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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20.05.24. 요한복음 16장 5-15절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1)"(요한 58)

 

 

날짜 :  2020년 5월 24일 일요일

본문 :  요한복음 16장 5절 - 15절

 

당사자가 이 자리에 있기 때문에 실명을 거론하지는 않겠습니다만, 며칠 전에 페이스북에 우리 교회 모 집사님이 올리신 책 사진이 하나가 올라왔습니다. 그 책은 ‘순간적으로 욱하고 마는 부모를 위한 현실 육아 코칭’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는 ‘오늘도 화내고 말았습니다’라는 책이었는데요. 책 제목이 그래서 그랬는지 사진이 올라오자 마자 댓글들이 난리가 났었습니다. 첫번째 댓글은 “응? 오늘도 화내고 말았어?”라는 것이었는데, 이 댓글은 물론 제가 단 것이었습니다. 그 뒤에 이런 댓글들이 이어졌습니다. ‘좀 참지!’, ‘육아 힘들지?’, ‘참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부모도 사람인데 화 낼 수 있죠’, ‘화 좀 그만내!’ 당황하신 우리 모 집사님은 그냥 좋은 책이라서 올렸다고 하면서 ‘애 한테 화 안냈어요ㅋㅋ’라고 댓글을 달았지만 이미 다른 분들은 그렇게 믿지 않는 눈치였습니다. 아이에게 화를 내지 않고 아이를 키우는 것... 말은 그럴 듯하지만 실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리고, 이 어려운 일이 어느 정도라도 가능하다면 그것은 절대로 부모가 훌륭해서가 아닙니다. 아이가 화를 내지 않아도 키울 수 있을만큼 성품이 훌륭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니, 나는 소리 지르지 않고 화내지 않고 아이 길렀다고 부모들이 자랑할 것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요. 성도 여러분, 그러면 어떤 자녀가 제일 부모를 힘들게 할까요? 말썽 많이 부리고 혼 날 일 많이 하는 자녀가 부모를 제일 힘들게 할까요? 그럴 것 같지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부모를 제일 힘들게 하는 자녀는 혼을 내도 혼나지 않는 자녀입니다. 아무리 혼을 내도 그저 자기 갈 길 가는 자녀가 키우기 제일 힘이 듭니다. 그러니 혼 낼 때 잘 혼나주는 자녀가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작은 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예수님의 고별말씀이 시작되는 곳에 있는 요한복음 13장 33절 말씀인데요. 이 말씀 속에는 이제 제자들을 떠나야만 하는 예수님의 마음이 그대로 들어있는 것 같습니다. 제자들은 큰 자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작은 자들이지요. 세상 앞에 놓고 보면 숫자도 그렇고, 힘도 그렇고 그저 작은 어린아이 같을 뿐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예수님이 떠나시면 제자들은 더 작은 자들이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제 얼마남지 않은 시간을 제자들의 홀로서기를 준비시키는데 사용하시기로 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시작된 예수님의 고별설교는 전부 제자들에게 확신과 소망을 주기 위한 말씀이었습니다. 하늘에 너희가 거할 곳이 많다는 말씀, 내가 너희 처소를 준비하러 간다는 말씀, 성령님께서 내가 너희에게 가르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실 것이라는 말씀, 포도나무의 비유,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고 핍박하면 그것 때문에 당황하거나 낙심하지 말고 그것을 너희가 바른 길을 잘 가고 있다는 증거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씀 등. 모든 말씀들이  다 그런 말씀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그렇게 예수님의 말씀이 이어지는 동안 아무 것도 달라진 것이 없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내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가는데 나더러 어디로 가는지 묻는 자가 없고 도리어 내가 이 말을 하므로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 하였도다”라고 하시며 한숨을 쉬신 것을 보면 말이지요. 실제로 이것은 예수님께서 바라셨던 것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결과가 나온 것인데요. 다른 사람이 아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들려주시는 말씀을 들었고요. 그런데, 제자들의 마음과 생각은 말씀이 가리키는 것과는 반대방향으로만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런 일이 일어나면 안겠되지만, 안타깝게도 이런 일은 그리 드물지 않게 반복됩니다. 말씀이 선포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말씀을 듣지요. 그런데, 마음도 생각도 전혀 변하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말씀과 반대방향으로 가기도 합니다. 우리는 제자들에게서 왜 이런 안타까운 일이 일어나는가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처음부터 근심했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근심하고 있지요. 근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점점 더 근심이 깊어졌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제자들이 자기들을 근심하게 만드는 것만 생각할 뿐, 말씀을 믿으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가지는 역할과 능력은 여러가지가 있지만, 우리가 근심하거나 두려워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말씀은 우리가 그런 것들로부터 눈을 돌려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을 볼 수 있게 해 줍니다. 