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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9.12.15. 요한복음 12장 12-19절 "예수는 한 어린나귀를 보고 타시니(요한복음 41)

 

날짜 :  2019년 12월 15일 일요일

본문 :  요한복음 12장 12-19절 

 

우리는 저마다 다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이름이 불릴 때만 거기 반응하지요. 이름의 중요한 역할은 구분점이 되는 것입니다. 나의 이름과 저 사람의 이름이 다른 것은 나는 저 사람이 아니며, 저 사람은 내가 아니라는 뜻이 되지요. 그리고, 처음에는 그렇지 않지만, 시간이 흐르고 나이를 먹어갈수록 어떤 사람의 이름은 그 사람의 모든 인생을 담아내는 그릇이 됩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나의 이름을 부를 때는 내 이름만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나라는 존재 자체를 호출하는 것이고, 지금의 나의 이름 속에 담긴 모든 시간과 흔적들이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때로 그렇게 서로 다른 우리는 하나의 공통되는 이름을 가지기도 합니다. 그저 모두가 다 다르다고 말해버리기에는 너무나 중요하고 특별한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지요. 오늘 여기에 모인 우리 모두에게도 그런 이름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가지게 되는 공통의 이름 말이지요. 그 이름은 바로 크리스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입니다. 우리가 이 이름으로 불리고, 우리 자신이 이 이름을 나의 이름과 우리의 이름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다 다른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믿는다는 이 공통점이 우리에게는 너무나 크고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공통점이 정말로 우리의 공통점이 되고, 그래서 크리스챤 이름이 실제로 우우리 모두가 누구인지를 말해 주는 우리의 이름이 되려면 이 이름 자체보다는 이 이름이 실제로 담고 있는 의미가 더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릇은 같아도 내용물이 다르면 그것은 같은 그릇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똑같은 병이라고 해도 참기름을 담아 놓으면 참기름병이 되고, 거기 간장을 담아 놓으면 간장병이 되듯이 말이지요. 스스로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이라면 모두 ‘크리스챤’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은 그저 예수를 믿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고백할 뿐만 아니라 그 믿음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 점이 다른 사람들과 너무나 달라서 우리가 그 이름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도 하나의 ‘이름’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부를 때 사용하는 ‘예수님의 이름’이지요. 그래서, 우리가 그 이름을 부를 때, 예수님에 대한 어떤 생각을 품고 있느냐에 따라 이 이름에도 전혀 다른 내용이 담길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믿는 믿음을 생각할 때, 제일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간 동안, 그 아래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가지고 나온 금으로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금송아지를 애굽에서 우상 섬기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방탕하고 음란하게 섬겼습니다. 그러면서 놀랍게도 그들은 그 금송아지를 ‘하나님’이라는 이름으로 불렀습니다. 정말 충격적인 일이었지요. 그런데, 만약에 우리가 “나는 예수님은 그리스도로 믿는다”라고 고백할 때, 이 ‘그리스도’라는 이름 속에 원래 담겨져야 할 내용이 아닌 다른 내용이 담긴다면, 우리의 예수를 믿는 믿음도 광야에서 금송아지를 섬겼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처럼 될 수 있습니다. 껍데기는 같지만 내용물이 달라서 실제로는 절대로 같은 것이 될 수 없는 그런 믿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모든 신앙생활은 헛 것이 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우상숭배가 되어버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 우리는 늘 그리스도인이라는 우리의 이름에, 그리고 그리스도라는 그 분의 이름에 꼭 담겨야 할 것이 담겨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그것보다 중요한 것이 없으니까요. 

