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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20.05.03. 요한복음 15장 12-17절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3)"(요한 55)

 

 

날짜 :  2020년 5월 3일 일요일

본문 :  요한복음 15장 12-17절

 

 

계속 앞만 바라보면서 길을 가면 걷고 있는 길의 아름다운 풍경을 놓치게 됩니다. 말씀도 그렇습니다. 눈 앞의 말씀에만 몰두하면 그 말씀을 주신 하나님의 마음을 놓치기 쉽습니다. 그래서, 말씀에 담겨 있는 풍성한 기쁨과 감격, 그리고 은혜 같은 것들도 놓치게 되고요.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랑 가득 담긴 편지를 마치 신문기사나 도덕교과서 읽듯이 읽게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15장 맨 처음으로 돌아가서 말씀을 우리에게 주신 예수님의 마음을 좀 헤아려 보고, 그 마음을 붙들고서 15장의 남은 말씀을 마저 살펴 보기로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15장은 예수님의 고별강화의 두번째 부분에 해당되는데요. 이 말씀이 이런 이름으로 불리는 것은 이 말씀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주신 마지막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조금 있으면 대제사장의 부하들이 들이닥칠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끌려갈 것이고, 고난을 당하실 것이며, 결국 돌아가시게 될 것입니다. 유월절의 어린 양처럼 말이지요. 그러니 이 말씀은 제자들에게 주시는 예수님의 유언일 뿐만 아니라, 그들을 향한 예수님의 마지막 사랑이기도 했습니다. 

