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본문을 살펴 본지가 꽤 오래되어서 우리 모두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요한복음 6장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거기는 예수님께서 초막절 마지막 날에 성전 마당에서 ‘누구든지 목 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오리라’라고 말씀하시는 장면이 나오고, 거기서 조금 내려오면 요한복음 8장에는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리라”라고 말씀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초막절에 성전에서 이런 말씀들을 하신 이유는 이 절기가 물과 빛의 절기였기 때문입니다. 해마다 초막절이 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람도 이 세상도 목마름과 배고픔이 없는 은혜를 구하고, 초막절에 그들은 어둠 속에서 자기들을 인도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 절기에 성전에 서서 내가 바로 세상의 배고픔과 갈증을 해결해 영원한 샘물이며, 세상의 빛이라는 것을 알려 주셨던 것입니다.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에게 새로운 삶을 주시고, 나면서부터 눈 먼 남자를 고쳐주신 것은 예수님이 정말로 그런 분이라는 증거였고 말이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예수님은 이 세상의 마르지 않는 샘물, 샘의 근원으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참으로 예수님을 만나는 사람들은 목마르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이 세상 그 무엇으로도 없앨 수 없앨 수 없어, 죄를 지어서라도 없애보려고 했던 그 깊은 갈증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오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또한 이 세상의 빛으로 오셨습니다. 우리가 그 분을 만나면 우리는 빛을 가지게 됩니다. 어둠은 사라지고, 보지 못하던 것들을 보게 되며, 희미했던 것들이 분명해 지는 은혜를 얻습니다. 무엇보다도 늘 빛되신 예수님의 인도를 받으며 빛 가운데 살게 됩니다.
사람들이 늘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목마름과 배고픔, 그리고 어둠과 혼란 속에서 살아가는 이유는 아주 단순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양들’이기 때문입니다. 아마 ‘양떼’를 생각할 때, 기분이 상하시는 분들은 없을 것입니다. 그 동글동글하고 귀여운 겉모습, 새하얀 양털, 착하고 순진한 큰 눈, 그리고 넓은 들판에 점점이 흩어져서 풀을 뜯고 있는 양떼의 모습…. 이런 것들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양의 이미지이니까요. 하지만, 실제로 양들은 그렇게 낭만적이기만한 동물들이 아닙니다. 양들은 시력이 무척 약합니다. 방향 감각도 전혀 없지요. 자기 능력으로는 쉴만한 물가도 못 찾고 푸른 초장도 찾지 못합니다. 또 고집은 얼마나 센지 그냥 내버려 두면 큰 일 납니다. 고집스럽게 가고 싶은 데로 가다가 길을 잃어버립니다. 그래서 양들에게 꼭 필요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목자’입니다. 양들은 목자가 있어야 물을 얻을 수 있습니다. 목자가 있어야 꼴을 얻을 수 있지요. 목자가 있어야 길을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고, 안전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렇게 시작되는 시편 23편은 정말 은혜롭고 아름다운 시편입니다. 이 시편만큼 우리가 하나님의 양으로 살아가면서 누리게 되는 복과 은혜를 잘 그려내는 말씀은 없지요. 하지만, 만약 이 시편에서 하나님이 빠져 버리면 양들은 어떻게 될까요? 그래도 양들이 정상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조금 지장은 있겠지만 그래도 그럭저럭 지낼 수 있겠습니까? 아닙니다. 목자가 없으면 양들은 목자 없는 양이 되고 맙니다. 그러면 양들은 먹을 것을 찾을 수 없습니다. 마실 물을 얻을 수도 없지요. 고집만 부리다가 이리가 들끓는 거칠고 매마른 광야로 들어가게 됩니다. 목자가 없다는 것은 양들에게는 언제 생명을 잃을지 모르는 상태가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초막절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물과 빛의 절기였을 뿐 아니라 참된 지도자를 기다리는 절기가 된 것은 절대로 우연이 아닙니다. 양들에게는 목자가 물이고 빛이며,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내가 선한 목자이고,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예수님께서 초막절의 마지막 말씀으로 이 말씀을 주셨는지 아시겠지요?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양떼의 물과 양식이시고, 양떼의 빛이십니다. 없으면 안되는 양들의 지도자이시지요. 그래서, 주님은 이 말씀을 초막절의 마지막 말씀으로 주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볼 때는 본문 말씀이 두 가지 다른 내용을 담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는 목자되신 예수님에 대한 비유이고 또 하나는 양의 문이 되시는 예수님에 대한 비유처럼 보이니까요. 하지만, 사실 이 두 개의 비유는 전부 다 ‘목자’에 대한 비유입니다. 뒤에 살펴 보겠지만 이 ‘양의 문’이라는 것 또한 산악지역에 사는 목자들의 중요한 역할을 가리키는 말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함께 살펴 볼, 첫번째 비유의 무대는 평야지대에 사는 한 마을 사람들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양의 우리인데요. 