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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9.07.28. 요한복음 8:12-20 '나는 세상의 빛이니'

 

 

요한복음 8장 12-20절 "나는 생명의 빛이니"

 

날짜 :  2019년 7월 28일 일요일

본문 :  요한복음 8장 12-30절

 

 

    오늘은 우리 모두가 너무나 잘 아는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을 좀 되짚어 보면서 설교를 시작해 볼까 하는데요. 출애굽이라는 사건은, 그 일 자체만 놓고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의 노예생활로부터 풀어 주신 해방의 사건이었습니다. 우리나라의 광복처럼 말이지요. 하지만, 출애굽은 단순히 옛날에 한 번 일어났던 신기하고 놀라운 사건이 아니었습다. 애굽에서 빠져 나오는 과정도 그렇고, 애굽에서 가나안 땅으로 가는 과정도 그렇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 땅을 차지하게 해 주셨던 것도 그렇고… 그 과정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경험했던 모든 일들은 그 이후로 언제나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베풀어 주시는 구원과 은혜를 기억하고 믿고, 또 소망하게 하는 신앙의 고향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특히 그 중에서도 그들이 광야에서 40년 동안 매일 반복해서 경험했던 일들은 너무나도 특별한 것이었는데요. 여러분은 광야생활 하면 어떤 단어들이 떠오르십니까? 아마도 만나, 구름기둥과 불기둥, 그리고 반석에서 솟아 올랐던 물… 이런 단어들이 떠오르실 것 같은데요.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랬습니다. 그들에게 광야생활이란 40년 동안 매일 매일 눈 앞에서 벌어지는 그런 희안한 기적들이 그들의 양식이 되고 삶이 되어주었던 정말 기가 막히는 경험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것 하나 하나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의 은혜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가장 대표적인 언어들이 되었고, 하나님 나라에서 누리게 될 복을 상징하는, 소망의 언어들이 되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유월절과 초막절을 지내면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들은 정말 놀라운 선언이었습니다. 우선 유월절 즈음에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구하는 떡이나 하늘에서 내려왔던 만나가 아니라 내가 너희를 영원히 배부르게 하는 참 떡이고 생명의 떡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초막절 마지막 날 아침에는 내가 너희를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해 줄 생수의 강이라고 하시면서 누구든지 목 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고 하셨지요. 이미 그 말씀들을 뒷바침해 줄 수 있는 충분한 증거들까지 보여주시면서 말이지요.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광야의 은혜들이 자신을 가리키는 예표들이었고 당신은 그 예표들의 성취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초막절을 지킬 때, 7일 동안 매일 아침에 실로암 못에서 금으로 된 항아리로 물을 길어 와서 제단에 쏟아 부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 올 해도 하늘을 여시고 비를 내려 달라고 기도하곤 했습니다. 광야에서 자기 조상들을 40년 동안이나 목마름을 모르고 살아가게 해 주셨던 하나님을 기억하면서 오늘 다시 그 은혜를 내려 달라고 간구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초막절을 지키는 아침 예법이었다면, 밤에는 밤대로 초막절을 지키는 예법이 따로 있었습니다. 밤이 되면 성전 맨 바깥 뜰, 누구나 다 들어올 수 있는 마당에 엄청나게 큰 네 개의 등불이 켜집니다. 그러면 레위지파 오케스트라의 잔잔한 연주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경건하고 선한 삶을 살아온 사람들”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횃불을 손에 들고 밤새도록 춤을 추었습니다. 기록을 보면 그 때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찬란한 불빛이 예루살렘 전체를 아름답게 수 놓았다고 되어 있고, 그 때 그 곳에서 사람들이 누렸던 기쁨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그 곳의 기쁨을 보지 못한 자는 자신의 생애에서 결코 기쁨을 보지 못한 것”이라고 까지 표현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초막절은 그렇게 풍성한 물의 절기인 동시에 찬란한 빛의 절기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요, 성도 여러분, 초막절날 그렇게 성전을 가득 채우고, 예루살렘을 아름답게 수 놓았던 그 빛, 그렇게 사람들을 기쁘게 해 주었던 그 빛은 과연 무엇을 상징하는 것이었을까요? 그들은 도대체 무엇을 마음에 그리면서 밤마다 빛의 축제를 벌인 것일까요? 그것은 광야의 ‘구름기둥과 불기둥’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은혜를 기억하고 영원한 빛이 오실 것을 기대하면서 초막절을 빛의 절기로 만들어 갔던 것입니다. 

