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창세기 28장 10-22절
헤깔리기 쉬운 두 가지를 확실히 구별하려면 두 가지 모두의 특징을 확실히 알면 더 좋겠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다른 어떤 것과 섞어놓아도 금방 구분할 수 있을만큼 하나를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대개 율법과 복음의 차이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둘 사이의 차이를 물으면 율법은 행위의 법칙이고 복음은 믿음의 법칙이라고 어렵지 않게 대답합니다. 그렇습니다. 율법은 우리가 무엇을 해야한다는 것이고 복음은 우리가 아무 것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우리가 주어이고 복음은 하나님이 주어입니다. 율법은 우리가 원인을 만들어야 결과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고 복음은 반대로 우리가 원인을 만들지 않아도 결과를 가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둘 사이의 차이점이 너무 명확하고 그래서 전혀 헤깔리지 않을 것같지만 실제로 신앙생활 속에서는 이 두 가지가 얼마나 쉽게 혼동되고 있는지 모릅니다. 이것이 별로 심각할 것 없는 문제같지만 복음과 율법이 헤깔리기 시작하면 결국은 신앙 자체가 인간의 일이 되고 맙니다. 은혜는 없어지고 공로만 남게 됩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이 신앙의 주어가 되고 맙니다. 원칙대로라면 우리는 신앙생활을 오래할수록 겸손해져야 할 것입니다. 신앙의 연륜이 오래될수록 받은 은혜도 그만큼 많아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입으로는 은혜라고 말하면서도 내용으로는 그 은혜를 받을만한 이유나 원인을 자꾸 내 안에서 찾기 때문에 겸손해 지기 보다 오히려 교만해 지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신앙의 이상현상입니다. 복음과 율법, 은혜와 공로가 혼동되고 있기 때문에 생겨나는 현상입니다.
이렇게 복음과 율법이 자주 혼동되고 문제를 일으키는 이유는 두 가지 입니다. 하나는 인간의 고정된 사고방식 때문이고 또 하나는 우리가 흔히 자존심이라고 부르는 교만 때문입니다. 인간은 철저히 인과응보라는 사고방식에 갖혀있습니다. 결과가 있으려면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원인이 있어야만 한다고 철석같이 믿고 그것에서 어긋나면 잘 받아들이질 못합니다. 그래서, 무언가 원인을 찾아야 직성이 풀립니다. 살면서 큰 어려움을 만납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그만한 어려움을 당할만한 잘못을 저지른 적이 없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도대체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다고 이런 어려움을 당하는가?"라고 생각합니다. 불교의 윤회설도 따지고 보면 인간의 이런 좁은 사고방식 때문에 생겨난 이론입니다. 신앙이기 이전에 사람들의 고정된 사고방식인 거죠. 그런데, 믿는 사람들도 비슷한 반응을 보입니다. 우리는 전생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어서 전생을 들먹이지 않을 뿐이지 원인을 찾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큰 어려움을 당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대개 어떻게 합니까? 우리도 아무 이유없이 그런 어려움이 있다고는 생각하기 힘들어 합니다. 그래서, 어려움이 닥치면 있지도 않은 죄, 행하지도 않은 잘못을 기억해 내고 고백하느라고 끙끙거립니다. 10년전, 20년전 죄까지 다시 끄집어 내어서 다시 고백하고 용서를 구합니다. 물론 그런 것이 신앙적으로 어느 정도 도움이 되기는 하지만 영적으로 보면 별로 건강한 것은 아닙니다. 