가지와 열매에 대한 말씀들, 열매를 맺지 않으면 밖에 버리워져 불태워진다는 말씀들, 그리고 내 계명에 순종해야 내 사랑 안에 거하게 된다는 말씀들 …. 모두 다 예수님의 말씀이지만 이 말씀은 참 은혜롭게 다가오는 반면 저 말씀은 조금 부담스러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끌어안고 싶지만 저 말씀은 조금 멀찌감치 밀어내고 싶을 수도 있지요. 하지만, 그 모든 말씀들이 전부 우리를 깊이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에서 흘러나온 말씀들입니다. 그 사랑을 담아 주신 마지막 말씀들이고요. 그걸 생각하면 버릴 것이 없습니다. 취사선택할 것이 없고요. 모두 다 사랑해서 주시는 말씀들이니 우리는 그저 사랑으로 받으면 됩니다. 그러면, 그 말씀이 우리를 복되게 하고 기쁘게 합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15장 말씀을 짧게 정리해 보면요, 처음에 예수님은 내 안에 거해야만 너희가 열매맺는 가지가 될 수 있다 하셨습니다. 그 다음에는 내 안에 거한다는 것은 곧 나의 사랑 안에 것이라고 설명해 주셨지요. 그리고, 나의 계명들, 그러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살면 내 사랑 안에 거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12절 말씀을 주셨는데, 12절 말씀은 사실상 15장의 중심이고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한 구절의 말씀 속에 우리가 예수 안에 거하고 열매를 맺어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기쁘게 살 수 있는 방법이 이 한 구절 말씀 속에 전부 요약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12절을 같이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것이니라” 아멘. 잠시 설명을 덧붙여 드리면요. 10절에 ‘계명’이라고 되어 있는 단어들은 전부 ‘계명들’이라고 옮겨야 맞습니다. 원래 헬라어 성경에서는 단수가 아니라 복수로 되어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10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하나님의 모든 말씀들에 순종하며 살았듯이 너희도 나의 모든 말에 순종하며 살아야 한다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도 이 부분에 대해서 말씀드릴 때, 예수님의 말씀이라는 표현으로 바꿔서 사용했던 것이고요. 그런데, 12절에 와서 예수님께서는 ‘내 계명’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딱 하나의 계명만을 거론하고 계시는데, 그 계명이 바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모든 계명의 완성이고 핵심이기 때문에 그 하나의 계명 속에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요약해 넣으신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말씀은 다른 건 다 어떻게 해도 좋으니 서로 사랑하기만 하면 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오히려 서로에게 무슨 일을 하고 무슨 행동을 하든지 그 모든 결정들이 전부 다 서로를 사랑하는 사랑에서 나온 것이 되게 해야하며, 서로를 향한 사랑이 되게 해야 한다는 그런 말씀이었습니다. 그 사랑이 세상으로 흘러가기 전에 우리들 사이에서, 교회 안에서 선명하게 드러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씀이었고요. 그러니, 12절 말씀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성도들이, 형제와 자매들이 서로 사랑하게 될 때, 그 사랑을 통해 예수님의 사랑 안에 온전히 거하게 되고 그것이 우리의 열매가 된다는 말씀이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면 그것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된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신비입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기도 합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눈에 보이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직접 증명해 보일 방법이 없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그 분께 드린 들, 그 분이 직접 그것을 받으실 수는 없으니까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우리가 예수님만큼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을 하나 남겨 놓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우선 교회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생명을 값으로 내어주고 사신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예수님께 교회가 그만큼 귀하다는 뜻이지요. 그리고 교회는 이 세상에 있는 예수님의 몸입니다. 이것은 비유가 아니라 사실입니다. 그러니, 내 옆의 형제와 자매를 사랑하는 것이 곧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은 예수님께서 그렇게 귀하게 여기시는 것을 나도 귀하게 여기는 것이고, 내가 형제와 자매를 사랑하게 될 때, 예수님의 몸과 그 몸의 지체가 그 사랑을 받고, 그 몸 안에 계신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그 사랑을 받으시니까요. 그래서,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되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결국 서로를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통해 우리와 예수님이 하나가 되어 우리가 예수 안에 거하고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행복한 연합이 가능해지고요. ‘나를 사랑하는 자가 내 계명을 지킬 것’이라고 하셨고,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던 것은 바로 그런 의미일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 참 적당히 피해가시는 법이 없으십니다. 그냥 사랑하라고 하셔서 알아서 대충 사랑하게 내버려 두면 좋을 텐데 그렇게 하시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꼭 찝어 말씀하셨습니다. 마치 사랑하려는 우리의 마음을 좌절시키기라도 하려는 듯이 말이지요. 베드로의 일화가 생각납니다. 한 번은 베드로가 예수님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라고 자랑스럽게 물은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는“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라도 할지니라”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인간은 늘 이렇습니다. 이 정도면 사랑하면 충분하겠지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조금 용서하고 조금 사랑하면서도 그것으로 만족하고 그것으로 자랑합니다. 심지어는 전혀 사랑하지 않을 때에도 별다른 안타까움이 없지요. 다 자기가 기준이고 자기만 못한 사람들이 비교대상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요청하시는 사랑은 그저 그렇고 그런 사랑, 적당한 수준의 사랑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의 사랑을 보여 주십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사랑, 우리의 인생과 고통을 구속하시기 위해 우리처럼 사시고 우리처럼 고통당하셨던 그 사랑, 우리를 사랑하시되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사랑하시는 그 사랑, 그래서 끝내 자신의 생명까지 내어주셨던 그 사랑을 보여주십니다. 그러면서 너희도 서로를 사랑하되 ‘이렇게’ 사랑하라고 하시지요. 너무하다고 생각되지 않으십니까? 너무 현실감이 없어서 오히려 별 느낌이 없지는 않으신가요? 저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그런 줄 알고 계십고요. 그런데도,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인간이라는 존재는 완전함을 목표와 기준으로 삼지 않으면 늘 게으름과 적당주의에 빠지고, 교만과 자기만족에 빠진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 아름다운 사랑이, 그리고 사랑을 위해 애쓰는 그 모든 노력들이 또 하나의 율법이 되고 자랑이 되니까, 그래서는 사랑을 사랑답게 지켜낼 수가 없으니까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같이 서로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처럼 일흔 번씩 일곱 번 용서할 수가 없지요. 그러니 어쩝니까? 그저 사랑하는 겁니다. 그저 용서하는 것이고요. 되니 안되니 힘드니 쉬우니 필요하니 필요 없느니 그런 것 따지지말고 그냥 사랑하고 그냥 용서하기 위해서 애쓰는 것입니다. 포기하지 말고 말이지요. 그렇게 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것 밖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사랑이 없으니까요.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 성도 여러분, 이것이 바로 우리를 사랑하신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더 사랑할 수 없을만큼 사랑하시지요. 그래서, 그 사랑 때문에 우리를 위해서 자기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실 수 있는 최고의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이 말씀 속에 아주 특별한 낱말 하나가 나옵니다. 그것은 바로 ‘친구’라는 낱말인데요. 이 낱말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이 친구가 친구에게 주는 사랑이었고, 우리는 친구로서 예수님의 사랑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원래 절대로 예수님의 친구가 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창조주이시고 우리는 피조물입니다. 예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이시고 우리는 심판받아 마땅한 죄인입니다. 게다가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원수노릇하며 살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친구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우리를 사랑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를 원래 우리가 있던 그 비참하고 형편 없는 자리에다 그냥 놓아둔 채로 사랑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의 종이 될 자격도 없는 우리들을 예수님의 친구의 자리로 높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친구가 받을 수 있는 있는 최고의 사랑으로 사랑해 주셨지요. 예수님은 그렇게 스스로를 우리의 자리까지 낮추신 다음, 우리를 예수님의 친구의 자리로 높여주셨고, 그런 우리를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는 최고로 사랑으로 사랑하신 것입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하면 나의 친구라”고 하신 말씀은 그런 맥락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먼저 예수님의 친구로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친구가 줄 수 있는 최고의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당신의 그 귀하고 영광스러운 목숨을 우리를 위해서 내어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도 그 사랑 안에서 그 사랑을 받으면서 살아가고 있지요. 그러니, 우리가 예수님의 그러한 사랑을 받는 친구이고, 그 사랑을 알고 있는 예수님의 친구라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당연히 예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친구이고 예수님의 친구라면 당연히 예수님을 사랑해야 하니까요. 그런데, 예수님은 너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 곧 나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계명에 순종할 수 밖에 없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모르고 있었지만, 예수님은 늘 제자들을 자신의 친구로 대하고 계셨습니다. 그 동안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끊임 없이 말씀을 주셨습니다. 제대로 알아듣지도 못하는데, 때로는 관심도 없는데, 예수님에 대해서, 믿음에 대해서,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하나님께 들은 모든 것들을 남김 없이 다 말씀해 주셨지요. 가끔은 따로 불러다 놓고 과외까지 시켜가면서 밥통같은 제자들을 가르치시는 수고를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그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종이 아닌 친구로 생각하셨기 때문입니다. 종은 주인의 뜻과 생각을 다 모릅니다. 알 필요도 없지요. 그저 시키는대로 하기만 하면 됩니다. 싫든 좋든 말입니다. 그래서 종에게는 모든 것을 알려주지 않습니다. 그냥 이러 저러하게 해라 하고 명령만 하지요. 하지만, 친구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친구에게는 자신의 생각과 뜻을 전부 알려줍니다. 그래서, 친구는 친구의 마음을 알고 친구의 생각을 압니다. 그리고, 친구는 자기 친구를 위해서 어떤 일을 할 때, 항상 그 앎에서 부터, 친구의 마음과 생각을 헤아려 거기서부터 출발합니다. 이것이 바로 친구와 종의 차이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때로는 제자들을 아프게 하고 힘들게도 했을 것입니다. 관심도 가지 않고 이해할 수도 없는 말씀들도 많았겠지요. 듣고 싶은 말씀보다 그렇지 않은 말씀들이 더 많았을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늘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친구였고, 그래서 예수님은 그 말씀으로 제자들을 귀하게 친구대접해 주셨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귀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십니까? 예수님의 말씀이 들리시나요? 지금까지 여러분은 그 말씀들 속에서 은혜를 받아왔으며 그 말씀을 붙들고 하나님을 섬겨 오셨지요? 예수님은 어느 것 하나 숨김 없이 하나님 아버지의 모든 말씀을 우리들에게 열어 놓으셨지요? 왜 그러셨을까요? 왜 예수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주셔서 말씀을 듣게 하시고, 그 말씀을 기뻐하게 하셨으며,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숨김 없이 알려 주셨을까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친구이고,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친구대접해 주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모세에게 그렇게 하셨고, 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말이지요.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주로 무언가 나에게 필요한 실제적인 것을 받으려고 합니다. 내 문제에 대한 답을 발견하려고 하고, 위로와 소망을 찾지요. 심지어는 나를 편들어 주고 나의 귀를 간지럽혀 줄 인간의 말을 구하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내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면 이내 그 말씀에 흥미를 잃어버리고 맙니다. 그 말씀을 귀하게 여기지도 않게 되고요. 하지만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들려주신다는 것은 그 자체가 너무나 황송하고 대단한 일입니다. 우리에게 말씀을 주시고, 우리에게 그 말씀이 들려온다는 것은 곧 하나님께서 우리를 친구로 여기시고 계시며 친구대접해 주고 계신다는 뜻이니까요. 

