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교 일 : 2019년 11월 17일 일요일
설교본문 : 시편 107편 1-22절
오늘은 추수감사절입니다. 하나님께서 한 해 동안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들을 되돌아 보면서 감사하는 날이지요. 감사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우러나올 때만 할 수 있고, 우러나와서 해야 진짜 감사가 되지요. 그렇게 보면 추수감사절은 우리에게 감사를 강요하는 날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감사절이 되면 설교자들은 성도들에게 감사하자고 말합니다. 감사할 것들을 찾아보고 감사를 드리자고 설교하지요. 그러면 물론 하나님께 마음이 온전히 담긴 벅찬 감사를 드리는 성도들도 계시지만, 성도들 중에는 마지 못해 감사할 거리를 찾아서 겨우 겨우 감사를 하는 성도들도 있습니다. 저도 한 때는 그런 사람이었으니까요.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하나님을 믿는 저와 여러분 같은 사람들은 감사할 수 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고 누리고 있는 모든 것들이 전부 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이라고 믿고 고백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감사의 삶을 살아가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좀처럼 우리의 삶을 묵상하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과 똑같은 눈으로 자신의 삶을 바라보며 그저 무심하게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우리에게는 이렇게 감사를 강요해 주는 절기가 꼭 필요합니다. 이 감사의 절기에 참된 감사의 마음과 정신을 되찾고, 감사를 드리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을 볼 수 있고, 또 하나님 안에 있는 우리 자신을 볼 수 있으니까요. 모든 절기는 하나님의 사랑이 담긴 거룩한 잔소리입니다. 그 중에서도 추수감사절은 한 해가 끝나가는 계절에 감사를 되찾아서 우리 삶 속에 계신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우리들의 특별한 복을 되찾으라는 우리 아버지의 잔소리입니다. 감사가 없을 때 우리는 하나님을 잊고 홀로 살아가는 인생이 되고, 하나님의 기가 막히는 은혜들을 그냥 흘려 보내게 되니까요. 오늘 시편을 함께 살피면서 감사를 되찾고, 하나님 안에 살아가는 우리의 복이 무엇인지를 다시 기억해 내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시인도 우리에게 그렇게 이야기 하면서 시편을 시작합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감사는 자연스러운 것이어야 하지만 우리 생각만큼 그렇게 자연스럽게 우러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의도적으로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때로는 억지로라도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그런 감사가 없으면 우리는 결국 하나님을 잊게 되니까요. 감사는 말하자면 하나님을 감각하는 감각기관이며, 잘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내 눈 앞으로 끌어 당기는 망원렌즈입니다. 그래서 감사가 없을 때 우리는 하나님을 잘 보지 못할 뿐 아니라 하나님은 마냥 멀리 계신 그저 막연하기만한 분이 되기 쉽습니다. 그 하나님은 늘 우리 곁에 우리와 함께 계시는데 말이지요. 그렇다면, 왜 우리는 그렇게 자주 감사를 잊게 되는 것일까요? 모두가 다 감사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잘 아는데도 말이지요. 거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우리는 감사라는 것을 너무나 좋은 것하고만 연관지어서 생각하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소외 ‘엄청난 복을 받아야’ 감사하게 되는 겁니다. 요즘 사람들 사이에서는 ‘소확행’이라고 해서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찾아 누리자는 이야기가 큰 설득력을 얻고 있습니다. 예전하고는 확실히 많이 달라졌지요. 아마도 그만큼 이제는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이 크고 화려한 꿈만 꿀 수는 없게 되었다는 것을 모두가 다 인식하고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빗대어 말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소확행’들의 특별함을 잘 깨닫지 못합니다. 그저 누구나 누리고 있는 당연한 것들로만 생각하지요. 그러니 감사할 마음이 생겨나질 않고 그래서 감사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에 대해서는 감사할 수가 없는 법이니까요.
