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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20.04.26. 요한복음 15장 9-11절"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2)"(요한 54)

 

 

날짜 :  2020년 4월 26일 일요일

본문 :  요한복음 15장 9-11절

 

 

오늘 함께 예배를 드리시는 여러분들 중에는 아직도 아버지와 어머니 두 분 모두 생전에 계신 분들도 계시지만, 한 분 혹은 두 분 모두 고인이 되신 그런 분들도 계실 줄 압니다. 저는 아버지는 이미 고인이 되셨고, 어머니만 생전에 계시는데요. 부모님을 여의신 분들은 대개 돌아가신 부모님과 관련된 애틋한 사연들이 다 있겠지만, 저에게도 아버지만 생각하면 떠오르는 가슴아린 추억이 하나 있습니다. 이 추억은 닭고기에 대한 추억인데요. 이미 이 이야기를 들어서 알고 계신 분들도 계실 줄 알지만 한 번 더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여러서부터 닭고기를 아주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요즘도 누가 뭘 제일 좋아하냐고 물으면 주저 없이 닭고기라는 단어가 입에서 튀어 나오고, 집에서 뭘 시켜 먹을 때도 제일 자주 먹게 되는 것이 닭고기입니다. 그러니 저희 집 아이들이 어렸을 때에도, 제가 집에 뭘 사가지고 가는 날에는 통닭이 손에 들려 있을 때가 많았습니다. 첫째 아이가 이제 막 어른들이 먹는 음식을 먹기 시작했을 때였다고 생각되는데요. 그 날도 저는 퇴근 길에 통닭 한 마리를 사들고 집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주자하는 곳이 좀 거리가 있어서 거기다 차를 세워 놓고서, 어깨에 가방을 메고서 한 손에는 통닭봉지를 들고 집을 향해 가고 있었지요. 얼마나 기분이 좋던지 그 봉지를 든 손이 저절로 놀이동산의 바이킹처럼 하늘과 땅을 오고 갔습니다. 그런데, 저는 몇 발자국 떼다 말고 그 자리에 멈춰서서 속으로 흐르는 눈물을 삼켜야 했습니다. 그렇게 걷고 있는 저의 모습 위로 한 잔 거나하게 걸치시고 손에는 똑같은 통닭봉지를 들고 흥얼흥얼 집으로 향하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겹쳤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 때까지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사가지고 오시는 통닭을 보고 침을 삼키기는 했어도, 그 통닭봉지가 바로 저희들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이었다는 것과, 그 봉지를 들고 오실 때의 아버지의 마음이 그 날 저의 마음처럼 행복했을 거라는 사실을 헤아려 본 적 조차 없었습니다. 

