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 2019년 11월 10일 일요일
본문 : 요한복음 11장 1-16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까? 우리를 정말로 언제나 변함 없이 깊이 사랑하고 계신가요? 그렇습니다. 틀림 없이 그렇지요. 예수님은 늘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지만, 똑같은 질문을 이렇게 바꿔보면 어떨까요? 그러다면요, 진짜로 예수님께서 우리를 늘 변함 없이 깊이 깊이 사랑하고 계신다면요. 그런 사랑을 받으며 살아가는 우리는 우리의 인생에 대해서 어떤 기대를 할 수 있을까요? 특히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시는 예수님은 모든 것을 아시고, 불가능한 일이 없으시며, 또 모든 것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이신데, 이런 예수님이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시면 우리의 인생은 어떤 인생이 될 것이라고 믿어도 좋을까요? 말 그대로 ‘완벽한’ 인생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나쁜 것은 하나도 없고, 좋은 것만 있는 그런 인생이 말입니다. 하지만, 막상 우리가 살고 있는 우리의 인생은 그러한 기대하고는 참 많이 다른 것이 사실입니다. ‘설마!’ 했던 일들은 늘 ‘역시!’가 되고, ‘이것만큼은 절대로 안돼!’라고 생각했던 바로 그 일들은 너무나 자주 우리의 현실이 됩니다. 한 두 번 그러다 말면 모르겠지만, 그런 일이 반복되고 또 반복되지요. 그래서,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면 우리는 내가 믿는 예수님은 정말로 우리의 모든 것을 책임지실 수 있을만큼 대단한 분이시고, 정말로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시는 것이 틀림 없나 하는 의심을 품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이런 시험들과 싸우고 또 이겨내며 믿음을 지켜내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1장은 예수님께서 죽은 지 나흘이 지난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일을 기록하고 있는데요. 이 일은 그저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또 하나의 기적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5장 21절로 돌아가 보면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과 같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25절을 보면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니나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라고 말씀하셨고요. 28절에서는 그 이야기를 듣고 어안이 벙벙해져 있는 제자들에게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직접적으로 보면 이 말씀들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일어나는 일이나 주님 다시 오실 때 죽은 자들이 부활할 것을 이야기하는 말씀들이지만, 5장의 말씀들은 놀랍게도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실 때 일어났던 일들과 완벽하게 일치합니다. 마치 나사로가 먼저 살아났고, 나중에 5장에 나오는 말씀을 하신 것처럼 보일 정도로 말이지요. 요한복음 11장은 5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말씀이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사건을 통해 일차적으로 성취되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도 충분히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일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마 성도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일이나 자기들의 부활이 의심스러워질 때마다 나사로를 생각하며 믿음을 추스리곤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결론이고, 이야기가 여기까지 가는 것은 그렇게 쉽지도 않았고, 그 과정에 좋은 일만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죽은 자가 다시 사는 일은 어떤 사람이 죽지 않으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니까요. 저는 이것이 우리가 신앙 안에서 경험하게 되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들의 특징이라고 생각합니다. 병에 걸려야 치료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영적인 침체 속에 있어야 회복의 은혜를 알 수 있지요. 절망 중에 있을 때, 주님이 소망이 되어 주신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고, 죄를 지어야 죄를 용서해 주시는 은혜가 얼마나 큰 지를 알 수 있습니다. 부족한 것이 있어야 채워주시는 은혜를 알 수 있고요. 