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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교회 설교/설교듣기

2010년 매일성경설교 16. 선한 말이 성취할 날이 이루리라

[사용법]

방문하시는 분 들 중에서 혹시라도 도움이 될까 적어봅니다. 

1. 읽기는 그냥 사이트에서 읽으시거나 마우스로 클릭하시면 다운로드 되는데, 그렇게 읽으시면 됩니다. 
2. 설교를 들으시려면 첨부되어 있는 mp3 파일을 위의 방법으로 다운로드 하셔서 들으시거나, 네번째 회색상자의 작은 화살표를 클릭하시면 들으실 수 있습니다. 단, 이 경우에는 중간에 스톱하시면 처음부터 다    시 시작합니다. 이 사이트의 서비스가 거기까지 밖에 안됩니다. 죄송합니다.
3. 다녀가실 때는 짧은 댓글 부탁드립니다. 예) 누구 누구 다녀갑니다. 
댓글은 저만 볼 수 있도록도 저장할 수 있습니다. 






본문 : 예레미야 33장 14-26절



서론 : 욥 이야기

고난하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욥입니다. 세상에 한 사람이 그렇게 엄청난 어려움들을 그렇게 갑작스럽게 그것도 한꺼번에 당한 사람이 또 있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사실 역설적이게도 욥기는 욥이 그런 극심한 고난과 고통 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성도들에게 큰 위로가 되고, 또한 욥이 그런 가운데서도 믿음으로 승리한 기록을 담고 있기 때문에 성도들에게 믿음과 용기를 불러 일으키기도 하는 두 가지의 유익을 줍니다. 욥은 하나님도 인정하실만큼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온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도 정결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지만 사람들을 돕고 사랑하는 일에서도 최선을 다하는 그야말로 균형잡힌 신앙의 본보기였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으로 부터 복도 많이 받았습니다. 양 칠천 마리, 낙타 삼천 마리, 소 천마리, 암나귀 오백 마리. 이것이 그의 재산이었고 그래서 그는 동방의 귀인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자녀도 많아서 아들이 일곱이었고 딸은 셋 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에게 말 그대로 아무 이유 없는 감당할 수 없는 만큼의 고난과 고통이 갑작스레 찾아옵니다. 

