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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9.12.01. 요한복음 11장 45-57절 -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우니"

 

 

날짜 :  2019년 12월 1일 일요일

본문 :  요한복음 11장 45-57절 

 

 

지난 두 주간에 걸쳐 우리가 살펴 본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방식이 우리 생각과는 많이 다를 때가 있다는 것과 나머지 하나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주시고 싶어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제 경험으로 보면 때때로 특히 결정적인 일에 있어서는 예수님의 사랑방식이 우리가 기대하는 방식과 정말 많이 다를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저 우리 입장에서만 보면 그것이 나를 향한 예수님의 깊은 사랑이라는 것을 보지 못하지요. 예수님은 우리에게 당장에 좋은 것을 주시는 방식으로 우리를 사랑하지 않으십니다. 당장 좋은 것과 진짜로 유익한 것이 서로 다른 경우에 예수님은 비록 우리가 그것이 예수님의 사랑이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할지라도 우리에게 진짜로 유익한 것을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사로를 죽지 않게 하실 수 있었습니다. 베다니에 계시지 않았어도, 멀리서도 충분히 그를 고쳐 주실 수 있으셨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나사로를 그냥 죽게 내버려 두셨습니다. 그리고 사흘이나 지나서야 베다니에 도착하셨지요.그것 때문에 마르다와 마리아가 많이 슬퍼하고 낙심했고, 예수님께서도 그럴 것을 아셨지만 일부러 늦게 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그렇게 해야 병든 나사로를 살려 주시는 것보다 훨씬 더 크고 좋은 것을 주실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부활과 영생을 주시는 분으로 믿는 믿음을 말이지요.

인간은 본성적으로 피상적이고 찰나적인 것에 끌립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은 늘 본질적이고 영원한 것에 관심을 가지고 계시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본질적이고 영원한 것을 주고 싶어하십니다. 우리에게 피상적이고 찰나적인 것이 전혀 필요 없어서 그러시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몸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무시하시기 때문에 그러시는 것이 아니고요. 우리가 본질적이고 영원한 것을 먼저 가져야 비로소 있다가 없어지는 것들이 우리의 삶을 흔들고 무너뜨리려고 할 때, 버텨낼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참된 믿음이 있으면 우리는 죽어도 다시 사는 부활의 소망 속에서 살게 됩니다. 일단 그렇게 육체적인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이기게 되지요. 그리고, 예수 믿는 참된 믿음이 있으면 그 사람은 ‘영생’을 가지게 됩니다. 이 땅에서 그 영생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제가 이번에 나사로 이야기를 묵상하면서,‘영생’이라는 것이 도대체 진짜로 뭘까 하고 다시 한 번 영생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계속 묵상하고 기도하다가 얻은 답은 의외로 간단했습니다. 영생은 다른 것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살아가는 삶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계셨을 때, 이 세상의 죽음을 닮은 것들에 굴복하지 않으셨습니다. 죄, 욕심, 미움과 분노, 생활이나 생명에 대한 근심과 걱정, 세상을 두려워 하는 두려움, 불의와 폭력, 위선이나 절망 같은 악한 것들에 지지 않으셨고, 그런 것들에 삼켜지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 안에는 이런 것들로는 어쩔 수 없는 강하고 풍성한 생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고 싶어하시는 것은 바로 이 강하고 풍성한 생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그 생명 가지고 예수님처럼 능력있게 살아가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으면서 적당하게 좋은 것들을 얻고 누리는 일에만 관심을 둘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적당히 좋게 살아갈 수도 있겠지요. 그것도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하나의 방식이 될 수 있을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다른 것이 아니라 부활의 소망과 영생을 주고 싶어하신다면, 우리도 그것을 얻어서 죽음도 집어 삼킬 수 없는 평안하고 담대한 삶을 살아가는데 우리의 관심을 두어야 하지 않을까요? 찰라적이고 피상적인 것들이 아니라 그렇게 영원하고 근본적인 것을 구하며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서 영원히 목마르지 않고 배고프지 않게 해 주는 비밀스러운 행복과 든든함을 아는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예수님은 그것 때문에 베다니로 가셨습니다. 유대인들이 당신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잘 아시면서도 마리아와 마르다, 그리고 나사로에게 부활과 영생을 주시고, 거기 모여든 유대인들에게도 같은 것을 얻을 기회를 주시기 위해서 그리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죽은 지 나흘이 지난 나사로를 다시 살려 내셨습니다. 거기 모인 모든 사람들은 예수님이 부활이요 생명이시라는 것을 두 눈으로 지켜볼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일에 대한 유대인들, 그러니까 예루살렘에서 마르다와 마리아를 위로하기 위해서 왔던 사람들의 반응이 어떠했는지를 알려주면서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처음 듣게 되는 소식은 너무나 기쁜 소식입니다. “마리아에게 와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대인들이 그를 믿었다”고 말하고 있으니까요. 요한이 유대인들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대개가 예수님을 좋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적어도 믿지는 않는 사람들이었지요.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런 유대인들을 포기하실 수가 없으셨습니다. 그래도 그들을 사랑하셨으니까요. 그래서, 예수님은 베다니로 오셨고, 그들이 보는 앞에서 나사로를 다시 살리셨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예수님의 사랑은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들 중에 많은 숫자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으니까요. 아직 그 믿음은 완전한 믿음이 아니었지만 이제 그렇게 오래 참으시고 포기하지 않으시는 예수님의 사랑은 그렇게 천천히 유대인들 속에서도 귀한 열매를 맺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요한은 유대인들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지만, ‘그 중에 어떤 사람은’ 바리새인들에게 가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알렸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도 예수님께서 죽은 사람을 살리셨다는 사실을 믿지 않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덕분에 그 동안 자기들이 들어왔던 예수님에 대한 놀라운 소문들이 전부 사실이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지요. 그런데도, 이 사람들은 예수를 믿지 않았습니다. 어떤 의미로든 예수를 믿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에 바리새인들에게로 달려가서 그 사실을 알렸습니다. 뭐라고 이야기했을까요? 아마 그렇게 이야기했을 겁니다. “큰 일 났습니다, 선생님, 예수라는 사람이 죽은 사람을 살렸어요. 이제 우리는 망했습니다.”라고 말이지요. 

