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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교회 설교/설교듣기

2009.12.6. 1부 설교 - 1.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본문 : 창세기 221-18


      사람들은 종교간의 화해를 쉽게 말하지만, 사실 종교 사이의 화해는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충분히 성숙하지 못해서 그런다고만 생각하기 쉽지만, 섬기는 신이 다르다는 것은 사실은 극복하기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어떤 종교가 섬기는 신이 여러 신이 아니라 한 신이고, 세상에는 그 신 밖에 없다고 믿는 종교라면 그런 종교들 끼리는 결코 넘을 수 없는 벽이 있게 마련입니다. 이것은 마치 내 아버지가 두 분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여서 만약 그 벽을 넘으려면 그 종교의 그 종교됨을 포기할 수 밖에 없습니다. 기독교와 유대교, 그리고 회교가 바로 거기에 속하는 종교들입니다. 이 세 종교는 유일신을 믿는 신앙을 가장 강력하게 고집하고 있기 때문에 서로 화해하기가 그렇게 어려운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 종교가 그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모두 일치하게 자기 신앙의 선조로 생각하고 존중하는 인물이 하나 있습니다. 그가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아브라함입니다. 이런 어찌 보면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생겨난 이유는 유일신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라는 견지에서 볼 때, 그가 세 종교 모두의 실질적인 믿음의 조상이기 때문입니다. , 적어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믿음이라는 말의 구체적인 의미가 무엇이든 이 아브라함이 그 믿음을 지닌 최초의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유대교에게도 그렇지만 특별히 기독교에 있어서 아브라함은 그 위치가 엄청납니다. 성경이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말할 때, 가장 강력하게 증거로 내미는 사람이 바로 아브라함이고, 믿음의 행위인 순종을 이야기할 때도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아브라함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아브라함은 믿음이라는 것을 어떤 시각에서 보든지 명실상부한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릴만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본문을 통해 이런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해서 함께 생각하며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충분히 신뢰하지 못했을 때, 아브라함은 자신에게 아들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제멋대로 해석해서 하갈이라는 젊은 여자를 통해 이스마엘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한 집안에 약속의 자녀와 불순종의 자녀가 더 이상 함께 거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하고 아브라함은 뒤늦게 얻은 이삭만을 남기고 이스마엘을 광야로 내쫓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명령이었다고 하더라도 아브라함의 입장에서는 생떼같은 자식을 잃은 셈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마음이 편할 리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는 대뜸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라" 여기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뒤이어 들려오는 하나님의 말씀은 듣는 귀를 의심하게 할 정도의 이야기였습니다. "가서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비록 자기 마음대로 난 자식이었지만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을 잃은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찾아오신 하나님이라는 분이 하신다는 말씀이 이제 정말로 하나 남은 아들을 칼로 죽이고 불로 태워서 제사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그 아들이 얼마나 귀한 아들인지를 일깨워 주시기라도 하시듯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말입니다. 물론 이것은 실제로 그렇게 하는 것을 원해서 말씀하시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하필 그런 극단적인 방법으로 아브라함의 믿음을 알아보시려고 하셨다니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더 이해할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이 아닌 아브라함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그런 요구에 대한 아브라함의 반응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아브라함이 일찌기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사환과 그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의 자기에게 요구하시는 곳으로 가더니..." 무슨 이런 아버지가 다 있습니까? 두 아들 중에 하나를 잃은지 얼마 안되었는데, 그리고 이제는 그 남은 아들마저 자기 손으로 죽여야 하는데, 어떻게 이렇게 담담할 수가 있습니까? 물론 히브리서 11장을 보면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이삭을 통해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신다는 약속을 믿었고, 그래서 자신이 이삭을 죽여도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실 것을 믿었다고 그의 믿음에 대해서 증언하고 있지만, 여전히 아들을 자기 손으로 찌르고 그의 몸에 불을 질러야 하는 일은 그 자신이 몫입니다. 그런데, 어찌 반항도 해 보지 않고, 따져 보지도않고 그저 순순히 시키는 대로 할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저 묵묵히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합니다.

