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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교회 설교/설교듣기

2010년 매일성경설교 25.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사용법]


방문하시는 중에서 혹시라도 도움이 될까 적어봅니다


1. 읽기는 그냥 사이트에서 읽으시거나 마우스로 클릭하시면 다운로드 되는데, 그렇게 읽으시면 됩니다

2. 설교를 들으시려면 첨부되어 있는 mp3파일(zip파일)을 위의 방법으로 다운로드 하셔서 들으시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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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다녀가실 때는 짧은 댓글 부탁드립니다. ) 누구 누구 다녀갑니다. 댓글은 저만 있도록도 저장할      있습니다







본문 : 로마서 1장 16-17절



서론 : 바울은 왜 로마서를 쓰게 되었는가?

바울은 단 한번도 로마에 간 적이 없었습니다. 그 로마에 있는 로마교회에 들르거나 그 교회를 가르친 적도 없었습니다. 그런만큼 바울은 로마나 로마교회와는 개인적인 관계나 친분이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로마에 가고 그래서 로마 교회에 들르기를 간절하게 원했습니다. 로마로 가려는 그의 노력이 번번히 실패했지만 계속 노력하고 또 노력했을만큼 그의 그런 바램은 크고 절실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시간은 흐르고 아마도 로마로 갈 가능성은 그만큼 더 불분명해졌던 것 같습니다. 로마서는 그래서 쓰여진 서신서였습니다. 꼭 가고 싶은데, 꼭 가야하는데 갈 수 없어서 자신이 직접 가는 대신 적어보낸 편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왜 그렇게 로마에 가기를 원했는가? 그 첫번째 이유는 로마교회를 선교거점으로 삼아서 로마의 서쪽 지역을 선교하려는 이유도 있었지만, 그에게는 더 긴급하고 중요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1장 11절을 보면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 함이니” 바울이 로마에 있는 교회에 가기를 그렇게 소원했던 이유는 그들에게 신령한 은사, 그러니까 어떤 “영적인 선물”을 나눠주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15절을 보면 이 신령한 은사, 그러니까 영적인 선물이란 바로 복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함으로써 그들도 열매를 맺게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바울이 불신자들이 아닌 로마 교회에 복음을 전하려고 간절하게 원했다는 사실에 우리의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여러분, 로마 교회의 성도들은 이미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그런 로마의 교회에 복음을 전하기를 그렇게 원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바울이 확신하기는 그 어떤 것보다도 로마 교회는 복음을 다시, 그리고 제대로 들어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것은 그들이 복음에 대해 전혀 몰랐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이미 그들은 복음을 통해서 예수를 믿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그들은 복음에 대한 초보적인 지식 밖에 가지고 있지 않았고, 바로 이것은 교회 안에 많은 문제들을 만들어 내고 있었으며, 그들에게서 믿음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일을 방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로마 교회는 복음을 듣고 구원을 얻었지만, 그 복음을 또 다시 그리고 더 온전하게 깊이있게 들어야만 했습니다. 그들이 아는 복음만으로는 그들이 온전한 성도로 성장해 가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만한 열매를 맺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복음은 그저 처음 예수믿고 구원얻을 때만 필요한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서 인간으로 오셨으며 또 돌아가셨고, 부활승천하셨는데, 이것을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내용이 복음의 전부인 줄 압니다. 물론 이것이 복음의 기둥인 것만은 사실이지만 복음이 가지는 내용의 전부가 아닙니다. 거기에는 왜 복음이 복음인지, 그 복음이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지, 왜 복음이 아니면 절대로 안되는지에 대한 내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그런 식으로 이해하고 믿는데서 그친다면 그 사람은 결코 복음에 합당한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신앙이 깊이있게 성장해 갈 수 없습니다. 저는 이것이 현대 교회의 성도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의 가장 심각하고 본질적인 문제가 아닌가 합니다. 분명히 교회는 다닙니다. 오랫동안 신앙생활은 해 왔습니다. 그래서 믿음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그 수많은 세월동안 그는 진지하게, 정말 진지하게 복음을 대한 적이 없으며, 또 배우고 묵상한 적이 없습니다. 복음 자체에 무릎을 꿇은 적이 없고, 복음 자체의 풍성함에 빠져본 적이 없으며, 그 복음 때문에 진실로 감사하고 만족해 본 경험이 없습니다. 그저 간간히 설교를 통해 들려오는 단편적인 것들만 접했을 뿐입니다. 마치 바울이 바라본 로마 교회의 성도들과 같은 모습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와 성도 모두의 책임입니다. 교회는 복음의 복음됨을 자세히 가르치려 들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도는 그런 것들보다는 오히려 느껴지고 만져지는 감각적인 복에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현실에서 써 먹을 수 있는 비결들에 더 매력을 느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처음 예수를 믿는 순간, 구원을 얻게 되는 순간에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일생을 두고 거듭 거듭 들어야 하며 배우고 묵상하며 연구하는 일을 통해서 더 깊이 있게, 그리고 더 온전하게 알아가야 합니다. 또한 복음을 알아가는 일에는 끝도 없고 한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무한한 지혜와 무한한 사랑에서 유래한 십자가 복음의 무한한 풍성함은 결코 그 밑바닥을 드러내는 경우가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한 사람의 신앙의 진정한 깊이는 바로 이 십자가의 복음을 얼마나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것에 얼마나 자신의 신앙을 단단히 붙들어 매놓고 있는가에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바울이 로마의 성도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여러분이 이 복음을 제대로 알고 믿는데 항상 진전이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그 무한한 십자가 복음의 은혜에 젖어 항상 감격과 감사 속에서 그 복음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살아있고 행복한 성도들로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왜 하나님의 영광인가? 

