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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20.05.17. 요한복음 15장 18-16장 4절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요한 57)

 

 

날짜 :  2020년 5월 17일 일요일

본문 :  요한복음 15장 18절 - 16장 4절

 

이제 예수님의 말씀은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에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할 것이라는 말씀으로 이어지는데요. 만약 교회와 성도들이 이 세상과 상관 없이, 이 세상 바깥에 존재한다면 예수님의 말씀은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으로 마무리 되었을 것입니다. 성도들 사이에는 그저 사랑만 있으면 충분할테니까요. 하지만, 교회도 그렇고 성도들도 그렇고 세상과 상관 없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세상 바깥에 존재할 수도 없고요.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게 해 주셨지만, 갑자기 우리를 하늘나라로 데리고 가신 것은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신 다음에도 여전히 우리를 이 세상에 두셨고, 이 세상에서 살아가게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이 세상, 그러니까 예전에 우리가 살아가던 그 자리가 우리의 부르심을 이루어 내야 할 내 소명의 자리이고 또 우리의 믿음을 훈련하는 훈련장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것 때문에 성도와 교회의 고민과 어려움이 시작됩니다. 나는 이제 모든 것이 달라졌지만 이 세상과 거기사는 다른 사람들은 무엇하나 달라지는 것이 없고, 그것이 이 세상과 나의 관계를 이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꿔놓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교회가 교회다워지고 성도가 성도다워지면 온 세상이 우리를 칭찬하고 사랑해 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세상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잘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요. 물론 안타깝게도 우리가 그런 이유로 세상의 미움을 받을 때도 있습니다. 요근래의 한국교회처럼 말이지요. 하지만, 꼭 그런 이유 때문에 우리가 사랑을 받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원래 우리는 세상의 미움을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애초부터 그렇게 되어 있지요. 잘 해도 미움받고 못 해도 미움을 받습니다. 우리가 잘 하고, 우리답게 살아가면 처음에는 세상도 우리를 칭찬합니다. 우리를 좋아해주고요.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세상은 우리를 미워하기 시작합니다. 심하면 대놓고 우리를 괴롭히기도 합니다. 여기에는 영적인 이유도 있고, 현실적인 이유도 있습니다. 오늘 주님은 세상이 주님의 제자들을 미워할 것을 전제로 바로 그 이야기를 들려주고 계십니다. 왜 세상이 제자들을 미워할 수 밖에 없는지, 그리고 제자들은 과연 그런 세상의 미움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하는지 말이지요. 오늘 말씀은 세상과 믿음 사이에 끼어 갈등하고 계신 분들이나, 왜 내가 바르게 살아가는데도 이렇게 힘이 드는가하고 고민하시는 분들에게는 더 유익하고 힘이 되는 말씀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설명에 따르면 우리가 세상의 미움을 받는 첫번째 이유는 아주 단순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세상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원래는 우리도 세상에 속해 있었습니다. 세상의 것이었지요. 우리도 세상에 속한 다른 사람들처럼 세상의 뜻을 따라 세상을 섬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것’이 되고 ‘하나님의 것’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된 것이지요. 비유를 들어 설명하자면 우리에게는 이런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원래 우리는 왕에게 반역한 역도들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역도들과 함께 뭐라도 된 듯이 뻐기면서 잘 지내고 있었지요. 그런데, 어느 날 왕이 우리를 찾아와 우리를 설득했고 그 역도들로부터 우리를 빼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왕의 신하가 되어서 왕을 사랑하며 충성스럽게 섬기는 왕의 사람이 되었지요. 그 사실을 이 세상 무엇보다도 감사하고 영광스럽게 생각하면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요, 성도 여러분. 역도들에게, 특히 그 역도들의 우두머리에게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될까요? 천하의 배신자가 됩니다. 가장 증오스러운 사람이 되지요. 세상이 볼 때 우리는 이런 사람들입니다. 세상에 속해서 세상을 섬기던 사람들이 이제는 하나님을 섬길 뿐 아니라, 자신의 삶으로 그 세상이 얼마나 악하고 더러운지를 증거하는 사람들이 되었으니 세상이 우리를 미워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 미움은 세상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기 때문에 생겨나는 아주 근본적이고 영적인 반감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우리를 미워합니다. 그리고 할 수만 있으면 우리를 다시 되찾으려고 합니다. 다시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하고, 자기들처럼 만들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게 잘 안되니까 세상은 우리를 더 미워하고 더 핍박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예전에 어떤 성도님에게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분이 회사에 입사를 했습니다. 그래도 믿는 사람이니까 성실하고 정직하게 일을 했지요. 일부러 하지 않아도 될 일들까지 찾아서 했고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직장상사 하나가 그런 자기를 계속해서 괴롭히더랍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가 그 사람에게 잘못한 것이 없는데도 말이지요. 그래서, 참다 참다 하루는 용기를 내어 물었답니다. 도대체 나에게 왜 그러시느냐고요. 그 때 어떤 답이 되돌아 왔을까요? 그 상사가 이렇게 대답하더랍니다. “왜 그러는지 나도 몰라. 그런데, 나는 예수 믿는 사람들이 그냥 싫어.”라고 말이지요. 또 제 후배 하나는 그런 경험을 했습니다. 이건 뭐 특별한 경험도 아닌데요. 이름만 대면 아실 법한 유명한 대학원의 석사과정에 입학해서 실험실 막내로 들어갔더니 선배라는 사람들이 그렇게 자기에게 술을 먹이려고 하고, 성적으로 타락시키려고 안깐힘을 다하더랍니다. 그래서 그걸 거절하느라고 마지막까지 미움을 많이 받았답니다. 아마 성도들 중에 군대에서, 그리고 회사에서 종류는 달라도 이런 비슷한 일을 경험한 분들은 적지 않으실 줄 압니다. 

