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 2020년 5월 10일 일요일
본문 : 요한복음 15장 17절
지난 주일에는 우리가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계명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는데요. 전하는 저도 그랬지만 들으시는 여러분에게도 그리 편안한 시간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사랑이란 늘 그런 것이니까요. 사랑하라는 명령은 언제나 우리에게 큰 짐을 지우고 부담을 줍니다. 그 명령 앞에서 마음이 편안할 만큼 충분히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 사람이나 사랑하는 일이 쉬운 사람이 없으니까요. 그래서 오늘은 왜 사랑하는 것이 우리에게 그렇게 어렵게만 느껴지는가 하는 이유를 좀 짚어 보고,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더 수월하게 이 문제를 풀어내며 살 수 있을지 함께 궁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사랑이라는 것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 보면요. 이 세상에 사랑보다 좋은 것이 없고, 사랑보다 더 가치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랑이라는 말을 들으면서 화를 내는 사람이 없고, 사랑받기를 원하고 사랑을 받으면 너무나 행복해 하지요. 거의 모든 영화나 소설, 그리고 옛날 이야기들이 어떤 모습으로든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을 정도로 사랑은 인생의 영원한 주제인 것 같습니다. 비유하자면 사랑은 인간의 영혼이 가장 귀하게 여기는 보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만 놓고 보면 누구나 다 사랑하며 살 것 같고, 그 사랑 때문에 행복하게 살아갈 것 같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모두가 다 사랑이 그렇게 좋고 귀한 것이며, 행복한 것인 줄 알면서도 사랑을 힘겨워 합니다. 늘 ‘사랑하며 살아야 하는데…’라고 말끝을 흐리며 살지요. 믿지 않는 사람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실 사랑은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는 더 큰 부담입니다. 사랑이란 우리에게 맺지 않으면 안되는 열매이고, 꼭 지켜야 할 계명이며, 명령이기도 하니까요. 그래서 우리 중에는 사랑을 생각하고 사랑하라는 말씀을 들을 때면 마치 커다란 알약이 목에 걸린 사람처럼 되어 버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랑의 가치와 사랑의 기쁨과 행복을 생각할 때, 이것은 커다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너무 당연한 이유가 되겠지만, 우리가 사랑하는 일을 힘들고 부담스러워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일 자체가 우리의 본성과 부딛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본질적으로 내 생명을 내어주어 다른 사람을 살게 하는 원리입니다. 그런다고 해서 사랑하는 사람이 진짜로 죽는 것은 아니지만 일단은 사랑하려면 크든 적든 자기를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애초에 사랑이라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지요. 때로 우리의 사랑이 다른 사람의 불행이 되고 상처와 아픔이 되는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내려놓지 않은 채로 사랑을 해 보겠다고 되지도 않는 억지를 부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힘든 것은 사랑하는 일 자체가 힘들기 때문이 아닙니다. 사랑하려면 자기를 내려놓아야 하니까 사랑이 힘든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누구나 자기가 살고 또 자기를 세상의 중심에 놓기를 원하는 천성과도 같은 아담의 원죄가 있으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사랑보다 좋은 것, 사랑보다 행복한 것, 사랑보다 가치있는 것이 세상에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사랑하는 것을 그렇게 힘들어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장애물을 어찌어찌 극복해 낸다고 하더라도 사랑하려는 우리의 결심을 약해지게 만드는 또 하나의 장애물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사랑을 다른 사람에 대한 좋은 감정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우리의 고정관념입니다. 많은 분들이 아예 사랑을 감정이라고 생각하거나 아니면 사랑에는 반드시 상대방을 사랑스러워하는 감정이 동반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랑이 아니라고 믿지요. 