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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오후

2016.09.25. 주일오후 - 해가 힘있게 돋음같게(사사기 19)


20160925SE (#1).mp3.zip





본문 : 사사기 5장 24-31절    




오늘 말씀 속에는 아주 대조적인 두 사람이 나옵니다. 겐 사람 헤벨의 아내인 야엘과 시스라의 어머니가 바로 그들입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승리와 영광을 얻고 한 사람은 쇠락의 길을 걷습니다. 보잘 것 없던 사람은 영광의 자리에 가고, 영화를 누리던 사람은 치욕의 자리로 떨어집니다. 그냥 생각해 보면, 잘 나가던 사람들은 자기가 가진 힘으로 계속 잘 나갈 수 있을 것같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간혹 처지가 바뀔 수는 있어도 그저 계속 평범하게 살아가게 될 것 같습니다. 


만약 인간의 삶과 역사를 좌우하는 것이 사람들뿐이라면 항상 일이 그렇게 되겠지요. 그렇지만, 인생과 역사 속에는 사람들만 있는 것도 아니고 또 사람들이 그것을 좌우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 세상에는 절대로 사람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세상을 움직이는 큰 틀이 있는데 그 틀은 언제나 하나님께서 쥐고 계십니다. 그래서, 세상은 사람이 생각하는 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대로 움직여 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생각을 읽고, 그 생각에 맞추어 살아가는 사람이 마지막에 행복하고 영광스러운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의 현재가 어떤가와 상관 없이 말이지요. 


야엘은 별로 보잘 것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저 이스라엘에 세 들어 사는 이름 없는 이방인, 가나안 땅 한 구석에서 텐트를 치고 사는 한 남자의 아내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드보라와 바락에게 야엘을 이렇게 축복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겐 사람 헤벨의 아내 야엘은 다른 여인보다 복을 받을 것이니 장막에 있는 여인보다 더욱 복을 받을 것이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복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우리가 한 일과 전혀 상관없이 우리에게 주시는 복과 우리가 한 일에 따라서 주시는 복이 있습니다. 야엘이 받은 복은 뒤 쪽에 속하는 복이었습니다. 이 복은 그 녀의 특별한 행동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특별한 복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야엘의 어떤 점이 야엘에게 그 특별한 복을 가져다 주었을까요? 


