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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교회 설교/설교듣기

2010 매일성경 설교 5.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본문 : 마태복음 11장 20-30절



이름만 대면 다 아실만한 목사님이시지만 그 분의 성함은 숨겨놓은 채로 제가 그 분에 대해서 경험한 이야기를 하나 들려드리겠습니다. 어느 날인가 목사님께서 목회하시는 교회에 다니는 한 친구를 만났습니다. 지금 기억으로는 아마도 20대 후반의 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친구는 그 목사님의 설교에 완전히 매료되어 있었습니다. 정말 입에 침이 마르도록 그 목사님의 설교에 대해서 칭찬하고 있었습니다. 표정만 보아도 그 목사님을 얼마나 좋아하고 존경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그 친구의 표정은 마치 구름을 타고 있는 듯 환희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는 그 때까지 그 목사님의 설교를 한 번도 접해보지 못했던 저는 서점으로 가서 그 친구가 말해준 그 설교가 실린 설교집을 구입했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기대 가득찬 마음으로 그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정말 놀랐습니다. 세상에... 그 분의 설교는 정말 정말 너무나 평범했습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 그런 설교에 대해서 이렇게 흥분하고 매료되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나중에 알게된 또 한 가지 사실은 그 분의 설교에 그 정도로 매료되는 사람들은 그 교회의 성도들 밖에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한참을 지나서야 그 궁금증을 풀수 있었습니다. 그 교회의 성도들이 그 목사님의 설교를 그렇게 좋아하고, 그 설교에 그렇게 감동되는 이유는 그 분의 설교 자체가 아니라 그 분의 삶과 인격에 있었던 것입니다. 강남의 큰 교회의 목사님이시지만 정말 겸손하고 검소한 그 분의 생활, 정말 사심없이 목회하시면서 성도들을 정말 인격적으로 돌보시는 모습... 이런 것들이 그 교회 성도들을 감동시켰고, 그것이 그 분의 메시지를 그렇게 힘있게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삶이 메시지를 뒷받침해 주고 오히려 넘어서니 그 메시지가 그렇게 거부할 수 없는 위력을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누군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어떤 진리에 대해서 계속해서 가르치는데, 그 말과 가르침의 내용이 너무나 엄청난 것이라고 한다면, 사람들은 그 말 이상의 무언가를 요구할 것입니다. 그 말의 진실성을 증명해 줄 증거말입니다. 만약 그 증거가 그 말과 가르침의 참됨을 충분히 증명해 주고도 남을만 하다면, 설사 그의 이야기 자체는 쉽게 믿어지지 않는 내용이라고 하더라도 그 증거때문이라도 그것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자신에 대해서 가르치셨습니다. 완전히 드러내놓고 그러시지는 않으셨지만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또 사람들이 기다리던 메시야라고 계속해서 가르치셨습니다. 또 하늘나라에 대해서도 가르치셨습니다. 그 나라가 어떤 나라이며 또 어떤 사람들의 나라가 될 것인지, 그 나라로 가는 유일한 길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사람들을 계속해서 가르치셨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그 분의 가르침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 분의 자신에 대한 주장과 이야기 자체가 너무나 터무니 없이 황당한 것이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 이야기를 하는 당사자가 너무나 평범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모든 말씀은 믿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 분은 몸소 말씀하신 그 천국을 자신의 삶을 통해 보여주셨고, 자신에 대한 주장 또한 그 분의 권위있는 가르침과 이적을 통해 거부할 수 없도록 증명해 보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주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런 수없이 계속되는 이적들을 보고도 사람들은 도무지 예수님을 믿으려 들지 않았습니다. 특히 성경에 대해서 잘 안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일수록 그런 경향이 강했습니다. 일반 대중들보다는 서기관, 바리새인들이 그런 경향이 더 심했고, 성경을 전혀 모르는 이방인들보다 유대인들이 훨씬 더 심했습니다. 11장 19절에서 주님은 그 당시의 그런 사람들을 바라 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함을 얻느니라” 조금 애매해 보이는 이 말씀은 이런 뜻입니다. 지혜라고 주장되어지는 내용은 그 자체로는 증명될 수가 없습니다. 실제로 그 지혜의 참됨을 증명하는 것은 바로 그 지혜를 이야기하는 사람의 삶과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하나님의 지혜이신 주님은 하늘의 지혜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지혜가 참되다는 것을 자신의 삶과 수많은 이적들을 통해 증명하셨습니다. 당시의 지도자들 또한 스스로를 지혜롭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자신들의 지혜를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그 지혜로 행한 일이란 게 참 우습기 그지 없었습니다. 세례 요한이 먹지 않고 마시지 않으며 금식하면서 사역하자, 그들은 세례 요한이 귀신 들려서 그런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예수님께서 사람들과 어울려 자주 식탁교재를 하시는 것을 보면서 예수님을 탐식가이며 주정뱅이이고 죄인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하는 질 나쁜 사람이라고 비난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최고의 지혜가요 스승이라고 생각했겠지만, 고작 그들의 지혜라는 것이 따지고 보면 굶으면 굶는다고 비난하고, 먹으면 먹는다고  비난하는 중심없이 흔들리는 기준들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자신들의 지혜가 사실은 지혜가 아니라 어리석음 이라는 것을 스스로 드러냈던 것입니다. 