하지만, 사랑이 정말로 그런 것이라면 우리는 사랑스러운 사람들 밖에는 사랑할 수 없고, 또 사랑하는 감정이 생겨날 때까지는 결코 다른 사람들을 사랑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사랑하라는 말을 들으면 전혀 사랑스럽지 않은 사람들이 떠오르고 그래서 우리는 그 아름답고 행복한 말 앞에서 그렇게 예민해지고 뚱해지는 것입니다. 사랑스러워하는 감정은 억지로 만들어 낼 수 없는 것이고, 그래서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적어도 지금 당장은 불가능한 일을 요구받는 셈이 되니까요.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사랑하라’고 ‘명령’하셨다는 점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명령은 반드시 그렇게 해야만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는 사랑이라는 것이 우리에게 큰 부담이 되지요. 하지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사랑을 명령하셨다는 것은 이 사랑이 단순히 사랑스러운 감정이 아니며, 그런 감정이 전혀 없어도 충분히 할 수 있는 ‘행동’이라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총알이 빗발치는 전장에서 소대장이 ‘돌격! 앞으로!’를 외친다면 그것은 명령입니다. 그러면 소대원들은 그 명령에 복종하지요. 하고 싶어서, 그 일이 좋아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죽기보다 싫고 죽기보다 두렵지만 명령이기 때문에 따르는 것이지요. 이렇게 명령을 따를 때 감정은 필요 없습니다. 필요한 것은 순종하려는 의지입니다. 그래서, 소대원들은 그런 명령을 받으면 이구동성으로 “와!”하고 외치면서 뛰쳐 나가는 것입니다. 하기 싫은 일, 본성을 거스르는 일을 하려면 그렇게라도 해서 힘을 얻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영국의 기독교 사상가인 C. S. 루이스라는 분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풀이하면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네 이웃을 너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지 않으시고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다는 것에 주의를 기울여 보자고 제안하는데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몸을 어떻게 사랑합니까? 아주 간단합니다. 우리는 그저 몸이 필요로 하는 것을 공급해 주는 일을 통해 우리의 몸을 사랑합니다. 그게 우리가 우리의 몸을 사랑하는 방식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신지 모르지만, 저는 제 몸을 막 사랑하지 않습니다. 거울 앞에 설 때마다 막 감탄하고, 기분이 엄청 좋아지고, 자랑스럽고 행복하고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냥 ‘어이구야!’하지요. 하지만, 우리는 우리 몸을 위해서 어떻게 합니까? 아무리 꼴보기 싫어도 추우면 옷을 입히고, 졸리면 잠을 재우고, 배가 고프면 음식을 공급하며, 목이 마르면 물을 먹입니다. 그리고 아파하면 최선을 다해서 치료해 주지요. 이것이 바로 우리가 우리의 몸을 사랑하는 방식입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사랑하기를 힘들어 하는 우리들에게는 정말 엄청난 힌트입니다. 한 발 더 나아가 보면 예수님께서는 이웃 뿐만이 아니라 원수도 사랑하라고 하셨는데요. 원수에 대해 한 번 생각해 볼까요? 원수는 그야 말로 원수입니다. 그래서, 원수는 전혀 사랑스럽지가 않지요. 아니, 사랑스러울 수가 없는 사람이 바로 원수입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의 말씀을 잘 적용하면 충분히 원수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원수를 사랑하냐고요? 간단합니다. 내가 내 몸을 사랑할 때 그러는 것처럼 원수가 필요로 하는 것을 주면 됩니다. 그러기 싫습니다. 정말 싫지요. 하지만 그래도 이를 악물고서라도 원수에게 유익이 되는 일을 해 주면 그게 원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원수의 짐승이 구덩이에 빠지면 확 흙을 덮어 버리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 마음을 억누르고 그 짐승을 구해주는 것, 원수가 망하게 생겼으면 확 망해 버리라고 저주라도 하고싶지만 그 마음을 꾹 누르고 그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 그것이 바로 원수를 사랑하는 일입니다. 이렇게 하는데 사랑스러워하는 감정은 없어도 됩니다. 그러면 충분하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것이 원수를 사랑하기 위한 훌륭한 출발점은 될 수 있습니다. 그것도 정말 훌륭한 사랑입니다.