잘못하면 복음이 준 자유가 아닌 율법이 주는 죄책감의 굴레에 빠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고방식이 더 위험해 지는 것은 우리에게 어려움이 아니라 복이 찾아올 때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야 그것을 단순히 자신의 노력의 결과라고 생각하고, 그렇지 않으면 운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믿는 우리는 복이 하나님으로 부터 주어지는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복이 찾아오면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을만한 무슨 잘한 일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간증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에 대한 증언입니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으로 부터 받은 복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간증들을 들어보면 분명히 이야기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은혜와 복을 주셨다고 이야기하지만, 거기에는 꼭 이유와 원인이 있습니다. 전체를 요약하면 "내가 이렇게 순종했더니 이렇게 복 주시더라", "내가 이렇게 기도했더니 이렇게 크게 응답해 주시더라", "내가 이렇게 봉사했더니 이렇게 갚아주시더라"라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러면, 내가 순종하지 않았다면, 내가 기도하지 않았다면, 내가 봉사하지 않았다면 은혜와 복은 없다는 이야기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가 중심이 아니라 내가 한 일들이 중심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되면 겉으로는 은혜를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실제적으로는 내가 한 일에 대해서 상받은 경험을 이야기하는 셈이 되는 것입니다. 간증이 진짜로 은혜에 대한 이야기,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가 되려면 이런 이야기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내가 이러 저러한 잘못을 저지르고, 이러 저러한 실패를 했음에도 하나님께서는 나를 구원하시고, 지금 이런 복을 주셨다. 나는 이유도 알 수 없고 감당할 수도 없다”라는 이야기 말입니다. 그래야 그 간증은 말 그대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증언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런 간증을 들어본 적이 정말 거의 없습니다. 대부분의 간증은 자기 자신이 한 행위와 그 결과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그래서 듣는 사람들에게도 "나도 저렇게 해야지. 그래서 저런 복을 받아야지"라는 행위의 결심을 불러일으키게 됩니다. 행위에서 시작해서 행위로 끝나 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사고방식은 우리가 성경을 볼 때도 그대로 나타나서 우리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듭니다. 특히 성경의 인물에 대한 부분을 읽을 때면 그런 경향이 더 강해집니다. 하나님께서 그 인물에게 그렇게 은혜를 베푸신 이유를 하나님이 아니라 그 사람에게서 찾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왜 그 사람이 그런 복을 누렸나, 왜 그 사람이 그런 은혜를 받았나? 그 사람의 행동 속에서 원인을 찾으려고 합니다. 그리고는 그것을 법칙 삼아서 그대로 따라하려고 합니다. 나도 그런 복을 받고, 은혜를 받으려고 말입니다. 물론 그들의 삶 속에는 우리가 본받아야 할 많은 모범들이 있습니다. 신앙인으로써 참 부럽고 고상하게 보여지는 정말 신앙인 다운 삶의 모습들이 있고, 나도 누리고 싶은 복들도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경에서 훌륭한 신앙인물을 만나면 그의 일거수 일투족을 다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그의 삶 전체를 모두 선한 것으로 보고 그대로 닮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에 나오는 그 어떤 인물도 완전한 인물은 없습니다. 모두가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결함 투성이 인간이었으며 실수와 죄로 얼룩진 인생을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며 복을 받았던 이유는 그들이 그럴만한 자격을 갖춘 사람들이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이 우리 보다 훌륭한 사람들이었을지는 몰라도 그들도 하나님보시기에는 여전히 죄인이었고 하나님의 기준에는 턱없이 부족한 사람들에 불과했습니다. 만약 그들이 그런 복을 누릴만해서 누리는 것이라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할 수 없을 것이빈다. 그저 일한 결과를 받은 '삯'에 불과할 것입니다.
