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 2019년 9월 29일 일요일
본문 : 요한복음 9장 35-41절
오늘은 지난 주일에 다 살피지 못한 내용이 있어서 거기서 부터 시작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일단 이 이야기는 크게 볼 때, 예수님께서 나면서부터 앞을 보지 못했던 한 맹인을 고쳐 주신 일에 대한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반응을 보여주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요.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에 대한 ‘사실’은 하나이고, 그것을 통해 선포된 ‘진리’도 하나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반응은 제각각이었고 오늘 본문은 그런 반응들을 가감없이 보여주고 있지요. 아마도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물으시는 것 같습니다. 너는 이 사람들 중에서 누구랑 닮아있느냐고 말이지요. 지난 주일에는 그 사람들 중에서 고침받은 맹인의 이웃들과 바리새인들의 반응을 살펴 보았습니다. 우선 그 남자의 이웃과 지인들은 진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고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 적어도 2-30년씩 안식일마다 회당에 가서 성경을 배웠지만 나면서부터 맹인이었던 사람이 고침을 받는 놀라운 일을 보면서도 그저 혼란스러워 하기만 했지요. 두번째 등장인물은 바리새인들이었는데, 이 사람들은 출발부터 잘못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처음부터 어떻게든 예수님을 죄인으로 만들고 예수님이 그 일을 하지 않은 것으로 만드는 것이었으니까요.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이 ‘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었고, 다른 답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답’을 지키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답정너’들이었지요. 이 사람들은 결국 고침받은 남자를 회당에서 출교시켜 버리는 일로 이 일을 마무리하고 맙니다.
우리가 세 번째로 살펴 볼 사람들은 바로 그 남자의 부모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또 다른 이유로 ‘사실’을 ‘사실’이라고 말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것 때문에 예수님을 만나고 참된 진리를 발견하는데 실패하고 맙니다. 아들의 일로 바리새인들이 자기들을 찾자 부모들은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이미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회당에서 출교하기로 결정해 놓은 상태였고, 그들도 그것을 알고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부모들은 미리 입을 맞춘 것 같습니다. 다른 것은 다 있는대로 대답하더라도, 그 아이를 누가 어떻게 고쳤는지에 대해서는 모른다고 잡아 떼자, 그 일은 아들에게 물어보라고 하자고 말이지요.
이야기는 부모들의 예상대로 흘러갔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그 남자를 가리키면서 저 사람이 나면서부터 앞을 보지 못한 그 아들이 맞느냐? 그렇다고 하면 누가 저 사람을 고쳤으며 어떻게 고쳤느냐고 다그쳐 물었지요. 부모들은 그 남자가 나면서부터 앞을 보지 못했던 자기들의 아들이 틀림 없다는 것까지는 확인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그 이상의 이야기는 입 밖에 내지 않았습니다. 행여 예수라는 이름이 자기들 입에서 나올까, 그러면 바리새인들의 심기를 건드리게 될까 겁이 나서 그 이야기는 아들에게로 떠 넘겨 버렸던 것입니다. 부모였기 때문에 그 내용을 모를 리가 없었지만 그렇게 둘러대고 만 것입니다.
그 당시 회당에서 출교당한다는 것은 요즘 교회에서 출교당하는 것 하고는 완전히 다릅니다. 사회 전체가 하나의 교회와도 같았던 유대사회에서 회당에서 출교를 당한다는 것은 사실상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였지요. 그런 점에서 보면 그 남자의 부모들의 이런 행동을 쉽게 나무랄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들이 꼭 이렇게 해야만 했느냐 하면 그건 아닙니다. ‘우리가 그 일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예수라는 사람이 이러 저러하게 우리 아이의 눈을 고쳐 주었다고 하더라’라는 정도의 대답은 충분히 내놓을 수 있었고, 또 내놓아야 했습니다. 그게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것도 아니고, 아들의 눈을 고쳐준 사람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니까요. 하지만, 그들은 두려웠습니다. 현실적으로 감당해야 할지도 모를 고통과 불이익이 너무 두려웠지요. 그래서 그렇게 자기들은 모른다고, 그러니 당사자한테 물어보라고 어떻게 보면 그 불쌍한 아들에게 그 짐을 죄다 떠 넘겨 버렸던 것입니다. 그것이 결국 그들에게서 예수님께로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귀한 기회를 빼앗아 버리게 되었고 말이지요.
