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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20.04.12. 요한복음 20장 1-18 "부활의 첫 목격자들"(부활주일 요한 52)

 

 

날짜 :  2020년 4월 12일 일요일

본문 :  요한복음 20장 1-18절

 

 

한 주간을 기준으로 볼 때, 오늘은 우리 믿는 사람들이 ‘주일’이라고 부르는 날인데요. 저는 어렸을 때, ‘주일’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서, 왜 일요일을 주일이라고 하나 궁금해 했었습니다. 하지만 너는 그것도 모르냐고 핀잔을 들을까봐 누구에게 묻지도 못했지요. 그러다가 나중에 ‘주일’이라는 말이 ‘주의 날’이라는 뜻이라는 것과, 예수님께서 일요일에 부활하셨기 때문이라는 이 날을 그렇게 부른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주일에 대한 모든 궁금증이 풀렸습니다. 그런데, 동양식으로 하면 한 주간의 순서가 월,화,수,목,금,토,일 이렇게 되지만 서양식으로 하면 주일인 일요일이 한 주의 맨 앞에 옵니다. 그러니까 한 주간을 열심히 일 한 후에 한 주의 마지막 날 안식하면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한 주간을 시작하기 전에 예수님의 부활을 기뻐하면서 예배를 드린 다음, 한 주간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주일은 성도들에게 한 주간 동안의 일을 손에서 내려놓고 안식하는 날이라는 의미와 함께 한 주간의 삶을 시작하기 전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기념하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날이라는 더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원래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과 만물을 창조하신 후에 쉼을 가지신 날입니다. 당신께서 만드신 것들을 즐기시고 기뻐하신 날이지요. 그것이 이 세상 첫번째 안식일이었고, 이 세상은 안식일 다음 날부터 다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으며 아름답고 조화롭게 움직여 가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안식 후 첫 날,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다스리시기 시작하셨던 그 날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그 이전까지 어디서 무엇을 하고 계셨을까요? 물론 무덤에 계셨습니다. 주검이 되어 거기 누워 계셨지요. 하지만, 예수님께는 그것이 끝이 아니고 패배가 아니었습니다. 그 삼일 동안 예수님께서는 죽음과 전쟁을 벌이며, 그 죽음을 정복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안식 후 첫날 새벽에 부활하심으로써 죽음을 죽이셨습니다. 그런데, 그 이전까지 이 죽음이라는 것은 우리들을 비롯한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들을 부패와 불행으로 몰아넣는 통제불가능한 폭군이었습니다. 그러니, 안식 후 첫날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것은 이제 죽음의 횡포는 끝이 나고, 이 세상을 생명과 빛으로 다스리시는 예수님의 새로운 통치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세상에 알리는 포고령이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안식 후 첫날, 부활절 새벽에 우리 주님은 부활하셨습니까? 그렇게 죽음과 어둠 아래서 신음하고 죽어가던 이 세상이 이제 우리 주님이 빛과 생명으로 다스리는 세상이 되었습니까? 사실 우리 눈에 보기에는 그렇지 않은 것 같을 때가 많습니다. 특히 이번 코로나 사태와 같이 안타까운 생명들이 죽음 앞에 힘 없이 스러져 가고, 사람들이 죽음과 질병의 공포에 갇혀 있는 모습을 보노라면 그 사실이 잘 믿어지지 않지요. 하지만, 우리의 인생과 이 세상을 빛과 생명으로 다스리시는 우리 주님의 통치는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우리 주님이 이미 죽음을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이 부활절 아침에 우리가 부활하신 주님을 예배하고 말씀을 들을 때에, 부활의 능력과 확신이 우리 안에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는 다른 여인들과 함께 예수님께서 누워계신 무덤으로 갔습니다. 