 그 이튿날, 그러니까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어드려 왕처럼 대접받으신 그 다음 날,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들어 가셨습니다. 그런데,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일 때문에 예수님은 이미 거의 모든 유대인들의 관심의 중심이 되어 계셨습니다. 멀리 시골에서 명절을 지키려고 예루살렘에 올라 온 촌부들까지도 먼저 예수님을 찾았고, 이번 명절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실까 하는 문제를 대화의 주제로 삼았을 정도로 말이지요. 그런데, 드디어 예수님이 베나니에 계시다가 예루살렘으로 출발하셨다는 소식이 들려 옵니다. 소식을 전해 준 사람이야 한 달음에 달려와 그 소식을 전해 주었겠지만 베다니에서 예루살렘까지 4킬로미터가 채 되지 않는 거리였으니 그 행렬은 길어 봐야 한시간 남짓이었을 겁니다. 그래서 그만큼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를 할 시간이 촉박할 수 밖에 없었지요. 사람들은 허겁 지겁 거리로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 당시 유월절이면 예루살렘에는 200만명이 훨씬 넘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고 하니 그 환영인파도 엄청났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급하게 몰려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저마다 손에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있었다는 것이고, 둘째는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라고 외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거기 모인 사람들 중에 많은 사람이 똑같이 그렇게 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이 일이 가지는 의미는 분명합니다. 이것은 그 사람들 모두가 지금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시는 예수님에 대해서 똑같은 생각과 똑같은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우선, 그 사람들의 손에 들려서 깃발처럼 흔들리고 있었던 종려나무 가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고대 세계에서 종려나무 가지는 승리와 힘을 상징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던 유대인들에게는 종려나무 가지는 항상 언젠가 하나님께서 가져다 줄 승리를 상징하는 것이었고, 그 날 그들이 그 가지를 높이 들고 흔들며 예수님을 맞이했다는 것은, 예수님으로 인해 이미 그 승리를 얻었다는 선포가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그 승리를 가져다 줄 자기들의 왕으로 인정한다는 뜻이었고요. 

그것은 그들이 외쳤던 ‘호산나!’ 외침 속에도 그대로 드러납니다. ‘호산나!’는 원래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뜻을 가진 구원의 외침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이 외침은 왕을 찬양할 때 사용하는 환호로 바뀌었습니다. 옛날에 왕이란 백성들을 구원할 힘을 가진 존재였으니까요. 그래서, 이 말은 왕이나 하나님에게 자신을 구원해 달라는 요청인 동시에, 그렇게 자신들을 구원해 줄 구원자를 찬양하는 환호라는 두 가지 의미를 모두 가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원래 13절에 있는 ‘호산나!’로 시작되는 사람들의 환호는 시편 118편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그런데, 시편 118편은 새로운 왕이 왕의 자리에 앉는 대관식 날, 왕이 행진할 때, 그 자리에 모인 백성들이 부르는 대관식의 노래입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이 로마의 식민지였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백성들이 이렇게 하면서 예수님께 기대했던 것은 분명합니다. 백성들은 다윗과 같은 힘 있는 왕을 원했습니다. 그런데,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사건으로, 그렇게 죽은 사람까지 다시 살리실 수 있는 예수님이라면 충분히 이스라엘을 해방시켜 줄 뿐만 아니라 그 옛날 다윗 왕국의 영광을 되찾아 줄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런 확신이 손에 들린 종려나무 가지와 호산나의 외침으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요약하면 그 날 그 자리에 모였던 사람들은 자기들을 로마의 압제에서 건져 주고 다윗시대의 영광을 되찾아 줄 힘 세고 강력한 왕을 원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 안에서 그 왕의 모습을 보았지요. 그래서, 이제 왕의 성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종려나무 가지와 호산나로 환영하며, 예수님에게 자기들의 왕좌를 내어드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여러분? 이 사람들이 바라는 메시야가 예수님이 되어 주시고 싶어하시는 메시야가 맞나요?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위해서, 힘 세고 능력있는 왕이 되어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까? 아닙니다. 전혀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것은 이제까지 예수님께서 살아오신 모습이나, 하신 말씀들을 복기해 보면 예수님은 전혀 그런데 관심이 없으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이런 환영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하셔야 했을까요? 예전에도 그러셨던 것처럼 자기를 왕으로 삼으려는 사람들을 피해서 달아나셔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기대를 만족시켜 주실 수가 없고, 그럴 생각도 없으시니까요.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좀 이상합니다. 14절은 그렇게 자신을 향해 환호하며 환영하는 사람들, 그렇게 자신을 왕으로 삼으려는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께서 취하신 행동을 이렇게 그리고 있습니다.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보고 타시니…” 원래 예수님은 걸어오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중간에 당신을 환영하기 위해서 모여든 사람들의 손에 들린 종려나무 가지를 보고, 그들이 외쳐대는 “호산나!” 소리를 들으셨지요. 예수님께서는 그 자리에 멈춰서셨습니다. 그리고는 길가에 묶여 있던 새끼 나귀 한 마리를 보셨고, 훌쩍 그 나귀에 올라 타셨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예루살렘의 거리를 행진해 들어 가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을 자기 왕으로 삼으려는 사람들의 환영을 받아들이신 것입니까, 거절한 것입니까? 거절하신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신 것입니다. 

