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법]
방문하시는 분 들 중에서 혹시라도 도움이 될까 적어봅니다.
1. 읽기는 그냥 사이트에서 읽으시거나 마우스로 클릭하시면 다운로드 되는데, 그렇게 읽으시면 됩니다.
2. 설교를 들으시려면 첨부되어 있는 mp3파일(zip파일)을 위의 방법으로 다운로드 하셔서 들으시거나,
네번째 회색상자의 작은 화살표를 클릭하시면 들으실 수 있습니다. 단, 이 경우에는 중간에 스톱하시면 처음부터 다 시 시작합니다. 이 사이트의 서비스가 거기까지 밖에 안됩니다. 죄송합니다.
3. 다녀가실 때는 짧은 댓글 부탁드립니다. 예) 누구 누구 다녀갑니다. 댓글은 저만 볼 수 있도록도 저장할 수 있습니다.
본문 : 레위기 10장 1-11절
서론 : 인간의 영광과 만족을 위한 기독교(?)
제가 예전에 어느 전도 프로그램을 위한 컨퍼런스에 참석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런 표현을 써서 아주 죄송하지만 3박 4일 동안 진행되는 프로그램들, 특히 ‘성령사역’이라고 이름붙인 부분에 이르러서는 목사로서 아주 역겨워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성령님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그들은 성령을 무슨 종도 그런 종이 없을 정도로 하챦게 취급했습니다. 기도하면 아말감으로 떼운 이빨을 금이빨로 바꿔준다고 하질 않나, 성령님은 머리에 임하라고 하면 머리에 임하고, 발을 쳐들고 발끝으로 임하라고 하면 발끝으로 임한다고 했습니다. 또 머리가 아프면 머리의 일이, 어깨가 아프면 어깨의 일이, 허리가 아프면 허리의 일이 필요한데, 그런 기도들은 모두 무슨 주문처럼 되어 있었습니다. 물론 참석한 사람들은 그런 것을 보고 들으면서 열광했습니다. 마침 제 대학동기가 목사가 되어 거기 참석했길래, 그 친구에게 조금은 화가난 채로 물었습니다. “야, 저거 좀 이상하지 않냐? 저게 무슨 기독교냐?” 그랬더니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치만 나는 저거 할거다.” 그래서 내가 “뭐? 이상하다며 왜 하는데?”라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렇지만 강력하쟎아.” 그 이상한 것을 선택하고 버리는 기준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강력하다.” 성령님을 종도 가장 낮은 종놈처럼 부리고, 병을 고친답시고 무슨 귀신 푸닥거리같은 짓을 하는 그 프로그램을 판단하는 기준이 그게 성경과 진리에 맞느냐 아니냐가 아니라 단순히 강력하냐 아니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너무 기가 찼습니다. 평신도도 아니고 목사까지 된 사람이 그런 기준으로 무언가를 평가한다니 참 어이가 없었습니다. 그 친구가 사용한 ‘강력하다’는 말은 실은 ‘사람을 끄는 힘이 있다.’, ‘사람에게 어필한다.’ ‘사람을 모으는데 효과적이다’, ‘사람에게 맞는다’는 말이었습니다. 그 친구의 말 속에는, 그리고 판단기준 속에는 성경도, 하나님도 보이질 않았습니다. 그저 사람에게 맞추고 사람만 끌어들일 수 있다면 목사로서 이상하다고 판단이 서는 것들도 아무 거리낌 없이 가져다 쓰겠다는 사람 위주의 생각, 정확하게 말하면 그저 사람들만 만족시키고, 또 숫자만 불리겠다는 생각 밖에 없어 보였습니다. 너무 오랜만에 그것도 같은 목사가 되어서 만난 친구였지만, 저는 그런 그 친구의 곁을 슬쩍 떠나고 말았습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만드시고, 그 분의 영광을 위해서 섭리해 가고 계시며, 그 분의 영광을 위해서 움직여 가고 계십니다. 그것이 우리가 믿는 기독교 신앙의 가장 중요한 전제조건입니다. 저는 이 기준이 깨지면 그 기독교는 껍데기는 기독교일지 몰라도 참된 기독교가 될 수는 없습니다. 물론 교회를 운영해 나가고 또 성도로 살아가다 보면 알게 모르게 이 중심을 떠나고 이 기준을 어길 때도 있지만, 그것은 실수에, 잠시 잠깐의 실패에 머물러야지 그것이 의도적인 선택이 되거나 혹은 목적 자체가 하나님과 그 분의 영광과는 상관이 없는 것이어서는 안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 교회와 성도는 크게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은 사람을 위한 것이기 이전에 하나님을 위한 것입니다. 인간의 유익을 위한 것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인간의 즐거움이나 만족, 그리고 유익도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큰 틀 안에서만 추구될 수 있고 또 얻어질 수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유익이고 즐거움이며, 그것이 신앙이 주는 참된 유익과 즐거움입니다. 성도의 삶과 교회는 아무리 고상한 목적이라도 결코 하나님의 영광과 상관없이, 그리고 그 분이 원하는 방식이 아닌 방식으로 움직여서는 안됩니다. 적어도 알면서 그래서는 절대로 안됩니다.
