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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매일성경설교 7. 씨뿌리는 비유를 들으라

본문 : 마태복음 13장 18-23절



지난 주일에 우리는 우리가 많은 열매를 맺는 좋은 땅이 되기 위해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성경을 통해 살펴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과 삶이 좋은 땅이 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다름아닌 두려움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들려지는 진리가 자신의 속사람과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패턴을 바꿀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그 두려움이 우리의 마음과 인생을 길가로, 돌밭으로, 그리고 가시떨기 밭으로, 그런 황폐한 땅으로 만들어 버린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이 말씀 속에서 우리를 위한 아주 귀한 교훈을 얻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과 삶을 많은 열매를 맺는 좋은 땅으로 만들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다름아니라 그 두려움과 싸우려는 의지이며 싸워서 몰아내려는 결단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누구에게나 두려움은 있습니다. 짧은 시간 동안은 전혀 두려움 없이 살 수도 있겠지만, 언제나 그 어떤 두려움도 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언제나 변하고 불안정하며 그 안에서 이루어 지는 우리의 삶도 꼭 같이 불안정하고 보장이 없기 때문입니다. 없을 때는 없어서 불안하지만 있을 때는 없어지고 빼앗길까봐 두렵습니다. 두려움은 항상 우리 주변을 맴돕니다. 이런 두려움은 현실이라는 그럴듯한 가면을 쓰고 우리와 섞여서 당연한 듯 함께 살아가려 하지만, 우리가 그런 것을 허용했다가는 결국은 그 두려움에 휘둘리고 맙니다. 현실 때문에 그 어떤 가치있고 의미있는 헌신도 하지 못하는 두려움에 꽁꽁 묶인 삶을 살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두려움과 함께 살아가려고 해서는 안되고, 그 두려움들과 싸우려는 의지를 가져야 하고 하나 하나 내어 쫓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마음과 삶은 결국 그런 두려움들로 인해서 망가져 버린 쓸모 없는 땅으로 남아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두려움은 있을 수 밖에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철저히 인식할 때 두려움과 싸울 수 있는 첫번째 교두보가 마련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오늘 본문에서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 대해서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해 주십니다. 제자들이 그 비유에 대해서 알고자 했고, 주님께 물었고, 주님은 그것을 아주 귀하게 보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런즉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들으라”라는 말로 설명을 시작하셨습니다. “들으라!”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을 잘 들어야 합니다. 진짜로 들어야 합니다. 제가 어떤 아이에게 “야, 너는 참 말을 잘 듣는구나.”라고 칭찬했다면 그건 어떤 의미이겠습니까? 첫번째는 다른 생각하지 않고 이야기하는 저에게 집중하며 귀를 기울여 경청했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제 목소리를 들었다고 제가 그런 칭찬을 한 것은 아닙니다. 두번째는 그렇게 경청한 결과 그 아이가 제 이야기를 잘 이해했다는 뜻일 것입니다. 첫번째는 소리를 들었다면, 두번째는 그 소리의 의미를 알아들은 것이죠. 그렇지만, 제가 그 아이를 칭찬한 것은 그 아이의 이해력에 대한 칭찬이 아닙니다. 저에게 “어른 말을 잘 듣는다”는 칭찬을 받으려면 그 다음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있는데, 실제로 “말을 잘 듣는다”는 말은 바로 이런 의미로 상요합니다. 아시다시피 그것은 그 아이가 “내 말을 그대로 따랐다”는 의미입니다. 만약 심부름을 시켰다면 그 아이는 그 심부름을 잘했을 것이고, 제가 그 아이의 잘못을 지적했다면 그 아이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고쳤을 것입니다. 무엇을 달라고 했다면 그 아이는 제게 그것을 주었을 것입니다. 저는 바로 그런 마지막 행동을 보고 “야, 너는 참 말을 잘 듣는구나”라는 칭찬을 하게 된 것이고 말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들으라”고 요구하거나 혹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고 표현할 때, 그 듣는다는 말의 의미는 바로 그런 의미를 가집니다. 성경은 단순히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라고 하거나 그것을 지식적으로 이해하는 것을 보고 “듣는다”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물론 성경의 듣는다는 말 속에는 그런 의미도 포함되어 있지만 그건 출발점입니다. 