주님은 온 세상을 위해서 오셨지만, 유대인으로 오셨고, 그래서 유대 땅을 가장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주로 유대 땅, 그것도 고향인 갈릴리 지역에서 가장 많은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런 점에서 그 곳은 가장 큰 특권을 누리는 땅이었고 가장 큰 복을 받은 지역이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렇게 가장 큰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하셨던 그 곳, 그렇게 그 분이 스스로의 말씀에 대한 확실한 증거를 가장 많이 보여주셨던 그 곳에서 그 곳에서 가장 심하게 주님을 거부했던 것입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그 분이 여러가지 일들을 통해서 보여주신 그 분의 권능은 예수님의 주장이 거짓이 아닌 참된 것이라는 것을 입증하고도 남았습니다. 주님께서는 가시는 곳마다 꼭 같은 말씀을 주셨고, 또 그렇게 말씀하신 자신의 능력을 수없이 보여주셨습니다. 그렇게 자신의 메시이심과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사실을 보고 알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세 도시, 정확하게는 두 도시와 한 지역이 나오는데, 고라신과 벳새다 그리고 예수님의 동네인 가버나움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세 도시에서 그 어디서 보다도 많은 놀라운 일들을 행하셨지만, 그들이 전혀 변화의 기미를 보이지 않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가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면 그 성이 오늘날까지 있으리라” 우리는 주님의 이 말씀 속에서 주님께서 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권능을 보여주시는지, 많은 기적들을 보여주시는지 그 진짜 목적을 발견하게 됩니다. 물론 기적은 한쪽 면에서는 하나니님의 엄청난 은혜입니다. 할 수 없고, 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가능하게 해 주시는 것이 기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보이는 것만 보면 그것은 선하신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적은 단순히 그런 의미만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기적을 통해 진짜로 원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본문의 세 도시가 주님으로부터 그렇게 큰 저주를 선언받은 이유는 그들이 그 어떤 도시나 동네보다도 주님의 더 큰 권능과 은혜의 수혜자가 되어 있었으면서도 정반대로 그 어떤 도시들보다 더 큰 죄를 범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죄란 바로 회개치 않은 것이고 오히려 더 교만해진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적을 보여주시고 권능을 베푸시는 이유는 그저 한 순간 놀라고 충격을 받게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그것을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회개하고 겸손해지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주님께 더 깊고 확실하게 돌아오게 하시기 위해서 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적을 베푸시는 이유는 그 기적을 붙들고 살게 하시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 기적을 행하신 하나님만을 붙들게 하시기 위해서 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을 붙든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표현한다면 자신만을 향해있던 삶으로부터 하나님을 향한 삶으로의 회개와 그로 인해 생겨나는 겸손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의도대로라면 우리는 기적으로 대표되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많이 경험하면 경험할수록 더 확실하게 하나님을 향할 수 있어야 하고 그만큼 더 겸손해져 가야만 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현실 속에서 보이는 모습은 이와는 정반대인 경우가 더 많습니다. 기적을 바라고 신비한 것을 중심으로 신앙생활하는 성도들 중에서 정말 겸손한 사람들은 그렇게 자주 발견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기적을 경험하는 것과 비례해서 자신보다는 하나님께 의존해서 살아가게 되는 사람들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그대신 더 당당해지고, 더 자신만만해 지며 도무지 다른 이들의 이야기를 듣지 않으려는 사람로 변해가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현실 속에서 더 진지하게 하나님을 섬기거나 더 낮게 몸을 낮추기 보다는 현실감이 없어지고 자신을 높이는 사람들이 더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기적적인 은혜는 너무 놀라운 것이어서 우리들을 흥분시키고 들뜨게 하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게 지속되어서는 안됩니다. 