이렇게 우리의 삶에 내가 죽는 작은 경험들이 없으면 작게 나마 다시 사는 은혜들을 알아갈 기회를 얻기가 힘듭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도 ‘어떤 병자가 있으니…’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이 걸린 심각한 병이 통로가 되어 이 세상에 하나님의 기적같은 은혜를 흘러들어오게 할 것이라고 예고하고 있지요. 그런데, 우리는 이야기의 처음에는 이 어떤 병자가 누구인지 구체적인 정보를 알 수 없습니다. 1절에서는 이 사람이 마리아와 마르다와 한 마을에 사는 나사로라는 사람이라는 것만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2절에서는 그 마리아가 나중에 예수님의 발에 값비싼 향유를 가져다 부은 그 여인이며, 나사로는 그 마리아의 오빠라는 사실을 알게 되지요. 그렇게 해서 우리는 그 ‘어떤 병자’가 그냥 ‘어떤 병자’가 아니라 예수님과 약간은 관계가 있는 사람일 수도 있다는 정보를 얻게 됩니다. 그리고, 3절 뒤쪽에 이르러서야 우리는 드디어 나사로가 예수님과 각별한 사이였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나사로가 큰 병에 걸리자 마리아와 마르다는 요단강가로 피신해 계신 예수님께로 사람을 보냈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전갈하지요. “선생님 보세요. 사랑하시는 사람이 병들었습니다”라고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가족들을 사랑하셨다는 것은 5절에서도 다시 한 번 이야기되고 있는데요.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라는 말만 들으시고도 그 사람이 나사로라는 것을 아실 것이라고 확신했다는 것은 나사로가 예수님께 그만큼 특별하고 각별한 사람이라는 뜻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나사로가, 예수님께서 그렇게 특별하게 아끼시고 사랑하시는 나사로가 병에 걸렸습니다. 나사로는 그냥 ‘어떤 사람’이 아닙니다. 그냥 마리아와 마르다와 한 마을에 사는 어떤 남자도 아니었고요. 단순히 두 사람의 형제도 아니었습니다. 나사로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이었습니다. 아주 특별히 사랑하시는 사람이었지요. 하지만, 나사로는 병에 걸렸습니다. 그냥 내버려 두면 죽을 수 밖에 없는, 그 당시로서는 손을 쓸 수 없는 큰 병에 걸렸습니다. 어떠십니까, 여러분?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능력 많으신 예수님께서 각별하게 사랑하시는 사람인데, 또 예수님을 특별히 사랑하는 사람인데, 그런 나사로가 왜 병에 걸려야 하지요? 왜 죽을 병에 걸려 죽어가야 하지요? 예수님이 정말로 이 사람을 사랑하고 있는 게 맞습니까? 특별히 아끼시는 것이 맞나요? 우리에게는 이 문제가 늘 혼란스럽습니다. 우리의 머리 속에서는 예수님의 사랑과 우리의 고난이 쉽게 조화가 되질 않지요. 하지만, 성경은 아무렇지도 않게 두 가지를 한 자리에 가져다 놓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아무리 사랑해 주신다고 해도 인간은 병도 들고 고난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때로는 죽음 문턱까지 내몰리기도 하지요. 우리에게는 썩 위로가 되는 이야기가 아닐 지도 모르지만, 그런 일에 있어서는 예수님께서 특별히 사랑하시는 우리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 차이가 거의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다가 어려움을 당하고 위기를 만나면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런 고통과 어려움이 나에게 온 것이라고 생각하지요. 하지만, 그런 것들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가, 그렇지 않은가를 판단하는 기준이 될 수는 없습니다. 이야기가 나온 김에 잠시 말씀드리면 인간의 고통과 고난, 질병같은 것들은 하나님의 징계나 형벌인 경우보다는 그저 불완전한 이 세상과 인간의 죄악이 만들어 낸 결과일 때가 훨씬 더 많습니다. 그저 자연법칙이 만들어 낸 자연현상일 때도 있고요. 태풍이나 해일처럼 말이지요. 그것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고 목숨을 잃기도 하지만 그것은 이 세상이 움직여 가는 물리법칙에 따라 생겨날 수 밖에 없고, 또 생겨나야 하는 일들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자가 병들어 죽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병은 죽음으로 끝날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고 또 하나님의 아들이 영광을 얻기 위한 것이다”라고 말이지요. 우리는 이미 이 말씀과 비슷한 말씀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바로 앞 장인 요한복음 9장에서 제자들이 나면서 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을 보고서 예수님께 저 사람이 저렇게 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인가를 물었습니다. 그 당시에 제자들은 여전히 사람이 큰 고통을 당하는 것은 죄에 대한 형벌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누구의 죄 때문에 그렇게 된 것도 아니다. 다만 그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는 일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라고 대답해 주셨습니다.