많은 성경학자들이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신 것을 보고 예수님께서 자신을 왕으로 맞이하게 모인 사람들의 환영을 거절하신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어린 나귀는 힘과 권위의 상징이 아니라 평화와 겸손의 상징이라고 말하면서 말이지요. 하지만, 그런 생각은 현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편견입니다. 우리는 나귀를 무시하면 안됩니다. 나귀는 원래 굉장히 귀한 짐승입니다. 어떤 성경학자가 성경시대에 나귀는 벤츠 S 클래스 정도 되었다고 말 할 정도로 귀한 짐승이었지요. 그래서, 나귀는 그 당시 고관대작들이나 왕이 타는 짐승이었습니다. 물론 나귀가 그 당시 로마의 왕들이 타던 말은 아닙니다. 전쟁을 할 때나 힘을 과시하기 위해 타던 짐승은 아니었지요. 그런 점에서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실 때, 자기를 한 없이 높이거나 전쟁에 이긴 장군처럼 힘을 과시하면서 들어가신 것은 아니었던 것이 분명하지요. 하지만 어린 나귀를 타신 일 자체를 평화와 겸손을 뜻한다고 볼 수만은 없습니다. 나귀는 왕이 타지 않는 하찮은 짐승이 아니라 왕이 타는 왕의 귀한 짐승이었으니까요. 

요한도 그것을 알려 줍니다. 우리 16절을 함께 읽어 볼까요? “이는 기록된 바 시온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요한은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신 것은 스가랴 9장 9절에 나오는 메시야에 대한 예언의 말씀을 성취하시기 위한 것이었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혹시 스가랴서의 말씀을 알고 계신 분들 중에서 스가랴 9장 9절에 분명히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니…”라고 되어 있는데 무슨 소리냐 하실 분이 계실 것 같아서 설명을 좀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분명히 그렇게 쓰여 있습니다. 예수님이 겸손하셨기 때문에 나귀를 타셨다고 말이지요. 하지만 그건 우리말 번역이 그런 것이고, 원래는 그렇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원래는 그저 그 분은 겸손하신 왕이고, 그 왕은 나귀새끼를 타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영어성경들도 다 그렇습니다. 그저 겸손하신 왕이, 왕이기 때문에 왕이 타는 짐승을 탔다고 이야기하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 말로 번역하시는 분들이 원래는 서로 상관이 없던 이 두 가지를 연결시키려고 하다 보니 그렇게 번역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제 말을 오해하시면 안됩니다. 예수님은 물론 겸손하신 분입니다. 너무나도 겸손하신 분이시지요. 하지만, 그 날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환영과 환호를 받으며 당당하게왕의 자격으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셨습니다. 지붕이 열려 있는 국왕 전용 벤츠를 타고, 손을 흔들면서 왕의 도성으로 행진해 들어가셨습니다. 그 날 예수님은 그렇게 당신이 이 세상의 왕으로 오셨다는 것을 분명하게 드러내시면서 당신을 위해 준비된 왕좌를 향해 다가가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귀는 예수님이 왕이시라는 것을 거절하셨다거나 아니면 예수님이 겸손하시다거나 하는 증거가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이 왕이시라는 것을 분명하게 드러내 보여주는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16절을 보면 요한은 자신이나 다른 제자들이나 예수님께서 그렇게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실 때, 자기들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요한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면 자기들 또한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스가랴서 9장 9절의 말씀을 떠 올릴 수 있었고 그것이 예수님에 대한 예언이며, 사람들이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그런 식으로 기뻐하고 반긴 것 또한 그 말씀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런데, 조금 이상하지 않습니까? 요한은 왜 굳이 이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는 것일까요? 생각해 보면 꼭 필요한 이야기도 아닌 것 같고, 자랑스러운 이야기는 더더욱 아닌데 말이지요. 