이 우리는 나무로 울타리가 둘러져 있고, 그 한 쪽에 양 우리의 문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우리 안에는 그 마을에 사는 모든 사람들의 양이 함께 들어 있습니다. 낮이면 각자가 자기 양들을 돌보다가 밤이 되면 이렇게 한 우리에 모든 양떼들을 몰아 넣게 되지요. 그리고 밤 동안 양떼를 지킬 문지기를 한 명 고용하는데, 이 문지기의 역할은 아침에 목자들이 올 때까지 그 양떼들을 보호하는 것이 이 문지기의 역할입니다. 도둑이나 강도가 훔쳐가거나 엄한 사람이 데리고 가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지요. 밤이 지나고 아침이 되면 어김 없이 목자가 옵니다. 이 목자는 도둑이나 강도가 아니니까 밤이 아니라 아침에, 울타리를 넘어서 오지 않고 당당하게 문으로 오는데요. 문이 잠겨 있으니 목자는 문지기를 부릅니다. 그리고 문지기는 목자의 목소리를 듣고 울타리의 열어 줍니다. 하지만, 목자는 그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저 바깥에서 자기 양들을 부릅니다. ‘점박아, 누렁아, 까맹아, 흰둥아, 짝눈아, 아름아, 밉상아, 고집아, 순딩아, 삐딱아, 삐돌아, 무심아, 소심아, 유진아, 현우야, 인덕아…’ 하고 말입니다. 그러면 참 희안하지요? 그 목자의 양들이 하나 하나 자기를 부르는 소리를 듣고서 목자에게로 나옵니다. 그러면 목자는 터덜 터덜 콧노래를 부르며 양떼들을 이끌어 갑니다. 이것이 그 우리 앞에서 아침마다 반복되는 흔한 풍경인데요. 그런데, 이렇게 똑같은 풍경이 아침마다 반복되려면 실은 두 가지 조건이 맞아 떨어져야 합니다.
첫째, 목자가 양을 완벽하게 알고 있어야 합니다. 자기 양이 수 백마리가 된다고 해도 그 양의 이름 하나 하나를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부르는 소리를 듣고 자기에게로 오는 양이 자기 양인지 아닌지 정확하게 구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새하얀 양 두 마리가 동시에 달려오더라도 어느 게 자기 양인지, 또 두 마리가 다 자기 양일 때에는 어느 놈이 어느 놈인지 정확하게 구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자기 양을 빼먹고 엄한 양 데리고 가지 않을 테니까요. 어떨 것 같으세요? 과연 목자들에게 정말로 그런 능력이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목자들에게는 그런 능력이 있습니다. 지금도 그렇다고 합니다. 중동지방의 목자들은요. 아무리 많은 양들이 섞여 있어도, 물체가 정확하게 분간되지 않는 어르슴한 저녁에도 자기 양들을 멀리서 다 구분해 낸답니다. 그 정도로 양을 잘 알고 있으니 목자의 입장에서는 울타리 바깥에서 자기 양의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것입니다. 목자가 양을 알아보지 못하거나 자기 양을 빼먹을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양들이 주인의 음성을 다른 사람의 음성과 정확하게 구분할 수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목자가 자기 이름을 부를 때, 그게 자기를 부르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엉뚱한 사람을 자기 주인으로 알고 따라가지 않을테니까요. 앞에서 양떼들은 시력이 굉장히 나쁘다고 말씀드렸는데요. 그대신에 양들은 청력이 기가 막히게 좋답니다. 작은 소리도 잘 들을 뿐 아니라 이 소리와 저 소리를 구분하는 능력도 굉장히 뛰어나지요. 아무리 자기 이름을 불러도 그게 주인이 자기를 부르는 소리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을 부르는 것인지를 구분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양들은 언제나 자기 목자의 음성을 듣는 일에는 실패하지 않는 것입니다.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정말 아름답고 평화롭지 않습니까? 만약 우리가 그 동네로 가서 아침에 그 광경을 지켜 본다면 너무나 신기해서 눈이 휘둥그레질 것입니다. 물론 행복한 마음은 덤이고 말이지요. 그런데요. 놀랍게도 이것은 남 이야기가 아닙니다. 주님은 이것이 바로 우리 주님과 성도들의 관계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은 우리를 아십니까? 잘 알고 계신가요? 얼마나 잘 알고 계시지요? 예수님은 우리의 ‘이름’을 알고 계십니다. 우리를 뭉뚱그려서 알고 계신 것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 우리 각자를 알고 계십니다. 그런데 이 이름은 목자되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붙여주신 이름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목자이시고 우리는 그 분이 기르시는 양이니까요. 요한계시록 2장 17절을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저는 이 구절을 정말 좋아합니다. 이 구절을 생각할 때마다 저는 빨리 주님을 만나서 그 돌을 받고 싶어 집니다. 그 돌에 새겨져 있는 저의 이름을 보고 싶어지지요. 그런데, 이 말씀은 마지막으로 그렇게 말합니다.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그 돌에 새겨져 있는 이름은 지금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우리의 이름인데도 말이지요. 나중에 흰돌을 받아야만 그 이름을 볼 수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름 안에는 그 동안 믿음으로 살아간 우리의 모든 이야기가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 인생과 신앙의 모든 스토리가 끝날 때까지, 그렇게 그 돌을 받을 때까지 우리도 그 이름을 알 수가 없지요. 주님은 이미 다 알고 계시지만 말이지요. 주님이 우리의 이름을 아신다는 것, 하나 하나 알고 계신다는 것, 그리고 그 이름으로 우리를 부르신다는 것은 그 분이 우리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시며, 우리 각자 각자를 돌봐 주신다는 뜻입니다.