오늘 제가 여러분에게 전하려고 하는 진리에 대한 설명이 여러분에게는 생소하고 복잡하게 여겨질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 믿는데 저런 게 뭐가 필요한가 하고 느껴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관심을 끌지 못할 수도 있지만, 그래서 여러분에게 귀를 기울여 달라고, 복잡하고 어렵게 느껴지더라도 이해해 보려고 노력해 달라고 부탁드립니다. 오늘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분명히 엄청나게 재미없을 것입니다. 설교라기 보다는 딱딱하고 졸린 신학강의처럼 느껴지시기가 쉬울 것입니다. 새벽부터 교회를 섬기시다가 오신 분들에게는 거의 고문처럼 여겨질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럴 줄 알고도 무식하고 용감하게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더라도 끝까지 이를 악물고라도 들어보십시오. 이해하려고 애써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한번으로 이해되지 않으신다면 반복해서 읽고 들으셔서라도 꼭 그렇게 해 주시기를 감히 부탁드립니다. 여러분이 오늘 말씀을 이해하고 소화하며 여러분의 신앙의 내용으로 받아들인다면 이것이 여러분의 신앙을 많이 유익하게 해 줄 것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의 내용과 이유가 되어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기독교의 신앙, 그리고 복음을 이해하려면 왜 하나님의 영광이 그렇게 중요한가를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과는 달리 기독교의 중심은 우리의 구원이 아닙니다. 예수믿는 일도 아닙니다. 기독교의 중심에는 이런 것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만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셨는지 모르지만 저는 예수를 믿고 진지하게 신앙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아주 이상하고 이해할 수 없는 점을 하나 발견한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고, 하나님께서는 그 영광을 받으셔야만 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하나님께서는 그 영광을 받기를 즐거워하시고 기뻐하시는 분이시라는 점이었습니다. 외람되지만 저는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렇다면 하나님은 참 유치하고 교만한 분이시다. 겨우 피조물들의 칭찬을 듣고 기뻐하신다니, 그것을 우리에게 요구하신다니 참 이해할 수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 사람들 중에서도 조금 칭찬해 주면 좋아서 헤벌쭉 웃는 사람을 우리는 가볍고 유치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성경은 사람이 칭찬받기를 좋아하면 그는 교만한 사람이라고 말하는데 하나님은 우리의 찬양을 기뻐하시는 분이시라니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무엇이든 이유를 제대로 알고 또 내용을 이해한 후에 하는 것이 훨씬 좋습니다. 그렇게 이해하고 동의한 후에 하는 일이라야 억지가 되지 않고 당연히 기쁨가운데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도 그렇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받아야만 하는지, 그리고 왜 그 분은 영광받으시기를 그렇게 기뻐하시는지를 이해한 후에라야 그것은 너무 당연한 것이 되고, 내가 기쁘게 할 수 있는 일이 됩니다. 