제사장 위임식
이스라엘은 이제 명실상부한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 나라가 되려는 순간에 와 있었습니다. 그 일은 바로 아론과 그 자손을 대제사장 가문으로 세우는 것을 통해서 거기서 부터 시작될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최고의 축제였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너무 즐거워하고 있었고, 모든 절차 절차는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착착 부드럽게 진행되어져 갔습니다. 제사장들은 몸을 씻고 제사장 복장을 갖추어 입었습니다. 그 모습은 너무 아름답고 영광스러웠습니다. 첫번 제사를 지내기 전에 하나님께서 명하신 회막 안의 물건들과 제사장들에게 관유를 바름으로써 거룩하게 했습니다. 먼저 제사장들을 위해서 속죄제가 행해졌습니다. 그리고 나서 번제가 행해졌습니다. 모두가 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이루어졌습니다. 그 다음에는 위임식의 수양을 드렸습니다. 그것도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그대로 행했습니다. 그 다음에 모세는 관유와 단 위의 피를 취해 아론과 아들들의 옷에 뿌려 그들을 거룩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난 후 위임식은 일주일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론과 아론의 아들들을 일주일 동안 회막 문 안에만 머물게 하셨습니다.
위임식후 첫 날의 비극 : 나답과 아비후의 죽음
8일째 되는 날, 아론과 아론의 아들들은 드디어 제사장으로써의 자신의 역할을 감당하게 되었습니다. 가장 먼저 아론은 바자신들을 위한 속죄제와 번제를 드렸습니다. 그렇게 하고 나서야 비로소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위한 제사장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아론은 그 다음에 백성들을 위해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속죄제의 염소를 잡아 제사를 드렸고, 그 위에 소제를 더하여 그 제사를 완성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화목제를 드렸습니다. 수소와 수양을 잡았고 아론의 아들들이 그 피를 가져오자 아론은 그 피를 단 주위에 뿌렸습니다. 그리고는 불에 태울 것은 태운 후에 가슴 부분과 오른쪽 뒤다리를 흔들어 요제로 드렸습니다. 이 제사의 모든 순서와 절차들도 하나도 임의대로 한 것은 없었습니다. 첫번째 제사는 아론이 제사를 마치고 백성들을 향해서 손을 들어 축복한 후에 단을 내려오는 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모세와 아론이 회막에 들어갔다가 나온 후에 백성들에게 축복하자 아주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백성들 중에 압도적으로 임했습니다. 또 불이 단에서 나와 단위의 번제물과 기름을 모두 태워버렸습니다. 온 백성이 이런 놀라운 광경을 보고 소리를 지르며 엎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제사를 기쁘게 받으셨고, 그 결과 백성들에게 은혜와 복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너무나 명확하게 드러냈습니다. 이것은 모두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순종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을 향기롭게 받으시고, 그 분이 어떠한 영광으로 백성들과 함께 하시는가를 보여주신 증거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영광스러운 순간이 지나고 곧바로 엄청난 비극이 이어졌습니다. 이런 비극은 있어서는 안될 일이었습니다.