만약에 그게 그랬다는 것을 빨리 알아차렸더라면 아마도 저는 훨씬 더 행복하고 마음 넉넉한 아이로 자랐을 것입니다. 비록 저희 아버지가 아버지의 역할을 그리 훌륭하게 하시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퇴근 길 손에 들린 봉지마다 가득 담긴 아버지의 사랑을 받아 먹으며 그 사랑의 힘으로 자라났을 테니까요. 아버지는 저를 사랑하셨습니다. 늘 사랑하셨지요. 서툴고 거칠어도 그 사랑 또한 사랑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단 한 번도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했고, 저도 아버지를 사랑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있으면서도 아버지의 사랑을 모르고서 자랐습니다. 사랑이란 얼마나 묘하고 예민한지요! 아무리 큰 사랑을 받아도 그 사랑이 사랑인 줄도 모를 수 있고, 그래서 그 사랑이 주는 엄청난 은택을 전혀 누리지 못할 수 있습니다. 내가 그 사랑 안으로 들어가 그 사랑 안에 거하고, 또 그 사랑에 응답하지 않으면 그 누가 이 세상 모든 사랑으로 나를 사랑으로 사랑해 준다고 해도, 그 사랑이 주는 은택을 제대로 알 수 없습니다. 그 사랑이 주는 부요함과 기쁨도 나와는 상관이 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사랑은 한 없이 좋은 것이기도 하지만, 안타깝고 또 안스러운 것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해 늘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지금까지 너희를 사랑해 왔으니 너희는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라고 말씀하셨는데요. 예수님은 처음부터 끝까까지 제자들을 사랑하셨습니다. 계속 사랑하셨지요. 그것도 그저 그렇게 그냥 사랑하셨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사랑하셨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사랑하셨던 그 사랑으로 제자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이 세상에 예수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만큼 완전하고 무한하며 대단한 사랑이 없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사랑이 어떤 사랑인지를 잘 알고 계셨지요. 늘 그 사랑 안에 거하며 그 사랑을 누리고 그 사랑의 능력으로 살고 계셨으니까요. 요한복음은 곳곳에서 그 사랑을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3장 35절에서는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의 손에 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5장 20절에서는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가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셨다”고 말씀하고 있고, 17장 23절에서는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사 나에게 영광을 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극진히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가지고 계셨던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모든 권한을 예수님에게 넘겨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아들에게 주셨고,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일들을 아들에게 보여 주셨으며, 하나님의 뜻을 하나도 숨김 없이 다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들을 하나님의 영광으로 영광스럽게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이 무엇이든간에 아버지가 아들에게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넘겨 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그 정도로 사랑하셨던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도 너희를 이런 사랑으로 사랑해 왔다고, 그리고 지금도 그 사랑으로 사랑하고 있다고, 너희가 지금까지 이런 사랑을 받고 있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은 다 알고 계시지요? 그러면 예수님은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실까요? 말할 수 없이 사랑하십니다. 너무 사랑하셔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내어주실 수 있는 것은 다 내어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말이지요. 예수님께서는 그것이 너희를 사랑하는 나의 사랑이라고, 나는 지금도 이만큼이나 너희를 사랑하고 있고, 너희는 지금도 그러한 나의 사랑을 받고 있다고 직접 말씀하고 계십니다. 성도 여러분, 이게 사실일까요? 정말 예수님은 우리를 이만큼이나 사랑하시고 우리는 지금도 그 사랑을 받고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주님은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는 그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이 사랑의 고백을 들을 때, 막 감동하고 눈물을 쏟고 그래야 할 것입니다. 입가에는 숨길 수 없는 미소가 그려져야 하고요. 그런데, 이 말씀을 전하는 저나 이 말씀을 듣는 여러분이나 그런 모습이 아닙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 사랑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대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그 엄청나고 불가사의한 사랑에 비하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저 또 그 이야기인가 보다 할 뿐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안타까운 일은 도대체 왜 일어나는 것일까요? 그 어마어마한 예수님의 사랑을 받는 우리들에게는 왜 그 사랑을 받고 있다는 자각도 없고, 만족이나 벅찬 감격도 없을까요? 그 답은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는 주님의 말씀 속에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할 때, 비로소 그 사랑을 받는 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아무리 사랑하셔도 우리가 그 사랑 안에 거하지 않으면 사랑을 누리는 것은 고사하고 그 사랑을 알아차리지조차 못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내어주시는 사랑, 죽음보다 강한 사랑, 그래서 모든 것을 견디고 모든 것을 인내하게 하며, 이기게 하는 그 불가사의한 사랑을 말입니다. 30년을 훌쩍 넘겨 아버지의 사랑을 받았으면서도 그 사랑을 한 번도 알아차리지 못했고, 그래서 그 사랑을 단 한 번도 누려보지 못한 못난 저처럼, 사랑을 받으면서도 사랑을 알지 못하는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고, 지금까지는 너희가 나의 사랑 안에 거하지 않았지만, 이제부터는 제발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고 말이지요.