우리가 대표적으로 오해하는 인물 중 한 명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야곱입니다. 우리는 야곱이 나중에 이스라엘이 되고 믿음의 조상들 중의 한 명이 되었기 때문에 그의 삶 전체가 우리의 모범이 될 수 있을만큼 선하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특히 오늘 본문이 그렇게 오해되는 대표적인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 본문으로 하나님의 복을 받으려면 야곱처럼 이렇게 적극적으로 구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설교를 많이 듣고 자랐습니다. 심지어는 야곱처럼 미래의 십일조를 약속하고 그만큼의 복을 받으라고 하는 설교까지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하나님에 대해서 알게 되고, 신앙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면서 부터는 그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은 성도들에게 본받아야 할 예가 아니라 잘못된 신앙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시기 위해서 기록된 본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 야곱은 정말 엄청난 사기행각을 벌이고 도망치고 있는 중입니다. 배고픈 형을 속여서 장자의 권리를 빼앗고, 어머니와 짜고 아버지를 속여 형이 받아야 할 축복을 가로챘습니다. 그리고는 에서에게 맞아죽을 것이 두려워서 지금 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치고 있는 중입니다. 야곱은 원래 그럴 필요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에서가 아닌 야곱을 선택하시고, 그에게 실질적인 장자의 복을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냥 있었다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때에 야곱에게 그 날의 축복을 받게 해 주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버지 이삭이 자기보다 형 에서를 더 사랑하게 되자 불안함과 욕심에서 일을 꾸미게 되고, 야곱은 형과 아버지를 속이고 희대의 사기극을 벌인 후, 이제 국외도피를 시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야곱은 브엘세바를 떠나 하란으로 가고 있습니다. 브엘세바는 '언약의 샘'이라는 뜻을 가진 곳입니다. 거기는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하심과 지켜주심이 있었던 곳입니다. 이방족속들이 아브라함과 이삭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눈으로 보고 두려워하며 먼저 화친을 청한 언약의 땅이 바로 브엘세바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그 땅을 떠나서 할아버지가 떠나왔던 하란으로 다시 돌아가고 있습니다. 약속이 있는 땅을 떠나 그 약속의 성취를 위해 떠나야만 했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의 후퇴요, 하나님의 역사를 뒤로 돌리는 행위였습니다. 그는 나중에 애굽의 바로 앞에서 자신의 나이를 묻는 그의 질문에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일백 삼십년이니이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세 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이것이 야곱 스스로가 요약한 자기 삶의 전체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복을 찾아 헤맸고, 그것을 위해서 수많은 사람들을 속이고 분노하게 만들었지만 결국 그의 삶 전체는 브엘세바를 버리고 하란을 선택한 "험악한 세월"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야곱의 삶이었습니다. 자기 힘으로 복을 만들고 그 안에 안전하게 거하려고 힘썼던 야곱의 인생이었습니다. 물론 그는 주변이 부러워하는 물질적인 복을 누렸습니다. 우리는 그의 복을 부러워합니다. 그러나, 정작 그 자신은 험악한 세월 보낸 것 밖에 없습니다. 회원 여러분, 이것이 하나님의 언약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 힘으로 자기가 원하는 복을 누려보려고 힘썼던 한 사람의 정직한 고백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복을 얻고자 브엘세바를 떠나 하란으로 가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하나님의 복을 기다릴 줄 아는 사람들로 남아있어야 합니다. 신앙을 우리의 공로가 아닌 하나님의 언약에 묶어 놓고서 말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삶도 그의 삶처럼 험악한 세월의 연속이 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란으로 향하던 야곱은 밤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이 밤은 그가 광야에서 그런 식으로 보내야만 했던 수많은 밤들 중의 하나였을 것입니다. 그 날도 그는 광야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적당한 돌을 골라서 베게를 삼은 후 잠이 들었습니다. 알지 못하는 짐승들과 사람들의 습격을 두려워 하며 잠을 청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꿈을 꾸게 됩니다. 그가 꿈에서 본 것은 정말 장엄한 광경이었습니다.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섰는데 그 꼭데기는 하늘에 닿아 있었습니다. 우리말로 사닥다리로 번역되어 있는 이 말은 우리가 생각하는 나무로 만든 사닥다리가 아니라 계단으로 생각하는 것이 더 적당합니다. 그것은 허술한 사다리가 아니라 하늘까지 이어진 단단한 돌계단이었습니다. 그 계단으로는 쉴새없이 천사들이 오르락 내리락 하고 있었고, 그 꼭데기에는 하나님께서 서 계셨습니다. 그렇게 나타나신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할찌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찌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우리의 사고방식대로라면 이런 엄청난 복의 약속을 받기 위해서 야곱이 무언가 한 일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는 한 일은 전혀 없었습니다. 