교회 안에서 서로를 사랑하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솔직히 뭐 우리가 다 다른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나를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샘솟게 할 만큼 충분히 사랑스러운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 함께 어울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교회마다 정말 저 사람만 없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징글징글한 사람들이 생겨나게 마련입니다. 도대체 왜 저러나 싶기도 하고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 자신도 누군가에게는 그런 사람이 되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절대로 나는 그렇지 않다고, 나는 충분히 사랑스러운 사람이니까 그런 말 말라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이런 상황에서 서로를 사랑해야 하는데, 만약 사랑이라는 것이 늘 좋은 감정이 되어야 한다면, 교회는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이 아니라 오히려 사랑에 좌절하고 신물이 난 사람들의 모임이 되고 말 것입니다. 하지만 사랑스러워 하는 감정을 빼놓고 다시 사랑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서로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 우리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답은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라는 예수님의 말씀 속에 들어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것이 사랑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감정은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괜찮습니다. 여전히 그 사람이 마음에 안 들어도 괜찮아요. 중요한 것은 고민이고 선택입니다. 내가 싫은 것은 다른 사람들도 싫어 합니다. 나에게 불쾌한 것은 다른 사람에게도 불쾌하고요. 내가 존중받고 싶다면 다른 사람도 똑같습니다. 예외가 없지요. 이것을 받아들이고 그러면 어떻게 해야할까를 고민하고 그 답대로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교회 안에서는 아무래도 ‘말’ 때문에 사랑이 깨지고 관계가 뒤틀리는 경우가 제일 많기 때문에, 오늘은 이 원리를 우리의 말에 한정해서 적용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말을 하기 전에 먼저 생각해 보야야 합니다. 만약 내가 내 말을 듣는 지체라고 한다면, 나는 그 말을, 어떤 말투로 어떤 단어들을 사용해서 해 줄 때, 제일 거부감 없이 불쾌해 하지 않고 들을 수 있을까를 고민해 보아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 말하기를 시작하는 습관을 들이기 위해서 애써야 합니다. 나의 말이 감정이나 본능에서 흘러나오도록 내버려 두지 마시고 말이지요. 그러니 자꾸 거친 말이 나오고 언성이 높아지고, 남을 비난하게 되고 그러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의 언어는 우리의 내면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말이 근본적으로 달라지려면 인격이 달라져야 하고, 마음의 상처가 있다면 그 상처까지 치료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좋은 말, 적절한 말을 골라 보려는 우리의 고민과 배려만으로도 우리의 언어가 서로를 사랑하는 것을 방해하는 일은 상당부분 예방할 수 있습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대부분 말의 내용이 아니라 말투와 단어들이니까요. 저는 그렇더라고요. 저의 잘못을 지적해 주는 말도 부드럽고 조심스럽게 해 주면 상처가 되거나 불쾌하지 않고 오히려 기쁘고 고맙습니다. 말 하기 전에 내가 듣는 사람이 되어 나의 말을 들어 보는 것. 그렇게 자신의 말을 잘 살피고 잘 선택하는 것. 이것은 정말 최소한의 사랑이고, 우리가 충분히 할 수 있는 사랑입니다. 성경은 말로만 사랑하면 안된다고 가르치지만 우리가 말로도 사랑하지 못한다면 어찌 서로를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말로써 서로를 사랑하기 위해 애쓸 때, 우리는 훨씬 더 수월하게 서로를 사랑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미운 사람, 사랑스럽지 않은 사람도 사랑할 수 있다는 것과 그 사랑의 방법을 조금 살펴 보았는데요. 