그러니, 우리가 일부러 세상과 등을 지거나 원수가 될 필요는 없고, 또 그래서도 안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상의 마음을 얻고 세상과 잘 지내려고 너무 애를 쓰면 안됩니다. 세상은 우리가 다시 세상의 것이 되고, 또 충분히 자기들처럼 되지 않는 한 우리를 사랑해 주지 않습니다. 사실 세상에 속해 있는 사람들은 자기들 끼리도 그렇지요. 세상적인 사람들은 충분히 세상적이지 않은 사람들을 그리 좋아하지 않습니다. 재미없고 융통성이 없다고, 잘난 척 한다고 말이지요. 그래서 우리가 다시 예전의 자리로 되돌아가 하나님께 반역하며 살 생각이 아니라면 섣불리 세상의 사랑을 받으려고 하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그리고, 세상처럼 되지 못해서 속이 상하고 세상의 사랑을 받고 싶어질 때마다, 우리는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시던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제 나는 세상이 아니라 예수님께 속한 예수님의 것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그런 유혹들을 이겨내야 합니다. 

세상이 우리를 미워하는 두번째 이유는 우리가 예수님의 종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다”는 말을 꼭 기억하며 살아가라고 하셨는데요. 세상은 이미 주인을 미워하고 핍박했습니다. 그렇다면, 세상이 그 주인의 종들을 어떻게 다루겠습니까? 함부로 다룰 것입니다. 더 쉽게 미워하고 더 쉽게 핍박하겠지요. 주인이 미움을 받고 핍박을 받았다면, 그 주인의 뜻에 순종하며 사는 종들이 미움과 핍박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내가 예수님의 종이라는 것을 알고, 세상의 생리가 어떤지를 안다면 애초에 그런 기대는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물론 아주 드물게 그렇게 살아가는 우리의 헌신과 삶의 가치를 알아주고 지지해주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만나고 그런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정말 큰 격려가 되고 힘이 되지요. 하지만, 이 세상이 전부 다 예수님의 종으로 살아가는 우리를 귀하게 여겨주지는 않습니다. 세상과 세상에 속해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예수님을 미워하고 핍박한 것처럼 우리를 미워하고 핍박하게 되어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이 세상의 다수가 아니라 소수입니다. 소수로서 세상의 다수가 걷는 것과는 길과 다른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이것은 때로는 그렇게 소수로 살아가는 고민과 갈등, 그리고 혼란스러움을 잘 감당해 내야 한다는 뜻입니다. 소수인 사람들은 늘 자기들이 걷는 길에 대한 불안함이 있습니다. 첫째로, 그 길을 가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지 않기 때문에 불안합니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무엇을 선택하는 데에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는 고정관념이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면 그 생각이 맞는 것 같고, 많은 사람들이 그 길을 가면 그 길이 옳은 길이고 좋은 길이라고 생각하지요. 하지만 숫자와 옳고 그름은 전혀 직접적인 관련이 없습니다. 어떤 것을 선택한 사람의 숫자가 많다는 것은 그저 그것을 더 좋아하는 사람이 많다는 뜻이지 그것이 가치있고 옳다는 뜻이 아니까요. 두 가지는 일치할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브라보콘과 월드콘이 있는데, 열 사람 중에서 일곱 사람이 브라보콘을 집었다고 해서 브라보콘이 월드콘보다 더 가치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저 더 많은 사람이 브라보콘을 더 좋아한다는 뜻이지요. 하지만 소수인 사람들은 늘 이 길을 가는 사람이 이렇게 많지 않은 것을 보니 혹시 자기가 틀렸고 다른 사람들이 맞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자꾸 자꾸 올라와서 불안해 지는 것입니다. 

