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문하시는 분 들 중에서 혹시라도 도움이 될까 적어봅니다.
1. 읽기는 그냥 사이트에서 읽으시거나 마우스로 클릭하시면 다운로드 되는데, 그렇게 읽으시면 됩니다.
2. 설교를 들으시려면 첨부되어 있는 mp3 파일을 위의 방법으로 다운로드 하셔서 들으시거나, 네번째 회색상자의 작은 화살표를 클릭하시면 들으실 수 있습니다. 단, 이 경우에는 중간에 스톱하시면 처음부터 다 시 시작합니다. 이 사이트의 서비스가 거기까지 밖에 안됩니다.
3. 다녀가실 때는 짧은 댓글 부탁드립니다. 예) 누구 누구 다녀갑니다. 댓글은 저만 볼 수 있도록도 저장할 수 있습니다.
본문 : 예레미야 46장 1-11절
서론 : 하나님을 아는 지식
신앙생활을 오래하게 되면 신앙에 대해서, 하나님에 대해서, 교회에 대해서 아는 것이 늘어나고 쌓여가게 됩니다. 특히 우리 신앙의 대상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이 듣고 또 알게 되는 것은 아무래도 하나님에 대한 것일 것입니다. 그 분의 성품이 어떻고, 그 분의 능력이 어떻고, 그 분은 어떤 방식으로 일하시는 분이시고... 설교나 성경공부를 통해서 배우게 되는 하나님에 대한 내용들은 반복되고 또 반복되면서 우리의 마음과 머리 속에 자연스럽게 쌓이게 됩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많이 아는 것은 너무나 좋은 것입니다. 그 내용들이 제대로 된 것이기만 하다면 그런 내용들이 건강한 신앙의 기초와 안전망이 되어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내용들을 많이 알고 또 다양하게 알고 있는 것과 그것을 진실로 믿고 그 믿음에 의지해서 살아가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흔히들 성경이 이야기하는 하나님에 대해서 내가 그렇다고 인정하고 동의하며 거부감을 갖지 않으면 그것을 성경의 하나님을 믿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진실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런 동의함과는 전혀 다릅니다. 야고보서 2장 19절을 보면 그것이 명확하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야고보는 전혀 아무런 믿음의 행함이 없이 자신의 믿음을 진짜 믿음이라고 여기고 있었던 일단의 사람들을 향해서 이렇게 외칩니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 하는도다” 이제부터가 중요합니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너무 충격적인 말입니다. 야고보는 하나님이 누구이시며 어떤 분이시라는 사실은 사탄도 안다고 하지 않고 믿는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런 하나님을 두려워한다고 말합니다. 사탄에게 물어보면 하나님이 없다고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에 여러 신이 있다고 대답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 분이 세상의 주인이시라는 사실을 부인할까요? 그것도 아닙니다. 이런 점에서는 성도들이나 사탄이나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그런데 사탄이 하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잘 알고 인정하지만, 그 지식을 통해서 그 분을 의지하고 그 분의 뜻대로 살아가는 일은 절대로 하지 못합니다. 그게 진짜로 믿는 성도와 사탄이 가지고 있는 믿음의 차이입니다. 진짜 성도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의 삶을 맡기자만 사탄은 그렇지 않습니다. 알고 인정하고 떨지만 결코 자신을 하나님께 맡기지 않습니다.