오히려 한 일이 있다면 아버지와 형을 속인 일 밖에는 없습니다. 그것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스스로 취하려고 말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그를 찾아오셨습니다. 도망치는 그에게, 광야에 누워 불안한 잠을 청하는 그에게 나타나셨고,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에게 약속하셨던 그 약속을 재차 확인시켜 주십니다. 두들겨 패줘도 시원치 않을 그였지만, 하나님은 그를 나무라지 않으셨습니다. 그 대신 내가 네 조상들의 하나님인 것처럼 너의 하나님이고 그들과의 약속을 너와 네 자손을 통해 이룰 것이고, 그 약속을 이룰 때까지는 너를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일방적으로 말씀하시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깜짝 놀라 잠이 깬 야곱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그는 계속해서 말합니다. "두렵도다 이 곳이여 다른 것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하늘의 문이로다" 아침에 일어난 야곱은 베게했던 돌을 기둥으로 세우고 그곳에 기름을 붓고는 그 곳의 이름을 하나님의 집이라는 의미의 "벧엘"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하나님께 서원합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사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 나로 평안히 아비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야곱은 브엘세바를 떠날 때, 자기 혼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하님께서는 그와 함께 하고 계셨습니다. 그 날은 사실 하나님께서 그 사실 알려주신 날에 불과했습니다. 그가 꿈에 본 하늘까지 이어진 계단은 야곱이 세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 계단을 세우기 위해서 돌 하나 보탠 것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계단은 땅과 하늘을 완벽하게 연결해주고 있었으며, 그 꼭데기에는 하나님께서 서 계셨고, 그 하나님은 그렇게 야곱을 만나셨던 것입니다. 그 계단은 야곱을 만나시기 위해서, 그에게 언약을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직접 마련하신 것이었습니다. 야곱은 자기가 생각하는 복을 움켜쥐기 위해서 가족까지 속인 도망자가 되었고, 그렇게 아무렇게나 아무 곳에나 쓰러져 잠을 청하는 신세로 전락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곳에 하늘과 땅을 잇는 계단을 세우셨고, 거기로 야곱을 찾아오시고 만나셨던 것입니다.
회원 여러분, 은혜는 우리가 받을만해서 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거룩하고 온전한 삶을 살아갈 때만 우리를 만나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죄악 속에서 절망하며, 아무도 도울 이 없어서 두려움에 떨 때도 주님은 그 자리에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우리가 신앙적으로 성장해 갈 때 뿐만 아니라 뒤로 물러서고 후퇴할 때도 하나님은 우리를 홀로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그 분의 은혜를 받기 위해서 우리가 하늘까지 닿는 계단을 만들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그 계단에 돌맹이 하나 보탤 필요도 없고, 사실 보탤래야 보탤 수도 없습니다. 그 계단은 우리가 아니라 그 분이 홀로 만드십니다. 우리를 찾아오셔야 할 때, 우리를 만나셔야 할 때, 그렇게 그 분이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셔야 할 때면 손수 계단을 세우시고 우리를 만나십니다. 신앙이 물론 일방통행은 아닙니다. 그러나, 가장 필요한 순간에는 언제나 하나님으로부터 우리를 향한 일방통행이 됩니다. 그것이 가장 분명하게 나타나는 것은 우리가 처음 하나님을 믿게 되는 순간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가진 것이 아닙니다. 그 분이 믿도록 해 주신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하나님을 향해 죽어있던 우리의 영혼과 마음을 하나님을 향해 다시 살리시고 새롭게 하셔서 우리가 하나님을 믿지 않을 수 없게 만들어 주셨기 때문에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하나님과 원수되었을 때에, 진노의 자녀였을 때에 구원의 은혜는 바로 그 때 우리에게 찾아온 것입니다. 은혜의 이유는 결코 우리에게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 분의 자녀와 백성을 선택하셨기 때문에 주시는 선물입니다. 비록 우리는 그 분과의 언약을 깨뜨리고 무시했어도 결코 그러실 수 없는 하나님의 신실함 때문에 우리에게 값없이 부어지는 생명의 빗줄기, 그것이 바로 은혜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로 만드시기 위해 야곱을 선택하신 것은 그가 태중에서 만들어지기 이전이었습니다. 그것은 영원 전에 세우신 하나님의 계획 안에 들어있었던 것입니다. 그 날, 하나님은 야곱에게 바로 그것을 알게하려고 하셨던 것입니다. 은혜란 그런 것임을, 언약이란 그렇게 변함없는 것임을 말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아직 그것을 깨달을 만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땅에서 하늘로 이어진 사다리를 보고도, 거기 오르락 내리락 하는 천사들을 보고 그 꼭데기에 서서 야곱을 찾으시는 하나님을 보고서도, 그 분의 그렇게 일방적인 은혜의 약속을 듣고도 야곱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복을 주시고 지켜 주시며 다시 고향으로 무사히 돌아가게 해 주시면, 그제서야 자신이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삼을 것이며, 십일조를 드리겠다고 말합니다.