이내 그런 흥분과 들뜸은 가라 앉아야 하고 그 자리를 하나님을 향해서 차분하게 집중하는 속깊은 영성이 대신해야 합니다. 만약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의 기적적인 은혜를 기대하고 바라는 이유가 이런 흥분과 자신만만하고 당당한 삶을 살기 위한 것이라면 그것은 방향이 잘못된 것입니다. 때로 우리 삶에는 기적도 꼭 필요하고 그래서 우리가 기적을 바랄 수도 있지만, 그 기적을 통해서 우리가 다다라야 할 목표지점은 우리의 흥분과 자기만족이 아니라 더 확실한 회개와 더 낮은 겸손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놀라운 은혜를 주실 때마다 그 은혜가 나에게 하나님 보시기에 어떤 바람직한 변화를 일으키고 있는지 체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놀라움만 따라다니게 되기 쉽고, 그 만족감만을 추구하게 되기 쉽습니다. 그러면서 오히려 더 교만해지고 높아지기가 쉽습니다. 

고라신과 벳새다, 그리고 가버나움이 그렇게 혹독한 꾸지람을 들었던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그만큼 큰 은혜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다른 도시나 마을보다 훨씬 더 많은 특권을 주셨지만 그들이 회개하고 낮아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은혜는 그 자체로만 본다면 너무 너무 좋은 것이고 반드시 사모해야만 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그만큼 위험하고 무서운 것이기도 합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그 도시들은 구약에 나오는 대표적인 악당같은 도시들보다도 심판날에 더 견디기 어려울 것이라는 책망을 받습니다. 악하기로만 본다면 구약의 도시들이 최고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권능을 많이 경험하고 목격하는 복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갈릴리의 세 도시들 만큼 회개하고 겸손해질 기회를 많이 받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만큼 회개하고 겸손해져야할 책임이 적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는 구약의 악당도시들이 갈릴리의 세 지역들보다 심판을 견디기가 쉬울 것입니다. 우리는 은혜라고 하면 무조건 좋아하지만, 우리가 은혜를 생각할 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은혜란 항상 목적이 있어서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점입니다. 물론 은혜 자체만 본다면 은혜는 분명히 공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일단 그 은혜를 받아들이면 그 은혜는 그 사람들에게는 그 은혜의 크기에 걸맞는 반응을 요구합니다. 깊은 은혜를 경험해 보신 분들은 다 아실 것입니다. 깊고 큰 은혜를 받으면 어떻게 됩니까? 그 은혜는 우리에게 그렇게 회개하고 낮아질 마음을 주고, 그리고 갈 수 있는 힘을 줍니다. 은혜가 크면 클수록 그 힘은 더 큽니다. 은혜는 그렇게 동기를 주고 힘을 주어서 더 깊은 회개와 겸손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해 주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는 이유입니다. 은혜는 자신의 깨달음과 힘만으로는 결코 새로워질 수 없는 우리에게 새로워질 수 있는 기회와 능력을 제공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은혜를 사모하고 은혜의 충만함을 간구할 때에라도 우리가 그것 때문에 더 교만해지지 않도록 기도하면서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 은혜를 통해서, 그 은혜의 크기만큼 더 주님을 향하고 겸손해 지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은혜만을 위해서 은혜를 구하지 마십시오. 그건 무척 위험한 일입니다. 우리가 그 은혜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고라신과 벳새다, 가버나움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엄청난 권능을 수없이 경험하는 은혜, 그 엄청난 영적인 특권을 받고도 전혀 반응하지 않고 오히려 더 완고해져 가는 갈릴리의 모습을 보면서 성자 하나님께서는 엄청난 저주의 경고를 쏟아부으셨습니다. 너무나 화가 나시기도 하셨겠지만, 그만큼 안타깝고 슬프기도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던 주님은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기 시작하셨습니다. 사실 이 기도는 하나의 대답이었습니다. 왜 위와 같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날 수 밖에 없는지에 대한 대답이었습니다. 