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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교회 설교/설교듣기

매일성경 설교 18. 이스라엘의 통과함을 용납치 아니하고

본문 : 민수기 21장 21-35절


도입 : 형통이란 무엇인가?

사람들이 순조로운 대화를 나누려면 대화 속에서 공통적으로 사용하는 말, 특히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말에 대해서 개념정리를 잘 해놓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오히려 의사소통이 더 어려워지고 오해가 깊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뭔가 이야기가 겉돈다고 여겨지거나 진전이 없다고 생각될 때는 혹시 같은 단어를 다른 의미로 사용하고 있지는 않은지 부터 확인하는 것이 더 지혜롭고 효과적입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그 말씀을 믿으며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실제로 그 말씀을 중심으로 하지 않는 신앙생활, 뿌리를 성경의 약속에 두지 않는 신앙은 참된 신앙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의 약속과 신앙에 대한 설명은 신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아듣는 것, 그리고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그만큼 중요해 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오해가 생기면 신앙이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가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생겨나는 피해는 고스란히 우리들의 몫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제대로 말씀하셨는데, 우리가 잘못 알아듣고 엉뚱한 방향으로 간 것이기 때문입니다. 

건강하고 바른 신앙생활 그리고 진정으로 능력있는 신앙생활을 하려면 신앙에 있어서도 개념정리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제가 실제로 성도들을 가르쳐 보면 처음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 배운 신앙에 대한 잘못된 개념을 가지고 아주 엉뚱한 방향으로 가고 있는 분들도 있고, 또 신앙이 주는 참된 유익과 능력을 놓치고, 하나님과 신앙에 대한 오해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성도들도 무척 많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기존에 알고 있던 개념을 버리고 새로운 개념을 받아들인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많은 분들이 바른 개념으로 돌아오는 일에 실패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참된 신앙의 힘과 능력을 알고 또 하나님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그리고 마지막에 하나님께서 주실 영광스러운 상을 받으려면 바른 개념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일은 꼭 필요합니다. 이것은 기독교가 진리의 종교이기 때문에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게 올바른 개념정리가 필요한 말들 중의 하나가 바로 ‘형통’입니다. 성경이 성도들에게 약속하고 있는 모든 복들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형통’이라는 말이 될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형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형통....’ 생각만 해도 기분좋아지는 말 아닙니까? 그런데 회원 여러분, 혹시 여러분은 오히려 이 형통의 약속 때문에 시험에 들었던 적은 없으십니까? 혹시 지금도 하나님께 대해서 삐져 계신 분은 없으십니까? 분명히 있으실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을 믿으면 형통케 하신다고 했고 나는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믿는데 왜 되는 일이 없을까? 왜 앞길에 장애만 생기는 것일까? 왜 이렇게 힘들기만 한 것일까?하는 불만 가득한 질문에 빠져계신 분들이 분명히 계실 것입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믿는 사람들에게 형통을 약속하셨습니다. 너무 좋은 것이기는 하지만 살아보면 이게 현실과 차이가 많이 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거짓말 하신 것일까요? 그리고 지금도 달콤한 말로 우리를 속이고 계신 것일까요? 답부터 말씀드리면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에게 형통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분명히 그 약속을 지키십니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전혀 형통스럽지가 못합니다. 그렇다면 뭐가 문제일까요? 어디서 부터 어긋난 것일까요? 사람들은 저마다 선이해라는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선이해라는 것이 맞을 때도 있지만 틀릴 때도 있습니다. 맞으면 괜챦은데 틀린 경우에는 의사소통에 아주 심각한 문제가 생겨납니다. 문제는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우리가 원래 가지고 있었던 거듭나기 이전의 생각대로, 또 우리 문화에서 ‘형통’이라는 말이 가지는 의미를 가지고 하나님의 약속을 이해하려고 하는데 이것이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형통’과는 굉장히 많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형통이라는 말을 들으면 ‘만사형통’이라는 네 글자를 먼저 떠올립니다. 그리고는 그와 동시에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내 마음대로, 아무 어려움 없이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개념을 떠올립니다. 이것이 한국어를 사용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형통’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개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성경이 말하는 형통은 전혀 이런 의미의 형통이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형통은 우리가 바라는 것 우선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우선입니다. 나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형통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가장 선하고 완전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결국은 우리들에게도 가장 유익하게 된다는 의미에서 형통이라고 말해지는 것입니다. 다행이 우리가 원하는 것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맞아 떨어지면 형통은 그야말로 우리의 바램과 생각대로 이루어지는 모양이 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형통이 우리가 바라는 것과는 때로는 정반대의 모양으로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두 가지 모두가 다 형통인데 우리는 미리 형통에 대한 나름대로의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두번째의 경우는 형통이라고 생각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두번째로 우리가 생각하는 형통은 어떤 일이 이루어지는 과정에 있어서 아무런 장애도 방해도 없는 것이지만 성경이 말하는 형통은 그런 형통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형통은 장애물이 있는 형통이고 방해와 반대자가 있는 형통입니다. 그런 것을 이겨내고 뛰어넘었을 때 주어지고 얻게 되는 형통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형통입니다. 시편의 약속대로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를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해 가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형통의 약속을 반드시 지키실 것입니다. 믿습니까? 그런데, 그 과정에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가 포함되어 있을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성경이 형통을 말할 때 빼놓지 않고 항상 믿음에 대해서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건너서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에 도착할 때까지 인내하려면 믿음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형통과 짝을 이루는 믿음은 단순히 하나님께서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확신한다는 의미에서의 믿음이 아닙니다. 형통의 조건으로 제시되고 있는 믿음은 그런 지식적이고 그저 마음 속에만 있는 믿음을 넘어서서 실제의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 분을 따라갈 수 있는 믿음, 그 분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 그런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비록 지금 당장 눈 앞에 보이는 것은 푸른 초장이 아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이고, 들려오는 것은 잔잔한 시냇물 소리가 아닌 대적들의 으르렁 거리는 소리이지만 하나님께서 나를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실 것이라는 것을 확신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로 그 분께 순종하며 그 분의 뒤를 따르는 그런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성도들에게 약속하신 형통이란 바로 이런 믿음에 대한 상입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는 믿음으로 장애와 방해를 넘어섰을 때, 주시는 형통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형통입니다. 