지금부터는 그런 사람들을 향한 우리의 좋지 않은 감정 자체를 근본적으로 달라지게 할 수 있는 방법을 좀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무래도 의지만으로는 미워하고 싫어하는 감정을 해결할수는 없고, 그러면 그 감정이 시한폭탄처럼 남아있다가 언제든지 어렵게 시작한 사랑을 무너뜨릴 수 있으니까요. 지금부터 말씀드리는 것은 요근래에 제가 경험하고 있는 일입니다. 그리고, 저는 오늘 설교의 이 부분을 타이핑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에게도 똑같은 깨달음과 은혜를 주셔서 이전보다 조금 더 수월하게 서로를 사랑하게 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드렸습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서 사람 사랑하는 일이 어려우시거나 자꾸 다른 사람들과 부딛히시는 분들이 있다면, 잘 들어보시고 꼭 여러분의 삶으로 옮겨 보시기 바랍니다. 분명히 적지 않은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제가 요근래, 너무 좋아서 세 번을 연거푸 읽은 책이 한 권있습니다. 그 책은 박대영 목사님께서 쓰신 ‘묵상의 여정’이라는 책입니다. 이 책은 제목처럼 ‘묵상'에 대한 책이기는 하지만 그저 성경을 묵상하는 방법에 대한 책이 아니라 우리가 성도와 하나님의 피조물로 살아가기 위해서 왜 반드시 성경을 비롯한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묵상하는 일이 필요한 지, 그리고 그런 묵상은 어떤 마음의 태도를 가지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적어 내려간 책입니다. 스스로 그렇게 30년을 산 분의 이야기이니 그만큼 묵직한 울림이 있었습니다. 제가 이 책을 세 번이나 읽은 것은 전체적인 내용도 내용이지만 책의 중간에 만난 ‘광야’라는 단어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죽겠다고 부르짖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탄식을 듣고 그들을 바로의 손아귀에서 건져 내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곧바로 가나안 땅으로 데리고 가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을 '광야'라는 곳으로 내모셨지요. 처음에는 넉넉 잡아 두 주면 갈 길, 그리고 훨씬 더 좋은 길을 내버려 두고 60일 동안 광야 길을 걷게 하셨고, 그 다음에는 40년을 광야에서 지내게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광야’는 거의 항상 고난을 의미합니다. 힘든 일을 당할 때, 우리는 지금 광야를 통과하고 있다고 말하지요. 하지만, 성도 여러분. 진짜로 ‘광야’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곳이었을까요? 그 곳은 이스라엘에게 고통과 고난만 주는 그런 곳이었겠습니까? 그 광야에서 사는 것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사는 것보다 훨씬 힘들었을까요? 아닙니다. 쓰고 있던 색안경을 벗어놓고 성경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여행할 때보다 더 풍족하고 안전하게 살았던 적은 없었습니다. 늘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번갈아 가며 인도해 줍니다. 그래서 낮에는 시원하고 밤에는 따숩지요. 아침에 일어나면 하루치의 양식이 들판에 널려있습니다. 그저 주워 먹으면 됩니다. 때가 되면 하늘에서 매추라기 떼가 내려와 진수성찬이 되어 주고요. 옷도 떨어진 적이 없고, 신발도 해진 적이 없습니다. 아무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드릴 수가 없었지요. 그러기를 60일이고, 또 40년입니다. 자기 땅이 아직 없다는 것만 빼면 광야보다 좋은 곳은 없습니다. 그러니 광야는 고통이 있고 궁핍함이 있어서 광야가 아니었던 겁니다.
그렇다면 광야는 왜 광야일까요? 무엇이 광야를 광야되게 하는 것일까요? 박대영 목사님은 그것에 대해서 “광야가 광야인 것은 그 곳이 우리가 우리 마음대로 콘트롤할 수 없는 곳이고, 그래서 하나님만 의지하며 살아가야 하는 곳이고, 그렇게 사는 법을 배우는 곳이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광야는 아무 것도 없는 곳입니다. 길도 없고 들도 없지요. 물도 없고 양식도 없습니다. 그래서 살려면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두 달을, 그리고 40년 동안을 하나님만 뒤따라오게 하셨고 날마다 하늘을 열어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공급해 주신 것입니다. 사는 곳이 변하고 형편이 달라져도 계속해서 그렇게 살아가라고 말이지요.