거기서 더 나아가 그렇게 귀 기울이고 이해한 것에 자신의 삶의 방향을 맞추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 성경은 그렇게 하지 않은 사람에게 결코 “잘 듣는다”는 칭찬을 해 주지 않습니다. 주님이 이미 비유에 대한 대략의 설명을 하신 후에 다시 그 설명을 풀어 주시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제자들이 그 비유를 바로 그런 의미에서 잘 듣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제자들이 1+1=2라는 것을 배웠으면, 진짜 시험문제에 나왔을 때도 항상 2라는 답을 적을 수 있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아무나 천국의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에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운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가에 뿌리운 자요” 이것이 첫번째 땅, 길가에 대한 주님의 설명이었습니다. 심방을 다니다 보면 아파트 단지 내에서 원래는 길이 아니었는데, 길이 된 곳을 보게 될 때가 있습니다. 처음부터 길로 닦여진 것이 아니라 이 사람, 저 사람 다니다 보니 분명히 주변은 모두 잔디밭인데 유독 그 곳만 반질반질한 흙길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길가는 지금은 길이지만 그렇다고 그 곳이 처음부터 길이 되기로 정해져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길가는 원래는 밭이었지만 사람들에게 밟혀서 길이 되어버린 곳입니다.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사람들이 자신을 밟고 다니도록 방치하였기 때문에 길가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과 삶이 길 가와 같아지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저 사람들이 마음대로 밟고 다니도록 방치해 두었더니 어느 순간엔가 단단하고 반질반질한 길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변해야 한다는 말을 들으면 단지 착해지고 선해져야 한다고만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물론 예수를 믿으면서 그렇게 되어야 하고 사실 그렇게 되는 것만도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착해지는 것만으로는 너무 부족합니다. 착하다는 것은 판단의 기준이 없는 말이고 기준이 없다는 것은 언제든지 이 쪽이나 저 쪽으로 기울기 쉽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어디까지가 착한 것이고, 또 어디서 부터는 악한 것입니까? 그리고, 한 사람 안에는 얼마나 많은 착한 부분과 얼마나 많은 악한 부분이 섞여 있습니까? 또한 우리가 선해진다고 한들 얼마나 선해질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 속 사람의 착함에 꼭 더해져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생각의 거듭남입니다. 성경적인 사고방식과 기준에 따라서 우리의 생각하는 방식과 기준의 틀을 다시 짜고, 비록 마음이 조금 덜 착해졌다고 하더라도 항상 그 기준에 따라 생각하고 판단하며, 행동하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저는 단순히 마음이 착해지는 것보다 이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믿습니다. 참된 기준과 사고방식을 마련하고 계속해서 그것을 가꾸고 견고하게 만들어 가는 것, 그것이 우리의 거듭남을 더욱 견고하게 하고 흔들림 없이 만들어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그랬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의 마음과 생각이 밟히지 말아야 할 것들에게 밟히기가 얼마나 쉬운지 모릅니다. 수없이 쏟아지는 이런 저런 지식들과 확실한 근거도 없는 사고방식들, 상식이라는 이름으로 다가오는 수많은 세속적인 가치관들... 이런 것들은 저마다 그러지 않으면 안된다, 따르지 않으며 안된다는 말로 주장되고 들려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그냥 내버려 두면 이런 것들에 밟히고 또 밟힐 수 밖에 없습니다. 문제는 그렇게 계속 밟히면서 단단해 지고, 단단해지면 씨앗이 뿌려져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런 땅에 씨앗, 그러니까 복음과 진리가 뿌려진다면 새, 그러니까 악한 자가 빼앗아 버린다고 말씀하십니다. 진리가 귀한 줄 모르고 그 속에 참 생명이 있다는 것 조차 알지 못하니 그 땅은 점점 더 딱딱해 지고 매말라 버린 길가가 되어버리고 맙니다. 주님은 그런 길가에 씨앗이 뿌려지면 악한 자가 와서 그 씨앗을 빼앗는다고 말합니다. 진리를 완전히 빼앗겨 버린 삶, 그래서 진리와 전혀 상관없는 삶을 생각해 보십시오. 날이 가면 갈수록 더욱 단단해져만 가는 마음과 생각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것이 얼마나 가치없고 의미없는 것이 되겠습니까? 아얘 진리나 가치로운 삶에 대해서 아무런 관심이 없다면 좋은데, 그러한 살고 싶어하면서도 항상 진리를 빼앗겨 버린다면 그 삶이 얼마나 비참하고 허전하겠습니까?  