또 한 가지 성경이 말하는 최고의 형통은 바로 땅 위에서의 형통이 아니라 하늘나라에서의 형통입니다. 이것을 확실히 붙들고 또 잊지 않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꾸 낙망하게 되고 시험에 들게 되기 쉽습니다. 그래서 그 최고의 형통을 놓치기가 쉽습니다. 물론 영적으로 말한다면 하나님께서 믿음의 성도들에게 약속하신 형통은 반드시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땅에서 믿음을 가지고 또 그 믿음을 지키며 살아가려고 분투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사람들만이 아는 풍성하고 다함이 없는 지극히 영광스러운 영적인 축복이 누구에게나 틀림없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의미의 형통은 이 땅위에서 모든 성도들에게 다 주어지지는 않습니다. 쉽게 표현하면 믿음생활을 잘 한다고 모두가 다 눈에 보이는 복을 풍성하게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가 더 많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진짜로 주시길 원하시는 것은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주시려는 진짜 형통은 땅에서의 잠시잠깐 주어지는 형통, 그게 너무 좋기 때문에 오히려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빼앗고, 그래서 영적으로도 위험할 수 있는 그런 불완전한 형통이 아니라 하늘에서의 영원한 형통, 아무리 좋고 좋고 또 좋아도 전혀 부작용이 없는 그런 형통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절대로 경험할 수도, 소유할 수도 없는 그런 형통 말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눈이 이런 형통을 바라보고 있다면 우리는 이 땅의 이런 저런 경험들 때문에 낙망하고 좌절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 나라에서의 가장 찬란한 형통을 향해 더 확실한 소망을 품고 믿음을 지켜나가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만난 두 번의 전쟁