어느 날 자녀들이 장남의 집에서 파티를 하고 있을 때, 갑자기 스바 사람들이 쳐들어 와서 그들을 모두 쳐 죽입니다. 이것이 그가 처음 전해들은 비극이었습니다. 첫번째 종이 그 소식을 다 전하기도 전에 또 다른 종이 뛰어 옵니다. 그리고는 하늘에서 불이 떨어져서 양떼들과 종들을 모두 죽였다고 말합니다. 무슨 말인지 어안이 벙벙해 있을 때, 또 다른 종이 뛰어들어 옵니다. 그가 전한 소식은 갈대아 사람들이 습격해서 낙타를 모두 빼앗아 가고 함께 있었던 종들을 모두 죽였다는 것이었습니다. 연이어 뛰어 들어온 종이 전해 준 소식은 바람이 불어 텐트를 무너뜨리는 바람에 그 속에 있던 다른 자녀들이 모두 죽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모든 것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사라져 버리기 전에 영광스러웠던 만큼 사라져 버린 후의 허탈감과 슬픔은 더욱 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게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아직 마음도 수습하지 못한 그에게 극심한 피부병이 찾아왔고 기왓장으로 종기를 긁어 피를 내도 시원치 않을 정도로 가려움증이 심했습니다. 보다 못한 아내는 그에게 차라리 그렇게 만든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하고, 위로하겠다고 찾아온 친구들은 오히려 욥을 비난하기에 이릅니다. 상황도 사람들도 모두 욥의 편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행로를 걸어가면서 만약 이런 상황을 맞닥뜨린다면 그야 말로 이것은 믿음의 최대위기라고 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마음은 절망과 허탈감에 깊게 빠질 것이며 영혼은 하나님을 향한 원망과 불신앙으로 가득 채워져 가기가 쉬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는 욥처럼 특별한 사람이 아닌 우리는 그대로 무너져 버리고 말아야 할까요? 영적인 침체에 빠져서 자포자기해야 할까요? 아니죠. 그렇게 하면 안됩니다. 이것이 정답입니다. 그렇지만, 그 답을 우리의 삶으로 옮겨 놓기란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욥이 자신의 고난 앞에서 보인 반응이 정답이지만 그 정답을 따르기는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그 옛날의 이스라엘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당시 이스라엘의 상황이 꼭 욥의 상황과 비슷했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불신앙과 죄악 때문에 하나님께 징계를 받고 있다는 점에서는 욥과 달랐지만 겉으로 보이는 상황은 아주 비슷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복을 받고 있는 나라였고, 세계에서 유일하게 하나님을 섬기는, 성전을 가진 제사장 나라였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요, 그 분이 택한 나라인 그들의 자존심은 하늘을 찌를 듯했고, 그들은 하나님의 도성인 예루살렘과 하나님의 이름으로 불리우는 성전 만큼은 결코 망하거나 무너지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그런 믿음, 그런 자존심은 하루 아침에 박살이 나 버립니다. 나라를 빼앗긴 것은 물론이고 예루살렘 성벽은 무너지고 그 안의 모든 가옥들은 불에 타 없어졌으며, 성전은 약탈당해서 초토화되었습니다. 그 자존심 높던 예루살렘의 거민들은 마치 짐승처럼 취급받으면서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다. 북 이스라엘은 그렇다고 쳐도 남쪽 유다는 자신들만큼은 결코 그런 일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지만, 그러한 그들의 바램은 하나님께서 불게하신 바벨론이라는 강풍 앞에 마치 아침안개처럼 사라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완전한 절망과 좌절 속에 빠졌습니다. 하나님의 징계 앞에서 정신을 차리고 다시 제 자리로 돌아와 열심히 하나님을 섬겨야 했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자존심과 확신이 컸던 만큼 그게 무너져 내린 충격이 너무 컸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모이면 서로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나라를 버리셨다. 우리를 다스릴 다윗가문도 버리셨고, 제사를 지낼 레위족속들도 버리셨다. 우리는 이제 끝장나 버렸다.” 다윗가문과 레위족속은 하나님의 언약의 당사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네 집과 네 나라가 영영히 보전되고 네 위가 견고하리라”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레위족속에게는 “그들이 영영히 제사장이 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가문과 레위족속을 버리셨다는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그 언약을 깨뜨려버리셨다는 의미이고, 그 언약이 깨졌다는 것은 자신들은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는 뜻이 됩니다. 이것이 당시의 이스라엘이 가지고 있었던 자신들을 향한 생각이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과 예루살렘 성전에 닥친 일을 바라보면서 자신들이 이제는 하나님께 완전히 버림받아서 도저히 가망이 없어져 버렸다고 자포자기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을 이렇게 생각했던 것은 당사자들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그 모든 일들을 지켜보던 주변의 나라들도 이스라엘을 무시하면서 더 이상 하나의 나라로 인정하질 않았습니다. 주변의 나라도 “너희는 너희 신에게 완전히 버림받았다. 이제 너희는 더 이상 나라도 뭣도 아니다”라고 비아냥 거리면서 비난합니다. 상황적으로나 심적으로나 이스라엘은 더 이상 이스라엘이 아닌 버림받고 흩어져 버린 불쌍한 부랑민들이 되어 버렸던 것입니다. 


