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 2019년 11월 24일 일요일
본문 : 요한복음 11장 17-44절
우리는 지지난 주일에 오늘 본문의 앞부분을 살펴 보면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방법이 때로 우리의 생각이나 기대하고 너무나 달라서 우리가 미처 그 사랑을 제대로 헤아릴 수 없을 때도 있지만, 그것이 바로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가장 깊고 큰 사랑일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것은 너무 당연한 것이지만 우리는 너무나 자주 이것을 잊습니다. 그래서, 낙심하고 원망하며, 마음에 분노를 품게 되지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의 사랑은 완전한 사랑입니다. 거룩하고 흠이 없는 사랑이에요. 우리의 사랑에는 늘 우리의 이기심과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환심을 사고 싶어하는 우리의 사심이 포함되어 있지만 주님의 사랑은 전혀 그렇지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의 설명처럼 예수님의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유익만을 찾으시지요. 그래서 때로는 그 사랑이 당장은 쓰라리고 굉장히 아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와 마르다, 그리고 나사로를 깊이 사랑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랬기 때문에 나사로가 죽을 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으시고도 이틀씩이나 더 계시던 곳에 머무셨고, 나사로가 죽은 지 사흘이 지나서야 베다니에 도착하셨습니다. 우리가 가진 사랑의 논리를 내려놓고, 이 역설적인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우리는 우리 주님이 정말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볼 수 있고, 그 사랑을 의심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때로 내 삶에 벌어지는 이런 저런 일들 때문에 주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으시는 것 같이 느껴질 때, 그 때도 주님은 다른 방식으로 나를 더 깊고 완전하게 사랑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기억해 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생각을 거기에 집중하시고 반드시 그 시험을 이겨내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 17절 말씀인데요. 이것이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도착하셨을 때의 상황이었습니다.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나흘이 지났습니다. 여러분, 이 구절이 우리에게 무엇을 이야기하고 알려주려고 하는지 아시겠지요? 오늘 죽은 것도 아닙니다. 어제 죽은 것도 아니고요. 이미 장사된 지 나흘이 지난 상태였습니다. 무덤 입구는 커다란 돌로 봉해져 버렸고, 당연히 그 안에 장사지내진 나사로의 시신은 부패되고 있었습니다. 나사로는 완전히 죽음에 먹혀 버렸습니다. 나사로의 죽음은 그 누구도 돌이킬 수 없는 기정사실이 되어 버렸습니다. 마리아와 마르다가 아무리 슬퍼해도,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위로하고 함께 곡을 해도 죽은 나사로는 절대로 다시 살아있는 사람이 될 수 없었고, 그것이 나사로의 죽음을 맞닥뜨린 모든 사람의 생각이었습니다.
죽음 앞에 서면 사람은 그 죽음에 갇혀 버립니다. 다시는 거기서 빠져 나올 수 없게 죽음에 붙들려 버리고 맙니다. 지금은 이렇게 살아있고, 그래서 맛있는 것도 먹을 수 있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수다도 떨 수 있고, 선하고 좋은 일도 할 수 있습니다. 실수를 하고 잘못을 저질러도 사과를 하고 바로 잡을 수 있지요. 하지만, 죽음은 그 모든 일들을 더 이상은 불가능한 일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렇게 사람을 꽁꽁 묶어 버리고 가둬 버립니다. 그런데, 죽음은 죽음을 당하는 사람만 그렇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사람이나 지인의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들도 똑같이 묶어 버립니다. 산 사람들에게 죽은 사람은 이제는 더 이상 없는 사람입니다. 살아있을 때는 함께 울고 웃고 떠들고 기뻐하고 슬퍼하고 싸우고 같이 장난도 치고 놀기도 하지만, 그 사람이 죽으면 더 이상 그 사람과 함께 할 수 있는 일이 남질 않습니다. 보고 싶어도 볼 수가 없고, 부르고 불러도 대답을 들을 수가 없으며, 아무리 찾고 또 찾아도 찾을 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그렇게 죽음은 죽음을 맞이한 사람들 뿐만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들도 그 죽음에 가둬 버리고 맙니다. 