    아브라함이 살던 브엘세바에서 모리아 땅까지는 꼬박 이틀을 걸어야 했습니다. 영문도 모르는 채 아버지를 따라 오는 이삭을 보면서 아브라함은 어떤 생각을 하고 무슨 말을 할 수 있었을까요? 또 무슨 이야기를 한들 어린 이삭은 그 말을 이해할 리가 없습니다. 아마 그 이틀은 아브라함에게는 200, 2000년 만큼이나 길디 긴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지난 밤 내내 한 숨도 청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의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라고 그를 보챘지만, 그리고 그도 그래야만 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래도 아브라함은 다음 날이면 자기 손으로 아들을 찌르고 아들의 몸에 불을 질러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뜬 눈으로 밤을 지세운 아브라함은 다음 날 아침 그 누구보다도 일찍 텐트에서 나왔습니다. 그는 아직 태양도 떠오르지 않아 보이지 않는, 그러나 꼭 가야만 하는 그 산 위를 멍하니 보았습니다. 거기 하나님께서 계시다면 무언가 다른 말씀을 하시리라 기대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가 원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고 무심한 하나님은 아무 말씀도 없으셨습니다.

    그 날 아브라함은 종들은 남겨두고 아직 어린 이삭에게 장작을 지게하고 자신은 칼과 불을 든 채로 산을 올랐습니다. 이삭은 궁금한 것이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제사를 지낼 때면 아버지는 항상 무엇보다도 제물인 양에 신경을 많이 썼습니다. 그동안 곱디 곱게 기른 양을, 어디 흠이나 나지 않았는지 살폈고 가장 깨끗한 양을 제물로 택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집에서도 그냥 나오더니 산을 오르는 지금도 제물로 쓸 양 생각은 하나도 하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이삭은 묻습니다. "아버지, 불과 나무는 있는데 왜 양은 없어요?" 원래 자식들의 철없는 질문이 가장 아플 때가 많은 법입니다. 아브라함은 당황했습니다. 뭐라고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둘러 댑니다. ", 번제로 드릴 어린 양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해서 직접 준비하실 거야." 정말 그랬습니다. 제물은 이미 하나님께서 택하셨습니다. 이삭으로 말입니다. 제사드릴 곳에 도착해서 아버지가 하는 행동을 보고 이삭은 그제서야 상황을 파악했습니다. 자기가 제물이 되어야 하는 상황을 말입니다. 그런데, 이삭은 아무런 반항을 하지 않습니다. 소리쳐 울지도 않았습니다. 도망가지도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장작을 묶어온 밧줄로 자신을 꽁꽁 묶는 순간에도, 그렇게 묶은 자신을 돌제단 위 장작 위에 올려놓을 때도 이삭은 고분 고분 아버지를 따를 뿐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죽여 불에 태우려 합니다. 그런데, 아들은 아버지가 하는 대로 그대로 따릅니다. 부전자전인지 몰라도 우리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모습들입니다. 이제 아브라함은 칼을 들어 내리치려 합니다. 떨리는 칼이 정점에 이르렀습니다. 그 때 그의 머리 위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이제 급한 것은 아브라함이 아니라 하나님이셨습니다. 그 순간을 막지 못하면 이삭은 죽고 맙니다. 그리고 어쨋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의도와는 달리 정말로 아들을 죽인 아버지가 되고 맙니다. 아브라함은 칼을 내리고 그 부르심에 대답했습니다.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처음부터 이 일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려는 하나님의 시험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시험은 하나님이 아닌 아브라함을 위한 시험이었습니다. 스스로 자신의 믿음을 드러내게 하고 그 믿음을 칭찬해 주시려고 마련하신 아브라함을 위한 시험이었습니다. 비록 그 시험이 이렇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긴 했어도 아브라함은 그 일을 통해서 자기 속에 있는 믿음이 어떤 믿음인지 잘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으로 부터 그의 믿음에 대한 공인을 받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눈을 듭니다. 그리고는 수풀에 뿔이 걸려있는 수양 한 마리를 발견합니다. 그 순간 그의 아들을 향한 궁색한 대답, 양은 하나님께서 직접 준비하실거라던 그 가슴 찢어지는 대답은 하나님의 깊은 속마음을 알아차린 예언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양을 가져다가 아들 대신 올려놓고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리고는 그 곳의 지명을 "여호와 이레" 그러니까 "준비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 일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경구 하나를 만들어 냈습니다. 그것은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라는 믿음의 경구였습니다. 아브라함은 그렇게 최악의 시험을 거뜬하게 통과했습니다. 그 시험을 통과하면서 그는 스스로 자기 안에 있는 믿음을 볼 수 있었으며, 하나님으로 부터 자기 믿음의 진정성을 공인받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창세기 15장에서 아브라함은 이미 하나님의 불가능해 보이는 약속을 믿음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하심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22장에 와서는 그렇게 15장에서 씨앗으로 심겨졌던 믿음이 어떤 나무로 자라났는지를 증명해 냈습니다. 의롭게 여김을 받는 믿음이 그 사람을 어떻게 의롭게 만드는지를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아브라함은 그렇게 그 누구도 꺾거나 찍지 못할 믿음의 거목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이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써 시작된 그의 믿음은 그의 100세에 얻은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자기 손으로 제사드리려 할 정도의,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신뢰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이 말하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믿음이고 그 믿음에 관한 스토리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이야기 속에 숨겨져 있는 또 다른 이야기를 봅니다. 한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 속에 들어 있는 또다른 아버지와 그의 사랑하는 아들의 이야기 말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이야기가 하나님께서 들려주시고자 싶어하시는 진짜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바로 아버지 하나님과 그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 뒤에는 또다른 숨겨진 울림이 있습니다. "나도 나의 사랑하는 독자 예수 그리스도를 거기서 너희를 대신할 제물로 삼을 것이다"라는 울림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데리고 이틀을 걸어 모리아 땅, 그 아들을 제물로 바쳐야 할 곳까지 묵묵히 갈 수 밖에 없었던 것처럼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이 이 땅에 인간으로 나셔서 거칠디 거친 세상의 길을 33년동안 걸어 예루살렘 성 밖 골고다 언덕을 향해 걸어 가는 것을 묵묵히 지켜보셔야만 했습니다. 아니 일찍 일어난 아브라함이 제단을 세울 곳을 바라보았던 것 처럼 아버지 하나님의 눈길은 항상 그 곳 골고다에 고정되어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자신이 오를 장작을 지고 산을 오르는 이삭처럼 예수님은 자신이 달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향해 가셨습니다. 횃불과 칼을 들고 이삭을 뒤따르는 아브라함처럼 아버지 하나님은 골고다를 오르는 아들의 뒤를 묵묵히 뒤 따르셨습니다. 이삭은 우리 예수님을 정말 많이 닮아 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시면서도 도살장의 양처럼 아무 소리 내지 않으셨던 예수님처럼 장작 위의 이삭도 아무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길은 여기서 두 갈래로 나뉘어 집니다. 칼을 들어 아들을 내리치려는 아브라함을, 아버지 하나님은 급하디 급한 마음으로 말리셨습니다. 그렇게 아들 이삭은 다시 아버지의 품에 안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그 누구도 말려 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아들의 목숨을 거두시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 아들이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 고통까지 끝내실 때까지 아버지 하나님에게는 그 분을 말려 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손은 멈춰졌지만, 아버지 하나님은 우리들 때문에 결코 그러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기는 아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삭은 단 위에서 내려왔지만, 예수님은 그 영원한 제단, 십자가 위에서 그 목숨 끊어질 때까지 내려오실 수가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님께서 준비해 주신 제물이 있었고, 이삭에게는 자신을 대신할 양이 있었지만 예수님은 당신 스스로가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유일한 어린 양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분은 그래서 그렇게 끝까지 생명을 내어주시기까지 순종하셨던 것입니다.