오늘의 우리들

제가 심방을 하다 보면, 크고 작은 고난을 믿음으로 잘 견디어 내고 계신 분들도 계시지만 그렇지 못한 분들도 계십니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제가 보기에는 정말 별것 아닌 어려움 앞에서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으시는 것 같다고, 아니 미워하시는 것 같다고 하면서 하나님께 불평을 늘어놓는 분들이 계십니다. 제가 보기에는 괜챦게 살고 계시는데도 하나님께서 자기에게는 물질을 주시지 않는다고 자신의 믿음생활에 대해서까지 회의하시는 분들도 더러 있습니다. 잘 달래고 격려한 후에 그 성도의 집을 나서기는 하지만 목사로서 참 석연치가 않습니다. 그래도 교회에서는 나름대로 열심도 있었고, 인정도 받으시는 분이신데도 그런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또 그런 심기를 그대로 드러내시니 도데체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하고 생각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만약 저런 분들에게 큰 어려움이 닥치면 정말 어떻게 견디어 내시나?’하는 걱정이 들기도 합니다. 

때로 우리는 우리가 견디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상황에 부딛히기도 하고, 사실은 별것 아니지만 우리를 낙심케 하고 뒤흔들어 놓는 크고 작은 장애물에 맞닥뜨리기도 합니다. 우리는 대개 그 일 자체를 문제의 전부로,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일들의 크기가 아닙니다. 사실 문제의 크기는 부차적입니다. 진짜 문제, 가장 중요한 문제는 그런 일들을 당할 때의 우리의 반응입니다. 우리가 믿는 자로서 그 일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대할 것인가? 더 믿음을 굳게 하고 인내할 것인가, 아니면 그 자리에서 실망하고 좌절해서 주저앉고 말 것인가? 그런 걱정거리들과 불만들이 자신과 신앙을 뒤흔들고 좌지우지 하도록 내버려 둘 것인가, 아니면 싸워 승리하겠다고 결정할 것인가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큰 어려움들이 별 것 아니라고 말씀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큰 어려움들과 큰 고통들은 우리를 참 아프고 힘들게 합니다. 그게 힘들지 않고 아프지 않다고 한다면 거짓말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도 우리가 그런 것들에게 보일 수 있는 반응이 딱 한 가지로 고정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믿지 않는다면 몰라도 믿는다면 우리에게는 그 고통과 어려움이 가져다 주는 절망과 좌절, 그리고 불평과 자포자기를 이겨낼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 방법은 결론부터, 그리고 가장 짧게 말씀드린다면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이 답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반응이 달라질 수 있고, 우리는 자포자기와 불평을 넘어서서 더 큰 소망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은 본문 말씀을 통해서 도대체 어떤 종류의 믿음이 그런 믿음인지를 살펴 보겠습니다. 


상황이 아니라 약속이다

상황은 너무 어렵습니다. 예루살렘성은 초토화 되었고, 성전은 무너졌습니다. 모두들 바벨론으로 잡혀갔습니다. 다윗 자손도 없어졌고, 레위인들도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그렇게 모든 것이 끝나버렸습니다. 주변의 나라들 앞에서 고개를 들 수 없습니다. 그들의 모욕 앞에서 그게 아니라고 항변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래서, 스스로도 포기해 버립니다. 그렇게 상황도 마음도 가능성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그러나, 그 때 그런 그들을 바라보시며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밤낮이 뒤바뀌고 섞일 수 있다면, 내가 정한 자연법칙이 뒤죽박죽이 되어 버릴 수 있다면, 내가 야곱과 내 종 다윗의 자손을 버려서 다시는 다윗의 자손 중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자손을 다스릴 자를 택하지 아니하리라 내가 그 포로된 자로 돌아오게 하고 그를 긍휼히 여기리라” 일어서야 할 당자사는 포기해 버립니다. 회복해 보려는 의지조차 갖지 못합니다. 이쯤 되면 하나님도 포기하실 것 같습니다. 이쯤되면 하나님도 돌아서실 듯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더 강하고 더 단호하게 언약을 이루고, 당신의 뜻을 이루시고 말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눈에 보이는 대로가 아닙니다. 단순히 지금 현재 모습의 못난 이스라엘, 스스로도 포기해서 가망이 없어져 버린 그런 이스라엘이 전부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지금의 이스라엘이기 이전에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후손들입니다. 그러니까 그들과 언약을 맺을 때 하나님께서 직접 거론하셨던 그 언약성취의 당사자들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오랜세월을 넘어서 이제 한 백성을 얻으셨고, 그들과 함께 하시는데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을 포기하시고 그들의 생각처럼 언약을 뒤집어 엎으실리가 없습니다. 비록 이스라엘은 스스로를 포기해도, 끝나버렸다고 절망에 빠져도 하나님은 그렇게 하실 수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을 살펴보면 24절을 가운데 놓고 앞뒤로 거의 똑같은 이야기가 반복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상황은 정말 나쁩니다. 절망적이고 포기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게 24절입니다. 그러나, 그 상황은, 그 절망과 자포자기는 하나님의 더 강한 언약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게 반복되는 말씀들입니다. 성도가 당하는 고난과 고통이 아무리 크고 그 속에서 느끼는 절망과 좌절이 아무리 크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 고난과 고통, 그리고 그 절망과 좌절은 항상 하나님의 약속 안에 있을 뿐입니다. 성도의 모든 삶과 그 속의 일들은 모두가 다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만 일어라는 일들입니다. 