요한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타신 나귀 새끼를 보면서 그 날 그 일이 스가랴서 9장 말씀의 성취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9장 9절 말씀을 15절에다 옮겨 놓았던 것이지요. 하지만, 요한이 진짜로 이야기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그게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원래 스가랴서 9장은 9절 한 절만이 아니라 한 장 전체가 메시야에 대한 예언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이 옮겨다 놓은 9절 말씀을 제외하면 다른 거의 모든 내용은 메시야를 겸손한 왕이 아니라 무시무시한 심판주의 모습으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죄 지은 이방족속들을 완전히 진멸하실 뿐 아니라 이스라엘과 유다에서 전쟁을 위해 준비한 모든 무기와 말들을 없애버리시는 그런 분으로 말이지요. 그렇게 해서 이 세상에서 모든 전쟁과 악한 것들을 없애고 세상에 당신의 공의와 평화를 세우실 그런 강하고 능하신 왕으로 선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고 계셨기 때문에, 예수님이 약하고 힘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저 속만 좋은 동네 아저씨 같은 그런 분이라는 뜻도 아니지요. 나귀새끼를 타고 있어도 그 분은 여전히 강하고 능하신 왕이시며, 온 세상의 심판주이십니다. 요한이 스가랴서의 말씀을 요한복음에 옮겨 놓으면서 우리를 향해서 ‘시온의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너의 왕이 나귀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라고 외치는 것은 예수님은 이 세상의 악한 자들과 당신의 대적들에게는 지옥불처럼 엄하고 두려운 심판주가 되시지만, 당신의 백성들을 향해서는 한 없이 겸손하고 인자하신 분으로 임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왕은 겸손하십니다. 그래서, 낮고 천한 우리들을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십니다. 자기 손의 양떼로 삼으시지요. 그리고 우리 왕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구원을 베푸시고 그들과 영원한 피의 언약을 맺으시며 자기 백성들을 왕관의 보석같이 귀하게 여기십니다. 그래서, 당신의 모든 능력을 자기 백성들을 구하고 섬기기 위해서 사용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스가랴서 9장이라는 랜즈를 통해 볼 수 있는 우리 왕의 모습이고, 그래서 요한은 그 왕을 기뻐하며 맞이하라고 이야기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자기가 예수님께서 어떤 왕이신지를 제대로 깨달은 것이 “예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 다음”이었다고 말하는데요. 그러니까 요한은 자신을 비롯한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또 부활하신 그 일을 통해서 스가랴서의 말씀을 들여다 보았을 때 비로소 그 말씀의 진짜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 말한 것입니다. 스가랴서의 말씀이 나귀를 타신 예수님을 보는 렌즈가 되어 주었다면, 이번에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그 스가랴서의 말씀을 보는 또 하나의 렌즈가 되어 주었는데, 요한은 그 두 개의 렌즈를 통해 희미하게 멀리 있던 왕이신 예수님의 모습을 가까이로 끌어 당겨서 제대로 보게 되었다고 말한 것입니다. 