사람은 큰 질병이나 고난, 그리고 고통을 만나면 언제나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에게서 그 이유를 찾습니다. 그리고, 그런 일들이 해결될 것인가 그렇지 않을 것인가 하는 것에만 집중하지요. 물론 이렇게 하는 것이 잘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납득이 갈 때 편안해 지고, 또 무한정 고통을 견딜 수 없는 것이 사람이기 때문에 사람들의 이런 반응은 당연한 일입니다. 아마 그 날 제자들도 그랬을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그렇게 사랑하시는 나사로가 죽을 병에 걸렸는가, 그리고 그 나사로가 죽을까, 살까 하는 것에만 마음을 빼앗겼겠지요. 하지만 요한복음 9장에서도 그러셨듯이 이번에도 예수님은 제자들을 그 일 차제나 그 일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에게 집중하도록 만드셨습니다. 정확하게는 ‘하나님의 영광’,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나사로의 질병과 죽음을 통해서 하시려는 일’에 집중하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면서 불필요한 시험에 들지 않으려면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말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일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십니다. 때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고난과 고통을 주시는 것도 결국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는 말은 무슨 뜻을 가지고 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이 바로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드러내시고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알려 주시는 역할을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병에 걸리고 또 죽도록 내버려 두신 것은 전부 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보여주시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제가 이런 설명을 해 드리면요. 굉장히 많은 분들이 그렇게 질문합니다. 그러면 사람은 뭐냐고, 사람들이 당하는 고통과 슬픔은 뭐냐고 말이지요.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람을 고통스럽게 해도 되냐고 말이지요. 저는 충분히 이해합니다. 우리는 충분히 그런 질문을 하고 그런 불만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분들께 제가 꼭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곧 인간의 행복’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 되실 때, 비로소 우리는 우리다워질 수 있고, 하나님이 하나님 대접을 받으실 때 우리도 가장 존귀해 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6장을 보면 바울과 실라가 복음을 전하다가 흠씬 두들겨 맞고나서 감옥에 갇힌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야기의 시작부터가 말이 안되지요. 어떻게 하나님을 위해서 복음을 전했는데, 하나님은 두 사람이 이 지경이 되도록 그냥 내버려 두실 수가 있으십니까? 그런데, 뒤쪽으로 가 보면 더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것은 두 사람이 그렇게 흠씬 두들겨 맞고 감옥에 갇혔는데, 하나님을 원망하고 신세를 한탄하는 대신에 그 감옥 안에서 한 밤 중에 찬양하고 기도하면서 부흥회를 열었다는 것입니다. 왜 그러는지 모르는 사람들이 봤다면 아마도 두 사람이 너무 얻어 맞아서 실성을 했다고 생각했을 것 같습니다. 우리라도 두 사람이 중얼거리다 손을 들고 찬양하고 또 중얼거리다 찬양하는 그런 모습을 보았다면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렇다면, 두 사람은 왜 이렇게 상식적으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반응을 보였을까요? 그 해답은 ‘찬양’이라는 말 속에 있습니다. 찬양은 하나님을 높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 보이는 가장 행복한 반응이지요. 그러면 두 사람은 도대체 어디서 하나님의 영광을 본 것일까요? 그들은 복음을 전하다가 얻어 맞으면서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얼마나 귀한 분이신지를 스스로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흠씬 두들겨 맞고서 발에 차꼬가 채워져 옥에 갇히게 되면서 자기들이 그렇게 높고 귀하신 하나님을 ‘위해서’ 그런 어려움을 당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에 감사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위해서 당하는 고난과 고통이라는 렌즈를 통해 비로소 하나님의 영광의 참된 모습을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흔히 목표가 없는 사람은 고통을 견디어 내는 힘이 약하다고 합니다. 반면에 목표가 분명한 사람은 역경을 훨씬 더 수월하게 견디어 내지요. 그렇다면, 자신의 인생의 목적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에 두고 살아가는 사람은 어떤 인생을 살아갈까요? 이 세상에 하나님보다 크고 하나님보다 귀하신 분은 없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어떤 것도 하나님보다 높고 큰 목적이 될 수가 없지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 자기 인생의 목적을 두고 사는 사람, 자기 인생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신지를 드러내기 위한 도구라는 것을 것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목적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사람이 됩니다. 이런 사람은 고난도 어쩔 수 없고, 고통도 뒤흔들 수 없는 그런 사람이 됩니다. 잠시 흔들리기는 해도 금방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이 됩니다. 그 사람에게는 그래야만 하는 이유와 동기가 너무나도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에게는 그 고통과 고난 자체도 영광이 되니까요.