사랑하는 회원 여러분, 혹시 우리의 생각과 사고 방식 속에는 점점 더 길가처럼 단단해져만 가는 부분이 있지는 않습니까? 신앙적인 기준과 사고방식으로 거듭나지 못한 채로 오히려 더욱 단단해져 가는 그런 부분 말입니다. 그런 부분이 있다면 그런 부분이 있다고 느껴질 때 고쳐야 합니다. 내가 이런 부분에서 고집부리고 있다고 생각된다면 그 부분을 내려놓고 고침을 받아서 다시 부드러운 곳으로 갈아 엎는 일은 그 부분이 아직 완전히 단단해 지지 않았을 때에만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완전히 단단해져 버리면 더 이상 단단한지 어떤지도 알지 못하는 채로 그냥 진리를 튕겨내 버리면서도 그게 옳다고 생각하는 안타까운 상태가 되어버릴 것입니다. 진리를 모두 사탄에게 빼앗겨 버리면서도 자신은 진리로 충만하다고 여기는 상태가 되어버릴 것입니다. 


주님께서 두번째로 말씀하신 땅은 “돌밭”입니다. 주님은 흙이 얇게 덮혀있지만 그 아래는 단단한 바위로 된 땅에 떨어진 씨앗의 운명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니다.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란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이 구절에서 시간에 대한 단어들을 찾아보면 돌밭의 특징에 대해서 잘 알 수 있습니다. “즉시, 잠시, 곧” 돌밭과 같은 마음의 특징은 그 반응이 즉각적이라는데 있습니다. 말씀을 즉시 받습니다. 아주 기뻐하면 받습니다. 그런데, 오래 견디지 못합니다. 그저 잠시 견딜 뿐입니다. 당장은 진리를 듣고 기뻐하지만 그 진리 때문에 무언가 대가를 치러야 할 일이 생기면 곧 바로 좌절합니다. 넘어지고 불순종에 빠집니다. 씨앗은 그렇게 말라죽고 맙니다. 성경은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그 속에, 그러니까 땅 속에 뿌리가 없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정확하게 말씀드리면 뿌리를 내릴 흙이 충분히 깊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저는 돌로 만든 뚝배기를 볼 때마다 참 지혜롭게 잘 만들었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비록 만드는데는 손도 많이 가고 힘도 많이 들겠지만, 그 속에 음식물을 담고 끓이는데도 훨씬 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겠지만, 그 안에서 음식물을 끓이면 거의 한 시간을 식지 않고, 오히려 더 더워지니 보온을 위한 그릇치고 이런 그릇이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저는 우리가 신앙을 가꾸어 가는 것도 돌 뚝배기를 만들고 사용하는 것처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열정을 가치있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서, 신앙에 있어서도 다른 것보다 지금 당장의 열정과 열심을 선호하지만 사실 그런 경향이 신앙을 깊은 신앙이 되게하는 것을 막을 때가 많습니다. 당장 끓어오르는데만 신경을 써서 그 열정을 유지하고 또 온전하게 사용하는 일에 실패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즉시, 잠시, 곧” 이런 단어를 좋아하시지 않습니다.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그것을 합당한 열매로 이어지는 것은 이런 단어들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우리를 기쁘게 하기도 하지만 그만큼 부담을 느끼게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진리를 들을 때 기뻐하기도 해야하지만 그런 부담감을 어떻게 하면 제대로 감당해 낼 수 있을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은 돌밭이 열매맺는 일에 실패하는 이유가 “환난이나 핍박”을 견뎌내는 일에 실패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처음부터 진리가 요구하는 대가를 고민하지 않고 그저 그 진리를 감정적으로만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생각지 못한 변수가 생기니 좌절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다른 곳에서 이런 비유를 드신 적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망대를 세우는데 예산을 생각하지 않고 크게만 지으려고 했다가는 중간에 포기하게 되고 그러면 부끄러움과 손해를 감수하게 될 것이다. 또 어떤 왕이 다른 나라와 전쟁을 하려면 이길 수 있을지 생각하고 해야 한다. 만약 이길 수 없다면 전쟁보다는 화친이 지혜로운 방법이다.” 