하지만, 그렇게 능력있는 말씀을 계속 들어도 아무 소용이 없을 때가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과 우리의 환경만 보느라고 도무지 말씀을 듣지 못할 때입니다. 이럴 때는 예수님께서 직접 우리 옆에서 말씀하신다고 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는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지당한 이야기입니다. 당연히 그렇게 되어야 하지요. 하지만 이 말이 앞에는 하나의 조건이 덧붙여져야 합니다. 그 조건은 바로 ‘나를 내려놓고서’라는 조건입니다. 한 번 따라해 볼까요? ‘나를 내려놓고서’. 설교시간은 우리가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시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최대한 내려놓은 상태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뭐라고 하시는지 마음과 생각을 열고 경청할 때만 제대로 들립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들려진 하나님의 음성만이 우리 삶을 위한 근본적인 해답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근심에 빠져 있는 제자들에게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라고 말씀을 계속 이어가셨는데요. 제자들은 예수님이 자기들을 떠나시는 것을 가장 커다란 상실, 그러니까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근심만 했던 것이지요. 하지만, 그것은 ‘실상’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떠나시는 것이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계시는 것보다 제자들에게 훨씬 더 유익합니다. 이것이 그 일의 ‘실상’, 그러니까 예수님의 마음 속에 그려져 있는 진짜 그림이고, 또 큰 그림이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눈 앞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 때, 거의 항상 그 일 밖에 생각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무언가를 잃어버리는 것은 늘 잃어버리는 것이고, 아픈 것은 늘 아픈 것이며, 힘든 것은 늘 힘든 것이 됩니다. 좀처럼 그 이상을 생각하지 못하지요.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그런 식으로 이끌어 가시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삶에 무언가를 허락하실 때는, 그것이 결국에는 우리를 더 유익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무엇을 하시든 우리를 유익하게 하십니다. 무엇을 가지고도 우리를 유익하게 하시지요. 늘 그렇게 하십니다. 이것이 예수님 안에 있는 우리 인생의 실상입니다. 우리는 우리 눈에 보이는 것, 그러니까 ‘현상’이나 ‘허상'이 아니라 그 뒤에 있는 ‘실상’을 바라보면서 그것을 믿음으로 붙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근심과 걱정을 넘어 하나님의 뜻을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떠나시는 것이 제자들에게 더 유익하다고 말씀하신 것은 보혜사 성령님 때문이었습니다. 성령님은 예수님께서 모든 일을 끝내시고 하나님께로 가셨을 때, 비로소 제자들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선물이니까요. 제자들은 예수님이 전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함께 계시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그건 오해였습니다. 아직 예수님보다 더 나은 보혜사, 예수님보다 더 완전하게 제자들과 함께 하시고, 예수님보다 더 완전하게 그들을 돌보시고, 제자들에게 힘을 주어 예수님처럼 살면서, 예수님이 하셨던 일을 하게 하실 성령님이 오지 않으셨으니까요. 그러니 예수님께서 하나님께로 가시는 것은 잃는 것이 아니라 얻는 것입니다. 더 좋은 것을 얻는 것이고, 가장 좋은 것을 얻는 것이지요. 이것이 제자들이 느끼는 것과는 다른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떠나가시는 일의 ‘실상’이었던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왜 보혜사께서 오시는 것이 그렇게 큰 유익이 되는 지를 하나 하나 알려 주시는데요. 그 첫번째 이유는 요약하면 성령님께서 오시면 ‘세상을 책망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님께서 오시면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그리고 심판에 대해서 세상을 책망하실 것이라고 하셨는데요. 세부적인 내용으로 넘어가기 전에 먼저 이 ‘책망’이라는 말부터 함께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이 ‘책망’이라는 말을 들으면 어떤 느낌이 드시나요? 막 화를 내고 소리를 지르고, 정죄하고 벌을 주는 그런 모습이 먼저 떠오르지는 않으시나요? 물론 책망에는 그런 측면이 있습니다. 무엇이 잘못인지를 가리고 꾸짖는 것이 책망이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책망이라는 말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실 책망은 잘못을 따져 책임을 묻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책망은 잘못을 깨닫고 바른 길로 돌아오게 하기 위한 특별조치이니까요. 성령님의 책망도 그렇습니다. 성령님께서 이 세상을 책망하시는 것은 세상을 정죄하고 심판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떠난 세상이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시려고 세상을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령님께서 우리를 꾸짖으실 때도 똑같습니다. 