오늘 시인은 우리가 자칫 작은 것으로 여길 수 있고, 그래서 당연한 것으로 여길 수 있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은 은혜들이 있다고 말해 줍니다. 그러면서 그러니까 함께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을 찬양하자고 청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속량을 받은 자들은 이같이 말할지어다 여호와께서 대적의 손에서 그들을 속량하사 동서남북 각 지방에서부터 모으셨도다” 시인은 지금 우리처럼 속량을 받은 사람들에게 말을 걸고 있습니다. 우리를 향해서 만약 당신이 속량을 받은 사람이라면, 구원을 받은 사람이라면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여호와께서 대적의 손에서 그들을 속량하셨고 동서남북 각 지방에서 모으셨다”고 말해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셨습니까? 우리 대신 값을 치르시고 도저히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대적의 손에서 우리를 건져 주셨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셨습니다. 언제 그렇게 하셨지요? 그렇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외아들의 생명을 값으로 치르시고 우리를 사탄이라는 대적의 손에서, 죽음이라는 도무지 빠져 나올 수 없는 대적의 손에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 주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여전히 사탄의 손에서 놀아나고 있을 것입니다. 영생도 모르고, 하늘나라도 모르고, 하나님의 은혜도 모르는 채로 영원한 죽음과 멸망을 향해 열심히 달음질 하는 삶을 살고 있을 것입니다.
어떻게 여러분 보시기에 제가 아주 조금은 그럴 듯하게 보이시나요? 아예 엉망진창은 아니지요?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는 만약 제가 하나님을 몰랐다면, 하나님이 나를 건져 주시지 않으셨다면 제 인생이 어떻게 되었을까를 생각할 때마다 소름이 돋곤 합니다. 제 기질과 약점들을 생각해 보면 하나님 밖에 있는 제 삶이 어땠을지 그 답이 대번에 나오니까요. 그런데, 현실적으로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영원한 운명을 생각해 보면 더 끔찍합니다. 이 세상에서의 인생은 일시적이고 상대적이지만 하나님 앞에서 결정될 영원한 삶의 모양은 영원히 돌이킬 수 없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무엇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하나님이 무엇을 주시고 주지 않으시고를 떠나서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속량을 받은 하늘의 백성들이 되었으니까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백성들은 무엇보다도 자신이 하나님의 속량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감사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가장 근본적인 감사이고 또 다른 모든 감사가 흘러나오는 샘근원이 되니까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구원에 늘 감사하며 사십니까? 나를 속량해 주신 십자가의 은혜에 늘 감사하며 사시지요? 꼭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이 감사가 막히면 다른 감사들도 막히게 됩니다.
시인이 알려주는 우리가 잊기 쉬운 두번째 감사의 제목은 우리에게 믿음의 공동체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시인은 여호와께서 대적의 손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을 뿐 아니라, 그렇게 속량한 우리들을 이 세상 모든 곳에서부터 모으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속량받은 사람들은 하나님께 감사드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저하고 여기 계신 우리 유덕임 권사님. 만약 저와 권사님이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면, 이렇게 만날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서로가 이렇게 세상에 생긴 사람이 있는지도 모르는 채로 살았겠지요. 아무 지장 없이 말입니다. 그런데, 저하고 유덕임 권사님만 그런 게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된 줄 아십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을 한 사람 한 사람 속량하셨을 뿐 아니라, 우리를 동서남북에서 모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교회 안으로, 그리고 이 광현교회 안으로 말이지요.
현실 속의 교회는 더 좋은 교회일수도 있고, 그렇지 못한 교회일수도 있습니다. 내 맘에 드는 교회일수도 있고, 그렇지 않은 교회일수도 있어요. 부족한 것이 많은 교회일수도 있고, 부족한 것이 별로 없는 교회일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교회가 이단이나 너무나 악한 교회가 아니라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 곳곳에서 값주고 사신 사람들을 불러 모아 만든 주님의 몸된 공동체들입니다. 우리가 무심히 지내면 우리는 교회라는 공동체가 얼마나 감사한 곳인지를 잘 모릅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세요. 만약 교회가 없다면 우리의 신앙생활이 가능이나 하겠습니까? 공동체가 없다면 우리가 믿음을 지키며 또 믿음을 키워가고 안전하게 하나님을 알아가는 일이 가능할까요? 우리는 홀로 성도일 수 없습니다. 그 수가 작든 많든 옆에 있는 그 사람들 덕분에 우리는 성도일 수 있고 성도로서 믿음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나만 보면, 그리고 이 세상만 보면 하나님이 계신지 안 계신지 확신하기가 힘듭니다. 