야곱이 하나님을 믿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지만, 야곱은 아직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신앙 속에는 여전히 자기 자신 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거래를 하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복을 주시고 보호자가 되어 주시면 하나님을 자기 하나님으로 인정할 것이며, 그래서 십일조를 드릴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제대로 모를 때, 우리의 신앙은 이렇게 조건부의 신앙이 되기 쉽습니다. 신앙을 거래처럼 이해하기 쉽습니다. 복을 받으려고 순종합니다. 복을 받으려고 기도합니다. 복을 받으려고 교회를 섬깁니다. 그렇게 내가 무언가를 한 결과가 나에게 , 눈에 보이는 복으로 주어지는 것과 비례해서만 더 열심히 신앙생활하고 더 열심히 교회를 섬깁니다. 만약 그 반대의 경우가 찾아오면 신앙은 후퇴하고 약해지기 시작합니다. 기도했는데, 순종했는데, 그렇게 열심히 섬겼는데 아무 것도 없으면, 오히려 삶이 꼬여가기만 한다면 오히려 신앙은 냉소적이고 기대감이 없는 신앙으로 변하고 맙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원하는 것을 주실 때는 나를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이시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 나와 상관없는 분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43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을 제자로 삼는 장면이 나옵니다. 참 은혜로운 장면입니다. 나다나엘은 빌립의 친구였습니다. 먼저 예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빌립은 나다나엘을 예수님께로 데리고 가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소개받은 나다나엘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겠느냐?" 그는 남의 말만 듣고 혹하는 인물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래도 강하게 권하는 친구의 권유를 뿌리치지 못한 나다나엘은 아마도 마지못해서 예수님께로 갔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빌립과 함께 오는 그를 보시고 예수님은 대뜸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극찬입니다.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간사함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정도의 칭찬이라면 요동할만도 한데, 역시 나다나엘은 예수님의 평가대로 였습니다. 그는 흔들림 없이 말합니다. "나를 어떻게 아십니까?" 이 말은 알리가 없다는 거죠. 처음 봤는데 어떻게 나에 대해서 그런 평가를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 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이 말씀은 나다나엘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빌립이 이 말씀에 예수님을 향해서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입니다."라고 고백한 것으로 봐서 무화과 나무 아래는 그 누구도 모르는 그의 은밀한 기도처였을 것입니다. 그는 항상 거기서 은밀하게 아무도 모르게 기도하곤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생전 처음 만나는 예수님이 바로 거기서 그를 보았다고 말씀하십니다. 빌립의 말이 확인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기에 덧붙여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무화과 나무 아래, 그 비밀한 기도처에서 보고 있었다고 말해서 그것에 놀라서 나를 믿느냐? 이것보다 더 놀라운 일을 보게 될 것이다. 진실로 진실로 말한다.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하나님은 아무도 없는 들판을 여행하는 야곱과 항상 함께 하셨던 것처럼 홀로 무화과 나무 아래서 이스라엘을 위해서 탄식하며 외롭게 기도하는 나다나엘과 항상 함께 하셨습니다. 야곱도 나다나엘도 그 사실을 몰랐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떠나신 적이 한순간도 없으셨습니다. 그들은 혼자인 줄 알았고, 하나님은 그저 저 멀리 하늘에서 팔짱끼고 지켜보고만 계시는 분으로 생각했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언제나 그들과 함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야곱을 이스라엘로 만들어 가셨던 것처럼, 나다나엘을 찾아와 "네가 참 이스라엘"이라고 불러주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내가 홀로 있을 때에도 하나님은 나와 함께 하신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말은 이미 말이 안되는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면 이미 나는 혼자가 아닙니다. 회원 여러분, 믿는 자들에게는 홀로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언제 어디서나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바라보시며 나를 붙들어 주십니다. 내가 그것을 알건 모르건, 느끼건 느끼지 못하건 주님은 항상 나와 함께 하십니다. 이것이 은혜의 특징입니다. 은혜는 우리 위에 항상 머물러 있습니다. 어느 순간에도 하나님의 백성을 떠나지 않습니다. 나다나엘은 주님의 말씀을 통해서 바로 그것을 깨닫고 주님을 향해서 그런 신앙고백을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나다나엘에게 한 가지 더 놀라운 약속을 주십니다. 그것은 그가 "하늘이 열리고 천사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는 약속이었습니다.