우리가 이해하기로 복음은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보내신 분이 예수님이시고 그 분이 바로 복음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은 이런 우리의 생각을 뒤집는 말씀을 하십니다.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그 분의 영광을 나타내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뜻이란 것이 바로 복음과 하늘나라를 지혜롭고 슬기로운 사람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드러내시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회원 여러분, 조금 이상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정말 복음과 하늘나라를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들에게는 숨기십니까? 그리고 어린아이들에게는 훤히 드러내십니까? 그렇습니다. 결과적인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십니다. 그것은 복음이 가지는 성격 때문입니다. 복음은 우리들에게 모든 인간적인 전제를 포기할 것을 요구합니다. 자신이 결코 구원받을 수 없는 죄인임을 인정하라고 하고, 자신이 자신의 참된 행복과 의로움에 대해서는 완전히 무능하다는 것을 인정하라고 요구합니다. 너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만 신뢰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삶으로 삶의 방향을 바꾸라고 요구합니다. 누가 이런 요구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적어도 스스로를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자신이 슬기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이런 사람들은 이미 자기 자신으로 꽉 찬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으로 충분하고, 자기 힘으로 참된 행복을 만들어 낼 수 있으며, 스스로 의로워질 수 있는 방법을 알며, 또 그렇게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결코 참된 의미에서 복음을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아니 복음이 복음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조차 없습니다. 이미 그들에게는 자신이 복음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숨겨지고, 그 복음을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는 하늘나라도 숨겨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린아이들은 다릅니다. 어린아이들은 자신의 지혜와 슬기를 믿지 않습니다. 아니 자기들에게 그런 것이 있다고 생각해 보지도 않은 사람들입니다. 아무 지혜도 없습니다. 아는 것도 없습니다. 이들에게는 모두가 다 새로운 것들이고 모두가 다 배워야 할 것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들은 모든 것을 받아들입니다. 자신이 비어 있기 때문에 채워야 하고 때 채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아이들은 자기 혼자서는 살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안전도 행복도 혼자서는 결코 얻을 수 없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의존적이고 수용적입니다. 하나님께 의존적이고 그 나라에 대해서 완전히 열려 있습니다. 회개를 요구하면 회개하고 겸손해지라고 하면 겸손해지려고 애씁니다. 그렇게 스스로 비어있으며 연약하다는 것을 스스럼 없이 드러냅니다. 그러니, 그들에게는 복음이 드러납니다. 하늘나라가 훤히 빛을 냅니다. 복음을 다른 형태가 아니라 이런 복음으로 주셨기 때문에 복음은 그리고, 그로 인해 주어지는 하늘나라는 지혜롭고 슬기로운 사람들이 아니라 어린아이들에게만 드러나는 비밀스러운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복음의 복음됨이 지켜지고, 하나님의 영광은 빛나게 되는 것입니다. 모두가 다 드러나있는 복음에 숨겨진 하나님의 뜻이며, 복음은 그렇게 하나님의 뜻을 완전하게 이루는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자들, 슬기로운 자들은 항상 어린아이들에게 무겁고 고통스러운 짐을 지우게 마련입니다. 마치 부모가 자녀에게 어른처럼 행동할 것을 요구하는 것처럼 결코 소화해 낼 수 없는 짐을 지우게 마련입니다. 당시의 일반서민들은 그들이 존경해 마지 않는 율법선생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자기들에게 지워준 율법의 짐을 지고 힘겨운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이미 경제적으로 충분히 넉넉해서 자신들이 만들어낸 율법적인 조항들을 지키는데에 그렇게 큰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서민은 달랐습니다. 