로는 죽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 그 때 나사로를 살리시면 누군가 시비를 걸 수도 있습니다. 나사로가 정말로 죽은 것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사흘이 지났고 그래서 나사로의 시신에서는 부패되는 악취가 풍겨나기 시작했습니다. 그 어떤 사람이라고 해도 나사로이미 죽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던 것이죠. 예수님께서는 이 시점에 나사로를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생명의 주님이시라는 것과 실은 나중에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게 될 때, 거기 있었던 사람들이 나사로의 부활을 생각하면서 예수님의 부활을 조금이라도 더 의심하지 않게 만들어 주려 하셨던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그 덕분에 예수님께서 마르다와 마리와와 나눈 대화 속에서 우리가 믿는 부활에 관한 가장 힘있고 분명한 진리들을 접할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나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라는 말씀들인데요. 정말 얼마나 우리에게 확신과 기쁨을 주는 말씀인지 모릅니다. 그야 말로 나사로의 질병은 죽을 병이 아니었을 뿐 아니라, 그것 때문에 우리 주님은 영광을 얻으실 수 있었습니다. 


둘째, 예수님께서는 무덤 앞에서 비통해 하시면서 눈물을 흘리셨는데요. 이제 곧바로 나사로를 되살리실텐데 이 울음은 우리로서는 참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눈물과 비통한 감정은 나사로가 죽었기 때문에, 그 죽음과 이별이 슬펐기 때문에 생겨난 것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왜 주님은 그런 감정을 품으셨고, 또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눈물까지 흘리셨을까요? 저는 그것이 죽음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의 불쌍함 때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죽음 때문에 그 귀한 하나님의 형상이 썩어가며 냄새를 풍기고 있고, 또 그 죽음 때문에 망자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큰 절망과 슬픔 가운데서도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울고 있어야만 했으니까요. 주님께서 비통해 하시고 눈물을 흘리신 것은 그런 사람들을 향한 불쌍히 여기는 마음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 죽음은 그저 잠자는 것에 불과합니다. 생명이신 우리 주님은 죽은 자를 잠 자는 사람 흔들어 깨우듯이 깨우실 수 있으시니까요.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런 죽음 때문에 사람들이 당하는 비참한 상황과 고통에 대해서 한 없이 아파하시고 공감하십니다. 눈물을 흘리실 정도로 말이지요. 주님께서 우리의 상황에 대해서 그런 마음을 품고 계셨기 때문에, 우리의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위해서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내어 주신 것입니다. 양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내어 주시는 선한 목자가 되셔서 말이지요. 


그런데, 우리 주님은 우리의 죽음을 이렇게 아프고 생각하시고, 또 우리가 그 죽음을 벗어나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믿게 해 주시기 위해서 애쓰셨는데,  대제사장들을 비롯한 공회원들은 오히려 그 놀라운 소식을 듣고 예수님을 죽여야만 하겠다는 결정을 하게 됩니다. 참 이상합니다. 정말 예수님께서 죽은 사람을 살리셨고 그들이 그 사실을 알고 의심하지 않았다면 꼭 예수님을 믿지 않더라도 그 동안의 잘못을 깨닫게 하려던 일을 멈춰야 정상일텐데 말이죠. 그렇지만 이미 그들은 정상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분명히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것만큼은 틀림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것 이상으로 그들이 집착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48절을 보면 그들은 서로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그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그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그들은 사람들이 자신들에게서 떠나갈 까봐 두려워 하고 있었습니다. 또 현실적으로 볼 때 그나마 누리고 있던 것들까지도 빼앗길까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대제사장이 유대교의 지도자들이라는 사람들이 그런 것들을 두려워 하고 있었기 때문에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서 그저 예수님을 죽이기로 작정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의 믿음을 방해하는 가장 큰 장애물이 무엇인지를 보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지금 내가 누리는 것과 현실에 대한 집착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그런 것들에 대한 집착을 가지고 있게 마련이지만, 그렇지만 그 어떤 것보다도 이런 것들을 앞세워서는 안됩니다. 아무리 쉽지 않은 일이라고 하더라도 그렇게 하면 안됩니다. 적어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라면 그런 것들을 자신에게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인정해야 하고, 그렇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언제든지 가져가실 수도 있고, 또 다시 허락해 주실 수도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임시적이고 잠정적인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반드시 바른 결정을 내려야 할 때, 그런 것들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잘못된 결정을 내리지 않을 수 있고, 또 믿음과 반대방향으로 가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생명도, 영원한 생명도 모두 생명이시고 부활되신 예수님께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겪는 죽음의 슬픔과 고통과 좌절을 함께 느끼셨던 예수님, 그리고 그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신 예수님께 달려 있습니다. 항상 이것을 기억하고 믿으면서 우리에게 생명도 부활도 될 수 없는 다른 것들에 대한 집착을 잘 다스리며 사는 우리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