    우리가 습관처럼 ‘낮에는 구름기둥과 밤에는 불기둥’이라고 말해왔기 때문에 구름기둥이 따로 있고 불기둥이 따로 있었던 것처럼 생각하기 쉽지만, 성경을 자세히 살펴 보면 그 두 개는 하나였습니다. 낮에는 뜨거운 햇볕으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평범한 구름의 모양으로 있지만, 밤에는 그 구름이 환한 빛으로 가득 채워집니다. 그런 식으로 밤낮으로 이스라엘을 보호하고 인도하는 것. 그것이 바로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정체고 역할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초막절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옛날 자기 조상들을 지켜주고 약속의 땅으로 인도했던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임재를 기억하면서 지금도 똑같은 은혜를 주셔서 자기들을 인도해 주시고 또 영원한 빛의 나라로 이끌어 달라고 기원하며, 밤새 불을 밝히며 춤을 추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렇게 초막절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얼마나 놀랍고 충격적이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그 날, “광야에서 너희 조상들을 지켜주고 인도해 주었던 그 불기둥이 바로 나다, 지금까지 너희들이 그나마 선하고 경건하게 살 수 있었던 것도 내가 너희들의 빛이 되어 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앞으로도 너희들의 영원한 불기둥이 되어 너희를 영원한 빛의 나라로 인도해 줄 것이다.”라고 선포하시면서, 내가 너희 조상들이 광야에서 경험했던 모든 은혜들의 실체이고 완성이라고, 그러니 너희는 이제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 말씀은 복음이었습니다. 참되게 사는 길을 찾고 하나님께로 가는 길을 찾는 사람들,영원한 빛의 나라를 꿈꾸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소식은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말씀은 빛이신 예수님만이 그 길을 비춰주고 인도해 주며, 우리가 다른 길로 벗어나지 않도록 인도해 줄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으니까요. 하지만, 이 말씀이 정말로 복음이 되려면 이 말씀은 진리여야만 합니다. 그렇게 믿을만한 분명한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복된 말씀은 그저 듣기 좋은 빈 소리가 되거나 아니면 최고 최악의 사기가 될 수 있습니다. 그건 결국 또 다른 어둠을 빛이라고 속인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실 예수님의 말씀에는 그 당시 기준으로 보면 그 말씀을 믿기 힘들게 만드는 중대한 결함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 자신만 예수님에 대해서 증언하고 있을 뿐이지 그 누구도 예수님에 대해 똑같은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일이면 중요한 일일수록 한 사람의 말만 믿고 덥썩 믿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래서, 율법도 한 사람의 증언은 유효한 증언이 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었지요. 바리새인들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율법을 꺼내 들고서 “네가 너를 위하여 증언하니 네 증언은 참되지 않다”고 예수님을 공격했습니다. 예수님을 향해서 회심의 일격을 날린 것입니다. 이 덫을 빠져 나가지 못하면 예수님은 오히려 예수님께서 하신 그 말씀 때문에 이단으로, 사기꾼으로 몰릴 지경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도 예수님은 당신이 빛이시라는 것을 나타내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서 그것이 한 사람이, 그것도 자신이 자신에 대해서 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참되지 않다’고 공격했는데요. 