오늘 본문은 광야를 여행하던 이스라엘 민족이 아모리왕 시혼과 바산 왕 옥과 전쟁을 치른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처음에 이스라엘은 아모리와 싸울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아모리의 왕 시혼에게 사신을 보내 그저 그들의 땅을 통과해서 지나가게 해 달라고 하며, 만약에 지나가다가 피해를 입히는 일이 생기면 모두 보상해 주겠다고 하면서 왕의 길로 통과하는 것을 허락해 달라고 겸손하게 요청했습니다. 실제로 이 왕의 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널 수 있는 사해의 북쪽 끝으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나가야만 하는 길이었습니다. 그래서 가데스에서 에돔 왕의 반대에 직면했을 때처럼 다른 길로 돌아갈 수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그 어느 때보다도 극심한 반대에 부딪힌 것입니다. 아모리왕 시혼은 모세의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오히려 자신의 백성들에게 전쟁동원령을 내리고 군대를 모아 야하스까지 이스라엘을 공격하러 나왔습니다. 

이 전쟁은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이 전쟁의 결과 이스라엘은 아르논에서부터 얍복까지의 영토를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전쟁은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세는 내친 김에 야셀지방을 점령하고 바산지역으로 올라가려고 했습니다. 가나안으로 가려면 그 길도 지나가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순조로울 것만 같았던 여정에 또 하나의 장애가 등장합니다. 그것은 바로 바산왕 옥이었습니다. 옥은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군대를 모아 에드레이까지 나왔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이들과 싸우라고 명하셨고 그들을 이스라엘의 손에 붙이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전쟁은 물론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났고, 그렇게 해서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을 향해서 훨씬 더 가까이 갈 수 있었습니다. 

이 두 번의 전쟁은 두 나라의 입장에서 보면 너무나 당연히 치러야만하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이스라엘이 그냥 지나가게만 해 달라고 했지만 시혼의 입장에서 보면, 그렇게 하는 것은 아무런 저항없이 대문빗장을 열어주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여겨졌을 것이고, 또 한 편으로는 당시 그 지역의 맹주로서 아주 자존심 상하는 일일 수 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요즘이야 정치나 전쟁에 있어서 실리가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지만, 고대사회에서는 명분과 자존심이 더 중요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이스라엘을 자기 땅으로 통과하게 하는 것은 굉장히 불안한 일인 동시에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을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또 옥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의 북진은 이스라엘의 입장에서 보면 그저 약속된 땅을 향해 길을 가고 있는 것에 불과했지만, 옥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엄연히 이스라엘이 전쟁을 통해서 영토를 확장해 가는 것이었고, 이번에는 자기 나라도 빼앗으려고 하는 것으로 보일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당시 그 지역에서 꽤 강대한 나라를 이루고 있었던 옥은 이스라엘의 북진을 자신들을 향한 선전포고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전쟁은 이스라엘에게 있어서는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은 그런 전쟁들이었습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이 처음 택한 방법은 전쟁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평화롭게 그 나라들을 통과해서 가야할 장소로 가고 싶어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들의 바램과는 달리 당시로서는 그 지역의 가장 강한 나라들이었고, 그래서 이스라엘의 입장에서는 정면으로 부딛히는 것만은 피하고 싶어했던 바로 그 나라들과 정면전을 벌여야만했던 것입니다. 물론 이스라엘은 그 전쟁들에서 전부 승리를 거두었지만, 막상 그런 전쟁을 벌여나가는 이스라엘에게 그 전쟁이 유쾌한 전쟁일수만은 없었을 것입니다. 아뭏든 전쟁은 전쟁이고 이기면 살고 지면 죽는 엄연하고 냉정한 현실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언약대로 애굽에서 나오게 된 이스라엘, 그렇게 하나님의 명령에만 순종하여 광야로 나온 이스라엘... 여러분이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 중 한 사람이라면 그렇게 해 주신 하나님께 무엇을 기대하겠습니까? 부족함도 없고 고난도 없으며 전쟁도 없는 눈앞에 열린 탄탄대로, 그냥 직선코스로 가나안 땅까지 들어가고 그 땅을 손하나 대지 않고 차지하게 되는 그런 것을 기대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렇지만,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애석하게도 그런 달콤하기만 한 현실이 아니었습니다. 눈 앞에 놓인 홍해, 그리고 뒤를 따르는 애굽의 전차부대... 이것이 그들이 처음 경험한 현실이었습니다. 비록 애굽을 빠져나오기는 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런 현실들을 받아들일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기적적인 역사로 가나안의 입구인 가데스 바네아까지 왔지만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40년을 떠돌아야 했고, 이제 다시 가나안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21장 10절부터 20절까지를 살펴보면 그들이 광야의 불뱀사건 이후 그 이전의 실패한 역사를 되풀이 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서 그저 여기 저기를 옮겨다니면서 진을 치고 다시 떠나고 머물다가 다시 떠나는 일을 반복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또 다시 큰 전쟁에 직면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이 먼저 싸움을 건 것도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답시고 무모하게 뛰어든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평화롭게 지나가려고 한 것인데 아모리왕 시혼과의 큰 전쟁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바산왕 옥은 아얘 그런 저런 이야기도 듣기 전에 그냥 군대를 이끌고 이스라엘을 공격해 왔습니다. 이번에는 하나님을 거역하지도 않았습니다. 불평이나 불만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은 이런 큰 전쟁들에 직면했던 것입니다. 믿음으로 순종하면서 가면 길이 훤하게 열려야 하는데, 탄탄대로 평안한 길, 가나안 까지의 고속도로가 열려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가 않았고 여전히 그 땅 원주민들과의 전쟁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전쟁의 의미 