5절과 6절은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라고 말합니다. 우리 말 성경에서 ‘사랑하시더니…’라고 옮겨놓은 말은 ‘사랑하셨기 때문에…’라고 옮겨야 더 정확합니다. 그러니까 사도 요한이 말해 주는 대로라면, 예수님께서는 마르다와 나사로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나사로가 병들어 죽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나서 계시던 곳에서 이틀을 더 계시다가 비로소 베다니로 가신 것이지요. 여러분은 이 문장이 이해가 가십니까? ‘사랑하셨지만’이 아닙니다. ‘사랑하셨음에도 불구하고’도 아니고요. 성경은 이상하게도 ‘사랑하셨기 때문에’ 이틀을 더 지체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이틀을 더 지체하신 것 자체가 그들을 향한 사랑의 표현이었고 또 최고의 사랑이었다고 성경은 그렇게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요한의 이런 설명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할까요?
날짜를 계산 해 보면, 예수님께서 소식을 듣고 이틀을 지체하셨고 그래서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 지나서야 베다니에 도착했기 때문에, 나사로는 마리아와 마르다가 보낸 사람이 베다니를 떠난 직후에 숨을 거둔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틀을 지체하셨기 때문에 나사로가 죽게 되었던 것은 아니지요. 하지만, 그래도 예수님은 더 서둘러 가실 수 있으셨습니다. 이틀이라도 더 빨리 말이지요. 그랬다면 나사로는 이틀 더 빨리 살아났을 것이고, 그러면 마리아와 마르다의 슬픔과 상실감도 그만큼 더 빨리 기쁨으로 바뀔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모든 사실을 아시면서도 일부러 이틀을 지체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 되는 시점에 맞춰서 베다니로 떠난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그것을 두고 예수님께서 마리아와 마르다, 그리고 나사로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하셨다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배워야 하고 또 받아들여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방식은 우리의 생각이나 기대와 완전히 다를 수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지 않으시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습니다. 늘 눈 앞의 필요, 눈 앞의 유익만을 생각하지요.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말을 들을 때도, 그런 전제를 깔고서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내가 필요로 하는 것, 지금 당장 나에게 유익한 것을 주시는 방식으로 나를 사랑하실 것이라고 기대하지요. 그런데, 따지고 보면 사랑에 대한 생각 중에서 이런 생각만큼 철 없는 생각이 없습니다.
요즘 엄마들이 아이들을 키우는 모습을 보면요. 어떤 면에서는 우리 어머니 세대가 우리들을 키울 때보다 훨씬 더 지독한 것 같습니다. 특히 먹는 것에 대해서는 정말 매몰찹니다. 그렇게 달라고 달라고 해도, 울며 때를 써도 좀처럼 사탕이나 초컬릿을 주지 않습니다. 우리 때는 막 줬는데, 그래서 저는 앉은 자리에서 사탕 한 봉지를 다 먹은 적도 많았었는데 말이죠. 심지어 모 어린이의 어머니께서는 아이가 가방 속에서 사탕을 찾아내니까 그거 선생님 껀데 내가 맡아 놓은 것이라고 거짓말 하는 것도 보았습니다. 그 덕분에 나중에 그 사탕 제가 먹을 수 있었지만 말이지요. 그런데,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사랑하는데 왜 그렇게 하지요? 사랑하는 자녀가 그렇게 원하는 것을 왜 안 주지요? 답은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자녀를 사랑하니까 그렇게 원해도 주지 않고, 그래서 울고 힘들어 해도 주지 않는 것입니다.