그 죽음 앞에서는 슬퍼하고 그리워하고 안타까워 하는 일 밖에는 정말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존재가 되게 하니까요.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저희 선친이 돌아가셨을 때, 꿈속에서 통곡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꿈 속에서 저는 본가에 들렀습니다. 집에 들어가자 마자 안방을 들여다 보면서 아버지를 불렀습니다. 하지만 그 때 제 눈에 들어온 것은 아버지가 아니라 그 아버지가 늘 앉아계시던 빈 의자였습니다. 꿈 속에서 저는 그 자리에 앉아 통곡을 했습니다. 살아계실 때는 단 한 번도 보고 싶었던 적이 없었던 그 아버지가 보고 싶어서 통곡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로 한 5년 동안은 문득문득 아버지 생각이 나면 그게 그렇게 힘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힘들어 하고, 그리워하는 것 밖에 제가 달리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습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 속에서 그렇게 죽음에 갇혀 버린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먼저 마르다입니다. 마르다는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동구 밖까지 마중을 나갑니다. 자기들을 그렇게 사랑했던 예수님, 나사로를 그렇게 아껴 주셨던 예수님께서 오셨다니 죽은 나사로가 살아온 것처럼 느껴졌는지 한 달음에 거기까지 뛰어 갔지요. 나중에 마리아도 그렇게 말하지만 마르다도 똑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나사로가 죽지 않았을 겁니다.” 우리는 이 말을 꼭 예수님을 원망하는 말로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을 향한 믿음의 표현이었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이 죽을 병에 걸린 사람, 곧 죽을 사람도 다시 살리실 수 있다는 것을 믿고 있었고, 그래서 너무도 안타까운 마음에 그렇게 말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마리아는 그 뒤에 놀라운 말을 덧붙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정말 놀라운 고백입니다. 마르다는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를 너무나 잘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구하시는 것이라면 하나님은 무엇이든지 들어 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말이지요. 그래서 마르다는 ‘무엇이든지…’라고 말했습니다. ‘지금이라도…’라고 말했고요. 이게 무슨 뜻일까요? 마르다는 무슨 뜻이로 이렇게 말했던 것일까요? 상식적으로 보면, 이것은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는 일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말이 그런 뜻이 아니라면 그 어떤 일이 일어나도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오라비가 살리라” 이것은 마르다가 ‘지금이라도 무엇이든지…’라고 말한 것에 대한 대답이었기 때문에, ‘지금 내가 네 올아비를 다시 살릴 것이다’라는 뜻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것말고 달리 해석할 방법이 없지요. 그런데, 마르다는 이 말씀을 듣고도 깜짝 놀라거나 다시 한 번 되묻지도 않습니다. 그저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라고만 대답합니다. 아마 마르다는 예수님께서 슬픔에 빠져 있는 자신을 위로하시기 위해서 언젠가는 나사로가 부활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에 그렇게 응대한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다시 한 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은 나는 나중에 언젠가가 아니라 지금도 부활이고 지금도 생명이기 때문에 나는 언제든지 나를 믿는 사람은 살릴 수 있고, 그 사람에게 영생을 줄 수 있는데, 너는 이것을 믿을 수 있겠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그러자, 마르다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렇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이시고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습니다.” 너무나 훌륭한 고백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완벽한 신앙고백이지요. 마르다는 놀랍게도 거의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몰랐을 때, 예수님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고 믿고 있었을 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분명하게 밝혔던 것입니다.