이것은 주님을 따르려는 열정넘치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따르는 일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라는 의미로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진리를 따를 때, 그 진리가 요구하는 대가를 치를 수 있는지 먼저 생각하고 자신을 따르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진리를 따를 때, 우리는 구원을 얻을 수 있고, 자유를 누릴 수 있지만, 그 진리는 언젠가는 우리에게 그 진리의 열매를 위해서 무엇인가를 내려놓고 포기하라고 요구하게 되어 있습니다. 처음에는 얕은 흙으로도 충분합니다. 싹을 틔우기에는 그 정도로도 충분합니다. 그러나, 진리가 계속 살아남고 자라나 열매를 맺으려면 뿌리를 깊게 내려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서 땅은 그 씨앗의 뿌리가 자기 안에 깊게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그 진리가 자신의 삶과 존재 속으로 깊게 영향을 미치고 그렇게 자신을 바꾸어 갈 수 있도록 허락해야 합니다. 흙이 얕다면 더 쌓아서라도, 그 속의 돌을 깨뜨려서라도 씨앗이 계속 자라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땅을 바꾸어서라도 씨앗이 열매가 될 때까지 오래 견디고 참아내야 합니다. 


세번째 땅은 가시떨기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좋은 땅 같으나 그 속에는 가시떨기의 씨앗이 숨어있는 그런 땅입니다. 이 땅에 대해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 이 땅에 떨어진 씨앗은 잘 자라납니다. 그러나, 그 씨앗과 함께 자라나는 것이 또 있습니다. 바로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이라는 가시떨기들입니다. 문제는 이것들이 더 빨리, 더 강하게 자라기 때문에 씨앗이 겉으로 보기에는 그럴 듯하게 자라나도 열매를 맺지는 못하게 됩니다. 가시떨기가 결국은 열매맺는 것을 좌절시키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런 가시떨기의 정체를 두 가지로 말씀해 주십니다. 첫번째는 세상의 염려이고 두번째는 재리의 유혹입니다. 세상의 염려란 쉽게 말해 “먹고 살 걱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 그대로 정말 지금 당장 먹고 살 것이 없어서 걱정인 경우도 있지만, 본문에서 지적하고 있는 것은 그런 걱정이 아니라 아직 생겨나지 않은 상황에 대한 걱정이고 우리가 하는 걱정의 대부분도 바로 그런 걱정들입니다. 생겨나지도 않았고, 그래서 생겨날지 어떨지 확실치 않은 일에 대한 걱정들 말입니다. 처음에 진리를 듣고 깨닫고 기뻐합니다. 기뻐하면서 성장해 갑니다. 그런데, 그러는 중에 놓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염려입니다. 뿌려진 씨앗이 자라나고 있는 것에만 기뻐서 그것보다 더 빨리 근심도 함께 자라고 있다는 것을 놓쳐버리고 맙니다. 많은 성도들이 처음에는 잘 나가다가 갑자기 현실적이 되고 성장을 멈추게 되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 동안 너무 커져 버리고 강해져 버린 염려가 엄습해 오면 그 자리에서 좌절해 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두 번째 가시인 “재리의 유혹”은 세상의 염려와 같은 뿌리에서 자라난 또 하나의 가시떨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재리의 유혹이라는 말은 원래 “부유함의 속임수”라는 좀 더 강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부유함이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로 믿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부유함이 우리를 속이기 위해서 건드리는 부분은 우리의 욕심입니다. 더 많이 가지고 더 많이 쌓아놓으려는 비뚤어진 본능 말입니다. 그러나, 사실 이 욕심이라는 것은 염려의 또 다른 얼굴입니다. 왜 염려가 생깁니까?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입니다. 그 불안을 없애려면 불안한 요소를 없애면 되는데, 그것은 욕심을 부리는 일을 통해서 가능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불안이 찾아올 때, 부유함은 우리에게 속삭입니다. “너, 나 가지면 미래가 불안하지 않다, 염려할 필요가 없다. 나 많이 가지면 많이 가질수록, 많이 쌓아놓으면 많이 쌓아놓을수록 너는 안전하다.”