진짜 성도는 하나님을 알고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그렇게 알고 있는 하나님께 자신의 삶을 온전히 의탁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그가 하나님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들과 인정하고 있는 내용들이 무엇이건 간에 그것이 바로 그의 삶의 기초요 반석이 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곧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되고, 그 믿음은 다시 하나님을 향한 굳건한 확신과 의지가 됩니다. 성도가 만족을 누리고 흔들리지 않는 안전감을 누릴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가 아는 바로 그 하나님이 늘 그와 함께 있음을 확신하며, 거기에 기대어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 때 유다에게,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오늘 말씀은 하나님께서 열국의 운명에 대해서 하신 말씀 중에서 애굽에 대한 첫 부분입니다. 오늘 본문부터 시작해서 주욱 이어지는 하나님의 말씀들 속에서 우리가 만나게 되는 ‘열국들’은 당시 유다가 살던 세계의 전부를 의미했습니다. 다른 나라들은 있어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나라들은 유다가 전혀 신경쓰지 않아도 될 나라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본문의 열국은 요즘 우리식으로 하면 ‘전세계’라고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유다의 선지자인 예레미야에게 당시의 유다백성이 살았던 세계 전부에 대해서 자신이 그 모든 나라들을 어떻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는 다른 나라들은 듣지 못할 것입니다. 들려진다고 하더라도 결코 들으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프리카에 사는 한 목사에게 아시아의 모든 나라들의 운명에 대해서 이야기하신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그 목사는 아시아의 언어 중 단 한 나라의 언어도 알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다른 나라의 말을 아는 것도 아닙니다. 그는 전하고 싶어도 전할 수 없습니다. 또 전한다고 해도 그 아프리카에 사는 무명의 목사의 이야기를 심각하게 듣고 받아들일 나라는 하나도 없습니다. 결국 그 목사가 자기가 하나님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전할 사람들도, 또 그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는 사람들도, 그리고 그 이야기를 믿어줄 사람들도 그 사람들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그 목사는 자기 동족들에게 그 이야기를 전합니다. 이 때 듣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그들이 아시아 여러 나라들의 운명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아는 지식 자체가 아닙니다. 만약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임에 틀림없다면 그 사람들이 그 운명을 알든 알지 못하든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져 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 이야기는 결국 누구를 위한 이야기가 됩니까? 누구 들으라고 주신 말씀이 됩니까? 바로 그 목사가 사는 나라의 성도들입니다. 그래서 그 목사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여야 할 사람들은, 그 안에서 무언가를 배워야 할 사람들은 전혀 엉뚱한 아프리카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거나 혹은 설교를 들을 때 중요한 것은 그 행위 자체가 아닙니다. 만약 성경을 읽거나 들으면서 그저 일반적인 이야기를 듣는다고 생각하거나 혹은 어떤 지식을 얻기 위해서 듣는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말씀을 잘못들어도 크게 잘못 듣는 것입니다. 어찌보면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어 보일수도 있는 그 말씀 속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들려주시는 숨겨진 교훈과 약속을 듣는 것이 그 이야기를 진짜 듣는 것이고, 또 가장 잘 듣는 것입니다. 성경에 대해서 오해하시면 안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성경적인 지식을 주거나 혹은 일반적인 삶의 지혜를 알려주기 위해서 쓰여진 책이 아닙니다. 그저 어떤 객관적인 사실을 설명해 주기 위해서 쓰여진 책도 아닙니다. 만약 그런 입장에서 성경을 대한다면 그는 성경의 진짜 유익을 전혀 누리지 못할 것입니다. 성경의 모든 말씀은, 그것이 우리와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그 이야기들일지라도, 그것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한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빚어가고 그래서 하나님의 일에 가장 적합한 사람들로 만들어 가기 위해서 주신 말씀들입니다. 또 믿음을 주시기 위해서 주신 말씀들입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여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라”라고, “그 배운 바의 확실함을 알게하려 함이라”고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첫번째 메시지는 바로 이 말씀이 열국에게, 정확하게는 열국에 대해서 하신 말씀이라는데서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하나님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우리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께서 ‘열국’ 그러니까 ‘온 세상’을 향해 말씀하고 계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은 놀랍게도 내가 그 열국을 내 뜻대로, 내 맘대로 하겠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무언가를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으려면 두 가지를 모두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는 그것에 대한 소유권이고 하나는 그것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능력입니다. 