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지 않는 순간은 없습니다. 또 대충 사랑하시는 법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늘, 그리고 최선을 다해서 사랑할 수 있을만큼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영원하고 완전한 사랑이니까요. 그런데도 우리가 그 사랑을 모르고, 그 사랑의 풍성한 은택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그 사랑 안에 거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지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우선 우리 마음과 전 존재를 활짝 열어 예수님의 그저 사랑을 받아들인다는 것을 말할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랑은 다 그렇게 시작되고 문이 열려지니까요. 하지만, 사랑은 받는 것만으로는 불완전합니다. 받는 사랑만으로는 사랑의 진짜 행복과 기쁨, 능력과 부요함을 제대로 드러낼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랑은 아버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이 주고 받으셨던 사랑으로부터 나온 것이어서 일방통행이 아니라 쌍방통행이 되어야 자신의 진짜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이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사랑 또한 그저 그 사랑을 받기만 하는 것만으로는 그 사랑을 제대로 알 수도 없고, 누릴 수도 없습니다. 때로는 그 사랑이 느껴지지도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 엄청난 사랑이 말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의 사랑이 주는 기쁨과 평안, 그리고 능력을 충분히 알고 또 누리려면 우리도 예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아버지는 아들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줌으로써 아들을 사랑하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사랑하시는 방식이었습니다. 이 세상 모든 아버지의 사랑은 이 사랑을 아주 조금, 그것도 거칠고 투박하게 흉내내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들이 아버지를 사랑하는 방법은 다릅니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자기 것을 내어 줌으로써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말에 순종함으로써 아버지를 사랑합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을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 안에 거하셨고, 그 사랑의 부요함과 능력을 온전히 누리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그러니까 예수님의 그 지극한 사랑을 받고 그 사랑에 응답해서 예수님을 사랑하는 일도 똑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진다고 말씀하십니다.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고 말이지요. 이 말씀을 대할 때,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데에도 무슨 조건이 다 필요한가, 예수님은 우리를 무조건 사랑하시는 게 아니었나 싶어 의아해 할 수도 있겠지만, 예수님은 지금 예수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을 논하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그저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방식에 대해서,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우리가 내놓을 수 밖에 없는 우리의 반응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왕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신하라면 스스로 왕의 뜻을 헤아려 그것을 목숨처럼 받들게 되어 있듯이, 우리가 정말로 주님을 사랑한다면 어떻게든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려고 애쓰게 되어있으니까요. 우리의 순종은 예수님의 사랑에 대한 당연한 반응입니다. 그리고 그 순종이 우리를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게 하지요. 그 순종이 예수님의 사랑에 더해져 예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최고의 행복을 가져다 주는 것입니다.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이 말씀은 너무나 복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시는 것보다 더 큰 기쁨과 행복이 없었듯이 우리에게는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보다 더 큰 행복과 기쁨은 없으니까요. 하지만, 어떻습니까? 우리도 제자들과 똑같습니다. 귀 기울여 잘 듣다가도 뭘 하라는 이야기만 나오고, 순종하라는 말씀만 나오면 불편해 하고 부담스러워 하지요. 물론 아무 것도 요구받지 않는 것이 훨씬 더 편합니다. 그리고 무엇인가를 요구받는다는 것은 그것보다 훨씬 더 부담스럽고 불편한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성도 여러분, 우리가 신앙의 길로 부름받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은 아무런 부담도 없고, 아무런 불편함도 없지만, 그래서 무가치하고 무의미한 삶으로 부름받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부름받아 걸어가는 이 길은 늘 우리를 부담스럽게 하고, 불편하게 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믿음의 길은 이미 익숙해져 있는 이 세상의 길과는 확연하게 다르니까요.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이 길은 영광스럽고, 참된 가치가 있는 길입니다. 이 길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걸어가셨던 그 길과 잇대어 있기 때문입니다. 