아마도 마리아는 율법이 허락하는 한, 가장 이른 시간에 길을 나섰을 겁니다. 마리아는 지난 삼일 동안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것이 금요일, 그러니까 안식일을 준비하는 날의 오후 늦은 시간이어서 그 동안  예수님의 무덤에 한 차례도 와 볼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안식 후 첫 날 꼭두 새벽에 길을 나섰고, 그렇게 예수님이 계신 무덤으로 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거기서 너무나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하게 됩니다. 무덤을 지켜야 할 로마병사들은 한 사람도 없고, 무덤 입구를 막고 있어야 할 큰 돌이 저만치 굴러가 있었던 것입니다. 마리아의 발걸음이 얼어 붙었습니다. 그 광경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으니까요. 그것은 곧 누군가가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갔다는 뜻인데, 그럴 사람들은 예수님을 죽인 유대인들 밖에 없었습니다. 마리아는 마음이 다급해졌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시신에 해를 가할 것이 분명한데, 자기는 예수님의 시신이 어디에 있는지도 알 수가 없었으니까요. 이제는 살아계신 예수님을 보지 못하게 된 것은 물론이고 예수님의 무덤에도 찾아갈 수 없게 되었다고 생각하니 억장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을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한 달음에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다른 제자에게로 달려 갔습니다. 그리고는 “그들이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다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고 눈물을 흘리며 호소했지요. 큰 충격을 받기는 두 사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두 사람은 그저 무덤을 향해 뛰기 시작했습니다. 베드로가 나이가 더 많거나 뚱뚱해서 그랬었던지 출발은 같이 했지만, 다른 제자가 무덤에 먼저 도착했습니다. 하지만, 그 제자는 무덤 입구 쪽에 놓여 있는 수의를 보고는 더 이상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진 것을 자기 눈으로 확인하기가 두려웠으니까요. 그렇게 그 제자가 머뭇거리고 있는 동안에 베드로가 도착했습니다. 베드로는 머뭇거리지 않았습니다. 한 달음에 무덤 속으로 뛰어 들어갔고, 거기서 다른 제자가 보았던 수의와 더 안쪽에 가지런하게 개켜져 있는 예수님의 머리를 쌌던 수건도 보았습니다. 다른 제자는 그제서야 용기를 내서 무덤 속으로 들어갔는데, 성경은 그렇게 해서 그 제자도 ‘보고 믿었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리고는 그 뒤에다가 ‘왜냐하면 그들은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라는 약간은 알쏭달쏭한 설명을 붙이면서 ‘이에 두 제자가 자기들의 집으로 돌아가니라’라고 맨 처음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세 사람에 대한 이야기의 앞쪽 절반을 마무리 합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베드로, 그리고 대개 요한 자신이라고 생각되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 이렇게 세 사람은 예수님의 빈 무덤을 처음으로 보았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첫 증인들이었지요. 그렇게 보면 이 세 사람은 이 세상 그 어떤 사람보다도 영광스러운 광경을 목격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세 사람 중에서 거기서 예수님의 부활을 본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오늘은 그 내용으로 우리 주님의 부활 이야기를 좀 살펴 보려고 하는데요. 막달라 마리아에 대해서는 뒤쪽 이야기를 살필 때, 같이 생각해 보기로 하고, 먼저 베드로와 다른 제자에 대해서만 생각해 보겠습니다. 