여기에 그것 때문에 미움을 받고 핍박받는 일까지 더해지면 상황은 더 심각해 집니다. 그 미움과 핍박이 내가 이렇게 힘든 것은 하나님 앞에서 내가 잘못하고 있기 때문은 아닌가 하는 우리의 불안감을 더 크게 증폭시키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늘 어려움과 고통의 이유를 나의 잘못으로 돌리려는 우리의 습관 때문입니다. 좋지 않은 일을 무조건 나를 향한 하나님의 형벌로 생각하려는 습관 때문이고요. 이런 습관은 우리가 자신의 죄와 부족함을 돌아볼 때는 유익이 될 때도 있지만, 이런 경우에는 자기가 걷고 있는 바른 길에 대한 확신을 더 심하게 흔들어 놓습니다. 

성도 여러분,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이 적다는 것이 곧 내가 틀린 길을 가고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자꾸 오해나 갈등이 생기며, 여러가지 힘든 일들이 일어나는 것 또한 내가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는 뜻은 아니고요. 그것은 자꾸 내 탓을 할 문제가 아닙니다. 21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이 신실하고 올바르게 예수님을 뒤따라 가고 있는데도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는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세상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세상이 예수님을 미워했듯이 제자들을 미워하는 죄는 핑계댈 수 없다고 하셨지요. 예수님께서 보시기에는 세상이 하나님을 모른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지 않으셨고, 하나님의 모든 말씀들을 들려주시지 않았다면, 그리고 그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충분한 증거를 보여주지 않으셨다면 세상은 죄가 없을 것입니다. 그들의 죄는 순전한 무지에서, 그러니까 예수님을 몰랐기 때문에 생겨난 실수가 될테니까요.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그들에게 전해 주었고,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거부할 수 없는 증거를 충분히 보여 주셨습니다. 요한복음은 그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예수님의 이적 중에서 일곱가지를 선택해서 기록해 놓았습니다. 예수님의 증거는 완전하다고 말이지요. 하지만, 세상은 예수님을 미워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세상이 이미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을 미워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미워하고 있었으니 하나님께서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도 미워하고, 아들을 믿는 사람들도 미워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몰라서 그랬다고 핑계를 댈 수가 없습니다. 세상이 지은 죄는 정상참작이 불가능한 죄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것이 되어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려고 하다가 욕을 먹고 미움을 받는 일은 우리의 잘못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 세상이 하나님을 미워했듯이 예수님을 미워하는 것이며, 그 미움을 우리가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속해 있고, 예수님처럼 살아가고 있으니 세상이 그것을 싫어하는 것이지요. 그러니, 그런 미움과 핍박은 전혀 부끄러워할 일이 아닙니다. 그것 때문에 스스로를 자책할 일도 아니고요. 그것은 우리의 가장 큰 자랑이며 영광입니다. 우리가 제대로 된 길을 잘 가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 이유 없이 미움을 받으셨습니다. 그렇게 거절당하셨고, 그렇게 목숨을 잃으셨지요. 그것이 예수님의 인생이었습니다. 잘못하셔서가 아닙니다. 틀렸기 때문이 아니었고요. 너무 잘하셔서, 너무 옳으셔서, 너무 사랑하셔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잘 하고 있는 것 같은데도, 십자가를 흉내내며 살려고 발버둥치는데도 오해를 받고 힘든 일을 겪게 되면, 그 때는 화를 내거나 자기 탓을 하기 전에, 포기하고 다들 그렇게 하는 것처럼 살자는 결론 내리기 전에 다시 한 번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도 이유 없이 미움을 당하셨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의인들이 다 그랬던 것처럼 말이지요. 지금 이유 없이 미움을 받고 계십니까? 예수 믿는 일 때문에 억울한 일을 당하고 계시나요? 그것 때문에 속이 상하시지요?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지금 나도 그 의인들 중에 있으면서 그들이 가는 길을 함께 가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물론 늘 부족하고 온전치 않아 자랑할 것도 내세울 것도 없지만, 그래도 끙끙대며 예수님이 걸어 가셨던 그 길처럼 빛나고 높은 길을 가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고요.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그 일에 기뻐하실 것이고 그 일에 큰 상을 주실 것입니다. 