여기서 여러분에게 하나만 물어 볼까요? 그렇다면 마르다가 이 고백을 한 시점에서 마르다는 예수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라고 하시면서 들려주신 말씀을 알아들었을까요, 알아듣지 못했을까요? 그 말씀을 믿었을까요, 믿지 않았을까요? (그렇습니다. 믿지 않았습니다) 마르다가 분명히 ‘주여 그렇습니다’라는 말로 대답을 시작했고, 그렇게 훌륭하고 완벽한 믿음을 고백했으니까 그가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고, 예수님이 당장 나사로를 다시 살리실 것을 믿었을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가 못했습니다. 믿기는 커녕 예수님의 말씀이 그런 뜻을 담고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무덤을 막고 있던 돌을 치우라고 했을 때, 마르다가 “주님, 죽은 지가 이미 나흘이 지나서 벌써 냄새가 납니다”라고 하면서 만류했던 것을 보면 그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면서도 예수님이 나사로를 다시 살리실 것을 생각조차 못했다? 우리가 보기에는 참 이상해 보이지만, 이것이 바로 죽음에 묶이고 죽음에 갇혀 버린 인간의 부조리한 모습입니다. 인간에게 죽음은 말 그대로 끝입니다. 그 이후에는 아무 것도 없고,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마지막, 그것이 바로 죽음입니다. 그래서, 죽음을 맞닥뜨린 인간은 그 다음을 생각할 수 없게 되어 버립니다. 죽음이라는 변경할 수 없는 사실에 완전히 묶여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남의 일이 아니라 나의 일이라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일이라면 더더욱 그렇게 되기가 쉽습니다. 죽음이라는 장벽 앞에서 그 너머는 내다보거나 생각할 수 없는 그런 상태가 되어 버리지요. 죽음보다 더 지독한 병이 절망이라는 말이 괜한 말은 아닌 듯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리아도 만나셨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도 똑같았습니다. 마리아도 예수님이 여기 계셨다면 나사로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만 되풀이 할 뿐이었지요. 자기 앞에 예수님께서 서 계시는데도 따라 온 호상꾼들과 함께 계속해서 울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그렇게 보면 마르다 보다는 마리아의 상심과 슬픔이 더 크고 깊었던 것 같습니다.
마리아와 마르다를 위로하려고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인들도 그랬습니다. 그들이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마리아와 마르다와 함께 울어주는 일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습니다. 이들은 비통해 하시는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그 중에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의 눈물을 보면서 예수님의 나사로를 향한 사랑의 감동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던 다른 사람들은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사람이 자기가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을 죽지 않게 할 수는 없었느냐고 빈정거렸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감정에 따라 유대인들이 보인 반응은 달랐지만, 이들에게도 나사로의 죽음은 바꿀 수 없는 기정사실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눈물에 대해서 이러쿵 저러쿵 평가를 덧붙일 수는 있었지만, 정작 나사로의 죽음에 대해서는 할 말도, 할 수 있는 일도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죽음은 나사로와 베다니 마을을 꽁꽁 묶고 있었습니다. 그 누구 하나 그 죽음에 반항하거나 대꾸를 하는 사람조차 없었지요. 죽음은 그렇게 죽은 나사로 뿐만 아니라 죽지 않은 사람들까지도 자기 안에 가둬놓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마을로, 그 죽음의 올가미 한 가운데로 예수님께서 들어오셨습니다. 예수님도 우셨습니다. 눈물을 흘리셨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었기 때문에 운 것이 아닙니다. 그 죽음 앞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어서, 그게 슬프고 절망스러워서 우신 것이 아닙니다. 33절도 그렇고, 38절을 보아도 그렇고 요한복음이 예수님의 슬픔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반복해서 말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비통해 하셨다”는 것입니다. 비통함이 무엇일까요? 비통함은 슬픔은 슬픔이지만 그냥 슬픔이 아닙니다. 단순히 깊은 슬픔도 아닙니다. 비통함은 분노를 동반한 슬픔입니다. 아니, 분노가 만들어 낸 슬픔이 비통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슬픔을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느끼는 그런 슬픔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날 거기 있었던 유대인들의 슬픔처럼 말이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그냥 슬퍼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비통해 하셨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예수님은 단 한 번도 나사로의 죽음 자체를 슬퍼한 적이 없습니다. 심지어는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도 예수님은 눈물을 보이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신 것은 마르다와 마리아, 그리고 거기 모인 모든 사람들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죽음에 묶이고 갇혀버린 하나님의 형상들을 보시면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죄 때문에 영생을 잃어버리고 죽음 앞에 좌절하고 있는 인생들을 보시면서 그것 때문에 화가 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게 너무나 불쌍하고 화가 나서 그렇게 비통해 하시며 눈물을 흘리셨던 것입니다. 사실 사람들에게도 이런 비통함이 있습니다. 죽음이 그런 식으로 귀한 사람들을 데리고 가고, 우리와 그들 사이를 갈라 놓을 때, 우리는 죽음에게 화를 내고 화를 내다가 눈물을 흘리지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우리는 그 죽음에 대해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 비통함을 가지고 죽음 속으로 뛰어 들어서 그 죽음의 사슬을 끊어 버리십니다.