때로 어려운 상황이 있고, 그것 때문에 절망할 수 밖에 없을지라도,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언약 안에 살고 있습니다. 상황들이란 것은 사실은, 우리가 못 알아차려서 그렇지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의 도구에 불과합니다. 설혹 그 상황이 언약이 이루어지는 것을 방해하려 들더라도 전능하신 하나님께는 그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어렵더라도, 실망스럽더라도 그 어떤 순간에도 나는 하나님의 언약 안에 머무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절망과 자포자기의 심정보다 훨씬 더 강력하고 거대한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고집이 언제나 나의 삶을 그 언약을 향해 움직여 가고 있음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왕과 제사장에 대한 두 가지 언약... 언약은 이루어졌다 

오늘 본문을 살펴보면 왕과 제사장에 대한 비슷하지만 또 다른 두 가지 언약이 나옵니다. 먼저 하나님께서는 다윗 가문의 통치자가 영원히 끊어지지 않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레위지파의 제사장들도 영원히 끊어지지 않게 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당시의 상황에서 이런 약속을 믿을 수 있느냐 없느냐는 별개의 문제로 하고, 이 약속이 과연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이루어졌는가 아닌가를 한 번 살펴 보겠습니다. 어떻습니까? 이루어 졌습니까? 이루어지지 않았습니까? 이루어졌습니다. 불완전하게지만 이루어지기는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하는 이방 왕의 마음을 강권적으로 움직이셔서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해방된 것입니다. 백성들은 본토로 돌아왔고, 성벽과 성전을 다시 세울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이스라엘은 다시 하나의 나라로 회복되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루어지지 않은 약속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왕과 제사장에 대한 약속입니다. 다윗의 후손 중에서 나와야 할, 영영히 끊어지지 않고 왕위를 이어가야 할 왕은 단 한 사람도 등장하지 않은 것입니다. 왕다운 왕은 수 백년 동안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사실 지금도 없습니다. 시드기야가 바벨론으로 잡혀 간 후, 다윗의 자손인 왕은 단 한 사람도 생겨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사실 제사장도 지금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2000년 동안의 방랑생활을 하는 동안 누가 레위지파인지가 불분명해졌기 때문에 엄밀하게 지금 레위인들, 그리고 그들 중에서 선택되는 제사장들은 이스라엘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두 가지 약속은 어떻게 된 것일까요? 한 가지만 그것도 부분적으로 이루어지고 나머지 하나는 폐기된 것일까요? 실패한 것일까요? 하나님은 그렇게 거짓말을 하시고, 그 약속을 어기신 것일까요? 아닙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다시 주신 언약 속에 나오는 “영영히”라는 단어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다윗가문의 왕도 영영히 끊어지지 않을 것이고 레위지파의 제사장도 영영히 끊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여기서 영원하다는 말은 끝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끝이 없기 때문에 사실 영원하다는 말은 인간에게는 해당되는 말이 아닙니다. 인간은 유한합니다. 그 인간의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길어도 시간은 시간일 뿐입니다. 개인의 삶도 인류의 역사도 끝나고 맙니다. 그래서 영원은 인간의 영역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왕과 제사장이 영영히 끊어지지 않는다”는 약속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결국 그 제사장과 왕은 인간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다윗 가문의 후손이기는 하지만 또 제사장이기는 하지만 단지 인간이어서는 안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이미 알다시피 그런 존재는 역사상 딱 하나만 있을 뿐입니다. 누구입니까? 바로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언약은 바로 그 분에게서 완전히 성취되었던 것입니다. 그저 사람의 눈으로 보이는 것만 보면 하나님의 언약은 믿을 수 없고 또 실패해 버린 듯이 보입니다. 역사 속에서 수없이 좌절되고 끊어 졌으며 심지어는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 같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회원 여러분, 영원한 언약은 그야말로 영원한 언약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시간 안에서 이루어 가시는 언약입니다. 끝난 것 같고, 실패한 듯이 보여도 다시 이어지기만 한다면 그 언약은 영원 안에서는 결코 끝난 것이 아닙니다. 실패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보이는 역사와 사람들만 바라보고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 분의 언약을 영원히 이루어 가고 계십니다. 