그런데, “우리 마음대로 콘트롤 할 수 없는 곳이 광야”라고 한다면 사실 우리 인생에, 그리고 이 세상에 광야가 아닌 것은 없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어디 이 세상에 내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라도 있던가요? 그렇지가 않습니다. 온 세상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것처럼 설쳐대는 것이 인간이지만, 사실 우리는 내 마음도, 내 생각도, 내 몸도, 심지어는 들숨과 날숨 하나도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보면 저기 저 밖에 있는 길 없고 샘 없는 땅같은 세상 뿐 아니라 나라는 존재 자체가 광야이고 ‘당신’이 광야이고, ‘우리 모두’가 다 광야입니다. 하나님이 없으면 길도 없고 물도 없는, 도대체 답이 없는 것. 그것이 이 세상의 본질이고, 우리 존재와 삶의 조건입니다.
제가 이렇게 박대영 목사님의 묵상을 따라가다가 무릎을 쳤습니다. 그러는 동안 내가 그 동안 왜 그렇게 사람을 사랑하기 힘들어 했는지 그 근본적인 이유를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광야라면 다른 사람들도 다 광야입니다. 내 안에 내가 어쩔 수 없는 광야가 있다면, 다른 사람들 속에도 그런 광야가 있지요. 그리고 우리는 결코 이 광야를 모두 없앨 수 없습니다. 나도 그렇고 당신도 그렇습니다. 내가 나는 도대체 왜 이럴까 생각하고 있을 때, 저 사람도 자기 자신을 놓고서 똑같은 생각을 합니다. 내가 저 사람은 도대체 왜 저렇게 말하고 저렇게 행동할까 할 때, 그 사람도 나를 이해할 수 없어하지요. 모두가 다 광야이며, 이 안에 광야를 품고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광야가 자기 맘대로 안되니 그렇게 말하고 그렇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너나 할 것 없이 말이지요. 물론 저는 이것이 옳고 선하다는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단순히 이게 사실이고 우리의 현실이니, 이것이 우리가 나를 생각하고 너를 생각하는 출발점이 되게하자고 말씀드리고 있는 것 뿐입니다.
우리는 모두 광야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내 안에 내가 내 맘대로 할 수 없는 인격과 사고방식, 그리고 행동의 거친 땅들을 잔뜩 품고서, 또 다른 광야들을 만나지요. 그 곳이 이 세상이고 또 교회이며, 함께 살아가는 우리의 삶입니다. 그런데요 성도 여러분, 광야인 우리가 또 다른 광야를 만날 때 우리는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나도 광야라는 사실은 까맣게 잊습니다. 내 안에 있는 더 거칠고 큰 광야는 그대로 내버려 둔 채로 다른 사람들 속에 있는 광야를 내 맘대로, 내 입맛에 맞게 바꾸려고 합니다. 남의 광야를 내가 컨트롤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도 어쩔 수가 없어 쩔쩔매고 있는 그 광야를 말이지요. 서로가 서로에게 그렇게 하려고만 합니다. 그러면서 그 광야가 나를 위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애당초 불가능할만큼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는 심지어 씻고 밥먹니 밥먹고 씻니 하는 문제로 사랑하는 부부지간에 전쟁을 벌이는 고상한 존재들이니까요. 그러니 서로 간에 벽이 생기는 것입니다. 감정의 골이 깊어지며 사랑하기가 점점 더 힘들어 지는 것이지요. 그것 때문에 우리는 사랑을 위해서 자기를 내려놓는 결단을 내릴 마음조차 빼앗겨 버리는 것입니다.