사실은 ‘하나’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지 사흘이나 지난 사람을 다시 살렸다는 것. 그것이 유일한 사실이었고 모두가 그 일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하지요?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 일이 예수를 믿어야 할 이유가 아니라 자기 삶에서 예수를 완전히 밀어내야 할 이유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왜 어떤 사람들은 자기 눈으로 나사로가 무덤을 걸어 나오는 것을 보았으면서도 이전보다 더 심하게 예수님을 밀어내려고 했을까요? 우리는 그 이유를 그 소식을 전해들은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소집한 다음 나누었던 이야기 속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만일 그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그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겉으로 보기에 이들은 나라와 민족의 앞날을 걱정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나라와 민족을 지키려면 그 일이 옳지 않아도 하는 수 없이 저 사람을 제지해야 하지 않느냐 하는 그런 말처럼 들리지요. 하지만, 그들은 자기도 모르게 자신의 속내를 드러냅니다. 여기 ‘땅’이라는 말은 유대 땅 전체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확하게 번역하면 ‘우리의 그 자리나 장소’라는 뜻인데, 여기서 ‘장소’라는 말은 성전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말은 정확하게 ‘우리의 그 성전’이라는 말이 됩니다. 바리새인들이 정말로 걱정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성전, 그러니까 자기들의 일터요, 권력과 특권의 상징인 그 성전을 빼앗길까봐 겁이 났던 것입니다. 사실 그들에게는 백성들도 그런 의미 밖에 없었습니다. 백성들이야 말로 그들의 권력과 특권의 원천이었으니까요. 

