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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20.03.08. 요한복음 13장 36-38절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요한복음 47)

 

 

 

날짜 :  2020년 3월 8일 일요일

본문 :  요한복음 13장 36-38절 

 

 

우리의 당연한 ‘일상’이 깨어지기 시작한 지, 벌써 한 달이 넘었습니다. 일상이라는 말은 말 자체가 이미 말해주고 있듯이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매일 매일 항상 그런 것. 그것이 일상이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일상이 얼마나 귀한 줄 잘 모릅니다. 그래서 늘 일상 속에서 특별한 시간을 꿈꾸지요. 하지만, 이렇게 그 일상이라는 것에 문제가 생기고 요즘처럼 심각하게 깨어져 버리면, 그제서야 사람들은 우리를 살게 하는 것이 특별한 일들이 아니라 일상이라는 사실을 절실하게 깨닫게 됩니다. 주일이면 예배를 드리는 것은 어쩌면 우리의 일상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 번 한 번의 주일, 한 번 한 번의 주일예배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했지요. 그런데, 이렇게 석 주를 보내 보니까 그저 일상적으로 드렸을지 모를 그 예배가 우리 삶에서 차지했던 무게가 제대로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이 예배가 빠져나간 자리 때문에 우리의 삶과 신앙의 균형이 무너지는 일이 없기를 기도드립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소중한 일상과 소중함을 되돌려 주시는 날이 속히 오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오늘부터는 계속해서 요한복음의 말씀을 상고해 보려고 하는데요. 오랜만에 요한복음으로 돌아왔으니 오늘 본문의 바로 직전 말씀을 잠시 되짚어 보겠습니다. 가룟 유다가 유월절 식사를 하다가 말고 예수님을 팔기 위해서 밖으로 나가 버린 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떠나실 때가 그만큼 가까이 다가와 있다는 것을 알리는 싸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식사를 마치신 다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제 곧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떠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내가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올 수 없을 것인데, 그것은 이전에 유대인들에게 말해 주었던 것과 다르지 않다고 하셨지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떠나면 제자들은 어떻게든 홀로서기를 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계시지 않는 상태에서 믿음도 지켜야 하고,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야 하는 상황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14장부터 18장까지이어지는 긴 말씀을 시작하셨던 것도 그것 때문이었고, 예수님께서는 그 말씀들을 시작하시기 전에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셨던 것입니다. 앞으로 이 계명을 붙들고 살라고, 그러면 된다고 말이지요.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자기들을 사랑하셨던 것처럼 서로를 사랑하려고 애쓰면, 세상은 그들이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 사랑은 그렇게 제자들의 정체성이 되고 세상에 예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귀한 역할을 하게 되지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서로 사랑할 때, 제자들은 그 사랑 안에서 하나님의 임재와 사랑을 경험하며 믿음을 지켜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른 말씀들을 시작하기 전에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셨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의 그런 속마음을 전혀 읽어내지 못했습니다. 그저 예수님께서 자기들과 유대인들을 똑같이 취급하고 계신 것 같아서 그게 속이 상하고 화가 날 뿐이었습니다. 아무리 못났어도 명색이 3년 넘게 예수님을 따라 다닌 예수님의 제자들이었으니까요. 베드로는 그 말씀을 듣고서 곧바로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라고 묻고 있는데요. 아시다시피 이것은 질문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도대체 어디로 가시실래 우리가 주님을 따라가지 못한다는 겁니까?”라고 따져 묻는 말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베드로가 무슨 뜻으로 그런 질문을 하는지 아셨고, 그래서 베드로에게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라고 대답해 주셨습니다. 흥분해 있는 베드로를 좀 누그러 뜨리려고 말입니다. 

예수님은 이제 십자가의 길을 가셔야 합니다. 그 길을 통해 아버지께로 가야 하니까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지금’ 그 길을 가시려는 것은 예수님 마음대로 정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 때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위해 정해놓으신 때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지금 그 길을 가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물론 예수님의 말씀처럼 나중에 언젠가는 제자들도 예수님께서 가셨던 길을 갈 것입니다. 모양은 달라도 저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뒤를 따르겠지요. 그리고, 주님이 그러셨듯이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지금은 그 때가 아닙니다. 그럴 준비도 전혀 되어 있지 않고요. 그래서 그들은 지금 예수님의 뒤를 따라 예수님이 가시는 곳에 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라고 말씀해 주셨던 것입니다. 