가나안 땅도 우리의 구원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언약을 통해 은혜로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러다 보니 이스라엘이나 우리나 이렇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이제부터는 아무 것도 할 필요가 없다고, 또 눈 앞에 평탄한 길만 열릴 것이니 느긋하게 가기만 하면 된다고 말입니다. 우리 모두는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과정이, 그리고 우리가 하늘나라로 가는 길이 그렇기를 바랍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저는 어느 날 눈 뜨면 바로 하늘나라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젊은 사람이 이상하다고 여기실지도 모르지만 이게 저의 진심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을 인도해 가시는 하나님의 계획은 절대로 이렇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하늘나라로 로 인도해 가시는 하나님의 계획은 이와는 전혀 다릅니다. 

가나안은 약속의 땅입니다. 하늘나라도 약속의 나라입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는 그저 가만히 있기만 하면 갈 수 있는 그런 나라가 아닙니다. 마트에서 무빙워크를 타는 것처럼 그저 발만 얹고 있으면 가게 되는 그런 나라가 아닙니다. 그 나라로 가는 길에는 수많은 시험이 있고 또 싸움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시험들을 이겨내야 하고 또 그 싸움에서 승리해야 합니다. 가나안은, 그리고 하늘나라는 그 후에야 우리의 나라가 되는 그런 곳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그 승리를 위한 가장 강력한 무기를 주셨습니다. 그 무기가 바로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길에서 우리가 그 믿음을 사용하며, 그래서 그 믿음을 더 굳건하게 만들고 더욱 더 하나님만 의지하는, 하나님만으로 만족하는 그런 하나님의 백성들로 만들어져 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나중에 글자 그대로 형통해 지더라도, 아무 일 없는 평강가운데 놓이더라도 결코 믿음의 정도를 벗어나지 않는 신실한 백성이 되기를 원하시며, 하늘나라에서 가장 빛나는 영광의 상급을 받게 되기를 바라십니다. 

