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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9.10.13. 요한복음 10장 7-21절 "나는 선한 목자라(2)"

 

 

날짜 :  2019년 10월 13일 일요일

본문 :  요한복음 10장 7-21절 

 

 

       점검한 번 해 볼까요? 여러분! 어떻게, 지난 한 주간 예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며 사셨나요? 그리고 그 음성을 따라 잘 살다 오셨지요? 그러셨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늘 기억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양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우리들은 양들보다 나은 것이 없어요. 우리는 눈도 어둡습니다. 방향감각도 없어 어디로 갈 줄도 모릅니다. 게다가 고집도 엄청나게 세지요. 약하기는 얼마나 약하고 놀라기는 또 얼마나 잘 놀라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생각과 고집대로 살면 큰 일 납니다. 그러면 길을 잃어 버리고 위험해 집니다. 방향없는 인생이 되고 방황하는 인생이 되며 참된 평안을 모르는 채로 살게 됩니다. 제 멋대로 광야로 나간 양처럼 말이지요.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귀를 주셨습니다. 우리의 이름을 부르는 목자의 음성을 구별할 수 있는 영혼의 귀를 주셨습니다. 이 귀가 우리가 가진 전부입니다. 우리가 믿을 거라곤 이 귀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귀를 잘 사용해야 합니다. 이 귀를 예민하게 갈고 닦아야 하며, 겸손하게 잘 지켜야 합니다. 목자가 우리를 부를 때, 그것이 목자의 음성인 줄 알아듣고 언제든지 순종하며 따라갈 수 있도록 말이지요. 정직하고 겸손하게 늘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시며, 여러분의 마음에 ‘진리’를 잘 담아놓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주님의 음성이 들려올 때, 그 음성을 듣고 목자의 뒤를 따라갈 수 있습니다. 안전하고 평안하게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 받을 수 있습니다. 진리는 진리하고만 공명하기 때문입니다. 늘 목자의 음성을 듣고 목자의 뒤를 따르는 양들로 살아가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9장에 나오는 목자와 양의 비유가 생소할 수 있지만, 예수님 시대의 유대인들에게는 정말 익숙하고 평범한 이야기였습니다. 매일 아침 거의 모든 마을에서 반복되는 일상적인 일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오히려 그것 때문에 유대인들은 이  비유를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이 비유가 옆집 사는 김씨 아저씨가 어제 아침에 일어나 세수하고 밥 먹고 회사에 출근했다는 이야기나 다를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유대인들이 이 비유를 알아듣는데 실패한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습니다. 그들은 아직 예수님의 양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음성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고, 목자가 그렇게 자기의 이름을 부르는데도 눈만 껌뻑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누가 예수님의 양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예수님에게 속한 양들에게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귀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고 그 음성을 따라 살아가게 되지요. 그것이 예수님께 속한 양들에게만 있는 복된 특징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했지만, 그래도 예수님은 그들을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더 알아듣기 쉽게 큰 소리로 다시 한 번 그들의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한 사람이라도 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따르는 주님의 양이 되게 하는 것이 예수님의 가장 간절한 바램이었으니까요. 