이런 속내는 대제사장 가야바의 말과 공회의 결정에서도 드러납니다. 그렇게 걱정하고 있을 때, 대제사장 가야바가 나섭니다. 그리고 한심하다는 듯이 얼굴에 비열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그렇게 말하지요. “너희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도다” 무슨 뜻입니까? 정말 순진하다는 겁니다. 뭐 그렇게 고민할 거리도 되지 못하는 것 가지고 고민을 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가야바는 이제 대답을 내놓습니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해서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게 되지 않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알지 못하느냐?” 굉장히 거창하게 들리지만, 요지는 간단합니다. 예수를 죽이면 되니까 예수를 죽이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가야바는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해서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게 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해 놓고 그것이 ‘너희를 위하여 유익하다’고 말합니다. 앞 뒤가 맞지 않습니다. 그 다음에는 ‘나라를 위하여’나 ‘민족을 위하여…’라는 말이 와야 합니다. 그런데, 가야바는 ‘너희를 위하여…’라고 말한 것입니다. 결국 가야바는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다, 무엇이 우리들을 위해서 제일 유리한가 하는 것만 생각하면 된다. 그러면, 답은 예수를 죽이는 것 밖에 없다. 그러니 그건 고민할 문제도 아니다라고 말이지요. 가야바의 이야기가 끝난 순간부터 공회원들의 관심은 한 가지 일에 집중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를 어떻게 죽일 것인가 하는 것. 그것이 그들의 유일한 관심사가 되었습니다. 

예수를 믿어야 할 너무나 확실하고 분명한 증거를 보면, 그 증거를 보는 모든 사람들이 예수를 믿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가 못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일종의 결단입니다. 지금까지의 자기 생각, 자기 고집, 자기의 가치관, 자기가 소중하게 생각했던 것, 그리고 자기가 주인되어 살던 삶, 자신의 은밀한 만족 … 이런 것들을 내려 놓아야 하는 비로소 내릴 수 있는 결단이지요. 물론 그래서 얻게 되는 것은 비교할 수 없이 좋은 것이지만, 그래도 내려놓지 않으면 진짜로 믿을 수 없다는 건 틀림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것들을 내려놓고 예수를 택할 생각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믿음을 돕기 위해 주시는 증거들이 오히려 더욱 더 믿음의 문을 닫아버리고 예수님에게서 멀어져 버리는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셨다는 소식을 알려 준 사람도, 그리고 공회에 모인 모든 사람도… 예수님을 믿겠다는 결단이 아니라 죽이겠다는 결정을 내렸던 것은 그래서 였습니다. 사실 그들은 누구보다도 먼저 예수를 받아들여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누구보다도 성경을 잘 아는 바리새인이고 제사장이었으니까요. 하지만, 그들은 진리보다 구원보다,  심지어는 기다리던 메시야를 영접하는 일보다 자기들이 가지고 있고 누리고 있는 것들이 더 중요했습니다. ‘그 자리’가 더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믿는 대신에 예수님을 죽이려 들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믿음이 무엇일까요? 믿음은 나냐 예수님이냐 하는 싸움입니다. 나를 내려놓을 것인가 아니면 진리를 내려놓을 것인가 하는 싸움이고요. 그 결단의 순간에 바른 결정을 내릴 때, 그것이 바로 믿음이 됩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여전히 나를 내려놓고 못하고, 내 유익을 포기하지 못해서 진리를 거부하고 믿음을 배반하고픈 유혹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유혹에 굴복할 때도 많고요. 그것은 분명히 우리의 연약함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일들이 우리 믿음을 뒷걸음질치게 하며, 우리 영혼이 예수님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주범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준비를 하고서 살아야 합니다. 믿음의 순간, 결단의 순간에 예수님 편에 서고 진리 쪽에 설 수 있는 준비를 해 놓아야 하지요. 그래야 하나님께서 주시는 믿음을 위한 결정적인 기회가 시험과 실패로 끝나지 않고 우리의 믿음으로 열매맺힐 수 있습니다. 그런 순간을 아무 준비 없이 대처하려고 하면 우리들도 그 때 공회 안에 있었던 그 사람들처럼 실패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공회가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 속에 있는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니까요. 그래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다가 가시지 않고 더 멀리 가셨습니다. 빈 들 근처의 에브라임이라는 곳으로 가셔서 거기 꽤 오랫동안 머물러 계실 수 밖에 없으셨습니다. 아직은 공회에 붙들려 고난을 받으실 때가 아니었고, 아직은 할 일이 더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게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상황으로 보면 이제는 예수님이 본격적으로 자신을 드러내셔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예수님을 죽은 사람을 살리시는 분으로 알게 되었으니까요. 하지만, 자기를 지키고 자기가 가진 것을 지키자고 예수님을 밀어내려는 공회원들 때문에 예수님은 사람들 앞에 나서지를 못하신 것입니다.  