      그 날의 모리아는 예루살렘이었습니다. 그 날의 그 언덕은 골고다였습니다. 그 날의 아브라함은 하나님이었고, 이삭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셨습니다. 그리고 그 날의 제단은 바로 십자가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얻은 한 사람의 순종의 이야기 속에 당신과 아들의 이야기, 그리고 그 이야기 속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을 고스란히 담아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생생하게 들려주고 계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얻은 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은 의는 결코 우리 힘이나 공로로 얻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무언가 하나님을 만족시킬만한 것이 있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납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의는 우리가 아직 죄인일 때에, 우리가 아직 하나님과 원수이고 그래서 그 분을 맹렬히 거부할 때에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그 선물이 우리에게는 공짜여도 하나님께도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그 분은 아들과 함께 골고다를 오르셨으며, 우리가 아닌 하나님이 직접 준비하신 어린 양,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제단 위에서 우리가 받아야 할 모든 저주를 뒤집어 쓰고 제물로 바쳐지는 것을 지켜보셔야만 했습니다. 그 귀한 외아들이 마지막 피 한 방울 흘릴 때까지 그저 묵묵히 지켜보고 계실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것만이 우리가 만들어 낼 수 없는 의를 우리에게 덧입혀 주시고 우리를 자녀로 삼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우리 힘으로 하나님 앞에 서고, 우리 힘으로 의롭다함을 얻으려면 사랑하는 아들을 내 손으로 죽인다 해도 불가능합니다. 본디 우리들의 더럽혀진 의는 인간에게 있는 그 무엇으로도 다시 깨끗하게 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을 때, 하나님은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셨습니다. 그것이 그의 의로움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시작된 믿음은 결국 그 고통과 슬픔을 삼켜 가면서 귀하디 귀한 아들도 아끼지 않고 하나님께 드리려 했던 믿음의 순종으로 이어졌습니다. 결코 그 반대는 아닙니다. 순종이 믿음으로 이어진 것이 아니라는 말씁입니다. 그가 믿음의 순종을 했기 때문에 의롭다고 여기심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저 한 일이 아무 것도 없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으로 시작된 그 믿음은 결국 그렇게 아들을 드리는 믿음으로 자라간 것입니다.