여러분이 들으시기에 어떤가요? 이 말이 그럴 듯 합니까? 아마 바리새인들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제는 당신도 빠져 나가지 못할 것이라고 말이지요.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안에 들어있는 어둠을 찾아 들춰 내셨습니다. 여러분, 제가 여러분에게 말이죠. “저는 여러분이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괜찮은 사람입니다.”라고 말했다고 가정해 볼까요? 그러면 이 말이 저의 입에서 나왔고, 저 한 사람의 말이기 때문에 무조건 거짓말이 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뭐 말을 하고 보니 썩 믿음이 가지 않는 말인 것 같기는 합니다만, 그래도 저 한 사람이 저 자신에 대해서 말했다는 것 때문에 무조건 거짓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겁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서로 상관 없는 두 가지를 교묘히 연결시키고, 거기에 율법의 권위까지 섞어 가면서 예수님을 옭아매려고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그런 어두운 속임수에 당하실 분이 아니지요. 예수님은 그들에게 조목 모목 왜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 증언해도 그것이 참된 것인지, 그리고 그 증언이 증언으로써 충분한 자격을 가지는 지를 설명해 주셨습니다. 우선 예수님은 비록 예수님의 말씀이 스스로가 자신에 대해 하는 이야기이지만 그것이 자신이 분명하게 알고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증언이 참되다고 말씀하셨는데요. 사실 이것이 바로 참과 거짓을 나누는 유일한 기준입니다. 참과 거짓을 분별하는데 누가 무슨 이야기를 했는가 하는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실을 말하고 있다면 아무리 말이 안되는 것같아도 그것은 참된 것이 됩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럴 듯하게 들린다고 해도 그것이 사실이 아니면 그것은 거짓이 되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그러니까 당신에 대한 모든 것을 정확하게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자신에 대해 하신 증언은 참됩니다. 하지만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아는 것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니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 대한 말한 것은 참된 것일 수가 없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사실 예수님에 대한 많은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못하겠다는 그들의 결론도 그런 정보들을 바탕으로 해서 생겨난 것이었으니까요. 그들은 예수님이 어디 출신이며, 지금까지 무슨 일을 해 왔고, 어떤 말들을 해 왔는지 그런 것들을 아주 자세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직접 따라다녔고 몰래 아랫사람들을 보내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기도 했으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나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고 있다고 말씀하신 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육체를 따라,’ 그러니까 타락한 세상에서나 통할 법한 순전히 인간적인 판단기준을 가지고 평가하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절대로 그런 식으로 파악할 수 있는 분이 아닌데 말이지요. 