설교자로 섬기는 사람들은 다 그런 경험을 합니다. 성도 여러분, 설교라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지 모릅니다. 설교자는 한 사람입니다. 그러니 설교도 하나일 수 밖에 없지요. 그런데, 성도들 각자가 그 하나의 설교로부터 모두 자신에게 필요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너무나 엉뚱한 말씀을 들었다고 고백하시는 바람에 내가 도대체 오늘 무슨 설교를 했는가 싶어 당황스럽고 낙심될 때도 있지만 말이지요. 그러면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요? 그것은 주님이 우리의 이름을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이름으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부르시고 우리 각자에게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배를 드리면서 귀에 잘 들리지 않는 설교라도, 썩 관심이 가지 않는 말씀이라도 절대로 소홀히 하면 안됩니다. 바로 그 설교를 통해서 주님이 나의 이름을 부르며 나를 불러내고 계실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목자이신 우리 주님이 우리의 이름을 아신다면 그 분의 양들인 우리는 주님의 음성을 압니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의 이름을 부를 때, 우리는 그것이 나를 부르는 우리 주님의 음성인 줄을 알고 그 음성에 반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당신의 양들의 이름만 아시고, 또 그 이름만 부르시듯이, 그 분의 양들 또한 예수님의 음성만 알고 주님의 음성에만 귀를 기울입니다. 다른 음성에는 절대로 반응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음성은 ‘알지 못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부를 때는 도망쳐 버립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우리가 주님을 아는 방식입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의 이름만 아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주님을 어떻게 압니까? 주님의 음성으로만 알고, 주님의 음성만 압니다. 그리고 주님의 음성에만 반응합니다. 목자와 양, 우리와 우리 주님이 이런 식으로 서로를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주님과 우리들의 관계 안에서 안전하고 평안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과 우리들 사이의 관계도 인격과 인격 사이의 관계인지라 우리가 이 관계 안에서 평안하고 안전하게 머물러 있으려면 이 관계는 일방통행이 아니라 쌍방통행이어야만 합니다. 사실 주님은 이미 그것을 전제하고 계시는데요. 그래서, 주님은 내가 내 양의 이름을 알고 있듯이, 내 양은 나의 음성을 ‘알아야만 한다’고 말씀하시는 대신에, 내 양은 나의 음성을 ‘알고 있고’, 내 음성에만 반응한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인간관계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많이 살펴 보았는데요.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서 발견하게 된 인간관계의 원리가 몇 가지 있었습니다. 첫째, 인간관계의 깊이와 친밀함은 함께 지낸 시간에 비례합니다. 그 시간을 뛰어 넘어설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십년 지기 친구와 일 년된 친구가 똑같이 친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게 더 중요한데요. 둘째는 어떤 관계가 의미가 있는 관계가 되려면 반드시 그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이 그 관계를 위해 의도적으로 노력하고 헌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노력과 헌신이 없으면 그 관계는 아무리 함께 보낸 세월이 많아도 그다지 의미있는 관계가 되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사람들 사이의 관계 뿐만 아니라 주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어떤 사람의 신앙이 더디 자라는 이유, 수십년이 지나도 제 자리인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그것은 그 사람의 신앙이 그 사람에게 별다른 가치와 의미를 지니지 못하는 이유도 그렇지요. 그것은 그 사람이 예수님과 자기 사이의 관계를 위해서 별다른 헌신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끊임 없이 그 관계를 위해 헌신하고 계시는데 말이지요.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과 예수님의 양들을 묶고 있는 것은 바로 ‘음성’입니다. 양들을 부르는 목자의 음성이지요. 이 음성이 없다면 예수님과 양들 사이에는 아무 일도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결국 이 음성이 예수님과 우리들 사이의 관계를 만들고 세워가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음성’으로 우리의 ‘이름’을 부르실 때, 우리가 그 ‘음성’을 알아듣고 반응할 수 있어야만 주님과 우리 사이, 우리와 주님 사이가 특별하고 친밀한 관계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음성’이 과연 무엇일까요? 예수님이 이 ‘음성’으로 양들의 이름을 부르신다는 말씀은 도대체 무슨 뜻일까요? 답은 분명합니다. 