계명을 지켜야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게 될 것이라 하시니까 제자들이 시무룩해졌던 것 같습니다. 그 말씀 자체가 부담스러웠고, 예수님의 계명 속에 난 길은 그들이 걷고 싶어했던 길과는 다른 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의 오해를 풀어주시려고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은 그저 그렇게 하는 것이 옳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것을 기뻐하시기 때문에 그것이 제자들에게 고통만 주고 고난만 가져다 줄 줄 아시면서도 나의 계명을 지키라고, 내가 가르친 대로 살아가라고 요구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정말로 사랑하셨기 때문에, 제자들을 위해서 해 주신 축복의 말씀이었습니다. 

제가 지난 주일에 이 세상에 예수님보다 더 행복하고 기쁘게 사셨던 분이 없다고 말씀을 드렸는데요. 어떻게, 여러분은 제가 드린 그 말씀에 의심없이 동의가 되셨습니까? 제가 ‘동의’라는 단어를 사용했지만 사실 이것은 동의하고 말고할 문제가 아닙니다. 당사자인 예수님께서 직접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이것이 예수님의 말씀인데요. 예수님은 “나의 기쁨”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기쁨으로 제자들의 인생을 가득 채워주고 싶다고 말씀하셨지요. 그러니, 예수님의 인생은 기쁨으로 충만했던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인생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것 같지만, 생각해 보면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참 많이 오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중의 대표적인 것 한 가지가 바로 우리 인생에 불편함과 부족함이 있으면 그것이 우리를 불행하게 만들 것이라는 믿는다는 겁니다. 실제로는 그렇지가 않는데 말이지요. 특히 우리가 어떤 고상한 가치나 선한 일을 위해서 살아갈 때 그것 때문에 만나게 되는 불편함과 부족함들은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예가 거의 없습니다. 우리 인생을 망하게 하지도 않고요. 이것이 자기 인생의 참 행복과 기쁨의 기준을, 자기 소유의 많음이나 안락함 같은 것들이 아니라 자기 인생에 부여되는 영원한 가치나 존재의 온전함에 두는 성도들의 경우에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저는 예수 너무 잘 믿어서 망했다는 사람 한 번도 본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처럼 선하게 살아서 불행해졌다는 사람도, 다른 사람에게 베풀고 나누고 살아서 기쁨이 없어졌다는 사람도 그렇고요. 반대로 그런 길을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가 진짜 행복해 졌다고 고백하는 사람도, 그렇게 해서 자기 인생의 참된 가치를 되찾았다고 말하는 사람도 본 적이 없습니다. 제가 만난 분들은 이상하게도 늘 그것과는 반대가 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의 경험도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 뜻을 이루기 위해서 사셨던 예수님의 인생은 참 고단하고 힘들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예수님은 그 짐을 내려놓지 않으셨습니다. 그 짐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삶을 포기하지 않으셨지요. 왜 그러셨을까요? 단지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오로지 하나님만을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예수님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삶,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예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아들이 사랑하는 아버지를 사랑하는 방식이었고요. 그렇게 하나님과 예수님은 사랑을 하고 또 사랑을 받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누리신 기쁨은 가장 사랑하는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그 아버지를 사랑하는데서 나오는 기쁨이었고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기쁨 때문에, 그 기쁨을 포기할 수 없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삶을 선택하셨고, 그것을 고집하셨던 것입니다. 

회의자들을 위한 사도라고 불렸던 C. S. 루이스라는 분은 ‘영광의 무게’라는 책에서 우리의 진짜 문제는 우리의 갈망이 너무 강한 것이 아니라 너무 약한 것이 문제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이 바닷가에서 휴가를 보내자고 해도 그저 빈민가 한 구석에서 진흙 놀이나 하면서 놀고 싶어하는 꼬마처럼 참된 것이 있고 그것을 얻을 수 있는데도 적당한 것에 적당히 만족하는 상태가 되어 버렸다고 했지요. 얼마나 정확한 진단인지 모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영혼에는 엄청난 구멍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구멍들은 이 세상 그 어떤 것으로도 메꿀 수가 없습니다. 많은 돈이나 높은 명예, 넓고 비싼 집이나 입만 열면 늘어게 되는 자랑거리들, 심지어는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나의 가족이 주는 기쁨과 위안으로도 우리 영혼 한 가운데 뚫려 있는 이 퀭한 구멍은 메꿀 수가 없습니다. 그 구멍은 태초에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과 나누었던 그 무한하고 완전한 사랑의 교제를 잃어버렸을 때 우리 영혼에 뚫려버린 ‘하나님께서 빠져나간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그저 믿는 것으로는 이 구멍을 메꿀 수가 없습니다. 오늘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여전히 헛헛한 삶을 살고, 가실 줄 모르는 갈증을 안고서 밑터진 웅덩이들만 파 내려가는 것이 그래서 입니다. 그 구멍은 너무나 크고 깊기 때문에 참 사랑으로만 메꿔집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사랑하셨듯이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할 때, 그렇게 예수님의 사랑 안에 온전히 거하게 될 때 비로소 채워지기 시작하고 또 채워져 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씀대로 사는 것이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방법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것이 우리가 잃어버린 참 사랑의 기쁨을 되찾는 비결입니다. 다른 방법은 없을까요? 안타깝게도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다른 방식으로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을 사랑할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예수님이 누리셨던 그 비밀스럽고 충만한 기쁨으로 저와 여러분을 초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고, 그래서 우리도 예수님처럼 기쁨 가득한 인생을 살기를 바라시니까요. 세상이 주는 진흙 덩어리같은 위로와 만족 때문에 하늘 해변에서 하나님과 함께 누리게 될 그 기쁨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말씀을 따라 사는 삶을 통해 예수님을 사랑하십시오. 예수님을 사랑하기 위해 지불해야 할 댓가가 아무리 커도 거기서 얻게 될 그 기쁨과 행복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무한 앞에서 유한은 없는 것이고, 완전한 것 앞에서 불완전 한 것은 가치를 논할 수가 없으니까요. 

 저와 여러분 우리 모두가 말씀 속에 난 길을 따라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의 넘치는 기쁨 안에 사는 주님의 제자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1.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마음과 전 존재를 열어 의심 없이 제한 없이 받아들이게 하소서. 
  2.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삶을 통해 나도 주님을 사랑하게 하소서. 
  3. 주의 사랑을 받고 주님을 사랑함으로써 넘치는 사랑의 기쁨 속에 살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