    오늘 본문을 살피기 전에 우리가 먼저 분명히 해 놓아야 할 것이 하나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내가 양의 문이다”, “내가 선한 목자다” 그렇게 두 번씩 힘주어서 말씀하시는데요. 그런데, 이 말씀을 하실 때 예수님은 ‘이 세상에 수많은 양의 문이 있는데, 나도 그중에 하나다, 이 세상에 선한 목자들이 많이 있지만 나도 선한 목자다’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내가 이 세상에 딱 하나 밖에 없는 양의 문이다’, ‘내가 이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선한 목자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정말 그렇습니까? 이 세상에 다른 양의 문은 없습니까? 다른 선한 목자는 없나요? 예수님만이 양의 문이시고, 예수님만이 하나 밖에 없는 선한 목자이신가요?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만 믿고 따라야 하나요? 그렇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양의 문이시고, 예수님만이 선한 목자라는 것을 믿으며 그 분의 양으로만 살겠다고 마음을 정하는 것. 그것이 바로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이게 우리에게는 너무 독선적이라고 생각될 수도 있지만, 사실 예수님의 말씀은 더 강렬합니다. 예수님은 나보다 먼저 온 사람들은 양들을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도둑과 강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아닌 사람들은 기껏해야 자기 이익을 위해 양 떼를 돌보는 삯군 목동에 불과하다고 하셨어요. 물론 예수님께서는 거짓 메시야들이나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을 그렇게 표현하신 것이었지만 예수님은 이렇게 나 아니면 안된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여러가지 비슷한 것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 아니면 안되는 것, 그것 밖에 없는 것 하나에 붙들리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 말씀을 통해서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떤 면에서 유일한 양의 문이시며, 또 하나 밖에 없는 우리의 선한 목자가 되시는가, 그래서, 그 분을 양의 문과 목자로 삼아 살아가는 우리들은 얼마나 복된 사람들인가 하는 것을 살펴 보려고 합니다. 우리 모두가 이 말씀을 통해서 다시 한 번 예수 믿는 우리의 믿음을 점검하고 우리가 예수 안에서 얻은 특별한 복을 헤아려 보는 귀한 기회를 얻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선 7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나는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뜻을 살려서 다시 읽으면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내가 바로 양의 문이다’라는 말씀이 될 것 같은데요.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것처럼 요한복음 10장 첫머리에 나오는 목자와 양의 비유는 평지에 있는 마을 사람들이 함께 공동으로 사용하는 양우리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7절부터 10절까지에 나오는 양의 문의 비유는 산간지역에서 홀로 양을 기르며 살아가는 목자의 모습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산간지역에 있는 양의 우리는 평지의 마을에 있는 양의 우리와 많은 부분에서 다릅니다. 일단 그 우리는 목자 혼자서 자기 양을 기르는 곳이기 때문에, 마을에 있는 큰 양우리보다 크기가 작습니다. 그리고, 그 울타리의 재료는 돌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저 돌담으로 빙 둘러친 다음 한 곳만 열어놓은 작은 울타리의 모습을 하고 있지요. 그런데, 이런 곳에서는 목자 혼자서 양들을 돌봐야 하기 때문에 따로 문지기가 고용되지 않습니다. 밤에 양을 지키는 일도 목자 혼자서 다 해야 합니다. 그래서, 산간지역에서는 밤이 되면 그렇게 돌담의 열린 곳에 목자가 자리를 잡고 누워서 도둑이나 짐승이 양을 헤치지 못하게 양떼를 지키게 되는데 바로 이것을 두고 ‘양의 문’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양의 문이라는 말은 이러한 목자의 역할 때문에 생겨난 목자의 별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 제가 “나는 양의 문이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내가 하나 밖에 없는 양의 문이다”라는 뜻이라고 풀어서 설명해 드렸지만, 이것은 사실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양의 우리가 하나인데 양의 문이 둘이 될 수는 없으니까요. 그래서, 우리 안에 있는 양들에게 양의 문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그들을 돌보는 목자가 바로 유일한 양의 문이 됩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양이라고 한다면 우리에게 다른 문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우리를 위한 양의 문이시고, 그 외에 다른 문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라고, “나를 통하지 않고는 그런 복을 얻을 수 없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아침이 되면 목자는 양우리의 입구에서 양들을 불러 냅니다. 그러면 양들은 우리의 입구로 오지요. 그리고는 밤새 목자가 누워서 양들을 지켰던 그 곳을 지나 들판으로 나갑니다. 그러는 동안 ‘양의 문’인 목자는 그 입구에 서서 지나가는 양들을 한 마리 한 마리 체크합니다. 그리고 양들을 이끌어 하루 종일 꼴을 먹인 다음, 저녁에 돌아올 때는 또 다시 입구를 지나 우리로 들어가는 양들을 한 마리 한 마리 체크하지요. 그러니 어떻습니까? 그 양의 문을 통해서 드나드는 양들만 안전합니다. 그 양의 문을 통해 드나드는 양들만 좋은 꼴을 먹을 수 있습니다. 