왕과 제사장에 대한 두번째 언약은 22절에 나옵니다. “하늘의 만상은 셀 수 없으며 바다의 모래는 측량할 수 없나니 내가 그와 같이 내 종 다윗의 자손과 나를 섬기는 레위인을 번성케 하리라” 같은 왕과 제사장에 대한 언약이지만 중심이 조금 다릅니다. 첫번째 언약이 그 언약의 영원함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면, 두번째 언약은 그 언약 성취의 혜택을 입을 당사자들의 숫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그 수가 조금 이상합니다. 그 수가 하늘의 별이 무수한 것처럼, 바다의 모래가 무수한 것처럼 많을 것이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어떻게 왕이 무수할 수가 있고, 제사장이 무수할 수가 있습니까? 왕과 제사장은 어느 사회에서나 소수만 필요합니다. 특히 왕은 한 사람 이상이 있으면 큰 일이 납니다. 그러니 이것은 단순히 이스라엘의 이야기가 아니라, 보이는 이스라엘과는 전혀 다른 사회의 이야기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만약 왕이 무수하고 제사장이 무수하려면 그 사회구성원 모두가 왕이고 모두가 제사장이 되어야만 합니다. 모든 백성이 왕이며 동시에 제사장인 나라, 그것도 무수한 백성으로 이루어진 나라여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이 나라는 어떤 나라이겠습니까? 베드로 전서 2장 9절에서는 신약교회의 모든 성도들을 “너는 택한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이라고 말합니다. “왕같은 제사장...” 이 말은 왕이면서 제사장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한 사람이 두 가지 신분을 모두 다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베드로 사도는 그게 바로 “너”라고 말합니다. “교회요 성도들”이라고 말합니다. 또 한 가지 “하늘의 별, 바다의 모래” 어디서 많이 보던 말들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주실 때 하신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그 언약이 수많은 굴곡을 지닌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진행되어져 오다가 구약의 이스라엘이 가장 큰 절망 가운데 있을 때, 다시 확인되고 이제 신약의 교회와 성도들에게서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회원 여러분, 하나님의 언약이 얼마나 놀라운지 아시겠습니까? 그 언약을 이루시는 하나님이 얼마나 놀라운 분이신지를 아시겠습니까? 하나님의 언약은 단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습니다. 인간의 불신앙과 불순종으로 방해를 받은 적은 있어도 포기된 적이나 중단된 적은 단 한번도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언약이 왜 그럴 수 밖에 없는 언약입니까? 하나님이 영원하신 분이시고, 그래서 그 분이 주신 언약도 영원한 언약이기 때문입니다. 그 분이 변하지 않는 한, 그 분의 언약도 변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분의 영원한 언약을 단 한 번도 변경시키지 않으시고, 수천년 역사 속에서 일관되게 이루어 오셨습니다. 아담에게, 노아에게,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그 언약을 그리스도를 통해 지금 그 분을 믿는 우리들에게서 이루고 계십니다. 그 언약성취의 당사자가 바로 저와 여러분입니다. 아니, 저와 여러분이 바로 그 언약의 성취입니다. 영영한 왕과 제사장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왔으며, 그를 통해서 무수한 왕들과 제사장들이 지금도 계속해서 더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의 시대가 얼마나 복된 시대입니까? 오늘 예수를 믿는 우리들은 얼마나 복된 사람들입니까? 구약의 그 수많은 믿음의 영웅들이 그토록 보기를 바라고 소망했지만, 그 좋은 믿음을 가지고도 끝내 보지 못했던 언약의 성취를 부족하기 그지 없는 우리들이 보고 있고 또 그 언약의 성취가 되어 있으니 말입니다. 우리가 언약성취의 증거인데, 내가 그 언약성취의 결과인데, 우리가 어찌 하나님의 언약을 의심할 수 있겠습니까? 성경에 나오는 아무리 불가능해 보이는, 현실과 맞지 않아 보이는 언약이라고 한들 어찌 믿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어찌 수천년이 걸려 우리를 언약의 성취자로 만드신 분이 어찌 크고 작은 은혜에 대한 언약을 깨뜨리고 어기실 수가 있고, 또 지키시는데 실패하실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불신앙일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선한 말”이다