예수님의 빈 무덤에 대한 두 사람의 경험은 대동소이합니다. 시간차이만 있을 뿐 두 사람이 본 것이 똑같았으니까요. 두 사람이 무덤 안에서 본 것은 두 가지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누워계셨던 자리의 머리맡과 발치에 놓여 있었던 예수님의 수의와 예수님의 머리를 감았던 수건이 그것 이었는데요.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이 두 개의 천 조각은 사실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는 분명한 증거로 그 자리에 놓여 있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질 수 있는 경우는 두 가지 밖에 없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생각했던 것처럼 누가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갔거나 아니면 예수님께서 정말로 부활하셨거나 둘 중의 하나이지요. 여러분 생각에는 상식적으만 본다면 둘 중에서 어떤 것이 더 가능성이 높습니까? 당연히 첫번째 경우입니다.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일보다는 시체를 도둑맞는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 훨씬 더 크니까요. 하지만, 만약에 그렇다고 한다면 무덤 속에 있던 수의와 수건은 전혀 설명이 안 됩니다. 이 세상에 시체를 훔쳐 가면서 수의와 머리를 싼 수건을 벗기고 시체를 훔쳐가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심지어 수의와 머리수건은 아무데나 되는데로 던져져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머리맡과 발치에 곱게 놓여 있었는데요. 이 세상에 아무도 몰래 급하게 시체를, 그것도 알몸째로 도둑질해가면서 수의를 그렇게 곱게 정돈해 놓고 가는 사람이 있을까요? 그래서, 무덤 속에 남아 있던 수의와 수건은 예수님의 시신이 도둑맞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말해주는 강력한 증거가 됩니다. 그것은 한숨 잘 자고 일어난 사람이 이부자리를 정돈하듯이 그것을 사용했던 장본인이 그렇게 해 놓았다고 볼 수 밖에 없으니까요. 