꼭 믿음이 없어서 그런게 아닙니다. 나의 못난 모습을 보고 이 세상의 형편 없는 모습을 보면 문득 문득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 같을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럴 때, 하나님 안에서 은혜를 얻고 아름답게 변해가는 지체들을 보면, 그리고 신기하게 예수를 믿고 교회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보면 하나님이 계신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제가 목사이지만 저도 그렇습니다. 저라고 해서 매순간 늘 100퍼센트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실을 확신하며 사는 것이 아닙니다. 가끔씩은 하나님이 계신 것이 정말로 맞나, 하나님이 안계시면 어쩌지?하는 생각도 들어요. 그런데요. 만약에 여러분이 없었다면, 우리 광현교회 공동체가 없었다면 그러한 저의 흔들림은 더 심해졌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럴 때마다 저는 여러분을 통해, 그리고 우리 공동체를 통해 정말로 하나님이 계시며 또 우리들을 위해서 일하고 계신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일은 몰라도 그런 일은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면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니까요. 도대체 무슨 일일까요? 도대체 무슨 대단한 일이길래 제가 이렇게까지 말씀드리는 것일까요? 그건 비밀입니다. 안 가르쳐 드립니다. 너무 많이 알면 다칠 수 있기 때문에 여기까지만 말씀드립니다. 하지만 그것만큼은 분명합니다. 저에게는 여러분이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증거입니다. 때로는 그 증거가 좀 부실하고 불안할 때도 있지만, 여러분 덕분에, 그리고 우리 교회 덕분에 우리 교회를 섬기면서 저의 믿음은 더 든든하고 생생해지고 있으며, 저는 그게 참 감사합니다. 저는 여러분도 저를 통해 하나님을 보고, 저 때문에 여러분의 믿음이 더 단단해지면 좋겠다는 소원을 품고 목회하고 있는데, 여러분도 저를 통해 그런 유익을 누리고 계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의 만남은 그 만남 자체가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축복이 아니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디서부터 우리의 감사를 시작해야 할까요? 무엇부터 감사해야 할까요? 우리 구원입니다. 우리 교회부터고요. 그것이 우리가 가장 근본적으로 감사를 드려야 하는 가장 큰 감사의 제목이 되어야 합니다. 늘 하나님께서 나를 값주고 사신 것을 기억하면서 그 감사와 감격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미우나 고우나, 부족하나 그렇지 않으나 이 공동체를 마련해 두시고 거기서 나를 지켜 주시고 자라가게 하시기 위해서 나를 그리로 부르신 하나님께 감사드려야 합니다. 이제부터 나를 구원하신 은혜를 잊지 않고 감사하실 겁니까? 여러분을 이 공동체 안에 두신 은혜에 감사드리실거죠? 꼭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거기서부터 여러분의 감사를 되찾아 보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시인은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를 알려 준 후에, 이번에는 우리가 살면서 경험하게 되는 또 다른 구원의 은혜를 일깨워 줍니다. 그리고, 그러니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감사하자고 이야기하는데요. 첫째로 시인은 하나님께서 우리 영혼의 목마름과 배고픔을 만족하게 해 주셨으니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사람이 겪게 되는 결핍들 중에서 가장 근본적이고 절실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목마름과 배고픔입니다. 그러니까 물이 없고 양식이 없어서 생기는 목마름과 배고픔이 인간에게는 가장 절실하게 해결해야 할 문제가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인간에게는 육체적인 배고픔과 육체적인 목마름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에게는 영혼이 느끼는 목마름과 배고픔도 있습니다. 그리고,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라면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물과 양식의 문제는 해결할 수 있지만 영혼의 갈증과 배고픔은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결국에 진짜로 문제가 되는 것은 영혼의 목마름과 배고픔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현실적인 삶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먹는 것이 없는 것도 아니고, 쓸 것이 부족한 것도 아니고, 집이 없는 것도 아니고… 뭐 하나 현실적으로 부족한 것은 없습니다. 물론 현실적인 문제가 있을 때도 있습니다. 부족한 것이 있습니다. 없는 것이 있고 필요한 것이 있어요.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그게 그럴만큼 큰 문제가 아닙니다. 꼭 그래야 할만큼 엄청난 일도 아니고요. 그런데, 마음이 허합니다. 광야에 내다놓은 것처럼 마음이 매말라 있습니다. 하지만, 무엇을 해도 그 허함을 달랠 수가 없습니다. 다시 마음을 촉촉하게 만들 수가 없고요. 오늘 수많은 사람들이 이미 충분한데도 더 많은 것을 가지려고 하고 또 계속해서 자극적이고 일시적인 즐거움을 찾아서 이리 저리 방황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무엇을 더 얻어서 손에 쥐고 있을 때는, 그리고 그 즐거움을 느끼고 있을 때는 허한 마음이 채워진 것 같이 느껴지니까요. 하지만 그것은 배고픔을 공기로 채우려고 하고, 목마름을 바닷물로 해결하려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은 또 다시 더 심하게 허해지고 맙니다.