우리는 가끔 투덜거립니다. “예수 믿는데 왜 이렇게 사는게 힘드냐?”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럴 때 그 마음이 오래가게 내버려 두어서는 안됩니다. 그것이 더 깊은 불신앙이 되도록 놓아두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그럴 때마다 의도적으로 생각하고 또 기억해야 합니다. 가나안에 가까이 갔던 이스라엘도 전쟁을 치뤄야먄 했고 믿음으로 그 전쟁에서 이겼을 때, 그만큼 약속의 땅으로 가까이 갈 수 있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상급학교로 갈수록 공부가 어려워지기 마련입니다. 요구되는 것이 더 많아지게 마련입니다. 성도는 삶 속에서 이중적으로 이런 일을 겪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견고해 지고 성숙해 갈수록 하나님의 훈련도 강도가 높아집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우리를 향한 사탄의 도전과 시험도 그만큼 강하고 집요해 집니다. 우리는 그런 모든 싸움들을  생략하고 바로 하늘나라로 직행하기를 원하지만 신앙의 현실에는 그런 일들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시험들과 믿음의 싸움들, 그리고 사탄의 도전과 싸워 승리할 때 우리는 그만큼 하늘나라에 어울리는 아름다운 성도들이 될 것이고, 그만큼 그 나라와 가까워져서 더 확실하게 그 나라를 소망할 수 있습니다. 그 나라에서 나에게 주어질 더 큰 상을 소망할 수 있게 됩니다. 

결론 : 믿음의 영토를 넓히자

회원 여러분, 가나안으로 가는 길에서 만나게 되는 전쟁이라면, 내가 꼭 가야만 하는 믿음 길에서, 그리고 지금 내가 그 길을 가고 있기 때문에 만나게 되는 싸움이라면, 우리는 그 싸움을 피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포기해서도 안됩니다. 두렵고 힘들어도 싸워야 합니다. 끝까지 싸워야 합니다. 필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순종하게 하는 믿음만 있으면 됩니다. 싸우라고 하셨으니, 싸우면 이기게 하신다고 하셨으니 우리는 그저 그 약속을 믿고 순종하기만 합니다. 우리가 지레 겁먹고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승리는 하나님께서 이루실 것입니다. 아모리왕 시혼, 그리고 바산왕 옥... 이 두 왕과의 전쟁은 이스라엘에게는 필요없어 보이는 싸움이었고 그래서 피하려고 했던 싸움이었지만, 이 싸움은 영적인 유익 뿐만 아니라, 현실적으로도 크게 유익이 있는 싸움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그 두 나라와의 싸움에서 얻은 영토는 나중에 약속의 땅의 일부가 됩니다. 르우벤과 갓, 그리고 므나세 반지파에게 분깃으로 주어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믿음의 싸움을 싸운 그 곳을 우리의 땅, 약속의 땅으로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내 삶의 자리에서 주어지는 믿음의 싸움을 싸워 승리한다면 그 땅은 앞으로도 내 믿음의 영토가 될 것입니다. 내가 내 믿음을 행사하며 믿음으로 살 수 있는 그런 편안한 약속의 땅이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지금 불편하고 지금 귀찮다고 그 싸움을 포기한다면 그 곳은 언제나 내 믿음을 방해하고 공격하는 믿음의 변방으로 남아있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 성도들의 삶 속에 이런 저런 크고 작은 전쟁들을 놓아두십니다. 믿음으로 이 전쟁에 뛰어들어 승리를 누리라고 우리를 초청하고 계십니다. 전쟁은 유쾌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치열한 것이며 힘든 것입니다. 상처를 입을 수도 있고, 어려움을 겪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전쟁 뒤에는 승리의 영광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가장 빛나는 형통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이 온전한 형통, 영원히 빛나는 하늘의 형통을 소망하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싸움의 결과는 선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께 맡기고 묵묵히 싸워야 할 싸움을 싸우는 성도들로 살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가 이 소망과 믿음 가운데 하루 하루 믿음의 영토를 넓혀가고 하늘나라를 침노해 가는 복되고 능력있는 성도들이 되어 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약속 : 우리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믿음의 싸움을 싸울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며 영원한 약속의 땅을 허락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