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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오후

2014.12.28. 전교인 기도회 - 실망스러운 전쟁보고서(사사기 5)





        본문 : 사사기 1장 27-36절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볼 부분은 이스라엘 본 지파들의 전쟁보고서입니다. 오늘 본문은 각 지파가 약속의 땅을 되찾는 전쟁에서 얼마만큼 성공했고, 얼마만큼 실패했는지에 대해서 알려주고 있습니다. 가나안 정복 전쟁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 마음대로 치른 전쟁이 아니었습니다. 그 전쟁은 하나님께서 내리신 명령에 따라 이루어지는 전쟁이었습니다. 신명기 20장 16-17절을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이렇게 명하셨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이 민족들의 성읍에서는 호흡 있는 자를 하나도 살리지 말지니 곧 헷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을 네가 진멸하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명령하신 대로 하라” 하나님께서 가나안 족속들에 대한 진멸을 명하신 것은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도착하기 전에 그 곳을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죄의 구렁텅이가 되게 만들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그 전쟁은 그 일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전쟁에는 다른 전쟁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아주 독특한 특징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명령대로 순종하기만 하면 100퍼센트 이기도록 미리 세팅을 해 놓으신 후에, 이스라엘의 광야세대를 그 싸움에 투입시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전쟁을 이렇게 이상한 모양으로 세팅하셨던 이유는 그 전쟁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그들을 하나님의 군대로 훈련시키는 훈련장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이 전쟁에 대한 아주 실망스런 전쟁보고서를 들려 줍니다. 오늘 본문에는 므낫세, 에브라임, 스불론, 아셀, 납달리, 단 지파가 치른 전쟁의 결과가 나옵니다. 오늘 본문에는 속하지 않지만, 16절에서는 유다, 21절에서는 베냐민의 전쟁결과도 들려줍니다. 결과는 한 마디로 총체적인 실패였습니다. 요셉지파를 제외하면, 단 한 지파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의 승리는 거두지 못했습니다. 베냐민 지파는 예루살렘에서 여부스 사람을 쫓아내는 것에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사사기가 기록될 시점까지 그들과 함께 예루살렘에 살았습니다. 므낫세 지파는 완전히 실패했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이 마음 먹고 거기 살기로 작정하자 그들을 쫓아내지 못했고, 나중에는 힘이 있었지만, 그들을 쫓아내지 않고 그들에게 자기들이 하기 귀찮은 일을 시켰습니다. 에브라임 지파는 게셀에서 원주민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아셀은 오히려 그들에게 세들어 사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납달리는 벧세메스와 벧아낫 사람들을 부리면서 그들 중에서 살았습니다. 단 자손은 참패였습니다. 오히려 밀려서 산지로 쫓겨가서 거기서 나중에 요셉지파가 그들을 종으로 부리게 될 때까지 거기서 살아야만 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이스라엘 지파들이 정복에 실패한 땅들은 그 당시 그 지역의 전략적 요충지에 있던 요세들이었습니다. 본문의 벧스안, 다아낙, 돌, 이블르암, 므깃도, 악십, 아빅, 르홉, 게셀 등의 도시는 당시의 중요한 무역로이자 군사로였던 해변 길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정복하기에 정말 어려운 성읍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 편에서도 그런 전쟁결과에 대해서 할 말이 있을 것입니다. 적이 너무 강했다고, 그러니 그 정도 한 것도 정말 대단하지 않느냐고 말입니다. 만약 이 전쟁이 그저 사람 대 사람, 나라 대 나라의 전쟁이라면 오합지졸 이스라엘이 이룬 이런 전과는 정말 대단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전쟁은 이스라엘의 전쟁이기 전에 하나님의 전쟁이었고, 그래서 전쟁의 승패는 전혀 그런 조건에 달려있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군대인 이스라엘이 승리를 위해서 해야 할  일은 그저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일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로 이 일에 실패했고 그래서 전쟁에도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결국 이 일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엉망으로 만드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항상 자신들 곁에 찌르는 가시를 놓고 살아가야만 했습니다. 그것도 목숨까지 위협하는 치명적인 큰 가시를 말입니다.