하지만 두 제자는 그저 예수님의 시신이 도둑맞았다고만 생각했을 뿐 다른 가능성을 전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특히 8절 말씀은 다른 제자가 ‘보고 믿었다’고 말하는데, 이 ‘보고 믿었다’는 말은 대충 추측으로 막연하게 믿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분명한 증거를 가지고 확실하게 믿었다는 뜻이지요. 성경은 그래서 보고 믿는 것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이 제자는 도대체 무엇을 그렇게 분명히 보고 무엇을 그렇게 확실하게 믿게 되었던 것일까요? 예수님의 부활일까요? 아닙니다. 그렇다면 “왜냐하면 그들은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라는 9절 말씀을 설명할 길이 없어지니까요. 다른 제자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분명한 증거를 두 가지씩이나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확실히 믿었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는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진 자리’만을 확실하게 ‘보았’을 뿐이고, 그래서 그는 누군가가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 갔다고 확실히 ‘믿게’ 되었던 것입니다. 먼저 무덤에 들어간 베드로처럼 말이지요. 

일이 이렇게 된 이유는 9절 말씀에 잘 설명되어 있는데요. 우리는 9절을 좀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9절 말씀이 제자들이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날 것”이 아니라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몰랐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9절이 말하는 성경은 구체적으로 말하면 시편 16편을 말합니다. 시편 16편은 다윗이 신실하고 의롭게 살아가려고 하다가 심한 고난을 당했을 때, 하나님께 드린 기도와 고백을 담고 있는데요. 그는 밤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의 은혜로 하루 하루를 버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다윗이 하나님의 놀라운 약속의 말씀을 듣고 난 다음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러므로 나의 마음이 기쁘고 나의 영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살리니 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라고 말이지요. 다윗은 드디어 자신의 모든 불안함과 두려움을 잠재울 수 있는 하나님의 든든한 약속을 얻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나오는 ‘스올’은 기본적으로 무덤을 말합니다. 그리고,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신다’는 말은 그대로 옮기면 ‘주의 거룩한 자가 썩음을 보지 않게 하신다’는 말이 되고요. 그러니 이 말씀은 하나님의 거룩한 자는 그 시체가 무덤에 영원히 버려지지 않고 그래서, 썩지 않게 된다는 뜻이 됩니다. 다윗은 이 약속을 붙들고 그 모든 고난과 어려움을 통과해 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죽은 후에 영원히 무덤에 버려졌습니다. 그리고, 그의 시체는 썩어 없어졌습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말이지요. 그러면, 하나님의 이 약속은 헛것이었을까요? 아닙니다. 사실 이 약속은 애초에 다윗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자’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이고 약속이었습니다. 물론 그 다음에는 다윗을 비롯한 모든 신실한 성도들에게도 해당될 약속이었지만 말이지요. 이 약속이 있기 때문에 예수님은 죽을 수는 있어도 그 시신이 영원히 무덤에 버려져서 썩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신 것이 되니까요. 그래서, 예수님은 반드시 부활하시게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두 제자들은 이 말씀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실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지요. 그래서 두 사람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확실한 증거들을 보았으면서도, 다시 자기 집으로, 깊은 절망과 슬픔을 안고 있던 곳으로 되돌아갈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만약에 두 사람이 시편의 말씀을 알고 있었다면, 두 사람은 이런 식으로 반응했을 리가 없습니다. 그랬다면 그들은 그 빈 무덤을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신 확실한 증거로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이제 막달라 마리아의 경우를 좀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실 막달라 마리아야 말로 최고의 특권을 얻은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빈 무덤을 가장 먼저 보았으니까요. 하지만 그런 마리아의 입에서 제일 먼저 터져 나온 것은 기쁨의 환호성이 아니라, ‘사람들이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다 두었는지 모르겠다’는 절망과 슬픔의 탄식이었습니다. 마리아는 두 제자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 버린 다음에도, 예수님의 무덤을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무덤 속을 들여다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마리아를 위해서 천사들을 보내주셨습니다. 하지만, 마리아는 천사들을 전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게 천사일수도 있다는 것 조차도 상상하지 못했고요. 