원래 인간에게는 하나님이 아니면 채울 수 없는 구멍이 하나 있습니다. 그 구멍은 아담이 스스로 왕노릇하겠다고 하나님을 떠났을 때부터 모든 인류가 가지고 태어나는 구멍인데요. 그 구멍은 애초에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에 생겨난 구멍이어서 다른 것으로는 채울 수가 없습니다. 세상을 다 얻어도 그렇지요. 그러니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있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을 사모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왜 인간의 삶이 광야같아지지요? 왜 우리의 영혼은 샘 없는 사막같아지나요? 이유는 하나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자꾸 하나님을 떠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리를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으로 채우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모하면 하나님께서 그 자리를 메워주시고 우리의 영혼까지 만족시켜 주실 것을 알고 있습니다. 성도가 성도가 아닌 사람과 다른 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다른 점에서는 근본적인 차이가 없지만, 이 부분에서는 성도와 성도아닌 사람들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은혜를 주셨습니다. 이 놀라운 은혜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광야같은 삶을 살면서도 영혼만큼은 배고프지 않고 목마르지 않는 삶을 살아갈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십니다. 우리는 올 한 해도 바로 그 은혜로 경험하며 지금까지 살아왔지요. 그러니 우리는 감사해야 합니다.
둘째로 시인은 우리가 죄를 짓고 어리석게 살았던 적도 많았고 그래서 고통과 고난을 자초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의 기도까지도 들으시고 우리를 구원해 주셨으니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고 이야기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의로운 사람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시고 신실한 사람의 간구에 응답하시는 분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참 이상하게도 성경은 똑같은 하나님을 자기 죄 때문에 상한 심령을 기뻐하시는 분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참 모순되어 보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분명히 그렇게 말하고 있고, 그것이 우리들에게는 말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죄를 짓게 되면 그 사람에게는 두 가지 일이 일어납니다. 첫째는 그 죄 자체에 매이고 그 죄의 결과에 얽매이게 됩니다. 사슬에 묶이고 포로로 잡혀 감옥에 갇힌 사람처럼 말이지요. 우선 죄는 중독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죄를 지으면 그 사람은 죄에 붙들리게 됩니다. 죄를 지으면 지을수록 더 쉽게 죄를 짓게 되고, 죄에 무뎌지다가 나중에는 죄를 짓고 싶어하는 데까지 가게 됩니다. 작은 죄든 큰 죄든, 사소한 습관 속에 깃든 죄든 모든 죄가 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죄는 우리를 얽어 맵니다. 결국에는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는 상태로 만들어 버립니다. 또 죄는 죄의 결과를 가지고 우리를 한 번 더 묶습니다. 우리의 인생을 죄가 만들어 낸 쓴 열매들로 고통스럽게 만들고, 그 결과를 피하려고 또 다른 죄를 끌어들이게 만드는 것입니다.