그 옛날 야곱을 찾아가시고 그를 끝내 이스라엘로 만드셨던 것처럼 하나님은 이번에는 나다나엘을 찾아가셔서 그를 "참 이스라엘"이라 부르십니다. 그리고 그 옛날 야곱에게 하늘과 땅을 잇는 계단을 보여주셨던 것처럼 그에게도 꼭 같은 광경을 보여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런데 그가 보게될 천사가 오르락 내리락 하는 계단, 그 위에 하나님께서 서 계시는 계단은 돌계단이 아니었습니다. 인자,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바로 그 계단이었습니다. 그 옛날 야곱이 광야에서 경험했던 일은 바로 이 일, 그러니까 "인자 위에 하나님의 사자가 오르락 내리락 할 일”의 예표였던 것입니다. 그 때 야곱이 본 하늘과 땅을 잇는 돌계단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늘과 땅을 이어주며,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지는 유일한 통로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미리 보여준 것이었습니다. 야곱이 그 그림자와 예표를 목격한 사람이었다면 나다나엘,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제 그 실체를 보게 될 참 이스라엘로 부름받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그 엄청난 일을 목격하고 그 약속을 받은 한 후에도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생각이 전혀 커지지 못했습니다. 여전히 자기 밖에 생각하지 못했고, 이전에 살아왔던 그대로의 방식대로 삶을 살아갔습니다. 그런 그의 삶은 엉망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때로 세상에서 내가 제일 똑똑한 줄 알지만, 그것은 나보다 더 똑똑한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만 그렇습니다. 나보다 한 수 높은 사람을 만나면 우리는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맙니다. 그 때 내 지혜는 무용지물이 되고 오히려 나를 가두는 올가미가 됩니다. 야곱은 자기 의 똑똑함만 믿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복을 움켜쥐려고 했지만 자기 삼촌 라반에게 속아넘어가고 맙니다. 아내를 얻을 때도 7년이라는 세월을 사기 당해야 했습니다. 라반이 이리 저리 말을 바꾸는 바람에 10번이나 그의 세경을 받지 못하고 허송세월했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도우심으로 삼촌의 손을 벗어나, 자기가 원하는 재산을 모아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했지만, 재산의 절반을 형에게 내어 주고서야 형의 호의를 얻어낼 수 있었고, 고향 브엘세바가 아닌 세겜 성 근처에 값을 치르고 불안한 정착지를 마련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어려움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외동 딸 레아가 동네에 놀러 나갔다가 겁탈을 당하게 되고 불의한 방법으로 그 원수를 갚으려 했던 아들들 때문에 그 지역 사람들 모두 원한을 사게 되었습니다. 형에게로 갈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거기 있을 처지도 아닙니다. 20년 넘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앞만 보고 달려간 삶이었지만, 그는 어디 한 곳 마음 편하게 머물 곳조차 없는 신세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때 하나님이 다시 야곱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이번에도 야곱은 기도 한 번 하지 않았고, 도와달라 애원한 번 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은 그에게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요구하셨습니다. "일어나라, 벧엘로 올라가서 네가 이전에 네 형을 피해 도망갈 때에 내가 나타났던 그 곳에 단을 쌓으라" 야곱은 식구들에게 명합니다. "너희 중에 모든 이방신상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케 하라 의복을 바꿔입으라. 