첫번째로 야엘은 항상 자신의 중심을 잘 지킬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비록 자신이 이방인이었고, 자신의 남편은 이스라엘이 아니라 하솔 왕 야빈과 잘 지내는 사이였지만, 야엘은 자신이 겐 족속 사람의 아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던 것입니다. 겐 족속은 아주 오래 전에 모세의 장인 이드로를 따라 가나안 땅으로 이주했고, 항상 이스라엘과 어울려 살았고 하나님께 대한 신의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그런 겐 족속 남자와 결혼을 했고 그렇게 겐 사람이 된 것이지요. 그렇지만 생각해 보면 야엘은 전쟁이 어떻게 되든 별로 상관이 없는 입장에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이기면 그들과 함께 살면 되고, 이스라엘이 지면 지금처럼 적당하게 야빈의 눈치를 보면서 편하게 살면 그 뿐이었지요. 그러나, 야엘은 그런 편안한 길을 가지 않았습니다. 야엘은 이스라엘을 위해서 헌신했고 하나님의 편을 들었습니다. 우리가 이미 살펴 보았듯이 이스라엘 지파 중에도 자신들의 편안함과 안전을 위해서 전쟁에 뛰어들지 않은 지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야엘은 자신과 직접 관련이 없는 일이었는데도, 그 위험한 일에 스스로 뛰어들어 헌신했습니다. 그것은 그녀가 항상 자신이 하나님의 편에 있으며 또 하나님의 편을 들어야 한다는 것을 잊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평상시에 하나님을 입에 달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막상 하나님 위해 결단을 내려야 하는 상황이 되면 슬쩍 발을 빼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야엘은 시스라가 자신을 찾아올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시스라가 찾아와서 도움을 청했고, 그녀는 거의 순간적으로 자신이 해야할 일들에 관한 모든 계획을 세우고 그것을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물을 달라고 하는 시스라에게 엉긴 젖, 그러니까 요즘으로 말하면 크림치즈 같은 것을 주었습니다. 물이나 그냥 우유보다는 훨씬 위장에 부담이 되는 음식입니다. 먼 길을 달려 온 사람이 그런 음식을 배불리 먹게 되면 식곤증을 일으키기가 쉽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그냥 평범한 그릇이 아니라 귀한 그릇에 담아서 주었습니다. 아무 의심도 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리고, 이불로 덮어서 잠들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렇게 해도 시스라가 잠을 자리라는 보장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최선을 다해서 자신이 해야할 일을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꼭 하고자 한다면, 항상 그 일에 대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막상 그 일을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가 찾아와도 그 기회를 놓치기가 쉽습니다. 야엘이 그 짧은 시간에 자신이 해야할 일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실행에 옮겼다는 것은 그녀의 마음 속에는 항상 하나님의 백성이 이방인들에게 수모와 박해를 당하는데 대한 안타까움이 있었으며, 그로 인해 더럽혀 지고 있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슬픈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밖에는 설명이 안됩니다. 아마 그녀는 항상 기도했을지도 모릅니다. 보잘 것 없지만 언젠가는 자신이 이스라엘을 위해,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무언가를 할 기회를 달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그녀에게 기회가 찾아왔을 때에 그녀는 자신이 하려던 그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참으로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하나님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의미있는 일을 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막연한 기대나 마음만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때가 더 많습니다. 의미있는 일을 하려면, 항상 그 일을 마음에 두고 관심을 가지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편을 들고 싶어하는 열정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기회를 알아볼 수 있고,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살릴 수 있습니다. 그럴 때, 그가 하는 일은 크기와 상관 없이 하나님과 교회에 꼭 필요한 의미있는 일이 될 것입니다.


두번째로, 야엘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는데 있어서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마음이 강한 여인이라고 하더라도 남자를, 그것도 장군을 죽이는 일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관자놀이에 말뚝을 박아 죽이는 방법은 아마도 상대적으로 약한 그녀가 찾은 시스라를 죽일 수 있는 가장 확실하고도 쉬운 방법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방법이 쉽고 치명적인 만큼 여인으로써는 실행하기 힘든 방법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녀는 그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자 주저하지 않고 그 일을 실행에 옮겼습니다.  


어떤 일이 의미 있는 일이고 확실히 하나님의 편을 드는 일이라는 생각과 확신이 들면 주저없이 그 일에 헌신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하는 여러가지 현실적인 이유가 얼마든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쉽지 않기 때문에 가치있는 일이고,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특별한 헌신이 필요한 것입니다. 만약 그 일이 아무나 할 수 있는 쉬운 일이라면 그만큼 가치도 없는 일일 수 밖에 없습니다. 야엘은 바로 이런 가치있지만 쉽지 않은 일에 즉각적으로 헌신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야엘에게서 이 두 가지를 보셨고, 그래서 장막에 거하는 모든 여인들 중에서 가장 큰 복을 받는 은혜를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야엘과는 정반대의 길을 걸었던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바로 시스라의 어머니였습니다. 시스라의 어머니는 창가에서 아들이 오기만을 기다립니다. 그런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립니다. 불길한 예감으로 마음이 초조해 졌습니다. 그녀는 말합니다. “그의 병거가 어찌하여 더디 오는가, 그의 병거들의 걸음이 어찌하여 늦어지는가?” 애꿎은 병거, 죄 없는 바퀴 탓만 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지켜보던 시녀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들이 어찌 노략물을 얻지 못하였으랴 사람마다 한두 처녀를 얻었으리로다 시스라는 채색 옷을 노략하였으리니 그것은 수놓은 채색 옷이리로다 곧 양쪽에 수놓은 채색 옷이리니 노략한 자의 목에 꾸미리로다” 늦게 오는 이유가 무슨 일이 있어서가 아니라 이스라엘에게 빼앗은 전리품들이 너무 많아서 그것을 서로 나누고 또 그것을 가지고 오느라고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 대답했던 것입니다. 성경은 시스라의 어머니도 그 이야기에 맞장구를 쳤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결국 어머니의 불길한 예감은 현실이 되었습니다. 시스라는 이미 여인의 손에 목숨을 잃은 후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자신의 욕심대로 사는 사람은 자신만만하고 당당해 보이지만 항시 그 마음에는 불안함이 있습니다. 시스라의 어머니가 보여주는 불안함은 악인과 악한 편에 선 사람들이 본능적으로 가지게 되는 불안함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악인이 불안해 하는 것은 악인은 영원히 잘 될 수 없다는 것을 악인들도 알기 때문입니다. 악인들이 악한 방법이나 자신의 욕심에 집착하게 되는 것은 바로 그러한 불안함을 떨쳐 버리기 위해서 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악함과 탐욕이 커져가면 커져갈수록 그들의 발걸음에 제동을 거시는 하나님의 시점이 가까워 집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그들의 길을 막아서시면 그들은 그 자리에서 갑자기 망하고 맙니다. 