그 날 부모들은 대놓고 예수님을 부인하거나 사실을 사실이 아니라고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그저 잘 모른다고만 했을 뿐이지요. 그런데, 그 일이 결국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발로 차 버린 결과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도 살다보면 그런 순간을 만납니다. 말로 혹은 행동으로 내가 믿는 진리를, 그리고 예수님을 시인하고 표현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하려고 하면 예상되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것이 때로는 금전적인 손해가 될 수도 있고, 사람들의 냉소나 따돌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말로 풀어볼 수 없는 오해가 될 수도 있지요. 그리고, 이런 어려움들은 절대로 작다고, 별 것 아니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어려움과 도전들 덕분에 우리는 우리 믿음의 진짜 모습을 확인할 수 있고, 또 영적으로 성장해 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이라는 것은 우리가 믿는 바에 대해 헌신할 때, 확인되어지고 또 더 분명해지고 단단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이런 도전에 대해 너무 쉽게 우리의 믿음을 양보한다면 우리 믿음은 거기서 주저앉고 뒷걸음질 치게 됩니다. 이 세상은 우리 믿음의 연병장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힘들게 하는 도전들은 그 연병장에서 우리를 강하게 훈련시켜 주는 장애물들입니다. 그 장애물들을 넘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믿음의 체력과 전투력이 커져갈 수 있습니다.
그 남자의 부모들은 아마 자기 아들도 자기들처럼 적당히 둘러대 주기를 바랬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모든 가족이 ‘안전’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아들은 그런 부모들을 실망시켰니다. 아들은 사실을 있는 그대로를 말하고 자기를 고쳐 준 사람의 편에 서기를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이 남자의 이야기는 처음부터 단 한 번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일관성이 있고 분명했고, 단순하고 단호했지요. 예수님이 자기 눈에 진흙을 발라 실로암 연못에 가서 씻게 하였고 그래서 자기가 앞을 보게 되었다는 것. 그것이 그의 한결같은 증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렇게 자기를 고쳐 준 사람에 대한 자기의 생각을 밝히는데 전혀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그는 일단 사실을 사실로 이야기하는 일에 있어서는 물러서지 않습니다. 있는 그대로만 증언합니다. 바리새인들이 협박을 하면서 자기들 편을 들라고 요구할 때도, 자신이 예수님 때문에 다시 보게 되었다는 사실만큼은 절대로 양보할 수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결국 계속 뻔한 사실을 모르는 척 발뺌만 하는 바리새인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예수님의 편을 듭니다. 예수라는 분이 나면서부터 앞을 보지 못했던 나를 고쳐 주었는데, 그 사실 하나만봐도 그 분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것만큼은 틀림 없는데 왜 그걸 모른다고 하느냐고 말이지요. 그는 그렇게 자기가 아는 것을 모른다고 할 수 없어서, 그리고 자기가 본 것을 보지 못했다고 말할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그 남자는 그렇게 하면서 점점 더 예수님에게로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습니다. 물론 일부러 그렇게 하려고 해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니었지만, 그가 계속해서 ‘사실’을 사실이라고 말하는 동안에 그는 예수님에 대해서 더 많이 정직하게 생각하고, 또 예수님에 대해서 정직하게 증언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던 겁니다. 그것도 자기 자신의 ‘안전’과 ‘편안함’을 걸고서 말이지요. 처음에는 이 남자도 예수님을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정도로 예수님에 대해서 거의 아는 것이 없었지요. 그런데, 바리새인들로부터 두번째 질문을 받았을 때는 “예수님은 선지자”라고 말했고, 마지막으로 회당에서 쫓겨나기 직전에는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큰 선지자가 분명하다고까지 말할 수 있었습니다. 이 남자는 그렇게 자신의 부모들이 걸어갔던 길과는 정확하게 반대방향으로 난 길을 따라 예수님을 향해 나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제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발견하게 된 신앙의 원리들이 있었습니다. 저에게는 정말 값진 선물이었지요. 충분하지는 못해도 저는 그렇게 깨닫게 된 신앙의 원리들 덕분에 지금까지 이렇게 믿음의 길을 걸을 수 있었으니까요. 우리는 저마다 자기 입장이 있고 자기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꼭 지켜내고 싶어하고 내려놓기 힘들어 하는 것이 있지요. 내가 더 편을 들고 싶어하는 쪽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를 믿는 우리들, 진리를 찾는 성도들에게는 이런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정직함’입니다. 내 의견이 어떻게 내 취향이 어떻든, 내 약점이 어떻고 또 내가 입장이 어떻든, 또 내 이익이 어떻든 진리 앞에서는 그런 것들을 앞세우지 않을 수 있는 정직함, 바른 것에 대해서는 예라고 말하고 그렇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아니요 할 수 있는 ‘단순한 정직함’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정직함이 없다면, 우리는 예수님께로 다가갈 수 없습니다. 진리를 향해 가까이 갈 수 없습니다. 이 정직함이 없으면 주님의 예스에 우리의 예스를 더할 수 없고, 주님의 노에 우리의 노를 덧붙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마음과 생각을 멀리다 두고서 예수님과의 거리를 좁힐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 남자는 예수님에 대해서 예스라고 해야 할 것에는 반드시 예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조금씩 조금씩 예수님께 다가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남자는 그렇게 예수님에 대해서, 그리고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에 대해서 ‘정직’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자기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 지 잘 알고 있으면서도 말이지요. 그렇게 해서 그는 회당에서 추방을 당하게 되었던 것이고요. 