라고 말입니다. 돈이라는 것이 현실적으로 보면 이런 것으로도, 저런 것으로도 바뀔 수 있는 만능의 물건이니 사람들은 진짜 그런지 따져 보지도 않고 그 길로 가게 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 진리에 대해서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그래도 상관이 없습니다. 어차피 그들은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라 생각하고 그래서 그것에만 의지해서 살아가면서도, 자신이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사실조차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릅니다. 우리는 이미 진리를 들었습니다. 천국의 씨앗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열매를 맺어야만 하는 입장에 있습니다. 이런 우리들은 부유함의 속임수에 속아넘어가면 절대로 안됩니다. 물질이, 돈이 속삭이는 자신이 힘이고 안전이고 전부라는 음성을 아무 생각없이 받아들이고, 그것이 우리 속에서 진리와 함께 커져가는 것을 그대로 내버려 두어서는 안됩니다. 진리를 열매맺게 하려면, 그래서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고, 하나님의 영원한 칭찬을 받는 땅이 되려면 우리의 염려를 틈타 우리를 속이는 부유함의 속임수를 그냥 듣고 있어서는 안됩니다. 그냥 내버려 두면 언젠가는 씨앗이 열매맺는 일을 완전히 불가능하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욕심을 뿌리 뽑으려면 염려를 뿌리 뽑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 방법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바로 하나님을 제대로 신뢰하는 것입니다. 저는 요즘 하나님께 참 감사하며 살아갑니다. 제가 얼마나 믿음이 없는 사람인지를 계속해서 말씀해 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깨닫는 순간은 아프지만 이내 신이 납니다. 어떤 부분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회복해야 할 것인지가 그제서야 보이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요즘 저는 인생의 한 부분 한 부분을 조금씩 조금씩 하나님께 더 맡기는 싸움을 싸우고 있습니다. 구체적인 부분 부분에 있어서 근심과 걱정으로 남아있던 것들을 하나씩 하나님께 대한 신뢰로 바꾸어 가는 재미가 얼마나 쏠쏠한지 모릅니다. 사랑하는 회원 여러분, 여러분은 정말 하나님께서 전지전능하신 분이라는 것을 믿으십니까? 온 우주의 주인이시며 모든 것을 만드시고 마음대로 주관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믿으십니까? 그러면, 그 분이 우리의 가장 선하신 아버지시라는 것도 믿으십니까? 그리고 그 아버지가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실 것을 믿으십니까? 설혹 우리에게 어려움을 허락하실지라도 감당할 시험 밖에는 내지 않으시고 또 그런 시험을 당할 즈음에는 피할 길을 내시는 분이심을 정말로 믿으십니까? 하나님을 그런 분으로 진짜 신뢰하고 내가 그런 분의 손 안에 있음을 진짜로 믿으십니까?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이 있다면 바로 이런 신뢰입니다. 우리의 삶의 세밀한 부분에서 하나님을 향한 이런 신뢰를 하나씩 하나씩 회복해 가야 합니다. 그래야 염려를 처리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욕심도 다스릴 수 있습니다. 그런 가시떨기들을 거둬버리고 열매를 향해 갈 수 있습니다. 이런 귀중하고 든든한 진리들을 머리에만 머물게 하지 마십시오. 기도할 때 고백하는 미사여구로만 사용하지 마십시오. 자신에게 내가 정말 하나님을 이렇게 믿고 있는지 계속해서 질문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느 부분에서는 잘 되지만, 어느 부분에서는 잘 안되는지 정직하게 판단해 보십시오. 그리고 마음 속에서 정직하게 그렇게 믿어질 때까지 기도하고 또 기도하십시오. 동일한 걱정에 대해서 내가 기도하는 것이 변할 때까지 기도하고 또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기도가 변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십시오. 저는 선하신 우리 아버지께서 이런 기도라면 백 번이라도 들어주실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네번째 땅은 좋은 땅입니다. 주님께서 오매불망 기다리던 땅입니다. 