그러는 중에도 그 아까운 시간은 계속 흘렀고,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땅위에서 보내신 마지막 유월절, 그러니까 이 세상의 마지막 유월절이 다가오고 있었는데요. 요한은 그 당시의 예루살렘의 분위기를 이렇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우선 시골에서부터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미리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사람들 덕분에 예루살렘은 제법 북적 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성전에 모여든 사람들의 관심은 온통 예수님께 쏠려 있었습니다. 우선 사람들은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그러다가 이번 명절에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오실지 말지를 궁금해 하면서 서로 그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이미 예루살렘 당국자들은 누구든지 예수님이 계신 곳을 아는 사람이 있다면 신고해서 잡게 해야 한다고 공포하고 수배령을 내렸지만, 예수님에 대한 사람들의 커져가는 관심을 아무도 막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이렇게 전부가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일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믿었습니다. 하지만 어떤 유대인들은 믿지 않았고, 그 중에 또 어떤 사람은 그 일로 위협을 느껴서 그 사실을 당국자들에게 알리기도 했습니다. 공회원들은 모여 들어서 자기를 지키고 가진 것을 지키자고 예수님을 죽이겠다는 결정을 내렸고요. 그리고 이제 예수님은 시골 사람들에게까지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 관심이 곧 믿음은 아니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이미 태풍의 눈이 되어 계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요한이 들려주는 본문 말씀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 이야기 속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꼭 들려주고 싶어하시는 숨겨진 이야기가 하나 더 들어 있습니다. 그 이야기는 바로 마지막 유월절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앞에서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너무나 사랑하셨고, 또 사람들을 너무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들에게 부활과 영생을 주고 싶어하셨고, 그래서 그것을 얻을 믿음을 주신 것을 보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부활과 영생은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최고의 사랑의 선물입니다.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영생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 그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가장 좋은 선물이지요. 그런데, 이제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서 부활과 영생을 가진 자들이 되었을까요? 우리 주님은 아무 댓가도 치르지 않고서 그 귀한 것을 우리에게 주셨을까요?  

우리는 그 대답을 나사로의 이야기와 오늘 본문 말씀 곳곳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우선 본문은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신 그 일 때문에 예수님께서 죽음을 당하게 되었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서 공회가 모였고, 거기서 예수님을 없앨 결정을 내리고 그 방법을 모의하게 되었으니까요. 나사로는 그의 생명을 거저 얻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것을 위해서 나사로가 치른 댓가는 전혀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생명이 그에게 공짜로 주어진 것은 아닙니다. 나사로가 사는 대신에 예수님이 죽게 되었습니다. 나사로가 무덤에서 걸어 나오는 대신에 예수님이 무덤으로 들어가셔야 했지요. 나사로가 다시 생명을 얻는 대신에 예수님은 생명을 내놓으셔야 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 안에서 새 생명을 얻었습니까? 부활과 영생을 얻었나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제 죽음의 두려움이 없고, 절대로 죽음에 잡아 먹히지 않는 능력있는 생명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생명 어떻게 해서 얻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누구의 생명입니까? 그렇습니다. 그것은 예수의 생명입니다.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대신 내어놓으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입니다. 나사로의 부활 때문에 예수님께서 죽음을 당하셔야 했던 것처럼 우리가 얻은 바로 그 생명 때문에 우리 주님은 당신의 귀한 생명을 내놓으셨던 것입니다. 