우리가 벧엘로 올라가자. 내가 환란을 당할 때 나에게 응답하시며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단을 쌓을 것이다" 모든 가족들은 야곱의 명대로 합니다. 몸에서 모든 장신구를 제하고 이방신상을 야곱에게 주었고, 야곱은 그것을 세겜근처의 상수리 나무 아래에 묻은 후 벧엘로 갔습니다. 당시의 장신구는 단지 몸을 꾸미는 장식품이 아니라 신의 보호를 가져다 준다고 믿어지는 부적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이방의 장식품과 신상이 있었다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 뿐만 아니라 그 신들도 섬겼다는 것을 뜻합니다. 야곱은 그 때까지도 자신의 안전을 도울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붙드는 악한 습관을 버리지 못했고, 그렇게 하나님 아닌 다른 것으로 자신의 안전을 보장받으려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벧엘로 가는 과정에서 그들은 이상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벧엘로 가는 그들을 그 누구도 따라오거나 공격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적들을 두려움에 빠지게 했던 것입니다. 단을 쌓고 내려온 야곱에게 하나님은 다시 한 번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는 말씀하셨습니다. "네 이름이 야곱이다마는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 그리고는 다시 한 번 이전에 그의 조상들에게 주셨던 그 언약을 새롭게 해 주셨습니다. 야곱은 거기서 이스라엘로서 단을 쌓고 그곳을 정식으로 벧엘이라고 부릅니다.
야곱은 미리 알았어야 했습니다. 자신의 안전을 보장하는 것은 자기의 능력이나 노력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하나님의 언약의 복을 받기 위해서 자신이 할 일도, 할 수 있는 일도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처음 하나님께서 벧엘에서 나타나셨을 때 깨달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가 그것을 깨닫는데는 한 평생이 걸렸습니다. 그것도 아주 고생스럽고 고통스러운 한 평생이 걸렸습니다. 이스라엘이 40년 동안 광야를 돌아 제 자리에 와서야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처럼, 야곱은 그 먼 세월을 한 바퀴 돌아 다시 처음 하나님께서 자기를 찾아오셨던 그 곳으로 돌아와서야 자신과 함께 하신 하나님이 변함없이 신실하신 은혜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회원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구원을 받았습니까? 또 우리가 지금 누리는 은혜는 어떻게 받았습니까? 우리가 이 질문에 대해서 확실히 고백할 수 있는 것이 하나 있다면 그것을 위해서 우리가 한 일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일 것입니다. 광야에 아무런 생각없이 잠들어 있는 야곱을 찾아가셨던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에 대해서 감각도 생각도 없는, 하나님께 대해서 죽어있고 잠들어 있는 우리들을 친히 찾아오셨습니다. 그 옛날 하늘로 이어지는 계단을 만드시고 그 위에서 야곱을 만나시고 그에게 변함없는 언약을 새롭게 해 주셨던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하늘과 땅을 잇는 영원히 변함없고 든든한 하늘계단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당신의 그 신실한 사랑의 언약을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이루셨습니다. 그 날의 야곱처럼 우리도 그 계단에 돌맹이 하나 보탠 것이 없지만, 그리스도께서는 그 분의 모든 생명을 십자가에 내어 주심으로써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임하는 영원하고 부족함이 없는 돌계단이 되어주신 것입니다.