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불이 아닌 다른 불로 분향을 하다가 하나님께서 솟아오르게 하신 불에 삼켜지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명하신 불이 어떤 불이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생각해 보면 다른 불이란 원래 분향할 때 사용해야할 특별한 향을 만드는 법을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해 주셨는데, 그 향제조법을 지키지 않고 임의대로 만든 향을 사용해서 그렇게 부르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향을 제조하는데 들어가는 재료와 그 재료들의 배합비율까지 정확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나답과 아비후는 그것을 지키지 않고 내키는 대로 아무런 향이나 가지고 나왔고, 그렇게 자기 마음대로 그것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노하시게 했고 그들은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사건의 의미
얼핏 보면 이 사건에서 하나님은 해도 너무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향을 태우지 않은 것도 아니고, 조금 다른 향을 태웠다고 그렇게 좋은 날, 그것도 제사장을 둘 씩이나 모두가 보는 앞에서 그렇게 죽게 하실 수 있을까? 우리로서는 도무지 이해하기도, 받아들이기도 힘듭니다. 그게 하나님께서 그저 그렇게 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어서 그렇지 만약 그들이 우리 아들들이고 또 우리 대신 하나님 앞에, 그것도 처음으로 선 제사장들이었다고 한다면 이 일은 두고 두고 이해하기 어려운 일, 그리고 우리들을 억울해 하고 화나게 만드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모세는 이 일이 그 누구에게 보다도 아론을 힘들게 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잘못하면 아론도 하나님 앞에서 비슷한 일을 당할까 걱정이 되기도 했을 것입니다. 아마 아론이 그 일을 보고서 입을 열어 무언가를 말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먼저 아론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형님, 이것은 여호와의 말씀입니다. ‘나는 나를 가까이 하는 자 중에서 내가 거룩하다 함을 얻겠고 온 백성 앞에 내가 영광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은 끓어오르던 아론의 분노를 멈추게 했고, 그래서 그가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고 또 징벌을 받는 일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나는 나를 가까이 하는 자 중에서 내가 거룩하다함을 얻겠고 온 백성 앞에서 내가 영광을 얻으리라” 이 말 속에는 왜 하나님이 어찌보면 그 사소한 일로 그런 엄청난 벌을 내리셨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답이 들어 있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의 목적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그 분이 그 분만큼의 가치로 인정받고 또 대우받으시는 것, 사람들이 하나님을 그런 분으로 알고 경험하며 섬기는 것입니다. 아론을 비롯한 그의 아들 제사장들은 바로 모든 백성들과 하나님 사이에 서서 바로 그 일을 위해 섬기는 역할을 감당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가장 가까이 있는 자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더욱 영광스럽게 드러내야 했고,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합당한 영광을 돌리게 도와주어야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오히려 그 일을 소홀히 생각했습니다. 제사에 관한 본문과 제사장 위임식에 대한 본문에서 가장 자주 반복되는 말은 바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심과 같았더라’라는 말입니다. 제사장으로써 제사를 드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위임식의 절차를 거쳐서 제사장으로 임명받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제사장이 되고 또 제사를 지내면서 그가 어떤 태도로, 무엇을 가장 큰 목적으로 삼고 그 임무와 일들을 수행하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들이 그 일을 통해서 진실로 하나님의 거룩하신 분으로 여기며 드러내고 있으며, 그래서 백성들이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느냐 하는 점이 중요합니다.
