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 2020년 6월 7일 일요일
본문 : 요한복음 16장 16절 - 27절
요며칠 동안 앞으로 이 세상이 어떻게 될까 싶어서 인터넷에서 코로나 사태와 관련된 내용들을 좀 찾아 보았습니다. 제가 본 것은 주로 동영상으로 된 전문가들의 인터뷰들인데요. 인터뷰들은 ‘포스트-코로나 시대’ 그러니까 코로나 폭풍이 지나간 이후의 세계가 어떤 모습이 될 것이며, 또 우리는 그렇게 달라지는 세상에 어떻게 적응하고 대처해야 하는가 하는 것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제가 ‘포스트 코로나 시대’니 ‘세계’니하니까 너무 거창한 것 아닌가 하실지도 모르지만, 그런 여유로운 생각이 드는 것은 우리가 다른 나라가 아니라 대한민국이라는 참 대단한 나라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세계적으로 보면 사태가 정말 심각합니다. 특히 이번 일로 큰 타격을 입은 유럽의 경우 모두들 이번 사태가 진정되면 사회와 산업의 구조, 그리고 사는 모습 자체가 바뀔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답니다. 하나만 예를 들어 드리면 앞으로는 이전처럼 해외여행이 쉽지가 않을 거라고 합니다. 일단 방역 때문에 비행기의 좌석을 멀찍이 떨어뜨려 놓아야 하고, 그러면 비행기 티켓 값이 지금보다 훨씬 더 비싸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다른 나라에 가려면 그 나라가 요구하는 소정의 건강검진증명서를 제출해야 하고, 또 외국에 다녀온 사람들은 전부다 일정기간 자가격리를 해야 한다면 외국에 나가지 않으면 절대로 안되는 사람들이 아니면 좀처럼 외국에 나가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공장은 전부 중국으로 옮겨 놓고 주로 관광산업으로 경제를 이끌어 갔던 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사회와 산업구조 자체가 달라질 수 밖에 없습니다. 만약 이번 사태가 1년이 아니라 2년 3년 계속되거나, 어떤 사람들이 우려하는 것처럼 이 바이러스가 감기가 유행하는 것처럼 정기적으로 유행하게 된다면 그 변화의 폭이 훨씬 더 커질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인터뷰들을 지켜보다 보니 전문가들이 그런 예측을 하고 또 이런 저런 대책들을 말해주고 있기는 했지만, 그러는 당사자들도 많이 당황스러워하고 혼란스러워 하는 모습이 역력했습니다. 어떤 분은 솔직하게 이번 사태가 ‘사상초유의 사태이기 때문에 앞으로 어떻게 될 지 정말 모르겠다’고 고백하기도 했으니까요. 아무튼 우리는 혼란에 빠져 있는 세상을 위해서 그리고 우리 자신을 위해서 계속해서 더 간절히 기도해야 할 것 같습니다.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이것이 예수님의 고별말씀을 마무리하는 16장 마지막 부분의 첫번째 말씀이었는데요. 우리는 이미 십자가도 알고, 부활도 알고, 승천도 알고… 다 알고 있기 때문에 그렇지가 않지만, 제자들에게 이 말씀은 정말 풀기 힘든 수수께끼였습니다. 말씀 자체의 의미도 그렇지만 이 말씀이 자기들에게 유리한 말씀인지 아니면 불리한 말씀인지조차 분명치가 않았으니까요. 자기들이 예수님을 보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하시니 아무래도 좋은 말씀은 아닌 것 같습니다. 하지만, 또 다시 보게 될 것이라고 하시니 꼭 그런 것만 같지도 않고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가신다고 하셨으니 예수님이 자기들을 떠나시는 것만은 틀림이 없고, 그러면 좋은 이야기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혼란스러워했고, 늘 그랬던 것처럼 웅성대면서 서로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예수님이 듣지 못하실만큼 작은 목소리로 말이지요. 특히 제자들은 ‘조금 있으면’이라는 말씀이 도대체 무슨 뜻인지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이 무엇을 궁금해 하는지, 무엇 때문에 혼란스러워 하고 있는지를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예수님께 질문을 하려는 것도 알고 계셨고요. 그래서, 제자들이 질문을 하기 전에 답을 들려주시기 시작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꼭 필요합니까? 하나님이 없으면 안되나요? 그렇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이 없으면 안됩니다. 그렇다면, 왜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꼭 필요한 것일까요? 그것은 사람이 근본적으로 무엇을 잘 아는 존재가 아니라 잘 모르는 존재이고 또 그렇게 모르면서도 매일 매일 삶을 이어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확실하게 아는 것이 있다면 자신의 인생에, 그리고 이 세상에 무언가 문제가 있다는 것인데, 사람은 많은 경우 그 문제조차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과 우리의 삶은 늘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진짜 문제가 무엇인지 다 알고 계십니다. 그 문제의 답도 알고 계시지요. 그러니 사람은 하나님이 없으면 안되고 반드시 하나님께로 가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혼란과 질문은 하나님이 대답해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목사이지만, 늘 풀지 못 하던 문제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람의 믿음이라는 것을 도대체 어떤 시각으로 보고 또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지금까지 그것도 모르고 목회를 해왔느냐고 하실지도 모르지만 부끄럽게도 그랬습니다. 그 질문이 떠오를 때마다 대충 넘겨왔으니까요. 그런데, 얼마 전부터는 그 문제를 놓고 진지하게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 물은 것이지요. 그러다가, 한 석 주 전쯤에 우연히 집어든 책 한 권이 있는데, 놀랍게도 그 책 한 권이 온통 저에게는 그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으로 들려 왔습니다. 지난 주간에 이어서 읽은 책도 그랬고요.