그 음성은 바로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당신의 말씀을 통해 우리를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그래서 결국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안다’는 말씀은 예수님의 양들은 ‘이미’ 진리를 알아듣고 그 진리에 반응할 수 있는 귀를 가지고 있게 마련이라는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면 꼭 그렇게 질문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미리, 그러니까 원래부터 그런 귀가 없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느냐고, 원래부터 그런 귀가 없는 게 그 사람 책임이 아니지 않느냐고 말이지요. 물론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성경도 그런 감각이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주신 사람들이고 그들이 바로 예수님의 양이라고 말씀하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여기에는 또 다른 측면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8장에서 예수님은 계속해서 딴지만 걸고 말씀을 믿으려고 하지 않는 바리새인들에게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이 사람들 속에는 왜 진리가 없을까요? 하나님께서 진리를 들을 귀를 주지 않으셨기 때문인가요?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렇게 오랫동안, 어찌보면 평생동안 진리를 듣고 배우고 심지어는 남에게 가르치기까지 했으면서도, 단 한 번도 진리를 받아들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진리 앞에서 정직하고 겸손하게 서 있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늘 하나님의 말씀을 끼고 살았던 그 사람들 속에 진리가 없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진리를 듣는 귀가 예수님과 우리들 사이의 관계를 친밀하고 특별하게 만들어 간다면, 우리는 무엇보다도 우선 그 귀를 만드는 일에 헌신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겸손하고 정직하게 귀 기울이고 그 말씀을 마음을 다해 받아들이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안에 진리가 들어옵니다. 그래야 우리 안에 있는 진리가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알아 듣게 하고 그 음성만 따르게 해 줄테니까요. 진리는 원래 불편한 겁니다. 절대로 처음부터 편하지 않아요. 사실 나중에도 그리 편한 것만은 아닙니다. 늘 우리 안에서 부대끼고 덜그럭 거리며 우리를 찌르니까요. 하지만, 우리 안에 진리가 없으면 우리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예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면 그 분의 인도를 받으며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2절부터 4절까지의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다 찾으시고요. 제가 시작! 하면 읽어 주십시오.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자기 양을 다 내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우리 주님은 당신의 ‘음성’으로 우리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당신의 ‘음성’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우리를 불러 내십니다. 그리고 우리보다 앞서 가시며 그 온유하고 우렁찬 ‘음성’으로 우리를 인도해 주십니다. 그렇게 우리의 인생은 목자가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해 주시는 복된 인생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절대로 이 복을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분의 음성을 아는 양으로 살아가는 복, 그 분의 음성을 듣는 양으로 살아가는 복, 그리고, 그 분의 인도를 받는 양으로 살아가는 복, 그 복을 절대로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눈이 어두운 자들입니다. 우리는 고집도 센 사람들이지요. 방향감각도 무딘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귀’를 주셨습니다. 주님의 음성만 듣고, 그 음성에만 반응할 수 있는 복된 귀를 주셨습니다. 늘 진리 앞에 겸손하고 정직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열어주신 귀가 닫히지 않게 연습하며 사십시오. 여러분 안에 있는 진리가 여러분 안에 거하도록 꼭 붙드십시오. 때로는 그 진리 때문에 부대끼고 아파도 말이지요. 그러면, 그 진리의 말씀이 우리를 주님 안에 거하게 해 줄 겁니다. 앞서 가시는 주님을 뒤따라 가는 행복한 주님의 양으로 살게 해 줄 것입니다.
자비로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만 주신 이 복된 귀 언제나 활짝 열어놓고서 우리의 선한 목자가 진리의 말씀으로 내 이름을 부르실 때, 예수님의 음성에만 반응하고 그 음성만 따라가는 주님의 양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먼저 우리를 강도와 도둑의 양이 아니라 예수님의 양이 되게 해 주신 은혜에 감사합시다.
- 말씀으로 나의 이름을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에 나의 영혼의 귀가 익숙해지게 하소서. 그 말씀으로, 그 음성으로 주님과 내가 단단히 묶여있게 하소서. 그래서, 늘 주님의 완전하신 인도 가운데 살아가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