사실  스가랴서는 예수님이 어떤 왕이신지에 대해서 두 가지 상반되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악인들과 악한 나라들을 가차 없이 심판하시지만 당신의 백성들에게는 한 없이 겸손하고 온유하신 그런 분으로 말이지요. 우리 주님은 이런 왕이신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은 세상에 속한 왕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심판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고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실 때, 이 세상의 왕들과는 완전히 다른 방법을 사용하십니다. 요한은 예수님이 왕이 되시고, 또 왕으로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방식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렌즈를 통해서 보아야만 볼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 다시 오시는 날, 우리 주님은 온 세상을 당신의 지혜와 능력으로 다스리시는 힘 있는 왕으로 우리 앞에 서실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이 이 세상의 왕권을 되찾기 위해서 사용하신 것은 칼과 방패가 아니었고, 권력과 돈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몸을 통해, 그 몸을 내어주시는 일을 통해서 그 일을 이루셨습니다. 예수님은 몸의 죽음으로 죄를 이기셨습니다. 그리고 몸의 부활로 죽음을 이기셨지요. 그렇게 해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우리의 가장 큰 원수인, 죄와 죽음,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를 자기 몸 안에서 멸하시고 우리를 그 지긋 지긋한 원수의 손에서 건져 주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요한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우리 주님이 온 세상의 왕이 되시고, 우리의 왕되시는 방식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우리의 구세주로 고백한다는 것은 바로 이것을 알고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은 우리의 왕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왕이 되어 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지요. 그래서, 예수님을 믿으려면 무엇보다도 예수님을 우리의 왕으로 기쁘게 모셔들여야 합니다. 그 날 예루살렘 거리를 가득 채웠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말이지요. 하지만, 우리가 그들을 흉내내면 안될 것이 하나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나름대로의 기대를 가지고, 예수님께서 그러한 우리의 기대를 만족시켜 줄 것을 기대하면서 예수님을 자기 왕으로 모셔들이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또다른 우상으로 만드는 셈이 되고, 세상의 왕으로 만드는 것이니까요.  

성탄 시즌입니다. 우리의 왕이 우리를 찾아오신 계절이지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우리 주님을 어떤 왕으로 생각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어떤 왕으로 받아들였고, 그 분께 무엇을 기대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님께 기대하는 것이 그저 마음의 위로나 평강을 얻고 나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는 것이 전부라고 한다면, 우리는 예수님에게 너무나 낮고 형편 없는 것을 기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말을 타고 칼을 휘드르는 세상의 왕을 경배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하나님의 아들을 드높이며 그 분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의 약점이 아닙니다. 우리의 슬픔도 아니고요. 이것이 바로 우리의 능력이고 승리이며 영광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죽음 안에서만 죄는 사라지고 죽음은 정복되며, 세상은 하나님의 사랑이 통치하는 하나님 나라가 되기 때문입니다.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한 어린 양이 서 있는데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요한계시록 5장 6절 말씀인데요. 이것이 요한이 알려주는 영광 중에 계신 우리 주님의 모습입니다. 그 날 우리는 우리 앞에 서 계신 영광의 왕을 뵙게 될 것입니다. 당신의 죽음 안에서 죄를 없이 하시고, 당신의 부활 안에서 사망을 정복하셨기에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은 어린 양이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영원한 왕으로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모세의 노래와 어린 양의 노래를 부르며 말이지요. 

늘 우리의 마음 속에 나귀를 타신 예수님의 모습이 새겨져 있기를 바랍니다. 온 우주의 심판하시는 분이시지만 당신의 백성들에게는 한 없이 겸손하고 한 없이 온유하신 그 분, 그래서 우리를 위해 일찌기 죽임을 당하셨던 어린 양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로운 모습이 그려져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늘 그 어린 양을 기뻐하며 찬양하는 어린 양의 백성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우리의 신앙이 우리 마음대로의 신앙이 되고, 그래서 우상숭배가 되지 않게 하소서. 
  2. 새끼 나귀를 타신 예수님이 우리 왕 되어 주심에 감사합시다. 자신의 몸 안에서 죄와 죽음을 멸하시고, 우리에게 영생과 부활의 소망을 허락하신 은혜에 감사합시다. 
  3. 세상의 논리나 세상의 방법이 아니라 일찍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을 본 받아 살아가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