먼저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인지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누리는 영예, 그 분께만 어울리는 영예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다는 것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눈에 보이게 드러나는 것을 말하고,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할 때는 바로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에 걸맞는 가치로 그 분을 인정하고 대접해 드린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지난 주에 반복해서 말씀드린 것처럼 그 분은 전능하신 분이시고, 전지하신 분이시며, 영원한 분이십니다. 만유의 창조주시며 소유주이시며, 모든 생명의 근원이 되시며, 모든 존재하는 것들의 기반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그 분께는 악이 없으시며, 사랑 그 자체이고 진리 그 자체이시며 모든 선한 것과 아름다움의 원천이십니다. 말로 형용할 수 없이 보배로운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이런 분이기에 이 세상에 그 분보다 가치있는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합당한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이런 분으로 받아들여지며 또 이런 분으로 대우받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마땅히 그런 영광을 받으실 자격이 있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은 그렇게 영광받으시는 것을 즐거워하고 원하시며 기뻐하신다고 말씀합니다. 얼핏 유치하고 교만하게 여겨지는 이런 하나님의 성품은 실은 절대로 그렇지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영광을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스스로 그렇게 높여지시는 것 자체를 즐기신다기 보다는 하나님께서 그런 영광을 받으시게 되는 그런 상태야 말로 모든 것이 가장 완전해 지는 기초가 되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에는 질서가 있게 마련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이 존재하고 움직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질서란 기본적으로 차례를 의미합니다. 이것을 가치와 연결해서 생각해 보면 가치가 크고 높은 것일수록 앞에 놓여지고 그렇지 않은 것일수록 그 뒤에 놓여질 때, 그렇게 가치에 따라 차례가 어그러짐이 없이 정해지고 인정될 때 그것을 온전한 질서라고 부를 수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렇다면, 최고의 가치가 있는 대상이 무엇입니까? 무엇이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고 그 가치에 알맞는 대접을 받아야 합니까?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무한한 가치를 지니신 하나님, 무한히 아름다우신 하나님은 무한히 높여지고 무한히 영광을 받으셔야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은 만물의 질서의 첫 단추입니다. 그 분이 그 분의 자리에서, 그에 걸맞는 대접을 받지 않으신다면 그 뒤의 질서는 모두 엉망이 되고 맙니다. 모든 선함, 모든 가치, 모든 아름다움은 뒤엉켜버리고 맙니다.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가치체계와 질서의 혼란은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리에 계시면서 그에 걸맞는 대접을 받지 못하고 계시기 때문에 생겨난 것들입니다. 첫 단추가 잘못 끼어졌기 때문에 생겨난 일들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자리에서 그 분의 가치만큼의 가치로움을 인정받기 시작할 때, 모든 것은 비로소 자기 자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자기 자리로 돌아갈 가능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바로 이런 일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받으실 때 일어나기 때문에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광받으심을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것입니다 .

그리고 또한 하나님께서 영광을 취하시는 일을 기뻐하신다고 해도 아무런 문제가 되질 않습니다. 그런 너무 당연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완전한 이성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그렇다는 것은 그 분의 가치판단에는 틀림이 없다는 뜻이 됩니다. 그런 이성을 가지신 하나님께서 무엇을 보시는 것이 가장 기쁘실까요? 어떤 모습이 그 분을 가장 만족하게 할까요? 바로 최고의 가치를 지닌 것이 최고의 자리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는 일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이 바로 그런 분이십니다. 그러니 그 분이 자신의 영광을 기뻐하고 찬양받기를 즐겨하시는 것은 전혀 유치하거나 교만한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지극히 정상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