매일 매일 끼니걱정을 하며 살아야만 했고, 그러자니 그 수많은 조항들을 지킬래야 지킬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그들에게 남는 것은 그 율법의 짐이 가져다 주는 과중한 무게와 율법을 지키지 못한다는 죄책감 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그런 삶을 보시면서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너무 무거운 멍에를 메고, 지고 갈 수 없는 짐을 진 채로 몸도 영혼도 지칠대로 지친 그들을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에게 쉼을 주고 싶어하셨습니다. 그 무거운 멍에를 벗기고 지기 쉬운 멍에를 메어주고, 그 과중한 짐을 내려놓고 함께 가벼운 짐을 지고 가게 해 주고 싶어하셨습니다. 그래서 말씀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초청하셨습니다. 누가 대답하겠습니까? 누가 그 초청에 응하겠습니까? 쉬운 짐을 지고 가면서 가벼운 멍에를 메고 가면서 자부심과 만족감에 젖어있는 사람들은 그 초청을 받아들이지 못할 것입니다. 지혜로운 자들, 슬기로운 자들은 그 부름에 대답하지 않을 것입니다. 짐이 무거운 자들, 멍에가 견디기 어려운 자들만 응답할 것입니다. 그렇게 남이 지어준 짐을 왜 지는지도 모르는 채로 지고 갔던 어린아이들만 그  초청에 응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동안의 고역으로 부터 안식을 얻을 것입니다. 그 무거운 짐을 지고 가면서 얻으려 했지만 결코 얻지 못했던 그 안식을 얻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계속 말씀하십니다. “나는 마음이 겸손하고 온유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니라” 우리는 예수를 믿으면 모든 짐을 내려놓을 수 있고, 또 내려놓아야 한다고 배워왔습니다. 아마도 쉬게 하신다는 데에 너무 강조를 두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어도 짐이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의 초청을 받아들여 예수님께 오더라도 모든 짐을 내려놓고 영원히 빈 몸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주님도 그걸 약속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물론 지금 지고 있는 짐과 멍에는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멍에와 짐을 져야 합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만들어 주시고 지워주신 멍에와 짐입니다. 그렇다면 이게 왜 안식입니까? 또 다른 짐을 지어야 한다면 나아진 것이 무엇이며, 무슨 유익이 있습니까? 유익이 있습니다. 여러가지 점에서 그렇습니다. 지혜로운 사람들, 슬기로운 사람들이 지워준 짐과 멍에는 무겁기 그지 없습니다. 그들은 가차없는 사람들이고 교만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어쩌면 율법의 짐은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에게는 강요되는 짐들이 있습니다. 일상생활 속에서도 그렇고, 심지어는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얼마나 많은 무겁고 감당하기 어려운 짐, 결코 질 필요가 없는 멍에를 메고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의 일상생활만 보더라도 우리는 얼마나 많은 짐을 지고 있습니까?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단지 사는 것 자체가 어렵다는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세상에 상식과 통념이라는 이름으로, 그리고 무슨 비결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하는 수많은 것들... 조금만 생각해 보면 그건 그저 스스로를 지혜롭다고 믿는 세상이, 그리고 스스로를 슬기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만들어 낸 근거없고 보장없는 짐들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지금 세상에 우리에게 부과해 주는 얼마나 많은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 이 정도는 되어야 한다, 저 정도는 되어야 한다는 기준들로 인해 무거운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대표적인 것이 돈과 학벌이 아닌가 합니다. 우리는 그 동안 어쩌면 왜 그래야 하는지도, 정말 그래야만 하는지도 모르는 채로 세상이 우리에게 강요하는 기준에 따라오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 기준을 만족시키는 것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으로 여기면서 말입니다. 어떠셨습니까? 정말 거기에 참된 만족이 있던가요? 그런 기준을 따르는 삶 속에 참된 쉼이 있던가요? 