주님은 이 땅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가 되느니라” 우리는 네번째 좋은 땅에서 위의 세 가지 땅에서는 발견하지 못한 한 가지 특징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깨닫는 자니”라는 말입니다. 앞에 나온 세가지 땅은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좋은 땅은 깨달았습니다. 주님께서도 인정하실만한 깨달음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마지막 좋은 땅에 대해서만 깨달았다는 단어를 사용하셨다는 것은 주님은 돌밭이 보인 반응인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는 것”은 참된 깨달음이라고 보시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열매로 까지 이어지지 않는 깨달음은 당사자가 어떻게 생각하는가와 상관없이, 얼마나 기뻐하고 흥분하고 있는가와 상관없이 깨달음이 아니라고 여기신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우리가 열매맺는 좋은 땅이 되려면 새로운 깨달음이 가져다 주는 단순한 기쁨을 넘어서야만 한다는 점을 알려 줍니다. 

저는 오늘날의  많은 성도들이 머물러 있는 곳이 여기가 아닌가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어느 어느 목사의 설교가 좋다고 하면 우루루 우루루 몰려 다닙니다. 듣고 듣고 또 듣고 열광적이 됩니다. 그러나 그것 뿐입니다. 또 다른 스타가 등장하면 새로운 기쁨을 찾아 다시 이주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더 이상 기쁨을 주지 못하면 이내 떠나 다른 곳으로 옮깁니다. 기쁨은 있으되 깨달음은 없습니다. 깨달음이 있어도 열매로 이어지지 못합니다. 주님께서 깨달았다고 인정해 주실만한 깨달음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즉 씨 뿌리는 비유를 들으라”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들으라 하셨으니 우리는 들어야 합니다. 귀를 기울여 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저 듣는 게 전부가 아닙니다. 아무리 많이 들어도 그저 듣는 것만으로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주님께서 사용하신 들으라는 말씀은 그런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깨달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열매를 맺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야 정말 들은 것이라고, 그래야 들은 것으로 인정해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여기에 있는 여러분 모두 열매를 맺기 원하시죠? 나에게 뿌려진 진리, 그 천국의 씨앗이 씨알 굵은 열매로 맺혀지기를 바라시죠? 그렇다면 주님의 “씨 뿌리는 비유를 들으십시오” 이 비유는 쟁기입니다. 앞으로 들을 말씀들을 위한 영혼의 토양을 준비하는 하나님의 쟁기입니다. 그렇게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 세상의 사고방식과 기준들이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밟고 다니도록 그냥 내버려 두지 마십시오. 지금까지 그랬다면 지금부터라도 그러지 마시고, 길가처럼 되어버린 마음밭을 다시 기름진 땅으로 돌려놓으십시오. 진리 때문에 치러야 할 대가가 있을 때는 기꺼이 치르기로 작정하십시오. 그렇게 흙밑의 바위를 하나 하나 깨뜨려 고운 흙으로 바꾸어 가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씨앗이 깊은 뿌리를 내릴 두터운 토양을 준비하십시오. 또한 그것이 근심이든 그 근심때문에 생겨나는 욕심이든 그것이 여러분 안에 이미 뿌려져 자라고 있는 그 귀중한 씨앗과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지 마십시오. 그 근심과 욕심의 도전에 기죽지 마시고 싸우십시오. 오히려 그 도전들을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키워가는 텃밭으로 사용하십시오. 그래서 열매맺는 땅이 되십시오. 주님께서 찾고 계시는 좋은 땅이 되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통해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수확을 거두시는 기쁨을 누리시도록 해 드리시기 바랍니다. 


날마다 순간마다 더 좋은 땅, 더 많은 열매를 맺는 땅으로 변화되어져 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