제자들이 문제를 만났을 때, 그들은 서로에게 질문했습니다. 하지만 답을 알아낼 수가 없었지요. 사람이란 이런 존재입니다. 사람은 문제만 알지 답을 모릅니다. 그래서, 서로 머리를 맞대어 보아도 오히려 혼란만 커질 뿐 답은 나오질 않습니다. 정말 중요한 문제일수록 더 그렇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 세상과 인생의 모든 문제를 정확하게 알고 계실 뿐 아니라, 그 문제에 대한 답도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문제를 만난 우리는 결국 하나님께로 가야 합니다. 그래야, 무지가 주는 혼란과 두려움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진실로 진실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부터 들려줄 이야기가 100퍼센트 틀림이 없다는 말씀이지요.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고요.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일에 대해서 이렇게 확실하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은 그렇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은 틀림 없이 말씀대로 됩니다. 처음이고 나중이요, 알파와 오메가이신 예수님은 모든 시간의 주인이시며, 그 시간을 당신의 섭리로 채워가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예수님의 말씀은 ‘답’이 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곧 있으면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실 것입니다. 그렇게 제자들 곁을 떠나셔야만 하지요. 그러면 제자들은 슬퍼하며 근심할 것입니다. 세상은 그것 때문에 잔치를 벌이겠지만 말이지요. 이것이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리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이 말씀은 반드시 그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 말씀도 예수님의 말씀이니까요. 하지만, 이것이 이야기의 끝은 아닙니다. 아직은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는 말씀이 남아 있으니까요. 예수님은 다시 사실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로 가실 것이고, 제자들에게 성령님을 보내주실 것입니다. 그러면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다시 보게 될 것이고, 성령님이 주시는 믿음의 눈으로 늘 예수님을 바라보며 사는 기쁨을 얻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답이 없으면 제자들이 앞으로 겪어내야 할 슬픔과 근심은 그저 슬픔과 근심에 머물 것입니다. 원치 않는 불행이 되지요. 하지만 이것을 예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면 그 의미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기를 낳으면 사람 난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고통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느니라” 산모가 아기를 낳으려면 하늘이 손톱만해지는 산고를 겪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이를 낳은 다음에 산모들은 넌더리를 내면서 다시는 아이를 낳지 않을 거라고 맹세를 하지요. 그런데, 한 1년쯤 지나면 말이 좀 달라집니다. 그리고,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둘째를 가졌다고 너무 좋아합니다. 왜 이렇게 되지요? 여자분들이 기억력이 나빠서 입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 사람이 난 기쁨 때문입니다. 아이를 낳아 품에 안아 키우는 기쁨이 너무 커서 이전의 고통을 다 덮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지금’ 제자들이 겪게 될 슬픔과 근심은 단순한 고통이 아닙니다. 그것은 여인의 산고입니다. 불행의 시작이 아니라 기쁨의 시작입니다. 그 씨앗이 자라 기쁨이 되면 ‘지금’ 겪는 슬픔과 근심을 기억나지 않게 할만큼 큰 기쁨이 되고, 아무도 빼앗을 수 없는 기쁨이 될테니까요. 그런데, 제자들의 슬픔과 근심이 이런 기쁨이 되는 것은 그 사이에 예수님의 부활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부활이 예수님과 제자들을 다시 만나게 해주고, 제자들이 겪어내야 하는 모든 슬픔과 근심의 의미를 완전히 달라지게 하니까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위한 구원의 보증일 뿐 아니라, 앞으로 성도들의 삶에서 반복되어 일어날 행복한 일들의 예고편이기도 했습니다.