그런데 악인의 멸망은 단순히 그 사람 한 사람의 멸망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와 함께 했던 사람들의 몰락과 수치로 이어집니다. 악인의 악함은 당분간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번성하게 합니다. 그 악인의 곁에서 그와 같은 길을 가는 사람들에게도 눈에 보이는 이익을 가져다 줍니다. 재물이며 명예며 화려함 같은 것들 말이지요. 그러나, 악인이 망하면 그 사람들도 함께 망합니다. 그것은 악한 사람에게 편승하고 그 악의 열매를 함께 먹는 것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똑같이 악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시스라의 어머니는 시스라를 말려야 했습니다.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고 충고하고 눈물로라도 호소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아들이 가져다 주는 채색 옷을 입고, 데려다 주는 여종들의 섬김을 받으면서 아들의 불의한 권력 위에 세워진 고대광실에서 그 악한 영광을 함께 누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아들을 그렇게 허무하고 비참하게 잃었고, 그 자신도 똑같이 몰락의 길을 갈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드보라와 시스라는 노래의 마지막에 이렇게 기도합니다. “여호와여 주의 대적은 다 이와 같이 망하게 하시고 주를 사랑하는 자는 해가 힘있게 돋움 같게 하옵소서” 야엘은 장막에 살았지만 항상 하나님 편이었습니다. 시스라의 어머니는 고대광실에 살았지만 악인에 편에 서 있었습니다. 그래서, 야엘은 돋는 해와 같이 되었고, 시스라의 어머니는 악의 멸망과 함께 쇠락의 길을 걸을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당장은 캄캄하게 보이고 그래서 어둠에 속한 방법이 더 효과적이고 더 쉬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돋는 해가 나타나면 아무리 짙은 어둠도 그 자리를 비켜주어야 합니다. 지금은 고대광실의 영광이 없어도 좋습니다. 지금은 장막에 살아도 좋습니다. 지금은 이름 없어도 괜챦습니다. 항상 하나님의 편을 들기로 작정하십시오. 하나님과 하나님의 교회에 참으로 의미 있는 존재가 되고, 의미 있는 일을 하겠다는 소원을 품고 계속해서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편을 들어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고 우리를 동쪽 하늘에서 어둠을 가르고 떠오르는 돋는 해와 같아지게 하실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순간의 편안함과 영광을 얻고자 하나님 편에 서는 일을 포기하지 않는 의미있는 삶을 선택하는 살아서 돋는 해와 같은 삶을 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성도의 복된 자리를 잘 지키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2. 언제나 하나님 편에 서겠다는 소원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하려는 열정으로 살게 하소서. 
  3. 항상 하나님께서 나를 돋는 해처럼 영광스럽게 하실 날을 소망하며 살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