 

본문은 전쟁을 치른 결과 이스라엘이 처한 상태에 대해서 몇 가지로 나누어 말해주고 있습니다. 첫번째, 완전히 패배해서 피신해 살게된 지파의 모습입니다. 여기에 속하는 지파는 단지파입니다. 아모리 사람들은 자신들을 공격한 단지파를 산 위로 쫓아보내고 골짜기로 내려오지 못하게 했습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분명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두려워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 분은 눈에 보이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우리 주변의 모든 것들, 그리고 그것에 매달려 사는 사람들은 다 눈에 보입니다. 그래서, 보이는 세상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사는 것은 생각처럼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단 지파를 통해서 우리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세상을 더 두려워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보이는 세상의 가치관에 따라 살아갈 때, 우리가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삶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아니라 세상을 따라 살게 되는 이유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세상이 두려워서 세상에 편승하게 되면, 성도는 성도의 영광을 잃어버리게 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원래는 정복하며 살아가야 할 땅에서 오히려 그 한 구석에서 눈치를 보며 살 수 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세상에 대해 줄 것 주고, 양보할 것 양보하며 적당히 살아가면 세상이 우리의 영역을 인정해 주고, 세상과 내가 공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저 사는 것만 놓고 본다면, 그렇게 해 주면 세상과 나는 공존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럴 때, 우리는 우리가 잃어버리면 안되는 가장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성도의 영광과 자존심과 정체성입니다. 우리가 이 세 가지를 잃어버리면 우리는 더 이상 성도다운 삶을 살 수 없습니다. 분명히 세상은 두렵습니다. 그 세상을 움직이고 있는 법칙도 두렵습니다. 그 크기가 엄청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에 비해 나는 턱없이 작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내가 섬기는 하나님, 내가 의지하는 하나님은 더 큽니다. 그 분은 만유보다 크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항상 믿고 의지해야 할 사실은 이것입니다. 모든 것을 세상이 쥐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모든 것은 우리 하나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이것을 잊어버리고 세상을 바라보면, 우리는 영광을 잃어버린 작고 빈궁한 성도로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두번째는 승리는 거두었지만, 가나안 거민들과 어울려 살아간 지파들입니다. 므낫세 지파, 에브라임 지파, 아셀지파가 여기에 속합니다. 겉으로 보면 너무나 인간적이고 조화로운 모습입니다. 가나안 사람들과 어울려 평화롭게 공존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것과는 다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진멸하라고 하셨습니다. 아마도 여기에 속한 지파들은 원주민들과 모종의 평화조약을 맺었을 것입니다. 처음 자신들이 공격해서 얻은 땅은 우리가 차지하고 우리는 여기서만 살 테니 너희들은 거기서 살아라, 이제 싸움을 그만두자. 누가 제안했는지는 모르지만, 이런 약속을 통해서 서로 서로 땅의 일부를 차지하고 살아갔을 것입니다. 이들 지파가 보여주는 모습은 항상 적당한 수준에서 머물러 있는 성도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거룩하게 살려는 영적인 싸움을 조금 싸우다가 그만두고, 그 때까지 이룬 신앙적인 성과에 만족하며 그 자리에 머무는 성도들이 여기에 속할 것입니다. 범위를 정해놓고 그 선까지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만 그 너머의 영역은 여전히 세상에 내어주는 성도들이 바로 여기에 속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신앙은 언제나 현재 진행형입니다. 과거가 성공적이었다면,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과거로부터의 교훈과 노우하우를 배워서 앞으로의 삶에 적용하면 됩니다. 그것이 과거를 가장 의미있고 가치있게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세번째 유형은 전쟁에는 이겼지만, 가나안 사람들을 노예나 머슴으로 부린 지파들입니다. 후기의 므낫세 지파, 스불론 지파, 납달리 지파가 여기에 속합니다. 항상 효율을 중시하고 또 경제성을 따지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들이 여기에 속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경제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들은 효율을 중시합니다. 어느 쪽이 더 유리할까 하는 것을 가장 큰 가치판단의 기준으로 사용합니다. 이런 경우 단기간에는 훨씬 더 풍요롭고 넉넉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이런 판단에 의해서 결정된 일들은 부작용을 만들어 냅니다. 


우리 신앙과 가장 많이 부딛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신앙적인 원칙에는 조금만 눈을 감고, 현실적인 효율을 추구한다면, 원하는 결과를 훨씬 빨리 얻을 수 있을 때, 우리는 신앙적인 원칙과 현실적인 이익과 효율 사이에서 갈등하게 됩니다. 세번째에 속하는 지파들이 빠졌던 유혹이 바로 이런 유혹이었습니다. 이들은 전쟁에는 승리했습니다. 승리는 했어도, 차지한 땅에 들어가서 할 일이 많습니다. 무너진 성벽도 보수해야 하고, 무너진 집들도 다시 지어야 합니다. 전쟁 후에 그 모든 상황을 정리하기에는 자신들의 힘 만으로는 벅차 보였습니다. 그럴 때, 그들의 눈에 띤 것이 바로 아직은 살아있는 건강한 원주민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생각합니다. “뭐, 저 사람들을 다 죽일 필요가 있나? 그렇게 하는 것은 너무나 잔인한 짓이야. 저 민간인들이 무슨 잘못이 있다고 저 사람들을 다 죽요. 저 사람들을 살려두고 종으로 삼으면 저 사람들은 목숨을 건져서 좋고, 우리는 일손을 얻어서 좋고, 누이 좋고 매부좋고 아닌가?” 그들은 바로 그 생각을 행동으로 옮깁니다. 분명히 그들은 전쟁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는데는 성공했습니다. 그들이 얻은 승리가 그 증거입니다. 그러나, 승리 후의 현실로 돌아오자 그들은 하나님의 원칙을 버리고 효율과 편리의 유혹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전쟁에 승리하고도 하나님의 눈에는 실패자가 된 것입니다. 오늘 얼마나 많은 성도와 교회들이 이것 때문에 큰 싸움에서는 이기고 나서 작은 싸움 때문에 그 승리를 다 망쳐버리는지 모릅니다. 