오늘 본문을 시작하시면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보라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대하여 이른 선한 말이 성취할 날이 이르리라” 하나님은 여기서 당신의 언약들을 “선한 말”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신의 언약의 가장 큰 특징을 선한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면 여러분, 우리가 한 번 생각해 보아야할 것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본문의 약속만이 선한 것일까요? 예레미야에게 주신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약속만이 선한 것일까요? 성경의 나머지는 약속들은 하나님의 ‘선한 말’이 아닐까요?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언약들은 전부 다 그 분의 ‘선한 말’들 입니다.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다 그렇습니다. 모든 언약들이 그 분의 백성들의 참된 유익을 위해서 주어진 지극히 선한 것들입니다. 모든 언약이 그렇다는 것은 그 언약 속에서 이루어지는 우리 믿는 사람들의 삶은 선한 삶이 될 것이고, 또 선한 결과물들로 가득 차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렇지 않다는 결론은 얻을래야 얻을 수 없습니다. 

그 분의 약속이 선하고, 그 분이 그 선한 약속대로 우리의 삶을 이끌어 가신다면 결국 그 분 안에 머무는 우리의 우리 삶의 결론은 어떤 것이 되겠습니까? 지극히 선한 것이 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도박적으로 믿어야 할 가능성이 아니라 너무나 필연적인 결과입니다.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어야 할 사실, 그리고 우리의 삶을 세워야 할 기초가 바로 이것입니다. 때로는 징계로 때로는 고난으로 실망과 좌절에 빠질 수 밖에 없는 순간이 오더라도 믿음으로 이 사실, 이 선한 사실을 붙들 수 있다면 우리는 그 실망과 좌절을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그 모든 상황도 하나님의 선한 선물로 이해하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결론 : 여호와만이 우리의 의라고 외치자

회원 여러분, 믿음은 원래 보이지 않는 것을 확신하는 것이기 때문에 믿음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그 믿음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역사가 그 믿음은 좌절되지 않는다는 것을 증거하며, 우리의 지나온 과거가, 그리고 지금의 우리 자신이 그 믿음이 헛되지 않음을 증명해 주고 있지 않습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비록 우리의 불신앙과 불순종으로 믿음의 항로에서 이탈할 때도 있었고, 우리가 원치 않는 고난과 고통을 당한 적도 있지만 지금까지 우리 삶을 이끌어 오셨던 하나님께 단 한번이라도 실수가 있었습니까? 그 모든 것들 중에 선하지 않은 것이 있었습니까? 아닙니다. 여러분은 어떤지 몰라도 적어도 저에게는 아닙니다. 하나님은 완전하셨고, 저를 완전하게 이끌어 오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께서 앞으로도 저를 완전하게 이끌어 가실 것을 믿습니다. 