우리가 자녀들을 꾸짖고 나무랄 때, 늘 뭐라고 하지요? ‘누가 너 미워서 그러냐? 다 너 사랑하니까 다 너 잘 되라고 그런다’고 합니다. 그런데 왜 내가 하나님의 꾸지람을 들을 때는 그 원리를 적용하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왜 쓴 소리, 아픈 소리, 불편한 소리를 하시지요? 하나님도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러는 겁니다. 다 우리 잘 되고, 진짜로 잘 되라고 그러시는 것이고요. 이제부터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이야기를 하신다 싶으실 때, 추호라도 불편한 마음 품지 마시고 그 책망을 달게 받으시고,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책망해 주시는 것에 대해서 깊이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 크신 하나님께서 이렇게 작은 나의 세밀한 부분까지 그렇게 세심하게 신경써 주고 계시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성경은 자녀가 아니라면 꾸지람이 없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 꾸지람이 바로 하나님의 관심이고 아버지의 사랑이니까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혼내실 때, 우리는 잘 혼나야 합니다. 좋은 소리, 듣고 싶은 소리만 들려달라고 하지 말고 나를 더 꾸짖어 달라고 해야 합니다. 그 책망을 단 마음으로  받아야 하고요. 그 책망 속에 답이 있고, 그 책망 속에 소망이 있으니 우리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꼭 그렇게 해야 합니다. 우리는 절대로 하나님의 책망에 감정적으로 반응하는 것을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하는 사탄의 속임수에 넘어가면 안됩니다. 그러면 우리에게는 소망이 없습니다.  

이제 9절로 넘어가서 예수님의 말씀을 하나 하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세상이 예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성령님께서 죄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은 죄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그 죄를 해결할 능력이 없었고, 그래서 자기 죄 가운데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아들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그들대신 죽음의 형벌을 받게 하시려고 말이지요. 하지만 세상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예수님을 믿으려면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인정해야만 합니다. 그 다음에는 회개하고 그 죄를 버려야 하지요. 하지만, 세상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거절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결국 자신의 죄를 죄 아니라고 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죽인 것이고요. 죄를 떠나기 싫어서 죄를 죄로 인정하지 않은 것,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죄의 유일한 해결책이신 예수님을 믿지 않은 것. 이것이 세상이 저지른 이중의 죄였고 세상은 이 죄 안에서 죽어갈 수 밖에 없ㅅ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런 세상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으니까요. 성령님께서 오셔서 가장 먼저 죄에 대해서 세상을 책망하시는 것은 그래서 입니다. 죄를 죄인 줄 알아야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에 마지막까지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을 보면 오순절날 성령님께서 임하자 베드로가 거리로 나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때 베드로는 예수님을 못 박아 죽인 세상의 죄를 책망했습니다. 그러자, 거기 모여 있던 사람들이 그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서 제자들에게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묻습니다. 그 때 베드로는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라”라고 대답합니다. 그래서 그 날 3천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자기 죄를 회개하며 세례를 받았습니다. 성령님은 그렇게 세상을 책망하셨고, 세상은 그렇게 하나님께로 돌아왔던 것입니다. 