바울은 로마에 복음을 전하기를 원했습니다. 그것은 그가 전혀 복음에 대해서 부끄러워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자랑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그가 바로 그 복음만이 모든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전에 자신의 구원에 필요한 의를 의를 스스로 세워보려고 정말 말 그대로 인생전부를 투자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그런 노력 끝에 도달한 결론은 자신의 의로는 결코 구원을 얻을만한 자격을 얻을 수 없다는 것과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지는 하나님의 의만이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능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말 성경으로는 16절과 17절이 전혀 연결이 없는 두개의 문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원문에서 보면 16절 마지막 문장의 이유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 있기 때문에 복음이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는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복음에는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 있습니다. 그래서 복음이 복음이 될 수 있고, 사람을 구원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의가 드러나지 않았다면 복음은 우리를 구원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중요해지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라는 말입니다. 이 말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의”라는 단어의 기본적인 뜻은 올바름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의”라는 말은 “하나님의 올바름, 하나님의 옳으심”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복음에는 하나님의 올바름이 드러나있다는 것입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올바르심을 드러내는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께 가장 올바른 것은 무엇일까요? 어떤 것이 하나님 자신에게 가장 올바른 상태일까요? 앞에서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서 말씀드린 부분으로 돌아가 생각해 본다면 하나님께서 가장 옳다고 여기시는 것, 바르다고 생각하시는 것, 그래서 가장 기뻐하시고 즐거워 하시는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하나님으로 인정받으시고 그에 합당한 대접받는 것”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하나님에게만 합당한 최고의 영광을 누리시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있다는 말은 결국 복음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장 크고 명확하게 드러낸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쉬운 말을 놓아두고 하나님의 의라는 어려운 말을 사용했느냐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이 질문에 답하려면 구약으로 넘어갔다 와야 합니다. 이 ‘하나님 의’혹은 ‘의로우신 하나님’이라는 말이 실은 구약에 반복해서 나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성도들은 하나님께 구원과 도움을 청할 때, 하나님을 의의 하나님이라 부르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자신을 구원해 달라고 호소했습니다. 그러니까 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구원하셔야 하고 도와주셔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두 사람이 약속을 했다면 무엇이 옳은 것입니까? 그 약속을 끝까지 지키는 것입니다. 그것이 옳은 것입니다. 구약의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언약을 지킴으로써 자신의 언약에 대한 올바름을 드러내시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그렇게 당당하게 기도했던 것입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라는 말을 사용한 이유는 그 말이야 말로 복음이 바로 그러한 언약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한 성취라는 사실과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장 잘 드러낸다는 사실을 가장 잘 표현하는 말이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의 수신자가 유대인이거나 혹은 유대교를 믿다가 예수님을 믿게 된 로마인이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그들은 이미 ‘하나님의 의’라는 말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오늘 이 말을 대하는 우리는 이 말의 진짜 의미를 잘 몰라도 그들은 이 말을 너무 잘 이해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은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시키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가장 풍성하고도 온전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복음을 듣게 되면 택함받은 자들은 예수를 믿게 되고, 그 예수님을 통해서 다시 하나님을 믿게 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받아들이고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복음을 통해 성도들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대접해 드리는 자리, 하나님께 합당한 영광을 돌려드리는 자리로 회복되는 것입니다. 원래 인간은 자신의 의지와 인격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유일한 피조물이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죄인이 된 후에는 엄밀한 의미에서 이 땅 위에는 그렇게 할 피조물이 없어지게 된 것입니다. 복음은 바로 이 유일하지만 망가져 버린 피조물을 새롭게 고쳐서 하나님께 최고의 영광을 돌리는 자신의 자리로 되돌려 보내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가장 빛나게 드러내고 증거하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을 통해서이다. 