둘 중의 하나라도 없다면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처음 등장하는 나라는 이집트입니다. 이집트라면 당시 바벨론과 함께 그 지역의 패권을 다투는 초강대국이었습니다. 요즘으로 하면 꼭 미국같은 나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나라를 완전히 초토화시키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마치 한 사람 대하듯 대하시면서 그 모든 운명이 자신의 손에 달려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당시의 유대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보호하고 지켜주시기에도 벅찬 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들여 바벨론에게 항복하여 하나님의 회복시켜주심을 기다리는 대신에 이집트의 힘을 빌어서 안전을 꾀하고 스스로 서 보려고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이집트를 초토화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완전히 회복불능상태로 만들어 버리시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것도 주변의 다른 나라들과 함께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하셨다는 것은 그 분이 이집트를 포함한 그 모든 나라들의 주인이시며 그 모든 나라들을 마음대로 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뜻이 됩니다. 그 말씀이 거짓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회원 여러분, 우리가 믿는 하나님, 내가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분은 어떤 분이십니까? 오늘 본문은 그 분에 대해서 우리에게 무엇을 알려줍니까? 하나님은 모든 나라의 주인이십니다. 미국과 중국의 주인이십니다. 우리나라의 주인이시고 북한의 주인이십니다. 오바마도 후진타오나 김정일도 자기 마음대로 하실 수 있는 온 세상, 그리고 온 우주의 주관자이십니다. 그 나라들의 정치도 경제도 당신의 마음대로 움직여 가시는 분이십니다. 그 분의 영향력을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세상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우리가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하나님에 관한 진리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렇다면 말입니다. 우리가 이 진리를 진실로 믿는다면, 믿고 살아간다면 우리의 삶은 어떤 삶이 될까요? 온 우주의 주인이신 분이, 온 나라들의 왕이신 분이, 그 나라들을 매순간 순간 자신의 뜻 가운데 다스려 가시는 분이 그 크시고 놀라운 분이 그 전능한 팔로 나를 항상 붙들고 계시며, 그 무한한 지혜로 지금 이 순간에도 내 편을 들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고 살아간다면 지금 나의 삶은 어떻게 달라질까요? 그래도 내 삶이 실패한 인생이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에 빠져 있게 될까요? 내 삶의 필요들이 공급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집착과 욕심속에서 살아가게 될까요? 패배주의나 피해의식에 젖어서 항상 불평과 불만을 음식으로 삼으며 이리 저리 휘둘리는 삶을 살아가게 될까요? 자꾸 하나님 아닌 다른 것에 의지하며, 그것이 주는 일시적이고 불만스런 만족, 더 목마르게 하는 해갈을 추구하며 살아가게 될까요? 아닙니다. 절대로 그럴 수가 없습니다. 만약 내가 믿는 하나님이 모든 나라의 주인, 온 세상의 역사의 주관자이심을 진실로 믿는다면 우리의 삶은 그 사실을 믿지 않을 때와는 절대로 같을래야 같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다리가 하나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리 튼튼해 보이는 다리는 아니었지만 실은 자동차가 지나가도 충분히 버틸 수 있는 다리입니다. 그 다리를 건너 본 동네 사람도 그렇게 이야기 해 주었습니다. 함께 여행하던 두 사람이 모두 그 다리를 통해서 건너편으로 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건너 갔고 한 사람은 가지 못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그 다리를 향한 두 사람의 믿음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은 그 다리가 충분히 튼튼하다고 믿었고 한 사람은 믿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아주 적절한 비유는 아닐지 모르지만, 우리의 믿음생활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이라는 다리는 항상 우리 앞에 있습니다. 그 다리 건너편에는 우리가 꼭 가야만 하는 정말 안전하고 풍성하며 견고한 땅이 있습니다. 그런데, 모두가 다 그 다리를 건너지는 못합니다. 그 다리를 믿는 믿음에 자신의 삶을 맡기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 다리 건너에 있는 그 믿음의 부요한 세상을 알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그의 믿음의 여행은 믿음의 더 크고 풍성한 세상을 알지 못하고 항상 그 다리 앞에서만 머뭇거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비극이고 안타까움이며 우리가 불신앙이라고 부르는 것의 진짜 정체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항상 그 분을 향한 든든한 신뢰로 이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안다고 하면서도 그에 걸맞는 믿음을 가지지 못한다면 진짜로 알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이야기하는 하나님에 관한 진리는 단지 객관적인 사실이 아니라 항상 우리의 삶에 구체적인 영향을 미칠 수 밖에 없는, 살아계신 하나님에 관한 변함없는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내 영혼의 구원자이시며, 우리가 섬겨야 할 한 분 하나님이라는 사실은 믿습니다. 그 분이 전지하시고 전능하신 분이시라는 것도 믿는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사실을 나의 구체적인 삶과 연관짓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그게 도대체 이렇게 고달프고 치열한 현실 속에서 나의 믿음을 공격하는 걱정과 근심, 두려움과 유혹과 싸우며 살아가는 나와 어떤 상관이 있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고, 그 사실이 주는 은혜를 누리지 못하는 경우는 더 많습니다.