둘째로 예수님께서는 성령님이 의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그것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은 자신을 의롭다고 확신합니다. 늘 자신이 옳다고 믿지요. 하지만 이 세상이 그 의로움과 올바름을 가지고 무슨 일을 했습니까? 세상은 자신의 의를 기준으로 예수님을 죄인으로 만들어  죽였습니다. 온전히 의로우신 예수님을 말이지요. 하지만, 하나님은 그 예수님을 다시 살리시고 하늘로 들어 올리셔서 예수님의 의로우심을 만천하에 증명해 보이셨습니다. 당신은 결코 의인을 버리지 않으시며 의인의 육체가 썩음을 보지 않게 하신다는 말씀을 이루신 것입니다. 복음이 선포되는 곳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더불어 예수님의 부활이 함께 선포되는 것이 그것 때문입니다. 그 부활이 세상의 불의함을 드러내고 꾸짖는 하나님의 책망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함께 하실 수 없으니까 예수님 대신에 성령님께서 그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 세상만 자신의 의로움을 과신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도 우리의 의를 신뢰하고 자랑합니다. 나의 도덕적인 기준을 자랑하고, 내 생각을 확신하며, 내 판단을 맹신합니다. 그런 이야기를 할 때보면 얼마나 확신이 넘치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성도 여러분, 우리는 정말로 그럴 수 있을만큼 의롭습니까? 나의 행위를 믿고, 나의 생각을 믿고, 내 감정을 신뢰해도 될만큼, 그것으로 다른 이들을 단정짓고 판단할만큼 우리는 그만큼 옳고 의롭나요? 우리가 그런 존재가 되지 못한다는 것 정도는 잘 알고 계시지요? 성도 여러분, 사람의 의로움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낡고 더러운 누더기같아 보일 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의인은 없고, 한 사람도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사람의 의는 기껏해야 예수님을 죄인으로 몰아 죽이면서도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유익하다’고 그럴 듯한 정의론을 펼쳤던 가야바의 의로움 정도 밖에 안됩니다. 올바른 편에 서 보려고 애쓰다가도, 자기가 책임져야 할 순간이 오면 금새 대야에 손을 씻고서 돌아서 버리는 빌라도의 의와 닮아있고요. 물론 우리는 의롭게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아무리 의롭게 살아도 우리의 의는 자랑하고 신뢰할만한 것이 못됩니다. 물론 우리는 바르게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나의 옳음은 언제나 오류를 품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의로울 때도 우리의 의를 자랑할 수 없고, 우리가 옳을 때에도 우리의 옳음을 신뢰할 수 없습니다. 내가 의롭다고 생각될수록 더 겸손해야 하며, 내가 옳다고 생각될 때일수록 한 발 물러설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올바름이, 나의 의가 이 세상에 또 하나의 아픔과 상처를 더하는 흉기가 되고 그렇게 또 하나의 불의가 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는 성령님께서 심판에 대해서 세상을 책망하실 것이라고 하시면서 그것은 이 세상의 왕이 이미 심판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의 임금인 사탄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면, 자신이 하나님을 완전히 이길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죽인 것이니까요. 그러면 당장이라도 온 세상이 자기차지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사탄이 몰랐던 것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미 그 아들을 통해 세상의 왕을 심판하기 시작하셨고, 십자가는 그 심판이 완성되는 자리라는 것을 몰랐지요. 그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순종하시기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내어드린 자리이고, 부활로 사탄의 가장 강력한 무기인 죽음을 끝장내신 예수님의 왕좌이며, 거기서 예수님은 죄의 포로된 사람들을 모두 대속하셨으니까요. 하지만, 세상은 그 때가 되어도 여전히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할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 나라는 끝이 났고 이제는 자기들의 나라가 든든히 세워질 것이라고만 믿을 테니까요. 하지만 성령님께서는 그런 세상의 가슴에 빈 십자가를 들이대고서 세상의 왕은 이미 심판을 받았다고 선포하실 것입니다. 그러니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도전하실 것이고요. 그러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자기들이 그 동안 얼마나 잘못된 길을 걷고 있었는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미 자기들의 세상이 끝났다는 것도 알게 되고요. 그렇게 되면, 다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들만큼은 분명히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님께서 세상을 책망하실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의 의미인데요. 그렇다면, 왜 성령님이 이런 일을 하시는 것이 제자들에게 그렇게 큰 유익이 되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다시 앞으로 돌아가 보면요. 제자들은 예수님이 자기들을 떠나신다는 것 때문에 두려움과 근심에 빠져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떠나시는 일 자체를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세상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이제 예수님이 안 계신 상태에서 세상의 미움과 핍박을 받아내야 하니까요. 그런데, 예수님은 지금 뭐라고 하십니까? 내가 떠나가야만 ‘너희에게’ 성령님께서 오실 수 있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나서 곧바로 그 성령님께서 너희가 그렇게 두려워하는 이 세상을 ‘책망하실 것’이라고 하셨지요. 그러니까 예수님은 내가 가야만 성령님께서 너희에게 오실 수 있는데, 그 성령님은 너희들을 통해서 세상을 책망하고 구원하는 일을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성령님이 오시면 제자들은 그렇게 두려워 하던 세상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성령님께서는 그들을 세상을 책망하고 하나님께로 나아오게 하는 사람들로 세우실 것입니다. 세상이 두려워서 벌벌 떨던 사람들을 변화시켜 그 세상을 복음과 믿음으로 정복하는 사람들로 만들고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으로 만드시는 것입니다. 정말 놀라운 반전이 일어나는 것이지요. 이것은 성령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고,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하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우리가 계속해서 이 세상을 두려워하며 살라고 우리를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그저 그 두려움을 없애고서 우리 한 몸 행복하게 살아가라고 우리를 부르신 것도 아니고요. 주님은 우리를 이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 세상을 책망해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사람들로 세우시려고 세상에서 우리를 불러내셨습니다. 그것을 위해서 우리에게 성령님을 보내주셨고요.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면서 그리신 큰 그림이고 우리가 늘 우리 마음에 새겨 두어야 할 우리를 위한 마스터 플랜입니다. 