어떤 분은 그러시더라고요. 성경을 보니 그저 사랑하며 살아가라는 이야기라고, 그러니 복잡하게 이야기할 것 없이 설교자도 그것만 말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말입니다. 틀린 말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만큼이나 두꺼운 책 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담아 주시고, 또 설교자들을 통해 이 말씀들이 구구절절히 여러분에 귀에 들려지게 하시는 것은 우리에게 어떤 정보를 전달하시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명령만 하시려는 것도 아니고요. 여러분이 하나님의 친구이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하나님과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을 알려주고 싶으셔서 그러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 말씀만 해도 그렇지요. 예수님께서 우리를 친구로 여기지 않으셨다면 그냥 그렇게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서로 사랑해라. 무조건. 끝!”이렇게 말입니다. 뭐를 물을 필요도 없고, 무슨 생각을 덧붙일 이유도 없지요. 우리는 그저 예수님의 명령을 듣고 그대로 따르기만 하기만하면 됩니다. 시킨대로 하지 못하면 불순종에 대한 벌을 받으면 되고요. 우리는 종이니까요.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의 종일 뿐만 아니라 친구이기도 합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친구가 된 종들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이렇게 조목 조목, 선과 후를 따져가면서, 그게 왜 그래야만 하는 지를 설명해 주시는 것입니다. 친구이니까 친구들을 충분히 이해시키고 제대로 설득시켜서 당신과 같은 마음과 생각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 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을 주실 때마다 그 모든 말씀들을 통해 ‘너는 나의 친구야’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통해 우리를 친구로 대접해 주십니다. 친구니까 모든 것을 알려주시고, 모든 것을 설명해 주시고, 모든 것을 숨기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목숨을 내어주신 그 모든 사랑을 담아 이 모든 말씀들을 우리에게 들려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그것이 바로 나를 사랑하는 너희의 사랑이라고 말이지요. 그 말씀이 바로 우리를 향한 사랑이고 존중이고 배려이며 진실된 관심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친구들을 정말로 복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그래서 우리늘 말씀을 들을 때 나를 최고로 사랑하는 친구의 이야기를 듣는 마음으로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인격을 다해 그 말씀에 반응해야 합니다. 때로는 그 말씀이 귀에 잘 들어오지 않더라도 말이지요.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 다 받게 하려 함이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라” 