26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다시 한 번 제자들에이 보혜사 성령님을 바라보게 하시는데요. 제자들은 이제 자기들을 미워하고 핍박하는 세상에, 예수님 없이 살면서 예수님의 증거해야 합니다. 도무지 자기들의 힘과 노력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는 삶을 살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미리 걱정할 필요도 없고요. 보혜사 성령님이 함께 계시고 성령님께서 그 일을 하게 하실테니까요. 적대적인 세상에서 제자들은 마치 재판장에 끌려 나온 죄인과 같이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 혼자라면 두려울 것입니다. 입이 얼어붙어 아무 변명도 못하고 변호도 못하겠지요. 하지만, 보혜사 성령님이 늘 그들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상황이 되어도 내가 나를 변호하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변명할 필요도 없고요. 성령님께서 우리들을 통해 예수님을 증거하실 것이고, 세상 앞에서 우리들의 옳음을 변호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사도행전에 나오는 공회와 법정에 섰던 제자들에 관한 일화를 보면 이것이 그저 듣기 좋은 위로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성령님을 통해 하시는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러셨던 적이 없으십니까? 여러분도 그저 예수 믿기 때문에 죄인처럼 되어 버린 적이 있으시지요? 예전에 제가 어떤 분으로부터 기독교에 대해서 굉장한 반감을 가지고 있는 자신의 아내를 좀 심방해 달라는 부탁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부탁은 받았지만 굉장히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런 경우에 오히려 긁어 부스럼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그래도 명색이 목사이니 기도를 잔뜩하고서 그 분을 찾아갔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 분은 제가 자리에 앉자마자 기독교, 정확하게는 개신교를 비난하기 시작했습니다. 들어보니 틀린 이야기는 하나도 없더라고요. 그렇지 않은 것을 그렇다고 하시는 것도 없고요. 그래서, 계속 듣고만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그 분의 이야기가 끝이 났는데요. 아마도 그 분은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가 보자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아마 다른 예수쟁이들처럼 또 변명이나 잔뜩 늘어 놓겠지 하는 표정이었지요. 그런데, 그 때, 저는 이상하게도 변명하고 싶지가 않았습니다. 그런 비난에도 화가 나지 않았고요. 그래서, 그 분께 진심을 다해서 그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저희가 부족해서, 저희가 못나서 정말 죄송합니다. 저희가 믿는 분은 절대로 그렇지 않은데, 저희가 믿는 복음은 전혀 그런 것이 아닌데,  저희가 제대로 믿지 못해서 선생님께서 그런 불편한 마음을 품게 되었으니 정말 죄송합니다.”라고 사과를 드렸습니다. 깜짝 놀라시는 눈치였습니다. 하지만, 금새 표정이 확 밝아지면서 그 이후의 시간은 서로 좋은 대화를 많이 나눌 수 있었고, 마지막에는 기도까지 함께 드리고서 그 가정을 떠날 수 있었습니다. 그 날 성령님은 세상의 법정에 선 불쌍한 목사를 도와 주셨습니다. 제 마음을 그렇게 움직이셨고, 제가 해야 할 말을 알려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 어떤 변명보다 설득력있는 변호가 되었습니다. 

우리도 우리가 옳다고 믿기 때문에 이 길을 가지만, 우리를 미워하고 핍박하는 세상도 그것이 옳다고 믿기 때문에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을 출교하고 죽이면서 그 일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확신했던 유대인들처럼 말이지요. 그렇게 보면 우리의 싸움은 확신 대 확신의 싸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처럼 믿고 우리처럼 사는 사람들의 숫자가 적고, 이런 저런 오해와 어려움이 있다고 해서 우리가 가는 길에 대한 확신이 흐려지면 우리는 시험에 들어 흔들리게 되고 우리의 믿음까지도 저버릴 수 있습니다. 겉으로는 안 그래도 실제로는 믿음을 떠난 사람처럼 될 수 있습니다. 실족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실족하지 않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난 주일까지 살펴 보았던 서로 사랑하며 살라는 주님의 말씀도 그렇지만 우리가 주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면 세상이 우리를 미워하고 핍박하게 되어 있다는 오늘 말씀도 우리를 편안하게 해 주는 말씀은 아닙니다. 사랑은 아름답고 좋은 것이지만 사랑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고, 주님 때문에 핍박을 받는 일은 무엇보다 가치있는 일이지만 너무나 부담스러우니까요. 하지만 이 두 말씀은 모두 다 예수님께서 우리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주신 말씀입니다. 사랑에 대한 말씀은 우리가 열매를 맺어야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주신 말씀이고, 미움과 핍박에 대한 말씀은 절대로 믿음을 포기하면 안된다는 것을 알려 주시려고 해 주신 말씀이니까요. 