오늘을 사는 이스라엘인 저와 여러분도 전쟁상황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단지 무기와 힘으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의 구체적인 선택을 통해 싸운다는 것만 다를 뿐, 전쟁의 본질은 같습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사람들이 치러야할 진짜 전쟁은 영적인 전쟁입니다. 로마서 12장 18절을 보면 주님은 우리에게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으로써 영적인 싸움에 임할 때 잊지 말아야 할 전술입니다. 우리는 우리와 다른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들과 싸울 수 없습니다. 그들의 종교시설에 대해서 테러를 가해서도 안됩니다. 종교적인 이유로 다른 사람들을 미워하거나 멸시해서도 안됩니다. 주님의 말씀처럼 화평해야 합니다. 그러나, ‘화평하라는’ 명령에는 ‘할 수 있거든’이라는 단서가 붙어있다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이것은 최선을 다해서 그렇게 해야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할 수 없는 일까지 해 가면서 화평해서는 안된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양보해서는 안될 것을 양보하면서까지 세상과 화평해서는 안됩니다. 


여러분, 우리는 진실로 하나님이 역사의 주인이시라는 것을 믿습니까? 우리는 진실로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역사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믿습니까? 그래서, 결국은 그 분의 뜻이 승리하게 될 것을 믿습니까? 그 하나님이 내 인생을 세밀하게 인도하고 계시다는 것을 믿습니까?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때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현실과 하나님의 명령 사이에서 선택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은 상황에서 그렇게 하십니다. 그런 일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본심이 드러나고, 또 그런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의 선택을 통해서만 우리의 믿음을 확인하고 또 성장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요구 앞에서 그 뒤에 계시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면 뒤로 물러나게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우리는 영적으로 퇴보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자존심과 존귀함을 잃어버리고 영적으로는 쪼그라든 보잘 것 없는 삶을 살게 됩니다. 항상 세상의 눈치를 보고, 비위를 맞추어 주면서도 그 세상을 두려워하며 살 수 밖에 없습니다. 또, 우리는 하나님의 요구에 대해서 적당한 수준의 헌신과 순종에 머물 수도 있습니다. 신앙에는 한 단계, 한 단계 성숙하고 온전해 질 때마다, 그 단계에 이르러야만 보고 누릴 수 있는 전혀 다른 세계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버티기 스타일’의 성도들은 결코 하늘에 속한 그 비밀스런 복들을 자기 것으로 가질 수가 없습니다. 부요함의 열쇠를 손에 쥐고 있지만, 결코 그 부요함을 누리지 못합니다. 그 문을 여는 수고를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뜻보다는 실용적인 것을 먼저 생각하고 명백한 하나님의 요구도 제 나름대로 해석하고 결론내리며 신앙생활 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스타일의 성도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자기에게 유리한 대로 해석하고 변형시킵니다. 말씀을 세속적인 상식과 관행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때로는 말씀과 상식이 일치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상식과 하나님의 뜻이 부딛힐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택해야 합니다. 결코 상식과 관행으로 말씀을 해석해서는 안됩니다. 그렇게 하면, 말씀은 사라지고 상식만 남습니다. 그러면, 얕은 만족은 있을지 몰라도 신앙의 능력은 없습니다. 능력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헌신으로부터 나오는 것인데, 그 말씀 앞에 세속적인 상식과 관행을 세웠으니 능력이 나타날래야 나타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언제나 하나님께서 우리 삶 속에서 요구하시는 것은 단 한가지입니다. 그것은 주님의 요구에 대한 정확한 헌신입니다. 우리 믿음과 삶의 능력은 우리가 이 정확한 헌신에 얼마나 가까이 가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최소한 하나님의 명백한 요구가 있거든 그것에 대해서는 다른 생각하지 말고 또 핑계대지 말고, 그저 정확하게 헌신하려고 노력하는 그런 성도들이 되십시다. 결코 하나님께서는 그런 성도들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전능하신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이런 성도들을 밀어주실 것이고, 그래서 결국 모든 믿음의 장애물을 극복하고 풍성하고 온전한 하늘의 복의 주인공이 되게 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 정확한 순종의 싸움을  계속해 가는 부지런하며 헌신된 성도들, 그래서 승리하는 하늘 군대의 병사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