그런데요, 성도 여러분! 그 때 그렇게 쫓겨난 남자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지요? 그렇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그 남자를 찾아가셨습니다. 그리고는 당신이 메시야시라는 것을 알려주시고, 그 사람에게 예수를 믿는 믿음을 선물해 주셨습니다. 여러분도 눈치를 채셨겠지만, 예수님께서는 처음에 이 남자의 눈을 고쳐 주신 다음에는 이 이야기의 무대에서 뒤로 빠져 계셨습니다. 그러니까 이 모든 일들이 예수님이 계시지 않은 상황에서 예수님과 상관 없이 이루어진 일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치 소동을 일으키고 살짝 숨어버린 장난꾸러기 같아 보이는데요. 그러면 그 동안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하셨을까요? 저는 예수님께서 기다리셨다고 생각합니다. 그저 지켜보고 계셨고요. 사람들이 모두 예수님에 대해서 반응을 내놓을 때까지 말이지요. 그러다가 예수님은 드디어 그 남자를 찾아가신 것입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그 모든 사람들 중에서 그 남자만이 눈을 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남자만이 예수님을, 자기 같은 죄인들을 위해 세상에 오신 구세주를 볼 수 있는 시력을 되찾았기 때문입니다.
그 남자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고 절을 한 다음, 예수님께서는 갑자기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은 이 세상의 빛으로 오셨습니다. 어둠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빛을 주시기 위해서, 빛 가운데서 살아가게 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 남자의 눈을 고쳐 주신 것은 바로 그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한 것이었고요. 그런데, 이제 그 빛이 무슨 역할을 합니까? 심판자의 역할을 합니다. 빛은 너무나 좋은 것인데, 이 빛이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가 된다고 하니 참 이상하게 생각되기도 하지만, 사실 빛은 빛이기 때문에 결국에는 심판하는 역할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빛이 비춥니다. 그 빛을 받아들이면 그 사람은 볼 수 있게 되고 빛 가운에서 살아가는 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빛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어떻게 되지요? 그러면 그 사람은 여전히 꼭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는 상태에 있게 되고, 결국 더 깊은 어둠 속에서 살게 됩니다. 그러다가 영원한 어둠 속에 갇히게 되고 말이지요. 그러니 이 세상의 구원이 되기 위해서 빛으로 오신 예수님은 같은 이유로 당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심판이 되실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그렇다고 해도 예수님은 그 심판에 대해서 조금 이해하기 힘든 말씀을 하십니다.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라고 말이지요. 보지 못하는 자들을 보게 하신다는 말씀은 충분히 이해가 가지만 그렇다면 보는 자들을 맹인으로 만든다는 말씀은 무슨 뜻인지 고개가 조금 갸우뚱거려 지지 않습니까? 하지만, 우리가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가까이 지낸다고 시비를 거는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께서 해 주셨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라고 하신 그 말씀을 생각해 보면 이 말씀의 의미도 금새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건강한 사람이 없습니다. 의인이 없지요. 그것이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판단입니다. 그렇다면 여기 건강한 사람은 누구이고, 의인은 또 어떤 사람일까요? 건강한 사람은 실제로는 병이 들었는데 자신은 그걸 모르는 사람입니다. 의인은 실제로는 죄인인데 자신이 그런 줄 모르는 사람이고요. 오늘 본문에 나오는 ‘보는 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정말로 보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사실은 눈 먼 사람인데 눈을 뜨고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입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바리새인들처럼 말이지요.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서 “그렇다면 우리도 맹인이라는 말인가?”라고 기분 나빠한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의 뜻은 알아들었지만, 스스로가 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전혀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눈을 뜨고 있고, 그래서 볼 수 있다는 것은 그 사람 안에 빛이 있다는 뜻입니다. 이런 기준에서 본다면 바리새인들은 자기 안에 이미 빛이 있다고 믿고 있었던 사람들이 되겠지요. 그런데, 이렇게 자기가 빛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할 수 없는 일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 안에 있는 빛이 아닌 다른 빛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대화를 하다보면 이야기가 안 통하는 사람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참 답답해 지고 당황하게 되지요. 우리 입장에서는 도무지 그런 사람들을 이해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사람이 그렇게 된 이유는 아주 단순합니다. 그 사람은 이미 자신이 빛을 가지고 있는데, 그 빛만을 진짜 빛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른 빛을 받아들이지를 못하니까 그렇게 말이 안 통하는 사람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성도 여러분, 그거 아십니까? 이 세상에 자기 안에 원래부터 빛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없습니다. 한 사람도 없습니다. 원래 모든 사람들은 어둠 속에서 태어나 어둠 속에서 살아가고, 그것은 이 세상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자신의 바깥으로부터 빛을 받아야 합니다. 그것이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말의 의미이니까요. 그렇다고 한다면, 자기 안에 이미 빛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정말 큰 일 난 것 아니겠습니까? 사람은 바깥에서 빛을 받아들이지 않는 한, 빛을 가질 수가 없고, 빛을 가지지 못하면 볼 수도 없는데, 이런 사람은 빛을 받아들일 수가 없으니까요.