만약에 양이 양의 문이 아니라 돌담을 뛰어 넘어 가거나 벽 사이에 난 틈을 비집고 나가 버리면 그 양은 길을 잃고 헤매다가 짐승의 밥이 될 것입니다. 자유를 누리거나 먹이를 찾는 것은 고사하고 말이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먼저 예수님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하셨는데요. 복음서에서 ‘들어간다’는 말은 거의 항상 ‘하나님 나라’와 짝지어 등장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구원을 얻는다는 말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말과 같은 뜻으로 쓰이지요. 그래서 이 말씀은 곧 나 외에는 구원얻을 길이 없고, 아버지께로 갈 방법이 없다는 그런 뜻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바라는 것이 구원이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며,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는 것이라면 양의 문이신 예수님을 믿고 그 분을 따르는 것 외에는 그런 은혜를 얻을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그 다음에 예수님은 그 양은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요. 예수님께서 양의 문이시니까 양들이 예수님을 통해 들어가고 나가고 하면서 꼴을 얻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이 말씀 속에는 보이는 것 이상의 아주 특별한 은혜가 들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사실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이미 구약성경에 수도 없이, 그리고 분명하게 나와있는 내용입니다. 제가 구약성경의 두 곳을 읽어드릴테니까 화면을 보시면서 한 번 잘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먼저 신명기 28절 1절 이하의 말씀입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자녀와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소와 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다음은 에스겔 34장 14절 이하의 말씀입니다. “목자가 양 가운데에 있는 날에 양이 흩어졌으면 그 떼를 찾는 것 같이 내가 내 양을 찾아서 흐리고 캄캄한 날에 그 흩어진 모든 곳에서 그것들을 건져낼지라 내가 그것들을 만민 가운데에서 끌어내며 여러 백성 가운데에서 모아 그 본토로 데리고 가서 이스라엘 산 위에와 시냇가에와 그 땅 모든 거주지에서 먹이되 좋은 꼴을 먹이고 그 우리를 이스라엘 높은 산에 두리니 그것들이 그 곳에 있는 좋은 우리에 누워 있으며 이스라엘 산에서 살진 꼴을 먹으리라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라… 그것들이 그 곳에 있는 좋은 우리에 누워있으며 이스라엘 산에서 살진 꼴을 먹으리라” 그 날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하신 말씀은 예수님께서 처음하신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날 하나님의 오래된 약속을 다시 한 번 반복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복된 약속들이 양의 문이신 예수님을 통해 이미 이루어지고 있으며, 그래서 그 복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당신의 양들에게 주어질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약속하셨던 모든 복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흘러 넘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예수님보다 더 큰 복이 없고, 예수님이 주시는 복보다 더 좋은 복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을 소유하고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것보다 더 크고 완전한 복은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 분의 양떼들이 양의 문이신 예수님을 통해 얻게 되는 최고의 복이고 은혜입니다. 우리가 그 분의 양이 되어 그 분의 돌보심 아래서 살아갈 때, 우리는 늘 이런 복과 은혜 아래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들어오며 나오며 꼴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만이 우리를 위한 양의 문이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양의 문’이라는 말씀하신 다음 예수님은 ‘내가 선한 목자’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선한 목자에 대한 말씀으로 넘어가기 전에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양들에게 두 가지를 주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첫째는 생명입니다. 그리고 두번째는 그 생명보다 더 풍성한 생명입니다. 앞에서 첫번째 말씀을 다루면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살게 해 주시는 풍성한 삶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만, 우리가 그런 복되고 은혜로운 삶을 살아가려면 반드시 먼저 거쳐야 할 단계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에게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예수님의 우리에 들지 않은 바깥에 있는 양들은 다 ‘죽은 양’들입니다. 그들은 이미 자기 죄 때문에 생명의 근원되시는 하나님과 단절되어 버렸으니까요. 그 양들은 이미 뿌리가 뽑힌 나무이고, 줄기가 잘려나간 초목과 같습니다. 그래서, 복도 좋고 은혜도 좋지만 그 죽음 가운데서, 하나님 앞에서 죽은 자로 살아가는 자리에서 다시 살아나지 못하면 그 좋은 복도 은혜도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그런데, 세상의 이치가 그렇습니다. 