때로 우리가 무언가를 결정해야 하는 하나님의 테스트 앞에 놓일 때, 순종이냐 불순종이냐를 결정해야 하는 어려운 시험을 만날 때, 우리는 아브라함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의 믿음도 그러한 하나님의 테스트들을 통과하면서 비로서 성장하고 증명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의 믿음이 어떤지를 잘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시험은 그 분이 우리를 알고자 하는 시험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우리의 믿음의 현주소를 알게하는 시험입니다. 우리가 그 시험 앞에서 우리 안에 있는 믿음을 밖으로 드러낼 때, 우리를 칭찬해 주시고 인정해 주시며, 우리의 믿음을 더욱 든든하게 해 주시기 위해서 주시는 시험입니다. 시험이 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원한다고 해도 하나님의 테스트가 생략된 신앙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 시험을 통해 드러난 모습으로만 우리는 우리 자신의 믿음을 보며, 하나님의 인정해 주심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비록 우리가 아브라함처럼 그 믿음의 시험에 합격하고, 그래서, 하나님의 인정해 주시는 믿음을 가진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눈은 여전히 어린 양에 고정되어 있어야 합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외치는 세례 요한의 충고에 귀를 기울이며 수풀에 걸려있는 그 어린 양, 하나님께서 우리의 의를 위해 친히 준비해 놓으셨던 하나님의 어린 양, 십자가 위에 달리신 그 어린 양께 우리의 시선을 고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오늘 한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를 통해 들은 것은 단순히 한 위대한 신앙인의 일화가 아닙니다. 우리는 그 이야기를 통해 아버지 하나님과 그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 우리를 살리는 복음을 다시 들었습니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복음을 담는 그릇이 되어주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삶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 각자의 삶의 이야기 속에도 무언가가 담겨야 합니다. 우리가 원든 원치 않든 아무 것도 담지 않을 수 있는 삶이란 없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바로 그것을 보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 속에는 무엇이 담겨야 할까요? 하나님께서는 우리 삶의 크고 작은 이야기라는 그릇에 무엇을 담으시기를 원하실까요? 저는 오늘 본문을 묵상하면서 나의 삶도, 그리고 이 설교를 듣는 우리 성도들의 삶도 하나님께서 그렇게 사용하시는 도구가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야기를 통해 생생한 복음과 아버지의 마음을 보고 듣듯이 우리 삶의 작은 조각들을 통해 사람들이 복음을 들으며,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의로움을 발견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마음이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성도의 삶은 결코 개인의 삶이 아닙니다. 성도가 걸어가는 믿음의 길, 그리고 그 위에 남겨진 발자국들은 하나님께서 그 분의 복음을 담으시는 소중한 그릇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순종은 우리의 순종이 되는 동시에 그것을 보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은혜를 담는 그릇이 될 수도 있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게 하는 표지판이 되어 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 그릇 속에서 단 한 사람이라도 시원한 구원의 생수, 그들을 살리는 그 차디 찬 생명수를 마실 수만 있다면 얼마나 우리의 삶은 얼마나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삶이 되겠습니까?


아브라함의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그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받은 믿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을 가지고 그리스도처럼 하나님께 끝까지 순종했던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그의 삶의 작은 조각 속에 그 귀한 복음을 담아 두셨습니다. 그는 그렇게 믿음의 조상이 되었고 오늘 우리는 그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아들을 죽이는 순종을 보이더라도 결코 자기 힘으로는 의로워질 수 없는 절망적인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스스로 마련하신 어린 양을 발견하고 기뻐할 수 있음을 보게하는,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하고 외치게 하는 소망의 도구가 된 것입니다.


눈은 항상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신 어린 양의 십자가에 두시고 발로는 믿음의 길을 끝까지 걸어가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를 의롭게 해 주심을 믿으며, 그 분의 의지에 의지하여 작은 순종의 걸음을 계속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테스트를 통해 우리의 믿음을 증명해 보이며 이 길을 갈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도 아브라함의 삶처럼 영광스러운 당신의 도구로 사용해 주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이 시대의 아브라함을 닮은, 복음을 담는 그릇이 되게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