자기 안에 빛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빛되신 예수님을 온전히 영접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빛이신 예수님이 찾아오면 그 빛을 자기 안에 있는 빛과 경쟁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다고 하는 자들은 예수님을 만나면 눈이 멀어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자기 안에 빛이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 그래서 자신이 앞을 보지 못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예수님이 찾아오시면 예수님을 마음을 다해 영접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은 절대로 빛을 만들어 낼 수 없고, 그래서 그 빛이 아니면 눈을 뜰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만나면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다시 보게 되는 은혜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우리도 맹인이라는 말인가?’라고 물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어떻습니까? 우리도 맹인입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이 없으면,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진리를 통해서 세상을 보지 못하면 보아도 보지 못하는 맹인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보게 되었습니다. 빛되신 예수님을 영접했고 우리 안에 빛을 받아들였으니까요. 하지만 그것은 완성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우리의 눈은 한 번 빛을 받아들였다고 해서 대번에 모든 것을 전부 다 밝고 완전하게 보게 되는 것은 아니니까요. 우리는 계속해서 예수님께서 우리의 빛 되어 주시는 은혜 안에 살아가야 합니다. 진리의 말씀 안에서 점점 더 밝게, 그리고 점점 더 많이 보게 되는 은혜를 덧입어야 합니다. 그래야 이 혼탁한 세상을 바르게 볼 수 있고, 혼란스러운 나의 인생과 우리 주님을 분명하게 바라보며 살아갈 수 있으니까요.
그 남자는 ‘네가 인자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사람이 인자다’라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내가 믿습니다’라고 고백하며 무릎을 꿇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만났다면, 빛되신 주님을 영접했다면 우리도 늘 예수님께 믿음을 고백하며 그 분 앞에 내가 가진 모든 것의 무릎을 꿇게 해야 합니다. 내 안에 있는 그 희미하고 알량한 빛과 주님께서 우리에게 비춰주시는 진리의 빛을 경쟁하도록, 그래서 내 빛이 주님의 빛을 이기도록 내버려 두면 안됩니다. 그러면 늘 우리는 눈을 감고 있는 사람이 되고 마니까요.
우리가 요한복음 9장을 통해 예수님에 대한 사람들의 다양한 반응을 보았습니다만, 그 중에 우리가 예수님께 보여드려야 할 반응은 딱 하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믿는 겁니다. 예수님을 우리의 구주로 영접하고 예수님의 빛 아래 우리가 빛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무릎꿇게 하는 것. 나의 경험, 나의 판단, 나의 생각, 나의 가치, 나의 목표… 이 모든 것들을 예수님의 빛으로 다시 비추임을 받는 것 말입니다.
오늘도 우리 주님은 우리 가운데 빛으로 계십니다. 이 말씀의 빛으로 우리의 어둠을 몰아내고 계십니다. 우리는 그 어떤 것도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빛, 그 분이 비춰 주시는 진리의 빛이 들어오는 일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내 안에는 빛이 없음을 겸손하게 인정하고 예수님의 빛 아래에 우리의 어둠을 하나 하나 절하게 해야 합니다. 그것이 유일하게 눈이 먼 우리, 여전히 희미하게 보는 우리가 우리의 눈을 밝아지게 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역할이니까요.
저와 여러분 우리 모두가 날마다 정직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께 나아가 그 분의 비춰주시는 은혜 가운데, 더 밝고 찬란한 빛을 닮은 삶을 살게 하시는 은혜를 누리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을 알게 하신 은혜에 감사드립시다.
- 진리 앞에 겸손하고 정직한 마음을 주소서.
- 나의 빛, 내가 빛이라고 믿는 모든 것들을 주님 앞에 내려놓고 주님을 경배하게 하소서. 혼탁하고 혼란스러운 이 세상에서 빛을 보며 빛을 따라 살아가는 은혜를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