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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6.10.16. 주일오전 - 피차 복종하라(에베소서 39)





설교본문 : 에베소서 5장 21절




  1. 들어가는 말


지난 주일까지 다섯 번에 걸쳐 우리는 부부관계, 부모와 자녀관계, 그리고 종과 상전의 관계에 대한 에베소서의 말씀을 살펴 보았습니다. 이 중에서 종과 주인의 관계는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지만, 여전히 이 세상에는 어떤 의미로든 위에 있는 사람과 아래에 있는 사람이 있고, 섬기는 사람과 섬김을 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은 경우에 따라 이 쪽이나 저 쪽에 속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모든 말씀들이 오늘 우리들에게 도 여전히 필요한 말씀들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오늘 우리의 상황 속에서 지혜롭게 이 말씀들에 순종한다면 우리의 가정이 달라지고 우리가 사는 세상이 새로워 질 것입니다.  하나 하나 뜯어 보면 어느 것 하나 순종하기 쉬운 것이 없고, 우리 마음을 편하게 해 주지도 않지만 그래도 우리가 이 말씀을 따라 살아가려고 애쓸 때,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내가 살고 싶어하는 그런 모습으로 변해갈 것입니다. 


2. 정리 :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고 성령님의 전이다. 


이제 우리는 에베소서의 마지막 부분만을 남겨 놓고 있는데요. 그래서, 오늘은 우리가 그 동안 지나온 길들을 다시 한 번 되돌아 보고 나서, 그 흐름 속에서 이 말씀들을 정리해 보려고 합니다. 에베소서는 교회에 대한 책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교회를 무슨 이유로 세우셨고, 그래서 교회는 무엇이며 어떠해야 하는지를 에베소서만큼 잘 설명해 주는 책은 없습니다. 에베소서가 교회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로 에베소서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말합니다. 1장 마지막 부분을 설교할 때, 함께 그렸던 그림이 기억나시죠? 한 번 기억을 더듬어 볼까요? 머리는 예수님, 그 머리의 몸은 교회, 그리고 그 사람의 발 밑에는 세상이 있습니다. 이 그림을 떠올리시면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교회를 무엇 때문에 세우셨는지를 쉽게 기억해 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머리이신 예수님과 하나로 묶으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예수님과 교회를 온전한 ‘한 사람’처럼 만드셨습니다. 그것은 먼저 교회가 예수님의 생명과 은혜로 가득 채워지고 그 다음에 그것을 다시 세상에 흘려 보내게 하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교회입니다. 좋은 교회가 어떤 교회인가 하는 질문이 생길 때마다 이 그림을 기준에 놓고서 생각하시면 됩니다. 좋은 교회는 결코 겉모습으로 평가할 수 없습니다. 그 교회가 겉으로 보기에는 정말 부족하고 연약해도 점점 더 예수님으로 채워져 가고 있다면, 그리고 그 예수님의 은혜를 최선을 다해서 세상으로 흘려 보내고 있다면 그 교회는 좋은 교회입니다. 우리가 우리 교회를 정말 좋은 교회로 만들려면 이 두 가지를 잘 하면 됩니다. 먼저 우리 자신이 예수님의 은혜와 생명으로 충만해져 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은혜와 생명을 세상에 전달해 주면 됩니다. 


두번째로 에베소서는 교회를 성령님이 계시는 성전이라고 말합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성도와 교회는 거룩해야 하고 거룩하게 살기 위해서 헌신해야 합니다. 거룩하고 정결하지 않으면 성령님께서 그 안에 계실 수가 없고, 그러면 그 교회는 교회다운 교회가 될 수 없으니까요. 우리는 꼭 기억해야 합니다. 교회와 성도가 죄를 가볍게 생각한다면 절대로 그 안에 성령님께서 거하실 수 없습니다. 그러면 성도는 성도다울 수 없고, 교회는 교회다울 수 없습니다. 다른 것 아무리 잘 해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성령님께서 거하시는 성전답게 거룩해야 하는 이유는 단순히 교회가 성령충만해야 한다는 이유 때문만은 아닙니다.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면서 우리를 힘있게 도와 주셔야 우리가 예수님의 은혜와 생명을 세상으로 풍성하게 흘려 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오늘 이것을 잊고 있는 성도와 교회들이 너무 많습니다. 자꾸 자기 의지로, 자기 힘과 노력으로 무엇을 하려고 합니다. 사람들끼리 의쌰 의쌰해서 표어를 외치면서 세상으로 나갑니다. 처음에는 잘 되는 것 같지만 나중에는 사람 냄새만 풍기고 일은 일대로 아름답지 못합니다. 기독교의 이름으로 생겨나는 단체와 운동들이 시간이 흐르면서 안타까운 모습을 보이는 것은 전부 이것 때문입니다. 성령충만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개인도 그렇습니다. 어디 우리가 거룩하게 살기 싫어해서, 또 세상에 하나님의 은혜를 흘려 보내며 살고 싶지 않아서 그렇게 살지 못합니까? 결심이 없고 마음이 없어서 그 일을 못하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결단도 있고 소원도 있지만 그럴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성령충만하지 않으니까요. 