이제 우리가 마지막으로 살펴보아야 할 내용은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는 부분과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는 부분입니다. 얼핏보면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는 말은 마치 미완성인 믿음을 완전한 믿음이 되게 한다거나 아니면 어떤 믿음을 다른 믿음이 되게 한다는 말처럼 여겨지지만, 이것은 실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17절을 원래의 의미를 살려서 다시 해석해 본다면 “복음 안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는데 그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을 통해서다”라는 의미가 됩니다. 그러니까 복음이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는 일은 철저히 믿음 안에서만 이루어진다는 뜻이 됩니다. 이것은 16절의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는 말고 일맥상통합니다. 복음은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는 능력이 됩니다. 그리고 바로 그 복음 안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의가 드러나게 됩니다. 공통적으로 나오는 단어가 바로 믿음이라는 단어입니다. 성경에서 믿음이라는 단어는 ‘일’ 혹은 ‘공로’나 ‘행위’라는 말과 대조하기 위해서 일부러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이라는 말이 쓰일 때면 언제나 그것은 “행위가 아니라, 일이 아니라, 공로가 아니다”라는 의미로 그 일에 있어서 인간적인 조건과 공로를 배제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믿음을 말할 때면 거의 언제나 은혜라는 말을 함께 쓰고 있기도 합니다. 사람이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은 철저히 하나님의 은혜지만 그렇다고 아무 것도 없는 진공상태에서 구원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필요하다는 것, 그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손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행위가 아닙니다. 일도 아니고 공로도 아닙니다. 그래서 믿음은 그 어떤 것보다도 은혜가 은혜라는 것을 명확하게 드러냅니다. 믿음은 구원이 인간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며 철저한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진 것임을 가장 겸손하게 인정하게 됩니다. 구원에 관한 한 하나님이 모든 것이 되시고 모든 것을 하셨음을 인정하는 역할을 믿음이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역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은 그래서 이런 뜻이 됩니다.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람은 언제나 그 겸손한 믿음 가운데 머물러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결코 자기 자랑을 하지 않으며 자기 공로를 내세우지 않으며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며 그렇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자기 자리에 머물며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복음이 회복해 준 자리를 지키며 살아간다는 의미가 됩니다. 


결론 :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 있습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회복하여 그 분께서 합당한 영광을 받으시게 하는 유일하고도 능력있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일차적으로 우리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복음을 믿으려면 그리고 하나님을 믿으려면 무엇보다도 이것을 이해해야만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믿을 때 받는 구원은 바로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그 아름답고도 온전한 예전의 상태를 회복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맺으셨던 태초의 연약관계 안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그것 때문에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우리에게 주셨던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우리의 유익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럴 때, 우리가 그 자리로 돌아가서 살아갈 때 그것은 우리에게 무한하고도 영원한 유익을 가져다 줍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만족과 기쁨이 우리의 것이 됩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모두 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리에 계시기 때문에, 우리 삶에서 그 놀라운 회복이 일어났기 때문에 우리에게 주어지는 선물들입니다. 

우리가 복음 안에서 가장 먼저 보아야 할 것은 우리의 유익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이며 그 분의 영광입니다. 이제 우리는 복음 안에서 만물의 첫 단추가 무엇인지 보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 첫 단추, 그 외의 모든 것을 제 자리에 있게 하며, 가장 풍성하게 하는 그 첫 단추를 제자리에 끼우는 일을 우리의 소명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 분을 영광스럽게 해 드리는 것을 우리의 업으로 삼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회원 여러분, 우리는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로 말미암아 의인이 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없이 믿음 안에서 살아가야만 하는 사람들입니다. 믿음은 겸손입니다.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인정하는 겸손함이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은 만족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과 이루시겠다고 말씀하신 약속에 대한 만족입니다. 다른 것으로 자신을 채우고 만족시킬 필요가 없게 하는 만족이 바로 믿음입니다. 그리고 복음을 믿는 믿음 안에 있는 이 겸손과 만족이 우리를 열매맺게 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게 합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삽니다. 의인이 살아가는 방법은 믿음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믿음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며 자신을 가장 온전한 제 자리에 머물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이제 믿음 안에서 하나님께 합당한 영광을 돌려드리는 복음이 가져다 준 지극히 복된 삶을 사시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