회원 여러분,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에 대한 설명들이 다 진리이심을 믿으십니까? 그러면 진리란 무엇입니까? 무엇을 보고 진리라고 부릅니까? 진리란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가능성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진리란 어느 순간에도 결코 변하지 않는 불변의 사실을 말합니다. 내 상황이 어떻고, 내가 느끼는 감정이 어떠하든지, 내 예측과 생각이 어떠하든지 상관없이 언제나 변함없는 사실, 세상이 무너져도 변하지 않는 진실, 이것을 일컬어 진리라고 말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들이 진리라는 말은 우리가 그 사실을 믿고 그것에 우리의 삶을 완전히 의지해서 살아가도 절대로 속거나 실망하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진리를 믿는 믿음이란 바로 이것을 믿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의 믿음이 여기에 이르지 못한다면 그런 믿음은 결코 우리를 견고하게 떠받쳐주지 못합니다. 그렇지 않은 믿음은 계속해서 그리고 한결같이 하나님을 의지하게 해 주지 못하고 우리를 믿음으로 살게하지 못합니다. 우리를 흔들리는 조각배같이 만듭니다. 그래서 진실로 우리를 구원하는 믿음이 될 수 없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못합니다. 그것은 그 하나님을 나의 공급자요 보호자가 되어주기에도 충분치 못한 형편없는 분으로 여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가진 것들 때문에 자신을 믿지 말라
이집트는 최강대국이었습니다. 주변에는 결코 대적할 나라가 없었습니다. 심지어는 바벨론도 함부로 넘볼 수 있는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나라의 부유함에 걸맞게 그들에게는 엄청난 군사력도 있었습니다. 당시로서는 최첨단, 최강이라고 할 수 있는 무적 전차부대가 있었고 그 뿐 아니라 구스, 붓, 루딤이라는 막강하고 어마어마한 용병부대들도 그들을 돕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만만했습니다. 그 어떤 나라와도 싸워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사실 그렇게 자신만만할만 했습니다. 뭐하나 부족한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계산해 넣지 못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운명을 이렇게도 저렇게도 바꿀 수 있는 가장 큰 변수를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 변수는 바로 하나님이었습니다.
사실 그들은 가장 풍요로운 땅에서 자기 신을 섬기며 떵떵거리고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볼래야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죄가 죄가 아닌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그들의 교만은 여전히 교만이었습니다. 교만 중에서 가장 위험한 교만이 바로 교만해질만한 이유가 있어서 생겨나는 교만입니다. 그 교만은 근거있는 교만,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교만이기 때문에 그 스스로도 그것을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교만이 교만이 아닌 것은 아닙니다. 허세가 아니어서 그렇지 교만은 여전히 교만이고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가장 싫어하십니다. 교만이라고 해서 꼭 남들 앞에서 내가 가진 것을 자랑하고 내 능력을 드러내며, 그래서 다른 사람이 나를 인정하게 만드는 것만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아닌 다른 것에서 만족을 찾고 안전을 찾으며, 그것에 의지하는 것도 교만입니다. 자신이 가진 것과 능력을 자신을 부풀리는 도구로 삼거나 혹은 의지처로 삼는 것은 하나님으로 불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것과 그래서 하나님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집트는 허세를 떨지 않았습니다. 가질만큼 가졌고 힘도 셀만큼 셌기 때문에 그들은 그럴 자격이 있었습니다. 사람들도 그것을 교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런 그들에게 기대어 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는 전혀 달랐습니다. 하나님보시기에 그것은 이미 극에 달해서 도저히 손을 보지 않고는 내버려 둘 수 없는 교만이었습니다. 때로 우리는 남들보다 똑똑할 수도 있고, 가진 것이 많을 수도 있으며, 여러 모로 능력 면에서도 뛰어날 수 있습니다. 