회원 여러분, 신앙은 공을 세우고 상을 받는 거래가 아닙니다. 일한 댓가로 삯을 받는 일꾼들의 노동도 아닙니다. 여러분 속에 조금이라도 그런 생각이 남아있다면 그 생각을 완전히 씻어 버리시기 바랍니다. 야곱의 장신구처럼 제해 버리시고 땅에 뭍어버리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신앙은 일한 것이 없이 의롭다 하심을 받는 자가 누리는 이해할 수 없는 복입니다. 없는 자를 있는 자처럼 부르시고, 죽은 자를 산 자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원수를 자녀가 되게하시고, 진노를 하늘 복으로 바꿔주시는 표현할 수 없는 은총입니다. 사다리를 놓는 것은 우리가 하는 일이 아닙니다. 사다리는 주님이 놓으십니다. 우리가 하늘로 올라가기 위해서 해야할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바벨탑을 쌓고 자기 이름을 내려는 사람들의 어리석고 교만한 노력으로 끝날 수 밖에 없습니다. 땅을 하늘에 닿게 하고 하늘의 은혜를 내려 보내시는 일은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우리는 그저 그 은혜를 은혜로 받기만 하면 됩니다. 이것이 신앙의 유일한 원리입니다. 이러한 신앙의 원리, 은혜의 원리는 예나 지금이나 단 한번도 변한 적이 없습니다. 야곱을 만나주실 때에도, 나다나엘을 부르실 때에도, 지금 우리에게도 이 원리는 항상 동일합니다. 그것이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세우신 영원한 신앙의 법칙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회원 여러분, 우리는 이미 인자 위에 천사가 오르락 내리락 거리는 것을 목격하는 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이미 하늘과 땅을 잊는 영원히 막히지 않고 무너지지 않는 하늘계단을 만들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잊게 되면 우리에게도 야곱과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신앙의 풍성함과 은혜를 누리지 못하고 자신이 은혜를 만들어 내려고, 자신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풍성함의 이유가 되려고 헛된 노력을 계속하게 됩니다. 그런 삶에는 복음은 사라지고 율법만이 지배할 뿐입니다. 그러면 신앙은 거래가 되고 노동이 됩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이미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는데, 그 만남을 찾아, 그 은혜를 찾아 끊임없이 피곤한 노력을 하는 그런 삶이 되고 맙니다. 브엘세바를 떠나 하란으로 돌아가는 그런 삶이 되고 맙니다.
우리가 은혜로 받는 것은 구원 뿐만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모든 좋은 것들은 모두가 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들입니다. 그 하늘계단을 통해서 하늘로 부터 끊임없이 부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 어떤 것 하나도 그렇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받을만 하기에, 우리가 그럴 자격이 있기에 우리에게 주어지는 은혜는 단 하나도 없습니다. 계단도 그 분이 만드시고, 그리로 천사가 오르락 내리락 하게 하시는 것도 그 분이십니다. 그렇게 인자가 되신 하나님, 그 분만이 신앙의 모든 것이 되시는 것입니다. 참된 복음에 이르려면 바로 이 사실을 진심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하며, 그것이 내 신앙의 유일한 원리가 되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신앙은 복음의 사건이 되고, 하늘의 복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은 벧엘에서 야곱을 다시 부르신 것처럼, 오늘 이 곳으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번 수련회에 이런 메시지를 전하게 하신 이유는 여러분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주시고자 하셨기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은혜는 반드시 은혜되어야 한다고, 신앙은 거래가 되고 노동이 되어서는 안되는 은혜의 사건이어야 한다고 다시 말씀해 주시려고 우리 모두를 이 자리에 모으셨다고 믿습니다. 오늘 함께 들은 이 메시지가 우리의 "벧엘"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찾아오시고, 먼저 만나주시고, 먼저 자녀삼으시며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심을 새롭게 알게 되는, 언제나 그렇게 은혜의 은혜됨을 회복시켜 주시는 두 번째 벧엘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이제 스스로 사다리를 만들려는, 계단에 돌을 더하려는 모든 헛되고 교만한 노력들을 모두 그만두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주시는 그 풍성한 안식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스스로 의를 쌓고, 받은 복의 이유가 되려는 그 무거운 멍에를 내려놓고 주님께서 주시는 쉽고 가벼운 멍에만 지시고 예수님을 따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은혜가 은혜되는 참된 복음에 이르게 하셔서, 복음만이 줄 수 있는 그 엄청난 하늘의 복과 자유를 누리는 성도들이 되게 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