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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오후

2016.11.27. 전교인 기도회 -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사사기 21)


20161127SE1 (#1).mp3.zip





날짜 : 2016년 11월 27일 일요일

본문 : 사사기 6장 11-26절   


   


밀을 타작할 때가 되었습니다. 기드온도 밀을 추수를 했습니다. 그런데, 기드온은 이상하게도 바람이 잘 부는 넓은 마당이 아니라, 좁아 터진 포도주 틀에서 밀을 타작하고 있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보이는 족족 빼앗고 약탈하는 미디안 사람들을 피하자니 이 방법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추수를 했고 타작을 하고는 있었지만, 추수의 기쁨도 풍성함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의 앞에 갑자기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났습니다. 그리고는 밑도 끝도 없이 이렇게 말합니다.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기드온은 지금 숨어서 밀을 타작하고 있습니다. 잔뜩 기가 죽어서, 그리고 패배감과 하나님에 대한 불만에 가득 차서 말이지요. 그런데, 하나님의 사자가 말합니다. 너는 큰 용사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고 말이지요. 참 좋은 말이었지만 기드온에게는 놀리는 말로만 들렸습니다. 그래서, 기드온은 따져 묻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면, 이런 상황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우리 할아버지들은 맨날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애굽에서부터 해방시켰다고 하는데, 도대체 그 때 하나님은 어디 가셨습니까? 그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셔서 우리가 지금 이 꼴이 아닙니까?” 이것은 그 당시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의 생각이고 또 질문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자는 마치 기드온의 말을 들었는지 듣지 못했는지 다시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가서 ‘이 너의 힘으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 내가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 이야기가 계속해서 서로 겉돕니다. 서로 자기 할 말만 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하나님은 사자를 통해 기드온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원하던 답을 주신 것입니다. 잠깐 앞으로 돌아가 보면 6장 10절 이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말렉 사람들과 동방 사람들 때문에 하나님께 부르짖었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첫번째 응답으로 선지자를 보내셔서 그들에게 말씀을 주셨습니다. 무엇을 잘못했는지,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해야하는지 아주 근본적인 처방을 대답으로 주셨습닏. 오늘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난 것은 그 다음에 주신 하나님의 진짜 응답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을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겠다고 말씀하고 계시니까요. 그런데, 뭐가 문제입니까? 그렇게 살려달라고 부르짖어 놓고서 막상 그들을 구원해 주시려고 찾아가니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미 구원을 포기한 상태로 살아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기드온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그런 영적인 상태를 대표하는 사람이었구요. 기드온은 또 이렇게 반론을 제기합니다. “그래요, 하나님. 내가 간다고 칩시다. 그런데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합니까? 우리 집안은 우리 지파 중에서도 가장 작고, 나는 그 중에서도 가장 형편이 없습니다.” 


 상황이 이런 것이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려 달라고 해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살려주시기로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일을 맡기려고 기드온을 찾아가셔서 ‘내가 너희를 구원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 일을 너에게 맡기기로 했다’고 말씀하신 겁니다. 그런데, 막상 그 이야기를 들은 기드온은 거기에 대해서 시큰둥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구원을 요청한 것은 도저히 자기 힘으로 아말렉과 동방사람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만 생각해야 합니다. 어차피 자기들에게 답이 없으니까요. 그런데, 막상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나타나셔서 이스라엘을 구원할 계획을 말씀하시자 기드온은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서 또 다시 자기 자신을 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람이 오랫동안 해결되지 않은 어려움을 겪게 되면, 자신에 대한 두 가지 일그러진 눈을 가지게 됩니다. 하나는 자기 자신만을 바라보는 집착이요, 또 하나는 그런 자기 자신에 대한 열등감과 평가절하입니다. 기드온은 하나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자기 자신만을 보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자신의 무능함과 자신의 형편만 보았습니다. 없는 것과 부족한 것만 보았지요. 그런데, 실은 그런 상황판단 조차도 정확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 집안을 아주 형편 없는 가정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지만 기드온의 말은 진실이 아니었습니다. 7년 동안이나 수탈을 당했지만 그의 가정에는 여전히 타작할 밀이 있고, 바로 여호와의 사자에게 새끼 염소를 비롯한 제물을 마련해서 드릴 수 있을 정도로 부유한 가정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보게 되겠지만, 이스라엘이 그를 왕으로 삼으려 할 정도로 그는 개인적으로 리더십도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언젠가 기도하는 저 자신 속에 이런 비슷한 모습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부족함을 알고 연약함을 압니다. 나에게 해결책이 없다는 것도 압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도와달라고, 하나님이 답이 되어 달라고 부르짖으면서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런데, 기도가 끝나면 그 뿐입니다. 금새 돌아서는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난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이런다고 뭐가 달라지겠나?’라는 생각에 빠져 버립니다. 저는 이것이 정말 큰 불신앙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나에게 방법이 없고 답이 없어서 하나님께 그렇게 기도해 놓고 또 자기 자신으로 돌아와서 자기만 보는 것 말입니다. 그래서 요즘은 기도하면서 저의 이런 불신앙과 치열하게 싸우고 있습니다. 