이 정도 설명해 주었으면 이해하고 넘어갈만도 한데, 베드로는 그러지를 못합니다. 또 다시 따지고 들지요.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라갈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베드로가 그렇게 발끈했던 것이 바로 이것 때문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이미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자기 목숨을 내놓겠다고 각오를 하고 있었습니다. 다른 복음서들을 보면 다른 제자들도 모두 그랬었고요. 이미 목숨을 걸었다면, 그런 사람에게 ‘지금’과 ‘나중’은 전혀 차이가 없습니다. 나중에 갈 수 있는 곳이라면 지금도 얼마든지 갈 수 있습니다. 그 곳이 자기 목숨을 내놓아야만 갈 수 있는 곳이라고 해도 말이지요. 그러니, 베드로는 지금은 나를 따라올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에게 왜 지금은 따라갈 수 없다고 하시냐고, 나 주님을 위해서 이미 목숨을 걸었고, 그래서 지금도 얼마든지 주님 가시는 곳으로 갈 수 있다고, 왜 자기 마음을 이렇게 몰라 주냐고 발끈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닙니다. 그의 이야기는 그저 주님을 기쁘게 하려는 사탕발림이 아니었지요. 그것이 베드로의 진심이었습니다. 그 때 베드로는 정말로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라면 목숨도 내놓을 각오가 되어 있었고, 예수님께 그 각오를 이야기했던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할 자신도 있었고요. 베드로는 자기가 이렇게까지 말했으면 예수님께서 내가 네 마음을 몰랐구나, 정말 미안하다 하시면서 그 정도면 나를 따라올 수 있다고 말씀해 주실 것이라고 기대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되돌아온 예수님의 말씀은 너무나 충격적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네가 나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라고 잘라 말씀하셨지요. 만약에 우리가 베드로였다면 얼마나 화가 나고 창피했을까요? 아무리 예수님이라고 해도 그렇지 이건 정말 너무 하신 것 아닙니까? 베드로가 그렇게까지 이야기하는데, 그냥 대충 넘어가 주시지 굳이 모두가 듣는 앞에서 이런 말씀까지 하실 필요가 있었을까요?  

우리는 늘 주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은혜가 언제나 친절하고 부드럽고 달콤할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그것이 사랑과 은혜라는 말에 대한 우리의 고정관념이니까요.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런 사랑과 그런 은혜만 주실 수는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하루살이처럼 지금 이 순간만 살고 사라지는 그런 사람들이라면 하나님도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시고 그런 식으로 은혜를 베풀어 주시겠지요. 하지만, 우리에게는 미래가 있습니다. 1시간, 며칠 후의 미래가 있고, 10년, 20년 이후의 미래가 있으며, 무엇보다도 영원한 미래가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 주님은 당장은 우리를 아프게도 하시고 힘들게도 하십니다. 불쾌하게도 만들고 수치스럽게 만들기도 하지요. 그런 쓰라린 은혜와 약처럼 쓴 사랑이 우리의 미래와 영원한 삶을 참으로 유익하고 복되게 할 것을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드러난 사실만 보면 예수님이 너무하신 것이 맞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베드로를 너무나도 수치스럽게 만들었으니까요. 38절의 예수님의 말씀을 끝으로 18장 10절까지 다른 제자들은 더러 더러 나와도 베드로는 한 번도 무대 위로 올라오지 않는 것을 보면 베드로가 많이 화가 나고 삐쳤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결과가 어떻게 되었지요? 베드로는 몇 시간이 안되어 정말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합니다. 예수님을 모른다는 자기 말을 믿게 만들려고 자기를 저주하면서 말이지요. 그런데,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번째로 부인했을 때, 정말로 새벽 닭이 웁니다. 베드로는 그제서야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 내고는 밖으로 뛰쳐나가서 통곡을 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의 통곡은 베드로를 죽이고 넘어뜨리는 통곡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그 아픈 말씀이 베드로를 지켜 주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거나 설교를 듣다가 보면 인간의 악한 본성과 행동에 대해 말하는 정말 과하다 싶은 내용을 만날 때가 있는데요. 사실 우리는 그런 말씀들 자체를 단 마음으로 듣거나 진심으로 공감하기 힘들어 합니다. 오히려 정말 이 정도로 인간이 형편 없는 존재이고, 내가 이렇게 악한 사람인가 싶어 거북하기도 하고 살짝 기분이 상하기도 하지요. 하지만, 그러다가 언젠가 어떤 일이 계기가 되어서 정말로 인간과 우리 자신의 추하고 악한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되면, 그제서야 내 생각이나 감정이 아니라 성경이 옳다는 것을 진짜로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는 그 말씀 앞에 고개를 숙이고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됨을 정직하게 고백하게 됩니다. 그렇게 더 깊은 은혜를 얻고 자유를 얻으며 하나님의 형상으로 빚어져 가게 됩니다. 하지만, 만약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런 말씀을 주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그런 말씀을 전혀 모르고 있다면 우리는 절대로 그렇게 반응할 수 없을 것입니다. 자신이 얼마나 악한 지를 보게 되어도, 그 사실을 애써 부인하려고 하거나 합리화하기에 바쁘겠지요. 그러다가 더 크고 깊은 죄에 어둠에 갇혀 버리게 되겠지요. 