둘째로 죄는 우리를 어리석은 사람이 되게 합니다. 사람이 죄를 짓는 것은 그것이 지혜롭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죄를 짓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자기 인생을 고통과 불행 속으로 몰아넣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지혜가 무엇일까요? 지혜는 결국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고 그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최고의 행복을 찾는 방법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을 만드시고, 우리의 인생을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고 그래서 이 세상과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움직여 갈 때, 가장 스무스하고 복된 인생이 되니까요. 그러니 죄를 짓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고 또 어리석은 사람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자기 스스로 자기 인생을 망가뜨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요, 성도 여러분. 우리 인생이 이렇게 되는 것은 자업자득입니다. 내가 내 인생을 위해서 나쁜 씨앗을 심었고 그 씨앗에서 나쁜 열매가 맺힌 것이니까요. 우리도 그것을 잘 압니다. 그래서 더 고통스럽고 아프고 후회스럽지요. 그리고, 벼룩이도 낯짝이 있다고 그런 경우에는 좀처럼 하나님께 도와 달라고, 살려 달라고 기도하기가 힘듭니다. 그런데요. 제가 경험해 보면요. 저에게는 방법이 없습니다. 하나님 밖에는 답이 없어요. 그러니 이럴 때는 누구라도 하나님 앞에서 마음이 낮아질 데로 낮아질 수 밖에 없습니다. 평상시에는 그렇게 당당하게 큰 소리로 기도를 하다가도 이런 형편이 되면 기도를 하면서도 말조차 제대로 이어가지 못합니다. 그런데요. 성도 여러분. 정말 놀랍지요. 하나님은 우리가 이렇게 낮아진 마음으로 드리는 그 기도를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그 기도를 들어 주십니다. 도무지 내가 벗어날 수 없는 죄의 중독이 끊어지게 하시고, 우리가 저지른 죄의 결과를 치워 주십니다. 그 짐을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으로 줄여 주십니다. 그렇게 우리를 묶고 있던 죄의 쇠사슬을 끊고 우리를 가두고 있던 죄의 문 빗장을 부수시고 우리를 죄에서 빼내 주십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실 때 하나님이 가장 즐겨 사용하시는 도구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 19절과 20절을 함께 읽어 볼까요? “이에 그들이 고통 때문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가 그들의 고통에서 그들을 구원하시되 그가 말씀을 보내어 그들을 고치시고 위험한 지경에서 건지시는 도다” 여러분, 정말 희안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말씀을 떠나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겁니다. 그 죄 때문에 고통을 자초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되는 것이고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고치시고 또 그런 상황에서 건져 주시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떠나 문제가 되었으니 말씀이라는 치료약을 사용하시는 것인가요?
성도 여러분, 인간의 어리석음은 스스로가 고칠 수 없는 질병입니다. 인간의 어리석음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 사람 속에 들어와 움직이기 시작할 때 비로소 고쳐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비록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났어도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주십니다. 그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어리석음을 고쳐 주시고, 그 말씀으로 위험한 지경에서 우리를 건져 주십니다. 진리와 능력인 하나님의 말씀이 그 사람을 고치고, 상황을 바꾸는 능력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다 그렇습니다. 대단히 잘 믿는 것 같아도요. 우리는 늘 하나님의 말씀에서 멀어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떠날 뿐입니다. 그것이 자신을 죄의 사슬에 묶이게 만들고, 자기 인생을 어리석게 만들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래도 여전히 우리는 고집스럽게 그렇게 살아갑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의 기도도 들어 주십니다. 그 기도를 듣고 우리를 풀어 자유케 해 주시고, 말씀을 통해 우리의 어리석음을 고쳐 주시며, 망가진 우리의 삶을 수선해 주십니다. 우리는 올해도 그런 은혜를 수도 없이 경험해 왔습니다. 그래서, 올해도 우리는 그런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감사의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참되고 깊은 감사가 그렇게 힘이 드는 것은 우리의 감사가 너무나도 보이고 만져지는 것에만 붙들려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실 때, 우리는 그 때도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하지만, 만약에 우리의 감사가 거기에만 머물러 있게 된다면, 우리의 감사는 늘 드물고 빈약한 감사가 될 것입니다. 감사절마다 억지로 감사의 제목을 찾아야 하는 그런 감사가 되고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의 감사와도 별로 다를 것이 없는 그런 감사가 될 것입니다. 그 분들도 그렇게 좋은 것을 얻으면 감사할 줄 아니까요.
오늘 우리는 시인의 감사와 찬양을 따라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이 정말로 감사드려야 할 은혜가 무엇인지를 살펴 보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속량셨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값주고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귀한 공동체를 주셨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위한 믿음의 증거가 되고 버팀목이 되어 주라고 이 교회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일 때마다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의 현실적인 필요를 채워줄 수 있는 것들은 많지만, 우리의 영혼까지 만족시켜 주시는 분은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죄의 쇠사슬에서 자유케 하십니다. 죄의 중독을 끊어주시고, 죄의 결과에서 우리를 풀어 주십니다. 죄의 짐을 감하여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어리석은 우리를 고치시며, 그 말씀의 능력으로 우리의 곤경을 해결해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성도에게는 성도만의 차별된 감사가 있어야 합니다. 거룩하게 구별된 감사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 감사를 되찾아 감사하며 살아갈 때, 우리는 아마도 성도의 진짜 복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맛보게 사는 참으로 행복한 성도들이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속량받은 성도가 드려야 하는 마땅한 감사를 회복해서 늘 복되고 은혜가 넘치는 삶을 사는 특별한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