나사로의 무덤으로 가신 예수님은 그저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돌을 옮겨 놓으라” 마르다는 당황했습니다. 그래서 말했지요.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습니다. 벌써 냄새가 납니다.” 사실이었습니다. 그렇게 좋은 천으로 싸고, 그렇게 좋은 향품을 발라, 커다란 바위로 봉해 놓았지만, 배어 나오는 죽음의 악취는 막을 길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죽음의 냄새는 이제는 그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조차 그에게로 가까이 가지 못하도록 그들 사이를 가로 막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게 예수님께도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죽음이 풍기는 악취 앞에서도, 모든 것이 끝났다고,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당당히 버티고 서 있는 그 돌문 앞에서도 예수님은 물러서지 않으셨습니다. 그대로 거기 서서 “내 말에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않았느냐?”는 말만 하셨습니다.
하는 수 없이 돌을 치웠습니다. 안에서 진하게 번져 나오는 죽음의 악취는 사람들의 슬픔을 불쾌함으로 바꿔 놓았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그런 후에 큰 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너라” 도대체 뭐하는 짓입니까? 이미 죽었습니다. 죽은 지가 사흘이 지났어요. 이미 무덤 안에서는 거부할 수 없는 죽음의 악취가 진동하고 있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방 안에 있는 아이 불러내듯이, 작게 말하면 듣지 못할까봐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너라”라고 냅다 소리를 지르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웅성대기 시작합니다. 대부분은 화가 났습니다. 고인과 유족들에게는 그것만큼 모욕스러운 일이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믿기지 않는 일이 일어납니다. 나사로가 온 몸에 수의로 쓰는 천을 감은 채로 무덤에서 나온 것입니다. 머리 쪽에서 발 쪽으로 온 몸을 두 바뀌 쯤 천으로 말고 허리와 가슴, 다리 부분을 묶어 놓았으니 그 모습이 어땠을까요? 그 순간 비극은 희극이 되었을 겁니다. 슬픔은 기쁨이 되고 눈물은 웃음이 되었겠지요. 나사로는 온 몸을 하얀 천으로 둘러싼 채로 두 발로 통통 튀어서 나왔을 테니까요. 아마 모르긴 몰라도 예수님도 함께 웃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아차 싶어 그렇게 말씀하셨겠지요.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고요.
인간에게 죽음이란 마지막을 뜻합니다. 그저 받아들일 밖에 그 어떤 것도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마지막 중의 마지막, 그것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죽음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음 앞에서 절망합니다. 죽음 앞에서 슬퍼하고요. 죽음 앞에서 발버둥을 치며, 반항하고 화도 내지요. 하지만, 그래도 죽음은 요지부동입니다.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죽음은 결국 사람을 묶어 버립니다. 모든 사람을 꽁꽁 묶어서 자기 안에 완전히 가둬버립니다. 죽는 사람도, 그 뒤에 남겨진 사람도, 죽음은 모든 사람을 철저히 절망하게 하며, 그 앞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자로 만들어 버립니다. 죽음을 두려워하며 살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 안에 갇혀서 죽음 이상은 생각할 수도 없고, 그 밖을 내다 볼 수도 없는 그런 사람으로 만듭니다.