내가 아니면 내 남편이, 가족이나 내 자녀가 그럴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자랑이라기 보다는 그저 사실을 말하는 것으로 여겨질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교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내용이 사실일지라도 교만은 교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는 지금 그것으로 만족하고 있으며, 그래서 하나님이 아닌 그런 것들에 의지해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그런 식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저런 좋은 것들을 덧붙여 주시는 것은 너무 선하고 감사한 일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그렇게 우리에게 덧붙여진 것들을 우리 자신의 힘으로 얻은 것으로 착각하고 그것 때문에 스스로 만족하고, 스스로 충분한 상태에 빠져서는 안됩니다. 그럴 때, 그 좋은 복은 오히려 교만의 이유가 되어 버릴 수 있습니다. 그대신 우리는 그 좋은 것들을 우리에게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소극적으로는 그 분께 감사드려야 하고, 적극적으로는 그렇기 때문에 더욱 더 그 분을 의지하고 그 분으로만 만족할 수 있는 참된 믿음의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 분을 더 사랑하고 더 사모하게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나를 믿고 나로 만족하며 내가 가진 것과 나의 능력에 의지하는 교만에 빠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결론 : 열국의 하나님을 기뻐하라
오늘 본문에서 만나는 우리 하나님은 열국의 주인이십니다. 모든 왕의 왕이시며, 모든 우주의 섭리자이십니다. 아무리 강한 나라도, 아무리 막강한 권력자라도 마음대로 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현실도 모두 손에 쥐고 계신 분이십니다. 경제도 정치도 다 그 분의 마음대로 입니다. 회원 여러분, 이 사실이, 이 진리가 그 분을 믿는 우리에게 얼마나 은혜로운 것입니까? 얼마나 우리를 든든하게 하고 또 얼마나 우리를 안전하게 합니까? 그 크신 분이, 그 능하신 분이, 그 놀라우신 분이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시며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의 삶과 영혼을 붙들고 인도하시고 섭리해 가고 계신다는 이 흔들리지 않는 현실은 우리를 얼마나 견고하고 풍성하게 합니까? 이런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 되어주심이 얼마나 기쁘고 즐겁습니까? 그 안에서 우리는 얼마나 넉넉합니까? 혹시 이것이 아직도 막연하기만 하십니까? 이 사실이 정치적 현실과 경제적 어려움보다도 작게 느껴질만큼 이 진리가 아직도 여러분의 속사람을 전혀 강건케 하지 못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믿음의 복을 주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이 진리가 우리 모두의 일상을 떠받치는 흔들림 없는 기둥으로 믿어지게 하시고, 그래서 여러분의 영혼을 강건하고 풍성하며 안전하게 하는 진리가 되는 그런 복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회원 여러분, 우리가 이 진리를 참으로 믿게 된다면, 그래서 이 사실에 우리의 삶을 맡긴다면 우리는 더 이상 내가 가진 것으로 자랑하지 않아도 되게 될 것입니다. 그것에 의지하고 그것에 집착하면서도 여전히 허전하고 불안해 하는 삶도 벗어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더 이상 의지해서는 안될 애굽에 의지해서 살아가면서 양심의 가책을 받는 신앙생활을 하지 않아도 될 것이고, 자신으로 만족하려는 터진 웅덩이를 파는 수고를 그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열국을 다스시시는, 온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진실로, 진실로 믿는 믿음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을 믿고 넉넉히 이기며 살아가는 복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 더 이상 궁핍하지 않고, 더 이상 비굴하지 않으며, 미래를 불안하지 않은 삶이 되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교만도 넉넉히 이기는 신앙이 되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애굽을 논하시는 하나님”을 진실로 믿고 의지하며 살게 하시는 가장 크고 견고한 기쁨을 허락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하나님께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을 진실로 믿게 해 달라고
- 내가 아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나를 하나님께 더 의지하게 하고 하나님으로 만족하게 하는 이유가 되게 해 달라고.
- 이제 만군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심을 믿으며, 그 믿음에 의지해서 든든하고 만족하며 평안한 삶을 살게 해 달라고. 눈에 보이는 현실보다 하나님이 더 크고 강하신 분이심을 온전히 믿고 의지하게 해 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