적어도 제 경험으로는 그렇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남과 나를 비교하며 나를 맞추어 가는 삶, 다른 사람이 일러준 비결에 나 자신을 억지로 맞추어 가려고 하는 삶 속에는 결코 쉼이나 만족이 없었습니다. 항상 피곤하고 불안만이 있을 뿐이었던 것 같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내 몫의 삶이 있다는 믿음에 이르렀을 때, 그리고 그 평가는 겉으로 보이는 삶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이라는 깨달음에 이르렀을 때 제 삶은 조금씩 쉼과 자유를 얻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또 어떻습니다. 나 자신의 참된 변화나 성숙은 이루어져 가고 있지 않으면서도 다른 사람들이 나른 사람들이 바라보는 눈을 의식해서, 그들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 그들이 가는 길을 억지로 따라가는 신앙생활 속에 참된 만족과 기쁨이 있었습니까? 그런 경건의 모양 속에 참된 안식과 자유가 있었습니까? 이것도 저의 경우에는 전혀 그렇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사람들 앞에서의 나의 뒷모습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나의 앞모습에 신경쓰게 되면서, 그렇게 사람들이 아니라 그 분이 주신 짐과 멍에를 지기 시작했을 때 제 삶은 그만큼 많은 자유와 쉼을 얻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은 후에도 져야할 짐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짐은 내가 스스로 의로워지기 위해서 져야 할 짐도 아니고 내가 내 만족과 행복을 책임져야 하기 때문에 지는 짐도 아닙니다. 우리가 참으로 예수를 믿는다면, 그런 짐들, 그런 멍에는 다 주님께 맡길 수 있어야 합니다. 지혜로운 사람들, 슬기로운 사람들이 나에게 지어준 짐들, 스스로 지혜롭다고 생각하면서 만들어낸 그 무거운 멍에는 다 주님 앞에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원래 나의 의로움도 나의 행복과 만족도 내 힘으로는 만들어 낼 수 없는 것들입니다. 우리는 그 동안 그저 그럴 수 있다고 우리를 은근히 부축이는 사탄의 사탕발림에 속아왔던 것입니다. 이제는 원래부터 지지 말았어야 할 그 짐을 내려놓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다른 짐을 지고 다른 멍에를 메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거룩한 삶의 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의 멍에를 말입니다. 겉으로는 무거워보여도 결코 무겁지 않을 것입니다. 무겁다고 생각하는 건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지 진실이 아닙니다. 그 짐은 세상이나 내가 만든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결코 무거울 수가 없습니다. 혹시 무겁더라도 그것 때문에 지치고 고통당할만큼은 아닙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짐을, 그 멍에를 우리에게 주시는 분은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은 결코 다른 사람에게 고통스럽고 아프기만한 짐을 메게 하지 않습니다. 항상 짐을 지는 사람을 생각하고 배려하며 가장 적절한 짐을 분배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겸손과 온유함에 있어서는 따라올 인물이 없으십니다. 그 분 자신이 겸손과 온유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짐은 짐이기에 무게가 없을 수는 없겠지만, 이런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짐이라면 그 짐은 결코 우리를 무겁게만 하고 수고하게 하면서도 결코 만족과 기쁨을 주지 못하는 그런 잔인한 짐은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 짐은 우리를 참으로 쉬게 할 것이며, 우리에게 참된 만족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자꾸 지혜로워지고 더 슬기로워지려고 하지 마십시오. 자신을 그렇게 만들고 그렇게 생각하고 싶어지는 그 치명적인 영적 유혹에 절대로 넘어가지 마십시오. 차라리 어린아이가 되시고, 항상 어린아이로 남아 계십시오. 그렇게 수용적이고 그렇게 의존적인 어린아이들 말입니다. 그래야 복음을 들을 수 있고, 천국을 볼 수 있습니다. 쉬게 해 주시겠다는 주님의 초청에 받아들여 그 분이 지게 하시는 가벼운 짐과 쉬운 멍에를 그 분과 함께 메고가는 은혜와 영광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 분의 제자로 산다는 것, 성도로 산다는 것 그것은 분명히 짐입니다. 만만치 않은 짐입니다. 그러나, 이 짐은 무겁고 수고롭지 않을 것입니다. 그 대신 우리 모두를 쉬게 할 것입니다. 우리를 참된 안식으로 인도해 갈 것입니다. 마음이 겸손하고 온유하신 주님이 주시는 짐이니 반드시 그럴 것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이 쉬운 멍에와 가벼운 짐을 지고 기쁘고 가볍게 주님을 따르는 참된 안식을 경험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