이렇게 정리가 되겠지요. 하나님께서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 되게 하시고, 또 우리들을 그 몸의 지체로 삼으신 이유는 머리이신 예수님의 풍성한 은혜와 사랑을 세상에 흘려 보내게 하시기 위해서 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일을 하려면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면서 우리를 힘있게 도와주셔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성령충만한 그리스도의 몸이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성도는 그 몸에 속한 성령충만한 지체여야만 합니다. 


그래서 5장 18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술취하지 말고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살아가야 할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삶을 살아갈 수가 없으니까요. 그런데, 성경을 보면 그리고 나서 곧바로 무슨 말씀들이 나옵니까? 성도들이 나누어야 할 성령충만한 교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그 다음에 피차 복종하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런 다음에 마지막으로 우리가 지난 주일까지 살펴 본 성도가 사람들을 대하는 방식에 대한 말씀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3. 성령충만한 성도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달라야 한다. 


성도 여러분, 성도의 성령충만한 모습은 어디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날까요? 은사를 통해서 일까요? 능력을 통해서 일까요? 그 사람이 기도하는 모습을 통해서 일까요? 그 사람의 열정을 통해서 일까요?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그 사람이 실제로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가는 모습, 특히 그 사람들을 어떤 방식으로 대하고 있는가 하는 것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령충만함을 받으라고 말한 후에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어떻게 관계맺고 또 그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에 대한 말씀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것이 성령충만함의 가장 분명한 증거이고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충만한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과 사람과 관계맺고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성령충만한 사람은 이미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는 완전히 다른 마음과 다른 생각으로 살아가는 다른 사람들이니까요. 그래서 5장 22절부터 6장 9절까지 이어지는 말씀들이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방식과는 많이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성경이 지금 그렇게 달라진 사람들에게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 우리는 그것을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지만 이 말씀들은 그 당시 사람들이 말하는 방식과는 정반대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당시에는 어떤 사람들에 대한 말을 하려고 하면 반드시 더 중요한 사람을 먼저 언급하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남편과 아내가 있으면 항상 남편을 먼저 이야기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있으면 아버지를 먼저 이야기했구요. 주인과 종이 있으면 당연히 주인에 대한 이야기가 먼저 등장했습니다. 이 순서를 지키지 않는 것은 그 당시의 상식적인 어법에 어긋나는 굉장히 무례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모든 순서를 완전히 뒤집어서 말했습니다. 남편보다 아내가 먼저 나옵니다. 아버지보다 아들이 먼저 나옵니다. 심지어 주인보다 종이 먼저 나옵니다. 


둘째, 이 모든 말씀들은 관계를 맺고 있는 한 쪽에 대해서만 이야기하지 않고 양쪽 모두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사회는 엄격한 신분사회였습니다. 가정 안에서조차도 위계질서가 너무나 분명했지요. 그리고 모든 관계의 중심은 항상 위에 있는 사람이었고, 짐은 아랫 사람만 지게 되어 있었지 윗 사람은 어떤 짐도 질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것을 완전히 깨뜨렸습니다. 바울은 한 쪽에 대해서만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양 쪽 다 이야기합니다. 아내를 이야기하면 남편에 대해서도 이야기합니다. 자녀들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아버지에 대해서도 이야기합니다. 종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주인에 대해서도 이야기합니다. 양쪽 모두가 서로를 위해서 져 주어야 할 짐이 있다고 말합니다. 