    고린도 후서 5장 16절에서 사도 바울은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사도 바울에게 정말 아프고 힘든 말이었을 것입니다. 그가 그리스도를 육체를 따라, 그저 세상적인 기준으로 보았을 때, 그는 교회를 무너뜨리고 예수님을 핍박하는 사람으로 살았습니다. 하지만, 그가 다른 눈으로 예수님을 보기 시작했을 때, 그는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예수님을 귀하게 여기며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삶의 방향을 180도 바꿔서 예수님을 위해서만 사는 사람이 되었지요. 그가 이렇게 뒤바뀐 것은 그 중간에 그가 경험했던 일 때문이었습니다. 그 때도 그는 교회를 핍박하려고 다메섹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하늘에서 쏟아져 내려오는 강렬한 빛을 만나게 되었지요. 그 때 바울은 당신이 누구시냐고 물었고, 그 때 그 빛 속에서 들려오는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라는 목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바로 이 사건 때문에 그렇게 극적으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요, 성도 여러분. 그 때 하늘에서 쏟아진 빛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그냥 밝은 빛이었을까요?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그 날 빛이신 예수님은 바울을 찾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눈이 멀만큼 강렬하고 찬란한 빛으로 바울을 만나셨지요. 그렇게, 자기만큼은 확실하게 눈을 뜨고 있고, 그래서 그 누구보다도 분명하고 확실하게 모든 것을 보고 있다고 확신했던 바울을 눈 멀게 하지 않으면 절대로 예수님과 세상을 제대로 볼 수 있는 눈이 열리지 않을 것을 아셨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그 날 그렇게 바울을 찾아가셔서 바울의 눈을 어둡게 하신 것입니다. 바울이 육체의 눈이 어두워지고 나서야 예수님을 제대로 볼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은 정말 의미심장합니다. 이 일은 우리에게 세상의 빛과 세상의 빛나는 것들을 보는 우리의 육적인 눈이 어두워져야 비로소 빛되신 예수님을 제대로 볼 수 있는 진짜 눈이 열리게 된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의 증언이 예수님 한 사람의 증언이기 때문에 율법으로 볼 때, 증언으로서의 효력이 없다는 부분으로 넘어가셨습니다. 만약 바리새인들의 말처럼 예수님을 위한 증인이 예수님 한 분 밖에 없다면 예수님의 증언은 결국 율법에 따라서 기각될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에게는 또 한 명의 증인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아버지 하나님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너희 율법에도 두 사람의 증언이 참되다 기록되었으니 내가 나를 위하여 증언하는 자가 되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도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나의 증인이고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시니까 증인이 두 사람이 되고 그러니까 내가 나에 대해서 하는 증언은 참된 증언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자신은 하나님께서 들려주신 말만 하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만 하며, 그래서 나를 보는 것이 하나님을 보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정말로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려는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것을 대번에 알아차릴 수 있다고 말씀하셨지요. 이 모든 말씀들의 요점은 하나입니다. 그것은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아볼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18절에 나오는, 아버지께서 자신을 위해서 증언하신다는 예수님의 말씀도 그런 뜻입니다. 정말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성품을 잘 압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도 잘 알고, 그 분의 말씀도 잘 압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들려주신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들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과 똑같습니다. 성품, 하시는 일, 그 입술에서 나오는 말씀 한 말씀 한 말씀이 자기가 알고 있는 하나님과 똑같습니다. 그러니, 정말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예수님을 당신이 보내신 그리스도시라고 증언해 주는 증인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그렇게 말씀하시는 예수님께 ‘너의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고 묻습니다. 정말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제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너무 답답해서 속이 터져 나갔을 것같아요. 예수님은 계속 영적인 이야기를 하고 하나님 이야기를 하는데, 그들은 계속 육신에 머물러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육체를 따라 듣고 있고 그래서 도무지 자신의 어둠속에서 헤어나오질 못합니다. 참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그리 드물게 일어나는 일은 아닙니다. 빛 가운데 있는 사람과 어둠 속에 있는 사람이 대화를 나눌 때면 늘상 이런 일이 반복됩니다. 빛되신 예수님과 그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 사이에도 이런 일이 반복되고요. 제가 언젠가 어떤 분과 대화를 하다가 참 이상하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제가 계속 설명을 하는데도 그 설명을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말하면 엉뚱한 이야기 하고, 그래서 또 말해 주면 또 다른 말 하고… 그래서 대화가 끝나고 나서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를 생각해 보았는데요. 