베드로는 예수님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내놓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자기는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다고 확신했지요. 그것이 베드로가 보는 자신의 모습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눈에 보이는 베드로는 그런 베드로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눈에는 닭이 울기 전에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하는 베드로의 모습만 보일 뿐이었습니다. 저는 이 베드로 이야기를 대할 때마다 늘 기억나는 일화가 하나 있습니다. 벌써 10년이 더 된 일 같은데요. 중동지역에서 테러조직에게 청년 선교사 하나가 납치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 테러조직원들이 그 청년에게 총구를 겨눈 상태에서 그 청년을 협박하였는데, 그 협박 때문에 그 청년이 자기 신앙을 부인하는 듯한 이야기를 하는 동영상이 인터넷에 올라온 적이 있습니다. 그것을 본 성도들이 참 말들이 많았지요. 대부분이 그 청년을 비난했습니다. 그냥 신앙을 지키고 순교를 하지 왜 저렇게 했느냐고 말이지요. 저는 그런 반응에 상당히 놀랐습니다. 그래서, 설교할 기회가 있을 때, 그 이야기를 하면서 ‘여러분은 그런 상황에서 신앙을 지킬 자신이 있습니까?’라고 물었지요. 그랬더니, 그 자리에 계셨던 100명이 넘는 성도들이 거의 이구동성으로 ‘네’라고, ‘당연하지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그 대답 때문에 제가 더 놀랐습니다. 그 분들 중에는 그런 대답을 할 수 없을 것이라는 확신을 주는 분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작은 불편과 손해도 감수하려 들지 않는 사람이 주님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는 것은 말이 안되는 일이었으니까요. 

물론 저는 그 분들이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베드로가 그랬듯이 그것이 그 분들의 진심이었겠지요. 하지만, 뭐가 문제였을까요? 베드로도 그렇고, 그 성도들도  그렇고 어떻게 그렇게 자신있게 신앙을 위해, 주님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을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그 분들에게는 자신의 진짜 모습을 볼 줄 아는 눈이 없었고, 그래서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마주한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잘 모르니까 그런 묵직한 이야기를 그렇게 쉽게 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가 품은 기특한 마음이나 그럴 듯한 생각들을 통해서 자기를 봅니다. 그 마음이, 그 생각이 자기 자신인 줄 압니다. 그래서 이런 일들이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이라는 것은 무조건 확신에 넘쳐야 한다고 배워왔습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분명하지 않고, 확고하지 않으면 그것은 참 믿음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습관이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그 믿음이 진리에 대한 것이라면,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한 것이라면 그 믿음은 분명하고 확고해야 입니다. 흔들려서는 안됩니다. 하지만 믿음을 가지는 것이 우리 자신이다 보니 우리가 가지게 된 심각한 오해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 확신을 믿음과 혼동하게 되었고, 자기 확신이 강한 사람을 믿음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베드로처럼 말하는 사람을 믿음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만큼 신앙에 대한 큰 오해가 없습니다. 참 신앙은 자기를 믿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믿지 않는 것입니다. 베드로처럼 ‘내가 할 수 있다’를 외치는 것이 아니라 ‘나는 할 수 없다’를 고백하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참된 기독교 신앙입니다. 