불완전한 인간의 사랑도 이렇다면 우리 주님의 사랑은 어떻겠습니까? 예수님은 분명히 우리보다 더 지독하게 더 철저하게 우리에게 정말로 유익이 되는 방식으로만, 조금이라도 더 선한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그런 방법을 찾아서 우리를 사랑하실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당장은 우리에게 더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 되더라도 말이지요. 우리가 만약 예수님께 우리를 다른 방식으로, 그러니까 우는 아이 떡 하나 더 주는 방식으로 사랑해 주시길 원하고 바란다면 그것은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을 크게 모독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와 마르다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사로를 사랑하셨지요. 사랑하시되 아주 특별히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틀을 지체하셨습니다. 나사로가 죽었다는 것을 아셨고, 그래서 그것 때문에 상심하고 슬퍼할 두 자매의 고통을 아시면서도, 심지어는 두 사람이 당신을 오해할 것을 아시면서도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머물러 계셨습니다. 그것이 결국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이 되고, 그래서 그들을 가장 깊이 그리고 완전하게 사랑하는 일이 될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까? 우리 예수님은 우리를 깊이, 그리고 변함 없이 완전하게 사랑하십니까? 그렇습니다. 우리가 우리 주님의 사랑을 어떻게 생각하든, 심지어는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지 않으실 거라고 확신할 때도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는 피조물이고 예수님은 우리를 만드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아무 것도 모르지만 예수님은 모든 것을 아십니다. 우리의 욕망은 불완전하지만 예수님의 사랑은 완전합니다. 우리의 생각과 예수님의 생각은 땅이 하늘에서 먼 것처럼 멉니다. 그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제대로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그 깊이도 그 방식도 말이지요. 하지만, 우리가 그 사랑 다 헤아릴 수 없어도, 그 사랑 미처 알아차릴 수조차 없어서 그 사랑을 의심할 때도 예수님은 가장 완전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가장 유익한 방식으로 변함 없이 우리를 사랑하고 계십니다.
오늘 저는 ‘사랑하는 자가 병들었나이다’라는 말씀으로부터 설교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 나사로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셨다’는 말씀을 붙들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방식을 함께 더듬어 보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사랑하는 자도 병이 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말씀드리기 정말 어렵지만 사랑하기 때문에 슬픔을 주시고 사랑하시기 때문에 아픔을 주실 수 있습니다.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조금 더 절망하도록 내버려 두실 수 도 있습니다. 마리아와 마르다처럼 말이지요. 그것이 우리를 향한 더 큰 사랑이 되고 더 완전한 사랑이 되고, 우리에게 더 큰 복과 유익이 될 것을 아시기 때문에, 당신도 아프고 힘드시지만, 너무나 안타까우시지만 그렇게 하실 때도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완전한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의 영광 안에서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십니다. 우리는 비록 그 사랑을 다 헤아리고 짐작하며, 깨달을 수 없지만 그래도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지금도 우리는 그 사랑 안에 있습니다. 늘 이 사랑을 믿으며, 이 사랑 안에 머물러 살아가는 우리들, 그리고, 사랑을 찬양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삶이 우리를 배반하는 것처럼 보일 때에라도 예수님의 사랑을 확신할 수 있는 믿음을 주소서. 늘 그 사랑 안에 살게 하소서.
- 내 인생의 모든 것이 전부 하나님의 영광을 향해 있으며, 그래서 나의 가장 큰 행복을 위한 것임을 믿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