사랑은 참 어렵습니다. 사랑만큼 우리를 자주 좌절시키는 것도 없지요. 그래서 사랑하며 살기를 원하는 사람은 늘 그 사랑이 자신을 좌절시킬 것을 각오하고 있어야 합니다. 하물며 그 사랑이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던 것과 같은 사랑이어야 한다면 그 사랑이 얼마나 어려울 지는 말할 필요도 없겠지요. 하지만 우리는 정말 말문이 막히는 예수님의 사랑을 받는 예수님의 친구들입니다. 늘 그 분으로부터 하늘의 비밀을 전해 들으며 사는 왕의 친구들이고요. 허니 우리도 서로를 사랑해야 합니다. 그 사랑을 받는 친구로서 우리를 친구 삼아주신 예수님을 사랑해야 하니까요. 사랑의 고통만 생각하고, 사랑하는 불편함만 헤아리지 마십시오. 사랑은 복된 것입니다. 그리고 기쁜 것입니다. 서로 사랑할 때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 안에 기뻐하게 됩니다. 그 사랑에서 열매가 맺혀지고, 그 사랑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항상 있는 열매가 되지요. 그러니, 서로 사랑하는 것을 쉽게 포기하지 마십시오. 서로 사랑하는 일을 피하지도 마시고요. 사랑의 고통과 어려움은 사랑을 포기하라는 신호가 아니라 우리의 사랑에 대한 도전이고 시험이니까요. 사랑하다 힘이 들고 사랑하다 지치면 예수님의 사랑 안으로 들어와 기도하십시오. 예수님께 부르짖어 아뢰세요. 그저 사랑하게 해 달라고, 그럴 마음과 힘을 달라고 말입니다. 그러면 아버지께서 사랑하도록 도와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데 꼭 필요한 마음의 변화를 주시고, 사랑의 열매를 맺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실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조금씩 조금씩 사랑할 능력을 가진 예수님의 친구들로 빚어져 가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친구가 될 수 없는 우리를 친구 삼으셨습니다. 친구이기에 우리를 위해 목숨을 내어 주셨고, 친구이기에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우리에게 알려 주셨습니다. 이제 그 분이 말씀하십니다. 서로 사랑하라고, 서로 사랑함으로써 너희들의 친구인 나를 사랑하라고, 이제는 너희들 차례라고 말씀하십니다. 계명을 따라 서로 사랑하십시다. 그리고 그 사랑을 통해 우리 주님을 사랑하십시다. 그 사랑을 연습하고 그 사랑을 키워가는 곳이 바로 이 교회가 되게 하십시다. 우리 공동체 안에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던 것처럼 서로를 사랑하는 사랑의 열매가 자라나는 은혜와 축복이 가득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예수님께서는 도무지 예수님의 친구가 될 수 없는 우리를 친구로 삼아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런 우리를 위해서 목숨을 내어 주시는 최고의 사랑을 주셨으며, 말씀을 통해 우리를 친구로 높여 주시고 친구대접해 주고 계십니다. 우선 이 사랑에 감사합시다.  
  2. 예수님께서는 친구인 우리에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주셨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일은 힘드는 일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없으면 우리는 예수님의 친구일 수 없습니다. 그 사랑이 우리 주님을 사랑하는 사랑이니까요. 서로 사랑하는 일 포기하지 않게 하시고, 가볍게 생각하지 않게 하소서. 기도하며 부르짖으며, 사랑하는 사람의 애통한 마음을 가지고 잃어버리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