“죽음 뒤에 부활이 온다는 것.” 이것은 우리가 우리의 인생사를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 줍니다. 우리가 살면서 당하는 모든 환란들은 전부 죽음을 닮아 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아프고 힘들고 슬프고 우리를 두렵게 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우리 인생의 환란은 늘 참된 기쁨의 씨앗이 됩니다. 죽음의 슬픔과 근심이 부활의 기쁨이 되었던 것처럼 말이지요. 그래서, 성도는 고난 중에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 절망 중에도 소망을 품을 수 있고, 참기 어려운 상황도 인내하며 기다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추측이 아닙니다. 단순한 희망사항도 아니고요. 예수님은 그렇게 되는 것은 정해져 있다고 하십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성도로 살면서 맞닥뜨리는 근심이나 슬픔은 절대로 무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진짜 기쁨의 씨앗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우리의 믿음으로 품어내어 싹트게 할 때, 거기서 성도는 세상은 알 수도 없고, 빼앗을 수도 없는 기쁨을 얻게 됩니다. 그렇게 보면 우리가 편안하고 아무 문제 없을 때가 아니라, 심한 고통과 고민 속에서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만나고 감춰져 있었던 하늘의 기쁨을 알게 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성도 여러분, 아프십니까? 많이 힘드세요? 혹시 지치고 근심이 되십니까? 저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래도요, ‘나중에는’ 그것이 세상이 큰 기쁨이 되어 돌아올 것입니다.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 믿음의 주인이시니까요. ‘너희의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될 것’이라고 약속하신 부활하신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그 근심을, 그 슬픔을, 그 고통을 믿음으로 잘 품어내시기 바랍니다. 저도 그럴테니까요. 그 씨앗에서 작은 싹이 올라오게 되는 날, 우리는 세상은 알 수 없는 기쁨을 가진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은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슬픔과 근심 속에서도 기쁨을 놓치지 않는 첫번째 비결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우리의 슬픔과 근심을 기쁨으로 바꾸어주실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을 위한 두번째 비결은 하나님께 기도하며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면 나의 이름으로 주실 것이다. 그러니, 기도해라. 그러면 받게 될 것이고, 받게 되면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라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아주 오래 전의 일인데요. 제가 한 동안 기도에 대해서 공부를 좀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책을 읽기도 하고, 기도에 대한 성경공부도 해 보고… 그런데, 그러다가 갑자기 깨달은 것이 있어서 기도에 대한 공부를 멈출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은 기도에 대한 성경구절을 전부 외우고, 기도에 대한 책 1000권을 읽더라도 그것이 기도하는 일을 대신할 수는 없고 기도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기도하라”고 하셨지요. 그러면 “받게 될 것”이라고 하셨고, 그러면 우리의 “기쁨이 충만해 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도는 기도해야 하지요? 기도하지 않고 살면 안되지요? 맞습니까? 그렇습니다. 성도는 기도하는 사람들입니다. 기도해야 하는 사람들이고요. 그래서 성도는 기도하며 살아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하지 않는다고 우리를 굶기시거나 우리에게 큰 벌을 내리시지는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악한 사람과 선한 모두에게 공평하게 비를 내려주시는 분이니까요. 다들 아시겠지만 전혀 기도하지 않아도 그저 사는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습니다. 하지만, 기도하지 않으면 엉뚱한 곳에서 엄청난 손해가 발생합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것들을 받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받지 못하면, 그것을 받은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 충만한 기쁨을 알 수가 없지요. 기도하지 않는 성도들이 충만한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기도는 생존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저 살기 위한 것이 아니에요. 기도는 더 나은 삶, 더 행복한 삶,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는 기쁨으로 충만한 삶을 살기 위한 것입니다.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나님께로 온 줄 믿었으므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라” 여기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기도에 응답해 주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 주시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고 또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셨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고,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 주시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 말씀은 단순히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사랑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그래서 우리 기도에 응답해 주신다는 그런 뜻은 아닙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 또 이 세상에 오셔서 그 모든 일을 하시고, 그렇게 돌아가시고, 또 부활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하나님의 원수였던 우리들을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자녀로 만들어 주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죄 때문에 망가지고 끊어진 관계를 다시 이어주고 회복시켜 주시려고 예수님은 거기 필요한 댓가를 그렇게 지불하신 것입니다. 