예수님께서 진실로 진실로 라는 표현까지 덧붙이시면서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라는 말씀을 그렇게 힘주어 강조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 사실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기 전에 우리의 신앙은 참된 신앙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베드로처럼 “내가 지금 주님을 위해서 내 목숨을 내어놓겠습니다”라고 고백하고 싶어 합니다. 진심으로 말이지요. 돌아보면 저도 정말 자주 그렇게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저는 주님을 위해서 목숨을 내놓겠다는 말씀은 거의 못 드립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이렇게 하겠습니다, 저렇게 하겠습니다라는 말씀은 자주 드리지요. 저 자신이 하도 답답해서 하나님 앞에서 ‘이번에는 정말로…. 내일부터는 절대로…’하면서 결심을 말씀드릴 때도 있고요. 어떤 때는 이번에는 정말 결심대로 할 수 있겠다 싶어 자신만만할 때도 있고요. 하지만 그게 어떤 결심이든, 그게 목숨을 내놓겠다는 대단한 결심도 아닌데, 그걸 하나 제대로 끝까지 해 내지 못합니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똑같은 죄를 떠나지 못하지요. 게으름 때문에, 교만함 때문에, 그리고 편안함과 순간의 기쁨을 더 사랑하는 못된 마음 때문에 그렇게 저는 너무나 자주 닭 울기 전에 주님을 세 번 부인하는 베드로가 되고 맙니다. 

그렇게 자신에게 실망하고 또 실망하다 보면 저는 제가 얼마나 약하고 형편없는 사람인지를 깨닫게 되고, 나의 본질이 주님을 위해서 목숨을 내놓는 베드로가 아니라 닭이 울기 전에 세 번씩이나 주님을 부인하는 베드로라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긍휼을 베풀어 달라고, 불쌍히 여겨 달라고, 더 이상은 주님 앞에 ‘나’라는 단어를 끄집어 낼 수가 없어서 그저 주님만 부르게 됩니다. 얼마나 아프고 쓰라린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늘 반복해서 확인하게 되는 귀한 진리가 하나 있습니다. 비록 그것이 아주 작고 미미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무언가 의미있고 참된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바로 그렇게 자신에게 실망하고 더 이상 내가 나를 붙들 자신이 없어서 자신을 주님 앞에 내려놓을 때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의 사랑은 달콤하고 따뜻할 때도 있지만 반대로 쓰고 거칠 때도 있습니다. 우리를 위로하고 고치시는 주님의 손길로 다가올 때도 있지만, 우리를 상처내고 아프게 할 때도 있습니다. 특히 주님의 말씀이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때로 우리를 공격합니다. 우리를 상처입게 하고, 심지어 우리를 산산히 부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베드로같은 우리에게 주시는 우리 주님의 사랑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베드로입니다. 닭 울기 전에 세 번, 아니 열 번 스무번이라도 주님을 부인할 수 있는 것, 그것이 우리의 본질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주님이 계시고 우리 주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마음을 다해 주의 말씀을 받아들일 때, 그 말씀은 우리가 완전히 쓰러지고 넘어지지 않도록 우리를 지켜 주는 방패와 버팀목이 되어 줄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을 다해 주의 말씀을 받아들일 때, 그 말씀은 우리를 주님 앞으로 인도해 줄 것이며, 우리를 참되게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이 될 것입니다. 그 말씀이 거칠고 쓰라린 말씀일수록 더욱 더 말이지요. 우리 모두가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라는 주님의 말씀 앞에 자주 자주 무릎을 꿇어 은혜를 구하는 겸손한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지금’은 못하지만 ‘후에는’ 하게 하시는 주님의 은혜 안에서 참된 주님의 제자로 세워져 가는 주님의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나의 본질이 닭 울기 전에 주님을 세 번 부인한 베드로라는 것을 잊지 않게 하소서.
  2. 주님 주시는 쓰고 거친 은혜를 달게 여기는 겸손한 마음을 주소서. 
  3. 주님의 은혜 안에서 참되고 아름다운 주의 사람이 되게 하소서. 
  4. 코로나 바이러스가 속히 사라지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