제가 모든 사람이 다 광야이고 그 안에 광야를 안고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다음, 달라진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예전에 그저 밉고 원망스러웠던 사람들이 조금씩 불쌍해지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내가 나 자신을 힘겨워 하는 것이, 내가 그렇게 말하고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그렇게 또 실수하고 또 후회하는 일을 반복하는 것이 내 안에 있는 광야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니, 그 사람들도 그럴 것이라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그 사람의 거친 언행이나 이해할 수 없었던 행동들... 그것은 자기 힘으로 자기 안에 있는 광야를 감당해 낼 수 없어서 그의 영혼이 내지르는 신음소리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니 그 사람도 나처럼 자기 광야를 짊어지고 가느라고 많이 고생스럽겠구나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요즘 저는 아침마다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 눈을 가지고 나의 인생을 보고 다른 사람들을 보며, 또 이 세상과 교회를 바라보게 해 달라고 말이지요. 모든 것이,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광야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거기서 부터 출발하게 해 달라고 말입니다. 그래야 마음의 자유를 얻을 수 있고 사랑할 수 있는 말미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모두 광야입니다. 서로를 광야로 바라보아 주는 것. 그것이 우리가 서로를 사랑할 수 있는 출발점입니다. 우리는 꼭 기억해야 합니다. 그 사람의 광야는 그 사람이 하나님과 함께 여행해 가며 다루어 가야 할 그 사람의 광야이지 나의 광야가 아닙니다. 나를 위한 옥토는 더더욱 아니고요. 내가 광야라면 그 사람도 광야입니다. 내 안에 광야가 있다면 그 사람 안에도 광야가 있습니다. 광야끼리 부딛히면 답이 안 나옵니다. 광야는 하늘을 만날 때만 길이 열립니다. 눈물의 땅이 샘의 땅이 되게 하는 것은 하늘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길이 열린 광야끼리 만날 때 그 길과 길이 이어지며 서로가 서로를 위한 더 넓고 큰 길이 되어 줄 수 있습니다. 교회는 바로 이런 기적이 일어나는 장소가 되어야 합니다.
절대로 남의 광야를 나를 위한 옥토로 만들려고 하지 마십시오. 저 사람도 나처럼 힘들겠거니 하면서 그저 지켜봐 주세요. 지켜 보면서 기도해 주시고요. 그러다가 그 광야에 단비 내리고 작은 샘 하나 터지면 그것으로 함께 기뻐하고 함께 감사하십시다. 나에게도 똑같은 기적이 일어나게 기도하고요. 교회도 광야입니다. 교회도 광야입니다. 그러니 교회를 바라볼 때도 똑같이 해 주십시오. 그러면 우리는 서로의 광야됨을 통해, 교회의 광야됨을 통해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보고 누리는 복을 얻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인용구 하나를 읽어 드리겠습니다. 헨리 소로우의 ‘월든’이라는 책에서 옮겨온 것인데요. 잘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내 삶의 방식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지 않으련다. 그 사람이 내 삶의 방식을 충분히 익히기 전에 내가 다른 생활방식을 발견할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나는 이 세상에 될 수 있는 대로 다양한 사람들이 있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나는 각 사람이 매우 신중한 태도를 가지고 자기만의 방식을 찾고 추구하게 하련다.”
성도 여러분, 사랑의 출발점은 겸손입니다. 나의 인생에 대해서 겸손하고 그래서 다른 이들의 인생에 대해서도 겸손한 것, 그것이 바로 서로를 향한 편안하고 행복한 사랑이 시작되는 곳입니다. 우리 다른 사람의 광야를 보며 화 내지 마십시다. 조급해 하지 마시고요. 서로의 광야에 서서 함께 안타까워 해 주고 울어주고 또 기뻐할 수 있는 동행이 되십시다. 지금은 모두 다 광야이지만 언젠가 이 모든 광야를 하나로 묶어 하나님의 나라가 되게 하실 하나님께 소망을 두며, 최선을 다해서 서로를 사랑하십시다. 그것이 우리에게 맡겨진 우리의 몫이니까요.
우리 한 번 같이 해 볼까요? ‘내가 광야다. 당신도 광야다. 모두가 광야다.’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가 이 귀한 진리를 겸손히 마음에 새기면서 서로의 광야에서 서로를 사랑하고 하나님을 배워가는 주님 닮은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 내 이웃을 내 몸을 사랑하는 것처럼 사랑하게 하소서. 마음이 있어도 사랑하게 하시고 마음이 없어도 사랑하게 하소서. 특히 교회 안에서의 우리의 언어생활을 지혜롭고 겸손하게 하소서.
- 모두가 광야임을 잊지 않게 하소서. 다른 이들의 광야를 나를 위한 옥토로 만들려고 하지 않게 하소서. 겸손하게 서로의 광야를 위해서 기도하며 기다리며 소망하는 성도들이 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