가야바의 악독하고 불의한 주장 속에도 그 이야기는 이야기는 계속 메아리치고 있습니다. 가야바는 말하지요.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 도다”라고. 가야바는 자신의 악한 지혜를 총동원해서 진지하게 자신의 의견을 말했습니다. 자기들이 가진 것들을 지키기 위해 죄 없는 희생양을 만들자고요. 그런데, 요한은 가야바의 그 악독한 말이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죽음이 어떤 죽음인지를 알려주시기 위해서 그에게 미리 말하게 하신 ‘예언’이었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아주 신비하고 이상한 이야기지이지요. 그런데요, 성도 여러분.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죽음이 온 세상에 생명을 주기 위한 유월절 어린 양의 죽음이라는 것을 어떻게든 한 번이라도 더 말해주고 싶어 하십니다. 이 세상에 그 복음을 듣고 믿는 것보다 더 귀하고 값진 것은 없으니까요. 그래서, 악을 선하게 바꿔 사용하시는 하나님께서는 가야바의 그 사악한 말 속에 이 세상 가장 복되고 은혜로운 대속의 복음을 담아서 온 세상을 향해 선포하게 하고 계십니다. 들으라고, 꼭 들어야 한다고. 내 아들의 죽음 덕분에 너희가 새 생명을 얻었고, 부활과 영생을 누릴 수 있게 되었으니 듣고 믿으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왔습니다. 시골에서 부터 올라온 순례객들이 예수님을 찾다가 서로에게 묻습니다. 이번 유월절에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오겠느냐고, 올 것 같은데 당신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말이지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수님은 이번 유월절에 예루살렘으로 오실까요? 공회가 예수님을 잡겠다고 수배령까지 내려놓았는데, 그래서 그리로 들어가면 죽을 것이 뻔한 데도, 그래도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오실까요? 그렇습니다. 오십니다. 오실 수 밖에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예수님이 그 유월절의 어린양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목숨을 내어 주시지 않으면 그 누구도 죄용서를 받고 정결함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부활을 얻고 영생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 마지막 유월절의 어린 양이 되어 예루살렘으로 걸어들어오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만큼 이 세상을, 그리고 우리를 사랑하시니까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부활과 영생을 주고 싶어하십니다. 죽음을 이기고 살라고, 죽음에 먹히지 말고 예수님처럼 살라고 말이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아주 깊이 깊이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부활과 영생을 주시려고 당신의 생명을 대신 값으로 지불하셨습니다. 그러고 보니 벌써 12월이네요. 성탄절이 다가옵니다. 성탄절은 우리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가장 기쁜 날입니다. 그런데, 성탄절이 우리에게 이렇게 기쁜 성탄절일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유월절 어린 양이 되어 십자가에 달리셨던 그 마지막 유월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탄절이 되면 우리는 사랑이 담긴 귀한 선물들을 주고 받지만, 우리 하나님은 성탄절에 당신의 독생자를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유월절 어린 양이 되어서 우리 죄를 씻어 정결케 하며 우리의 부활이요 생명이 되어주라고 당신의 외아들을 우리에게 선물로 아낌 없이 내어 주셨습니다.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 일과 가야바의 악하고 불의한 이야기, 그리고 성전 문 앞에서 나누는 시골 촌부들의 대화 … 그 해 유월절 즈음의 유대 땅 곳곳에서는 진짜 유월절의 이야기가 여기 저기서 울려 퍼지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온 세상은 하나님의 어린 양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날을 준비하며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따가도 말씀을 드리겠지만, 교회에서는 성탄절을 맞이해서 전교인이 함께 사복음서를 읽는 시간을 가져 보려고 합니다. 꼭 모두 다 함께 참여해 주셨으면 합니다. 개인적으로 성경을 읽고 계시는 것이 있더라도 잠시 멈추시거나 혹은 거기에 더해서 주보 속지에 기록되어 있는 일정을 따라서 같이 찬찬히 묵상하면서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이번 성탄절에는 그렇게 함께 성탄절에서부터 유월절까지, 말구유에서 십자가를 향해 걸어가신 우리 주님의 발걸음과 주신 말씀들을 더듬어 가 보았으면 합니다. 

성탄절은 사랑입니다. 그리고, 유월절은 더 큰 사랑입니다. 주님 오신 이 계절에 우리 모두의 영혼 속에 참 유월절의 깊은 사랑 이야기가 다시 한 번 크게 울려 퍼지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