셋째, 가장 충격적인 것은 바울이 그런 짐들을 이야기할 때, 아랫 사람보다는 오히려 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더 까다롭고 무거운 짐을 지우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위에서 아래로 일방통행적인 관계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전혀 짐을 질 필요가 없었던 위에 있는 사람에게 짐을 지울 뿐 아니라 오히려 더 무겁고 지기 까다로운 짐을 지게 한다니, 이런 것은 그 당시는 물론이고 실은 평등을 당연한 권리로 생각하는 지금 이 시대에도 받아들이기가 그리 쉽지 않습니다. 오늘도 사람들이 사는 모습은 똑같습니다. 사회에서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이 그 관계의 주도권을 쥐려고 합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주도권을 쥐게 되면 그 관계를 자기가 의도한 대로 끌어갈 수 있고, 또 그만큼 그 관계 안에서 자신이 짊어져야 하는 의무도 적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또 그렇게 살아가고 있던 사람들을 향해서 정반대의 이야기를 했던 것입니다. 갑도 을도 모두 의무가 있지만, 을보다는 갑이 훨씬 더 무겁고 까다로운 짐을 져야 한다고 말이지요. 


바울은 인간관계의 순서를 뒤집었습니다. 항상 위가 우선이 되는 관계를 아래가 우선이 되는 관계로 뒤집었습니다. 바울은 인관관계의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항상 섬김과 의무가 아래에서 위로만 흐르던 관계를 위에서 아래로도 흐르도록 길을 하나 더 뚫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인관관계안에서 각자가 짊어져야 할 짐을 서로 바꿔 주었습니다. 이제는 아래가 아니라 위가 더 무겁고 더 까다로운 짐을 지도록 했고, 아래는 더 쉽고 가벼운 짐을 지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관계에 있어서 아래와 위라는 위치만 남겨 놓은 채로 모두 뒤집어 엎은 것입니다. 


4. 하나님 나라는 겸손과 섬김의 나라다.


그렇다면 바울은 왜 그렇게 했고, 또 성도들에게 그렇게 살아갈 것을 요구했던 것일까요? 답부터 말씀드리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고, 또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조금이라도 더 하나님 나라를 닮은 곳으로 만들어 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 세 분은 모두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시라는 점에서 전혀 차이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들이신 예수님에게 하나님의 모든 능력과 권한, 심지어는 하나님의 왕좌까지 모두 내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처럼 늙기 때문에 세월에 밀려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자신을 낮추어 예수님을 섬기고 높이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들을 건네 받은 예수님은 그 어느 것 하나 자기 마음대로 하지 않으십니다. 아버지가 하시는 것을 본 그대로, 아버지의 뜻에 따라서 그 뜻에 순종하면서 모든 일을 하십니다. 그렇게 자신을 낮추어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십니다. 그리고 성령님은 하나님과 예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습니다. 이 세상을 향해 파송되고 파견되십니다. 이렇게 해서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을 섬기며 두 분을 높이십니다. 이것이 성부, 성자, 성령 세 분이 서로를 낮추어 서로를 섬기시는 방법입니다. 삼위 하나님께서는  이런 겸손과 섬김 가운데 가장 복되고 기쁜 관계를 누리고 계십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 나라를 좋아하시나요? 그 나라를 소망하면서 사시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왜 그 나라를 그렇게 좋아하고 그 나라가 이루어 지기를 소망하면서 살까요? 우리는 그 나라가 질병이 없고, 아픔이 없고, 슬픔이 없고, 헤어짐이 없고, 상실이 없고, 아무튼 나쁜 것은 다 없는 나라라는 것을 압니다. 이것 때문에 우리가 하늘나라를 좋아하고 또 소망하며 살아가는 것이겠지요. 우리는 지금 여기서 아픔이 있고, 슬픔이 있고, 헤어짐이 있고, 상실이 있는 삶을 살아갑니다. 이런 것들이 우리를 아프고 고통스럽게 합니다. 그래서, 만약 이런 것들만 없다면 우리가 영원히 행복하고 기쁘게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것들이 없어지는 것은 잘 해 봐야 그저 우리가 크게 불행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가 될 수 있을 뿐입니다. 실제로 우리를 기쁘고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것들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서 받아 누리는 선한 선물들입니다. 내가 사랑받고, 인정받고, 용서받고, 귀히 여김을 받고, 섬김을 받는 이런 것들이 우리를 행복하고 만족하게 만들어 줍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살아가는 진짜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 하나도 없을 뿐 아니라, 우리를 정말로 행복하게 해 주는 모든 것들이 전부 있는 그런 나라입니다. 무엇보다도 거기에는 자신을 낮추어 서로를 섬기는 삼위 하나님이 계시고, 또 그 하나님을 닮은 성도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나라를 소망하며 사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혹시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라에서 도대체 무엇을 하며 지내실까 하는 질문을 가져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여러분 생각에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하실까요? 딥다 찬양만 받으실까요? 영광을 받으실까요? 물론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거기서도 여전히 ‘일’을 하실 것입니다. 그 나라를 다스리셔야 하니까요.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나라를 어떤 방식으로 다스리실까요? 권력으로 다스리실까요? 엄격한 법으로 통치하실까요? 저는 확신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나라와 우리들을 다스리시는 방법은 바로 겸손과 섬김이 될 것입니다. 그 때도 삼위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겸손하실 것입니다. 여전히 몸을 낮추셔서 우리들과 피조물들을 사랑으로 섬기실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하나님 나라의 영광스러운 왕이시고. 우리의 왕으로 다스리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 분은 하나님의 자리에서, 그리고 왕의 자리에서 겸손히 우리를 섬겨주실 것입니다. 그 겸손과 섬김이 하나님께서 항상 하나님으로 ‘계시는’ 방식이고 이제까지 변함 없이 이 세상을 구원하고 다스려 오신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그 귀하고 높으신 하나님께서 겸손히 마음을 다해 기쁨으로 우리를 섬겨 주시고, 우리가 그 섬김을 받는다면, 그 겸손하고 사랑넘치는 섬김을 받는 우리는 얼마나 행복하고 기쁜 사람으로 살게 될까요? 그렇게 낮은 마음으로 피조물들을 사랑하시고 돌보시는 우리의 왕을 바라보는 우리의 감격은 또 얼마나 크고 깊을까요? 뿐만 아닙니다. 그 나라에서는 우리도 서로를 섬기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는 서로 잘난 척하고 서로 높다고 고개를 들고서 살았을 지라도 거기서는 더 높은 사람이 더 많이 겸손하고, 더 큰 사람이 더 작은 사람을 섬기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닮고 예수님을 닮은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그 나라에는 하찮은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낮은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작은 사람은 더더욱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모두가 모두를 높여주고 모두가 모두를 섬기는 곳. 그 곳이 바로 하나님 나라가 되고, 그래서 그 나라는 모든 사람이 높임을 받는 그런 곳이 될테니까요. 믿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 나라에만 이런 행복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 나라에 들어가야 하며, 그 나라를 소망하며 사는 것입니다. 