체인지 그라운드라는 인터넷 사이트에서 올린 글을 하나 보았습니다. 제목이 ‘98억 제안을 거절한 고교생’이었는데요. 벌써 제목부터 심상치가 않아 얼른 글을 읽어 보았더니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미국은 우리나라처럼 인터넷을 통한 정보공유가 원활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번 코로나 사태 때 혼란이 더 많았답니다. 그런데, 이 때 제일 먼저 굉장히 일목요연하게 고로나 관련 정보를 알려주는 홈페이지가 하나 개설되었는데, 그게 바로 워싱턴 주에 사는 아비 쉬프먼이라는 17살짜리 소년이었습니다. 당연히 미국 전역에서 이 아이가 만든 홈페이지에 접속했고, 하루 방문자 수가 3천만명이 넘었답니다. 그러자, 이 소년에게 홈페이지에 자기회사의 광고를 실어달라고 8백만 달러, 그러니까 우리 돈으로 98억원짜리 광고제의가 들어왔답니다. 이 소년이 어떻게 했을까요? 소년은 일언지하에 거절하면서 이렇게 말했답니다. “나에게 그렇게 큰 돈은 필요 없습니다. 단지 많은 사람들이 필요한 정보를 얻었으면 좋겠습니다. 특히 저는 전 세계인에게 고통을 주고 있는 코로나를 이용해서 돈을 벌고 싶지는 않습니다.”라고 말이지요. 그러면서 그 기사는 그 아래에 소아마비 백신을 개발했지만,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 특허신청을 포기했던 조너스 소크 박사의 일화를 함께 실어 놓았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설명을 달아 놓았지요. “쉬프먼이나 소크처럼 세상을 바꾸는 사람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돈보다 더 큰 동기가 있다는 점이다. 물론 돈도 훌륭한 동기가 될 수 있다. 하지만 타인과 세상을 이롭게 만든다는 기쁨이야 말로 가장 강력한 동기가 아닐까 싶다” 그저 인간적인 가치도 사람을 이렇게 달라지게 할 수 있다면, 우리 안에 성령님께서 그리신 그림이 있을 때, 우리는 얼마나 많이 달라질 수 있을까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미 우리는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그 분께 붙어있는 포도나무의 가지가 되어 있지요. 그리고 성령님은 이미 우리 안에,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이미 그렇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성령님의 꾸지람을 듣고 세상을 두려워하는 그 두려움을 이기고 성령님께서 우리 가슴 속에 그려 주시는 큰 그림을 보며 살아가게 되기를 바라십니다. 이제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그리고 심판에 대해서… 우리를 꾸짖어 주시는 성령님의 꾸지람을 많이 받으시기를 축복합니다. 그 꾸지람을 달게 받으시기 축복합니다. 제대로 잘 혼나는 자녀가 좋은 자녀입니다. 잘 혼나는 성도가 더 많이 예수님을 닮아 갈 수 있고, 그들이 그저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세상을 꾸짖는 거룩한 사람들이 될 수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 우리 모두가 사랑으로 우리를 꾸짖어 주시는 성령님의 책망을 받으며,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 세상을 꾸짖어 주님께 돌아오게 하는 주님의 제자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성령님께서 들려주시는 모든 말씀을, 그것이 위로와 격려의 말씀이든지 나를 책망하시는 쓴 말씀이든지 달게 듣고 순종하게 하소서. 
  2. 이제는 작은 내가 그린 작은 그림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보여주시는 큰 그림을 보며 살게 하소서.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 세상을 꾸짖는 사람이 되고, 그 세상을 주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사람으로 살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