아무도 손해를 본 사람이 없는데 누군가가 유익을 얻는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을 만드신 우리 하나님이 정직하신 분이시고,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정직하신 성품이 반영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생명을 얻는 일도 똑같습니다. 죽은 우리, 생명이 없는 우리가 생명을 얻고 살아있는 사람이 되려면 그 생명은 그냥 주어질 수 없습니다. 그러려면 누군가는 자신의 생명을 우리를 위해 내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도 우리를 위해서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간혹 부모가 자녀를 위해서, 또 누군가가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해 자기 생명을 내놓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은 철저히 육체적인 생명에 국한됩니다. 그 어떤 고귀하고 숭고한 죽음도 끊어져 있는 하나님과 우리들 사이의 관계를 다시 연결시켜 줄 수 없고, 그렇게 우리 영혼을 다시 살릴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나는 선한 목자라 …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양들을 정말로 사랑하는 목자들 중에는 양들이 위험을 당하면 짐승이나 도둑들과 싸우다가 안타깝게 목숨을 잃게 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지요. 하지만, 양들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버리는 것. 이것이 예수님께는 유사시에는 그렇게 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이미 정해진 일이었습니다. 영원 전에 하늘에서 정해놓은 기정사실이었지요. 예수님은 다른 일 때문에 이 세상에 오셨는데, 어쩌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우리를 위해서 목숨을 내놓게 되셨던 것이 아닙니다. 억울하게 희생당한 피해자가 되신 것이 아니지요. 예수님께서는 처음부터 당신의 양떼들을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 주시기 위해서, 그것 때문에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18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죽음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자기가 돌보는 양떼들에게 생명을 줄 수가 없습니다. 자기가 돌보는 양떼들을 살리기 위해 자기 생명을 대신 내어줄 수도 없지요. 그렇게 한다고 해도 그 생명이 양들의 영원한 생명이 되지는 못하니까요. 그렇지만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십니다. 당신의 생명을 우리를 위해 내어주셔서 그 생명이 저와 여러분의 영원한 생명이 되게 해 주십니다. 그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 일이 가능하지요. 예수님은 그것을 위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당신의 생명이 우리의 영원한 생명이 되게 해 주시려고 말이지요. 그리고 예수님은 정말로 그렇게 하셨습니다. 보잘 것 없는 자신의 양들을 위해서 기꺼이 당신의 귀한 생명을 내어주셨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의 생명이 되게 해주셨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세상에 이런 목자가 또 있을까요? 자기 양떼들을 위해 이런 일을 해 줄 수 있는 선한 목자, 이렇게 자기 양떼를 깊이 사랑하는 목자가 또 있겠습니까? 만약에 그런 목자가 있다면 우리는 그 목자를 우리의 목자로 삼아도 됩니다. 그 목자를 따라가도 됩니다. 하지만, 예수님 밖에는 그런 목자가 없다면, 우리가 그것을 알고 있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우리의 목자로 삼고서 그 분만 따라가야 합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내가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내가 선한 목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우리 주님 안에서만 영원히 안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만 안식과 평안을 얻습니다. 예수님 안에만 참 생명이 있습니다. 선한 목자만이 양떼들의 생명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를 아십니다. 너무나 잘 아십니다. 우리도 그 분을 압니다. 수많은 음성과 소음 속에서 예수님의 음성을 구별하고 그 음성에만 순종할 정도로 그만큼 예수님을 잘 압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아시고,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시는 것처럼 그렇게 예수님은 우리를 아시고, 우리도 예수님을 압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선한 목자이시고 우리는 그 분이 기르시는 양들이니까요. 

    세상에는 자신이 선한 목자인 척 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수많은 목소리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만 믿으십시오. 예수님만 따르시고요. 그 분의 양이 되어 그 분의 음성만 듣고 늘 그 분 안에 사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양들이 살고 더 풍성한 삶을 살 수 있는 가장 복된 방식이니까요. 늘 선한 목자 되신 우리 주님의 음성을 들으며, 양의 문이 되어 주시는 그 분을 통해 생명을 얻고 더 풍성한 생명을 누리는 주님 기르시는 양으로 살아가는 큰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세상에 딱 한 분 밖에 없는 선한 목자, 우리 예수님의 양떼가 되게 해 주신 은혜에 감사합시다.
  2. 이 귀한 은혜 받았으니 늘 양의 문을 통해서만 드나 들며 꼴을 얻게 하소서. 새 생명을 얻었으니 선한 목자의 그늘 아래에만 머물며 날마다 더 풍성한 생명을 누리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