5. 결론 : 성도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그리고 성령님께서 거하시는 성전으로 두셨습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을 힘입어 이 세상에 예수님의 은혜와 생명을 전해주라고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이 세상을 조금이라도 하나님 나라를 닮은 곳으로 회복시켜가라고, 너희들이 살고 싶어하는 그런 세상으로 바꿔가라고 말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고 부탁하신 것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서로 복종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요구하신 이유는 너무나 분명합니다. 겸손과 섬김이 하나님 나라를 하나님 나라로 만들어 줍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은 어떻게 하나님 나라를 닮은 곳으로 회복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서로 복종할 때입니다. 먼저 몸을 낮추어 섬길 때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서로 복종하고 먼저 복종하며, 여기서 하나님 나라를 흉내내며 살아갈 때, 그 때 이 세상은 하나님 나라를 닮은 모습으로 회복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서로 복종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복종은 자신을 다른 사람의 아래로 내려 보내는 것입니다. 복종이라는 그렇게 할 때만 가능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성령님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세 분은 그렇게 복되고 기쁨 넘치게 계실 수 있었고, 그래서 우리는 구원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는 그렇게 소망이 넘치는 곳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이것을 기억하면서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흉내내고, 하나님 나라를 흉내내면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도의 영광은 겸손과 섬김에 있습니다. 성도의 소명도 겸손과 섬김에 있습니다. 성도의 기쁨과 행복도 겸손과 섬김에 있습니다. 한 주간 살아가실 때, 기억하시고 또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열심히 하나님의 겸손과 섬김을 흉내내며 사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이 세상은 하나님 나라를 보게 될 것입니다. 내 삶의 자리가 조금씩 하나님 나라처럼 변해갈 것입니다. 매일의 삶 속에서 마음을 낮추는 섬김과 겸손으로 살아서 이 세상으로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을 흘려 보내며, 섬김과 겸손의 나라에서 큰 자로 섬기는 복되고 영광스러운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내가 먼저 몸을 낮추고 내가 먼저 섬기게 하소서. 그래서 내 삶의 자리가 하나님 나라를 닮은 곳이 되게 하소서. 
  2. 특별히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성도는 하나님 나라의 소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 나라를 그리워 하며 그 힘으로 아름답고 향기롭게 사는 사람들입니다. 나에게 하나님 나라에 대한 넘치는 소망을 주소서. 그 소망으로 가득차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