우리는 꽤 오랫동안 우리의 영적인 회복과 신앙의 부흥을 위해서, 그리고 성령충만을 위해서 기도해 왔습니다. 우리를 변화시켜 달라고 부르짖어 왔습니다. 너무 귀한 일입니다. 저는 성도가 이런 기도를 드리는 일보다 더 귀한 일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혹시 그 기도를 그저 기도로 끝내지 않았습니까? 하나님께서 이 기도를 들으시고 언젠가 반드시 응답해 주실 것이라는 기대와 소망을 가지는 대신에 다시 침체된 마음으로, 시큰둥한 마음으로 되돌아 가지는 않았습니까? 그렇게 하나님께 부르짖어 놓고서 기도가 끝나면 또 다시 우리 자신만 보면서 이래서 뭐가 될까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우리의 기도에 힘이 실리고 열정이 실리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까? 


저는 분명히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듣고 계시고, 그 기도에 응답해 주시려고 준비하고 계십니다. 우리 교회에 영적인 부흥과 회복을 주시려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계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성품이고 또 하나님의 소원이니까요. 그렇지요? 제 이야기가 맞겠지요?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까요? 우리의 기도는 어떻게 달라져야 할까요? 적어도 그저 기도로 끝인 그런 모습이 되면 안되지 않을까요? 그 기도가 우리의 깊은 소원을 아뢴 것이 맞다면, 그리고 우리에게 방법이 없어서 하나님의 도우심과 긍휼을 구한 것이라면 그 소원을 이루실 하나님의 마음에 우리의 마음을 맞춰가야 하지 않을까요? 


기드온은 그렇게 냉소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런 그를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 네가 미디안 사람을 한 사람 치듯이 하리라” 하나님께는 반드시라는 단어가 필요 없습니다. 말씀이 곧 능력이고 말씀이 곧 현실입니다. 말씀하는 모든 것이 전부 반드시 그 말씀대로 됩니다. 그래서 이런 말을 덧붙이실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반드시’라는 말을 사용하셨을까요? 기드온 때문입니다. 기드온이 계속해서 자기 자신만 보고 현실만 보느라고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있으니 그런 기드온의 눈을 하나님께로 돌리게 하시려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렇지만 기드온은 또 그 말씀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를 얻었다는 증거를 보여달라고 요구합니다. 자기가 들은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증명해 달라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여호와의 사자에게 예물을 드리려고 합니다. 자기가 예물을 가지고 올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말합니다. 기드온은 예물을 가지고 옵니다. 새끼 염소 한 마리를 잡고, 무교전병을 만들고, 고기를 소쿠리에 담고, 국을 양푼에 담아서 가지고 왔습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사자는 고기와 떡을 바위 위에 두고 그 위에 국을 쏟아 놓으라고 말합니다. 기드온은 그대로 했습니다. 사자는 국에 흠뻑 젖은 고기와 떡을 놓은 반석에서 불이 나오게 하여 태워버렸습니다. 