요한일서 4장 14절 이하를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거하노니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저 안에 거하시고 저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이 구절은 우리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27절과 거의 비슷한 이야기를 들려주지요. 하지만 요한은 우리가 이 말씀을 거꾸로 오해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19절에 이런 설명을 덧붙여 주었습니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라고 말이지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먼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사랑한 것인가요? 아닙니다. 전혀 그렇지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도, 그 사랑을 비웃으며 손가락질 하는 사람들 중에 있었으니까요. 우리는 그저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았을 뿐입니다. 그 사랑에 그저 약간 반응을 보여 하나님을 아주 조금 사랑하기 시작한 것이고요.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자녀였고, 하나님은 늘 우리를 사랑하고 계셨지만, 그제서야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던 것입니다. 집 나갔던 탕자처럼 말이지요.
예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가 되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우리가 사랑하는 우리 아버지가 되게 해 주셨지요. 그래서, 우리는 직접 우리의 아버지께 기도할 수 있게 되었고, 우리 아버지는 우리가 구하는 것을 우리에게 마음껏 주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왜 하나님은 우리 기도에 응답해 주시지요? 우리가 기도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우리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마음껏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기도가 응답된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라는 가장 확실한 증거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기도가 응답될 때, 그렇게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을 아니까요. 우리는 우리의 기도가 응답될 때마다 정말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확신은 우리를 기뻐하게 하지요.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덤으로 얻게 되고 말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라고 하신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라는 확신을 가지고 사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은 없으니까요. 함께 아버지의 자녀된 성도 여러분, 꼭 기도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그 기도가 응답될 때마다 아버지께서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확인하시고요. 그렇게 하늘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충만한 기쁨 속에 살아가는 인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말씀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인생에는 늘 환란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그 환란들이 면제되지는 않습니다. 환란이란 인간의 죄와 이 세상의 불완전함 때문에 생겨나는 것인데, 그런 것들은 주님 다시 오시는 날까지 사라지지 않을테니까요. 그리고 성도들에게는 성도이기 때문에 감당해야만 하는 환란이 더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에게는 감당해야 할 환란이 더 많을 수 밖에 없지요. 그래서 예수님도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게 될 것”이라고 “지금은 너희가 근심할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고 근심하게 만드는 환란을 너무 두려워 하거나 피해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환란 중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너희 슬픔과 근심이 기쁨이 될 것이라고 하신 예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가 구하는 것을 주신다는 것을 믿고 기도하는 것이고요. 이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며 살 때, 우리는 환란에 빼앗긴 기쁨을 되찾고, 이전보다 더 크고 견고한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늘 쉽지 않은 인생이고, 이래 저래 아픔과 근심이 있는 인생이지만, 주님 주시는 기쁨으로 늘 기뻐하며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우리의 모든 슬픔과 근심이 해산의 고통이며, 우리를 큰 기쁨으로 인도할 것을 믿으며 살게 하소서.
- 기도의 응답은 우리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아버지께 기도하고 응답받는 사랑받는 자녀의 기쁨을 놓치지 않게 하소서. 꼭 기도하며 기도의 기쁨 속에 살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