예수님은 이런 인간들을 사랑하셨습니다. 그것도 아주 많이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무엇보다도 사람들을 죽음에서 풀어 주고 싶어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싶은 것이 당연한 것이니까요. 예수님은 그래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우리를 묶고 있는 죽음이라는 쇠사슬을 끊어주시려고 말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여전히 ‘죽음’이 해결될 수 있는 문제라는 것을 믿지 못합니다. 그래서, 마르다처럼 ‘무엇이든지…’라고 말할 때에도 그 말 속에 ‘죽음을 이겨내고 죽음을 넘어선 삶을 사는 일’은 포함시키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계시던 곳에 일부러 이틀을 더 머무셨습니다. 그리고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 지나서야 베다니에 나타나셨지요. 그리고 이제는 죽음의 악취만 풀풀 풍기는 나사로를 향해 “나사로야 나오너라”라는 말씀 한 마디로 나사로를 무덤에서 스스로 걸어나오게 하셨습니다.
만약 그들이 그 날 그 일로,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면 거기 있었던 사람들의 삶은 어떻게 달라졌을까요? 그렇게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나사로의 삶은 또 어떻게 달라졌을까요? 이제 그들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그리고 자기들에게 무엇을 주실 수 있는지를 분명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정말로 부활이요 생명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으면 죽어도 다시 살고, 살아서 믿으면 영원히 죽지 않게 됩니다. 그렇게 죽음을 이기고, 죽음에서 풀려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 날 그들은 그것을 눈으로 보고 확인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 날 이후에도 그들은 여전히 그렇게 죽음을 두려워 하며, 죽음 앞에서 절망하고, 죽음에 갇혀서 살았을까요? 하루 하루 살아가는 일에 매이고, 미래의 걱정에 묶여서 그렇게 살았을까요?
많은 사람들이 자기는 사는 게 두렵지 죽는 것은 두렵지 않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앞뒤가 맞지 않는 말입니다. 정말로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은 사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사는 게 두렵다는 말은 사는 것 자체가 두렵다는 말이 아닙니다.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 어디 살아야 할까… 그런 것이 걱정된다는 뜻이고, 그런 것을 충분히 얻지 못하거나 빼앗기게 될까봐 그게 두렵다는 뜻이지요. 그런데, 사람들이 이런 것들 때문에 걱정하고 두려워 하는 것은 그런 것들이 없거나 빼앗겨 버린 채로 사는 것이 마치 죽음과 같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때로 농담 삼아 던지는 “어떻게 그렇게 하고 사니?”라는 말 속에는 그것을 두려워 하는 본능적인 두려움이 들어 있는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래서,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절망하고 슬퍼하는 사람들 앞에서 무덤에 들어간 지 나흘이나 지나 완전히 죽어버린 나사로를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리고는 오늘 우리에게 “나는 부활이고 생명이다. 그래서 나를 믿으면 그 사람은 죽어도 다시 산다. 그리고 내가 주는 영원한 생명 덕분에 죽음을 두려워 하고 사는 것을 두려워 하며 살지 않아도 된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고 묻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예수님은 부활이실 뿐 아니라 생명이기도 하십니다. 마지막 날에 성도들을 다시 살리실 뿐 아니라, 지금 여기서 두려움과 근심, 걱정같은 작은 죽음들로부터 자유로운 영생을 살게 해 주십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죽음에서 이중으로 자유롭습니다. 먼저 죽음 자체가 주는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죽어도 산다는 것을 아니까요. 둘째로 죽음을 닮은 삶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도 자유로워집니다. 이미 그런 죽음들로는 어쩔 수 없는 영생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그렇게 해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그러셨듯이 죽음을 정복한 정복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지극히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부활과 영생입니다. 그 부활과 영생이 있어야 우리가 우리를 묶고 가두는 죽음이라는 놈을 넉넉히 이길 수 있으니까요. 예수님은 우리에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고?” 묻고 계십니다. 이 결정적인 질문에 대한 우리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주님께 어떤 대답을 드리시겠습니까?
우리 모두 다 한 사람도 빠짐 없이 모두 다 참으로 예수 믿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부활의 소망과 영생의 능력 속에서 우리를 묶으려 하는 죽음과 죽음을 닮은 모든 것들을 넉넉히 이기며 사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