돌이켜 보면 지금까지 그러한 하나님을 의심한 손해와 해악은 제가 고스란히 당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모든 순간, 그 모든 상황 속에서 나를 완벽하게 인도해 가시는데, 제가 그 속에서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원망하고 좌절하며 분노하며 의심했기 때문에 그 선하신 은혜의 풍성함을 누리지 못하고, 그 속에서 든든히 거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결국은 믿음이 없어서 그 유익을 누리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제 더 이상 그렇게 바보같이 살지 않기로 했습니다. 더 이상 그렇게 답답하고 손해보는 인생을 살지 않기로 했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상황이 오기 전에 믿음을 준비하며, 또 그 믿음을 견지하며 살기로 했습니다. 하나님은 선하시며, 그래서 그 분의 약속도 지극히 선할 수 밖에 없다는 진리에 제 삶과 영혼의 하나 밖에 없는 닻을 내리고 살기로 했습니다. 이제 제 믿음은 잘 믿어지지도 않으면서 믿어야 한다고, 믿어야 한다고 스스로를 세뇌시키는 억지 믿음이 아닙니다. 그래도 허전하기만 한 그런 믿음이 아닙니다. 이제 저는 그저 믿습니다. 아니, 믿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진실로 믿으니 그 분의 약속과 그 분의 선하신 인도하심을 믿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평생 이 믿음을 공격하는 불신앙과 싸워야 한다는 또 하나의 과제를 받았지만 이 과제는 기쁘게 풀어나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나 하나의 문제를 풀 때마다 더 나은 믿음, 더 견고한 믿음에 이르게 될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저에게 언제나 그만큼 더 큰 유익을 가져다 줄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회원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이루어 오셨고, 또 이루어 가시는 그 언약을 바라보기를 원하십니다. 보이는 상황이 아니라, 닥쳐온 고통과 미래에 대한 불확실한 근심이 아니라 그 영원한 언약과 영원한 하나님을 바라보며 믿음의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힘으로 사는 것, 우리의 능력을 의지하는 것, 우리의 쌓아놓은 소유로 안전함을 얻으려 하는 것... 그것은 다 일시적이고 불완전합니다. 영원하지 못합니다.  언제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래서, 그것이 우리를 안전하게 하지 못하며, 우리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그런 것에 기대려는 것은 하나님이 아닌 우리 자신을 구원으로 삼고 자신의 의로 여기려는 시도입니다. 그래서 불신앙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구원, 우리의 영원한 산성은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그 분만이 영원하고 그래서 흔들리지 않으며 변함없으시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런 하나님을 믿는 것이 신앙이며, 그 분의 약속에 의지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 우리를 만드셨을 때부터 우리를 ‘여호와만이 우리의 의다’라고 외치며 찬양하는 족속으로 선택하셨고, 지금도 그렇게 만들어 가고 계십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여호와만이 우리의 의시다’라고 외칠 때, 그 사실에 참으로 기뻐하며 그 분만을 의지하게 될 때, 우리는 우리 믿음의 풍성하고 든든한 유익을 누리게 될 것이고 그 분은 그 믿음을 통해 가장 큰 영광을 얻으실 것입니다. 


이제 지금의 상황과 미래의 근심이 아닌 하나님의 언약, 그 변함없는 약속을 바라 보십시오. 우리를 영원히 선대하시겠다는, 나의 삶을 최고로 선한 삶으로 만드시겠다는 그 약속에 여러분의 믿음을 붙들어 매시기 바랍니다. 이미 이루어진 가장 큰 언약의 증인이여, 그 성취의 당사자로서 항상 “여호와 우리의 의”라고 기쁘게 외치는, 그 든든한 성 안에 영원히 거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