천사들은 마리아에게 “어찌하여 우느냐?”고 물었지만, 아시다시피 이것은 질문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부드러운 꾸지람이었습니다. 그들은 마리아에게 지금은 전혀 슬퍼할 때가 아닌데도 네가 슬퍼하는 것은 예수님을 죽은 분으로만 여기고 있고, 그래서 살아계신 분을 죽은 자 가운데서 찾으려고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그러니 이제는 슬픔을 거두고 기뻐하라고 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마리아는 천사들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또 다시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전에 두 제자에게 했던 말을 되풀이 했습니다. 

그 때 마리아의 뒤쪽에서 인기척이 났고, 마리아는 뒤를 돌아다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거기에는 한 사람이 서 있었습니다. 그 분은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렇지만, 마리아는 자기 앞에 서 있는 것이 부활하신 예수님이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저 동산지기인줄로만 알았지요. 그래서,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시는 예수님께 도리어 당신이 주님의 시신을 옮겼거든 알려달라고, 그러면 내가 시신을 모셔 가겠다고 부탁했습니다. 그것이 마리아가 처음 예수님의 무덤으로 갈 때부터 바라던 것이었으니까요. 그 때 예수님은 “마리아야!”하고 마리아의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이 짧은 한 마디가 예수님의 죽음에 묶여 있고, 무덤 속에 갇혀 있던 마리아의 영혼을 깨워 놓았고 그래서 마리아도 “랍오니여!”라는 친숙한 언어로 다시 사시고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나뵐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덤에 갔던 이야기는 두 제자의 이야기와는 다른 결말로 끝을 맺게 되지만, 하나님께서 두 이야기를 들려주시려는 하는 교훈은 똑같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우리의 귀에 주님의 말씀이 들려오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를 붙드는 어둠과 절망, 슬픔 같은 것들에 붙들려 있을 수 밖에 없고,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모든 믿음과 소망의 증거들이 아무런 소용이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두 제자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분명한 증거를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거기서 얻은 것은 절망과 슬픔 밖에 없었습니다. 왜 그렇지요? 그들이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셔야만 한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시 자기 집으로 되돌아갈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마리아도 그랬습니다. 그는 두 사람보다 더 놀라운 증거들을 눈 앞에 두고서도 계속해서 같은 말만 반복했습니다. 누군가가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 갔다고, 그런데 나는 그들이 어디로 예수님의 시신을 가져갔는지조차 모른다고, 혹시 당신이 가져 갔으면 내가 모셔가게 해 달라고 말이지요. 그렇게 마리아는 예수님의 죽음의 언저리, 그리고 그 죽음이 가져다 준 절망과 슬픔의 주변만 맴돌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결국 마리아의 귀에 예수님의 말씀이 들려오고 그것이 자기 양을 부르는 선한 목자의 음성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마리아는 슬픔과 절망의 사슬을 끊어 버리고 부활하신 예수님 앞에 기쁨으로 설 수 있었고, 제자들에게 달려가 내가 주를 보았다고 증거하는 부활의 참된 증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부활절입니다. 이 세상에 인간으로 오셔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의롭고 신실하게 사시다가 생명까지 내어주셨던 예수님께서 다시 사신 날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신실하고 거룩한 자를 무덤에 버려두지 않으시고 다시 살리셔서 썩음을 보지 않게 하신 날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대로 말이지요. 이것이 부활절이 가지는 첫번째 의미이고 약속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왜 하나님의 말씀대로 신실하고 진실하게 거룩하게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하지요? 그것은 바로 그렇게 살아간 사람은 결코 무덤에 영원히 버려두지 않고 썩음을 보지 않게 해 주시겠다는 부활의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두 제자는 이 약속을 몰랐기 때문에 무덤에 갈 때보다 더 큰 낙심과 슬픔에 빠져 집으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늘 그렇습니다. 생존에 대한 근심과 두려움, 질병과 굶주림, 불확실한 미래와 같은 이 세상의 죽음을 닮은 것들은 늘 우리를 두렵게 하고 낙심하게 합니다. 그 자리에 우리를 주저 앉혀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더 아름답고 거룩한 삶을 살아가지 못하게 방해하지요. 이럴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현실적인 보장이 아니라 부활의 확신입니다. 부활을 확신할 수 있으면 우리는 다시 집으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죽음을 닮은 모든 것들과 싸워 이기고 하나님께서 맡기신 자리에서 부활의 생명을 살아내며 세상에 부활을 전하는 전령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살아계십니다. 살아계셔서 슬픔과 낙심의 주변을 맴돌며 근심과 두려움의 언어들만 반복하는 당신의 양들의 이름을 부르시며 네가 어찌하여 우느냐고, 도대체 누구를 찾고 있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왜 울고 있습니까? 또 누구를 찾고 있습니까? 우리는 삯꾼의 양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돌보시는 그 분의 양들입니다. 우리가 귀를 기울여야 하고, 따라야 할 것은 우리 목자의 음성이지 이 세상의 떠도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주님은 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죽음을 이긴 너의 목자가 네 앞에 있으니 슬퍼하지 말라고, 두려워하지 말고 나를 따라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나의 증인이 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번 부활절은 겉으로 보기에는 가장 부활절 같지 않아 보이는 부활절인지도 모릅니다.  부활의 성찬마저도 함께 나누지 못하게 되었으니까요.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렇기 때문에 이번 부활절은 그 어떤 해의 부활절보다도 더 부활절다운 부활절이 된 것 같습니다. 지금 이 세상에는, 그 날 무덤으로 달려갔던 제자들과 마리아의 마음처럼 슬픔과 두려움 같은 죽음의 그림자가 진하게 드리워져 있고 우리는 그 한 복판에서 부활절 예배를 드리고 있으니까요. 우리는 조심은 해야 하겠지만 두려워 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 주님은 죽음을 닮은 것들 정도가 아니라, 진짜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그렇게 우리를 위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그렇게 우리 부활의 보장이 되셨습니다. 무덤보다 부활을 확인하기에 좋은 곳이 없듯이 이런 세상보다 부활의 소망과 능력을 확인하기 좋은 환경은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의롭게 살아가는 성도들, 그래도 자기 자리에서 예수님을 흉내내며 살아가려고 애쓰는 성도들에게는 부활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죽어도 다시 살 것입니다. 썩어질 것을 심고 영광스러운 것을 거둘 것이며, 추한 것을 심어 아름다운 것을 거둘 것입니다. 땅의 것을 심어 하늘의 것을 거두고 찰나의 씨앗을 심어 영원의 열매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 믿습니까? 늘 이 약속을 가슴에 담고 우리 목자의 음성을 따라 사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모두들 두려움과 근심으로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부활의 소망을 따라 살며, 소망의 삶과 확신의 언어로 부활을 증거하는 증인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