아무리 생각하고 또 생각해 보아도 제 설명이 어려워서 그런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다 문득 그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관심사에 있었고, 바라보는 눈에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그 분은 제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에는 아예 관심이 없었고, 저와는 다른 세상에 살면서 전혀 다른 것을 바라보시는 분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같은 곳에서 같은 한국말을 사용해서 긴 시간 대화를 나누었지만 차라리 대화를 나누지 않은 것만 못한 형편이 되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그런데, 어쩌면 이런 일이 우리와 하나님 사이, 우리와 예수님 사이에서도 반복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고 하시는 것과 우리가 원하는 것이 달라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들려주시려는 말씀과 우리가 듣고 싶은 말이 달라서, 우리의 관심사와 하나님의 관심사가 너무 많이 달라서 말이지요. 사람들은 자꾸 신앙에 대해서 오해합니다. 신앙을 내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께 받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배를 드릴 때도 내가 원하는 그 것만 받으려고 합니다. 설교를 들을 때도 내가 듣고 싶어하는 메세지만 들으려고 하지요. 물론 우리는 모두 욕구라는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행동을 하고 선택을 할 때는 다 그 욕구를 채우고 싶어 하지요. 하지만, 신앙생활을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는 절대로 내 욕구를 중심에 놓으면 안됩니다. 왜냐하면 신앙이라는 것은 흔히 생각하듯이 내가 원하는 것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 소원이 하나님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나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을 바라는 것이 우리의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단지 하나님이 하나님이시고 우리는 피조물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래서 무조건 우리가 하나님께 복종해야 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완전하시지만 우리는 불완전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시지만 우리는 아는 것이 거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지극히 선하시지만 우리들은 악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한 없이 지혜로우시지만 우리는 어리석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배를 드릴 때마다 우리의 자아를 내려놓고 하나님을 붙드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는 빛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안에는 빛이 없다는 뜻이고요. 그러니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빛이 아닌 우리, 빛이 없는 우리가 빛을 만났으니 어떻게 해야 할까요? 빛이 어둠을 따르는 것이 맞을까요 아니면 어둠이 빛을 따르는 것이 맞을까요? 빛이 어둠에 맞춰줘야 할까요, 어둠이 빛에 맞추어야 할까요? 우리가 예수님께 맞춰가야 할까요, 아니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맞춰 주셔야 할까요? 어떤 것이 이치에 맞고 어떤 것이 정말로 우리에게도 유익하겠습니까? 그리고 우리는 지금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기둥과 구름기둥의 보호와 인도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늘 불기둥과 구름기둥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언제 움직이고 언제 떠오를지 모르는 불기둥과 구름기둥이었지만 늘 그 뒤를 ‘따라’ 움직였기 때문에 결국에는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복을 얻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빛이십니다. 딱 하나 밖에 없는 광야의 불기둥이십니다. 우리를 어둠으로부터 보호해 주시고 영원한 빛의 나라로 인도해 줄 수 있는 것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실제로’ 빛되신 예수님의 보호와 인도를 받으려면 ‘실제로’ 그 분의 뒤를 따라야 합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 안에는 참 빛이 있습니다. 광야의 불기둥이 있습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들은 더 이상 다른 빛을 찾아 해맬 필요가 없습니다. 자기 스스로 빛이 되려고 할 필요도 없고요. 우리는 그 빛을 따라가기만 하면 됩니다. 그 불기둥이 움직이는 대로 움직이면 됩니다. 그러면 어둠에 다니지 않게 됩니다. 빛가운데서 행하며 확실하고 분명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빛 가운데서 살다가 영원한 생명의 빛을 얻게 됩니다. 

    여러분 안에 있는 옛 어둠을 따라 살아가지 마시고, 여러분 안에 있는 밝은 빛을 따라 사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욕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순종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자신의 능력이나 소유가 아니라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께서 나의 아버지 되어 주심을 신뢰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빛을 따라 살아가는 방법이고, 어둠을 벗어나서 영원한 빛의 나라로 들어가는 방법입니다. 저와 여러분 우리 모두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고 하신 예수님의 복되신 초청에 순종하여 늘 빛을 따라, 빛의 나라로 여행하는 빛의 자녀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믿는 자들에게 빛이 되어 주신 예수님께 감사합시다. 더불어 내 안에 여전히 옛 어둠을 고집하며 사는 습관이 있거든 회개하며 이제는 빛되신 예수님만 따르게 하소서 기도합시다. 
  2. 이제는 ‘육체를 따라’ 보고 육체를 따라 판단하는 어리석음을 버리고 내 안에 있는 밝은 빛을 따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예수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게 하소서. 나를 영원한 빛의 나라로 인도해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