목사인 저를 가장 안타깝게 만드는 성도들은 말씀 때문에 오히려 믿음이 흐려지고 신앙을 떠나는 분들입니다. 처음 교회에 나오고 신앙생활을 시작했을 때는 잘 모릅니다. 모든 것이 새롭고 그저 행복하기만 하지요. 이 시기에 있는 성도들을 만나보면 보고만 있어도 마음이 흐뭇할 정도입니다. 꼭 신혼부부를 보는 것 같아요. 그런데, 신앙다운 신앙 안으로 한걸음 들여놓게 되면 거기 부담스러운 말씀들이, 신혼부부가 만나는 거친 현실처럼 떡 하니 기다리고 있습니다. 네 맘대로 하면 안된다, 욕심부리면 안된다, 돈을 사랑하면 안된다, 교만하면 안된다, 자기를 믿으면 안된다, 하나님께 순종하고 십자가를 흉내내며 살아라… 이런 말씀들을 듣게 되면 굉장히 당황스러워 합니다. 그런데, 사실 성도가 말씀 앞에서 당황하는 것은 참 좋은 일입니다. 그것은 그가 드디어 진짜를 만났다는 뜻이니까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어떤 분들은 거기서 주저 앉습니다. 말씀이 주는 당황스러움은 네가 이제는 거짓되고 헛된 것을 떠나 참된 것을 붙들어야 할 때가 되었다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싸인이지만 옛 것들, 그러니까 이전에 익숙했었고 또 사랑했던 것들을 놓치기가 싫어서 말씀을 떠납니다. 저는 그렇게 교회를 떠나고 신앙이 흐려지는 분들을 볼 때마다 얼마나 안타까운지 모릅니다. 

사랑하지 않는다면 적당히 달콤한 말만 들려주어도 됩니다. 진실을 말해준답시고 괜히 불편하게 만들 필요가 없지요.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만큼은 진실을 말해 주어야 합니다. 적당히 듣기 좋은 말로 진실을 흐리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참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하며 상대방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니까요. 예수님은 우리를 참으로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늘 우리에게 진실을 말씀해 주십니다. 하지만, 그 말씀 속에는 진실이 담겨 있기 때문에 우리가 진실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을 때는 그 말씀이 부담이 되고 거치는 돌처럼 되기도 합니다. 말씀때문에 실족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세상이 우리를 미워하고 힘들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우리를 힘들게 하고 불편하게 하시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믿음을 지켜주시고 끝까지 실족하지 않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세상이 너희를 미워할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을 진실로 받아들이고, 그 말씀 위에 우리 삶과 신앙을 세워나가야 합니다. 

교회에서 저희 집으로 가는 길, 알파시티 입구에는 노란색 간판을 달고 있는 부동산 하나가 있었는데요. 제가 어느 날 거기 붙어 있는 선전문구를 보고 허허 웃었습니다. 현수막에 커다란 글씨로 “내 니 올 줄 알았다”라고 적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세상이 우리를 미워하고 우리를 불편하게 하더라도 당황하거나 낙심하지 마십시오. 자기 탓도 하지 마시고요. 그 때는 스스로에게 꼭 이렇게 말해주시기 바랍니다 “내 니 올 줄 알았다”라고 말이지요. 그렇게 그 불편함을 담대하게 맞아들이십시오. 세상이 하나님을 미워하고 예수님을 핍박했으니, 우리가 예수님처럼 하면 세상은 우리를 미워하고 힘들게 만들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렇게 바른 길을 따라 걸어갈 때, 보혜사 성령님께서 늘 우리와 함께 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 옆에서 우리의 편을 들어 주실 것이고, 결국에는 우리를 통해 예수님을 증거하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나를 먼저 미워한 줄 알라”셨던 우리 주님의 위로 가득한 말씀을 붙들고, 거친 광야같은 이 세상을 성령님과 함께 여행하는 힘있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성도에게 믿음 때문에 겪는 오해와 고난은 이상한 것이 아니라 당연한 것입니다. 때로 믿음 때문에 손해를 보고 불편을 겪을 때, 그것 때문에 낙심하거나 피하지 말고 영광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믿음을 달라고 기도합니다. 
  2. 늘 보혜사 성령님을 믿고 의지하며 담대하게 살게 해 달라고 기도합시다. 성령님께서 나의 삶을 통해 세상에 복음을 증거하시고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드러내시옵소서.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