제물은 불에 태워져 하나님께 드려져야 합니다. 그런데, 제물이 흠뻑 젖어 있으면불이 붙지 않습니다. 제물로 드려질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과 기드온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써 자신을 살라 하나님께 드리고 헌신해야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패배의식과 열등감, 냉소주의에 푹 젖어서 스스로를 하나님께 드릴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반석에서 하나님의 불이 나왔습니다. 그리고는 결코 탈 수 없는 국에 젖은 떡과 고기를 순식간에 태워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제물이 될 수 없는 것들을 제물을 제물이 되게 하셨고 또 받으신 것입니다. 반석에서 불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흠뻑 젖은 제물이 불에 태워져 드려질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회복 가능성은 그들 속에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그리고 기드온이 회복되어서 다시 하나님의 백성으로 헌신할 수 있는 가능성은 하나님께 있었던 것입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그 일을 통해서 그것을 알려주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제서야 기드온은 자신이 하나님의 사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음을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곧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자기가 하나님의 사자를 함부로 대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나무라지 않고 기드온을 위로하시고 안심시키셨습니다. 그래서 기드온은 그곳에 단을 쌓고 ‘여호와 샬롬’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그곳은 하나님이 그에게 평화를 전하고, 하나님과 화평하게 된 화평의 장소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기드온은 불평과 불만의 사람, 패배의식과 냉소주의, 열등감의 사람에서 그 안에 하나님의 평강을 담은 사람으로 변화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그 속에 하나님께서 주신 평화를 소유한 사람만이 참된 헌신을 할 수 있습니다. 이 평화가 없으면 언젠가는 흔들리고, 언젠가는 자기 자신이라는 울타리 속에 자신을 가두게 되어, 결국 헌신에 실패하게 되기 때문입닏. 원래 기드온 속에는 평화가 없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면서도 여전히 자기 자신만 보고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이 스스로의 회복의 길로 들어설 때까지 기드온을 나무라지 않고 계속 기다리시면서 그를 설득하셨습니다.  


 우리는 오늘 분문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이 만들어 가신다는 평범한 진리를 배우게 됩니다. 그러나, 이 평범한 진리를 신뢰하는 것이 우리가 신앙생활 하는데 있어서는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우리는 항상 부족합니다. 게다가 열등감과 패배감에 시달리기도 하고, 그것 때문에 냉소적이 될 때도 정말 많습니다. 그래서, 물에 흠뻑 젖은 수건처럼 영적으로 완전히 무기력해지기도 합니다. 또 반대로 우월감과 맹목적인 자기확신에 빠져서 깃털처럼 가볍고 유치한 사람이 될 때도 있습니다. 이렇게 변하기 쉬운 우리가, 이렇게 불안정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워질 수 있습니까? 그 가능성은 우리 안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를 붙들고 계신 하나님께 있습니다. 


현실 때문에, 그리고 자신의 모습 때문에 실망에 빠져 계신 분들이 계시다면, 여러분의 열심이 아니라 이제 하나님의 열심에 자신을 맡겨 보십시오. 기드온에게 찾아가셔서 샬롬을 주셨던 하나님께서 현실과 자신의 모습 때문에 지친 여러분의 마음에도 하나님의 샬롬을 주실 것이고, 여러분을 새로운 헌신 가운데로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지금은 열등감이 있어도 좋고, 지금은 냉소적이어도 좋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부르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꼭 응답하십시오. 그 응답이 하나님께 대한 물음이 되어도 좋고 하나님께 대한 항의가 되어도 좋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계속해서 대화를 나누는 일을 포기하지는 마십시오. 그리고 그 분이 맞거든 그 분께 기꺼이 설득 당하십시오. 그 때 우리는 그 불만스러운 현실을 바꾸는 하나님의 큰 용사가 되는 길에 들어설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분의 손에 의해 활활 타오르는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가 이렇게 하나님께 설득되고 다듬어져서 반드시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며 사는 복되고 든든한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