추측해 보건데 나답과 아비후는 자신들이 제사장으로 세워지는 위임식 기간 동안, 또 아버지 아론이 제사를 지내고 난 후, 손을 들어 축복했을 때 거기 임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면서 거꾸로 그 일의 중심이 누구인지를 잊어버렸던 것 같습니다. 생각해 보면 정말 그랬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상 처음 있는 일입니다. 그들은 처음 제사장으로 세움받는 사람들입니다. 모든 사람들을 대신하여 하나님 앞에 서는 사람이며, 사람들의 죄용서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유지하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입고 있는 옷은 또 얼마나 화려하고 영광스럽습니까? 그 위임식의 과정 과정은 그들로 하여금 얼마나 큰 자부심을 갖게 했겠고 우쭐해 지게 했겠습니까? 그들은 얼마나 스스로를 대단하게 여겼으며 또 영광스러워 했겠습니까? 그 결과 그들은 오판을 했던 것같습니다. 잠시 잊었던 것 같습니다. 제사장은 그저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 아니라 그 제사를 통해서 참된 순종을 해야하며,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더욱 거룩한 분으로 여겨지게 하며,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장 크게 드러내야 한다는 사실을 잊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망각이 제사에 쓰일 향료를 스스로 결정하도록 하는 교만으로 이어졌고,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향이 아니라 자신이 고른 향을 하나님 앞에 들고 나왔던 것입니다. 결국 그것이 그들의 목숨을 잃게 만들었으며, 그들은 더 이상 그렇게 영광스러운 직분을 행하지 못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자신의 영광스러운 직분으로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더럽히게 되자 하나님께서는 즉각적으로 그들을 심판하셨던 것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읽고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겁고 두려운 일인지 다시금 깨닫게 되었습니다. 물론 목회자는 당시의 레위인도 아니고 제사장도 아니지만, 일정부분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맡은 임무에 대해서는 겹치는 부분이 있고, 더욱이 맡겨진 일을 통해서 행해야 하는 본질적인 일에 있어서는 차이가 없다고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제가 목회자의 일을 하면서 점점 더 강하게 가지게 되는 목회에 대한 생각이 있습니다. 정직하게 말씀드려서 저는 예전에는 제가 하는 일을 잘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잘 해야 한다는 생각이 제대로 해야한다는 생각보다 훨씬 강했습니다. 그런데, 해가 거듭되면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눈으로 제 일을 보게하셨습니다. 그러면서 깨닫게 되는 너무나 당연하고 평범한 사실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잘 하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제대로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잘 하고 싶기도 하고 잘 해야 한다고도 생각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것보다는 제대로 해야한다는 중압감이 더 무거워지는 것 같습니다.
성도들은 자신들을 섬기는 목회자가 탁월하기를 바랍니다. 설교도 심방도 상담도 돌봄도 교회를 다스리는 일도... 무슨 일이건 잘 하기를 바라고 또 그것을 요구합니다. 이런 요구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건 당연한 바램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바램은 두 가지 점에서 현실과 차이가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사람들이 모두가 다 탁월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탁월한 사람도 부르시지만 누가 보아도 영 형편없어 보이는 능력을 가진 사람도 부르십니다. 그리고 두번째는 잘 하기 위해서 노력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나 다 탁월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은사라는 것이 있습니다. 특히 목회자에게 가르치는 은사는 가장 기본적이고도 중요합니다. 그렇지만 이 기본적이고 중요한 은사에 있어서도 하나님은 차별을 두십니다. 어떤 사람은 아무리 노력해도 어느 수준 이상은 가기가 힘듭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아얘 선천적으로 그런 부분에서 이미 수준에 오른 사람도 있습니다. 제가 이런 것들을 깨달으면서 저는 오히려 자유로워졌습니다. 은사를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면, 은사의 효율성이나 겉으로 보이는 영향력들은 하나님 앞에서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반면에 하려고 하기만 하면 정말 잘 할 수 있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잘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제대로 하는 것입니다. 잘 하지 못하는 것은 능력의 차이를 핑계로 댈 수 있지만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은 아무런 핑계도 찾지 못합니다.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것은 그만큼 제대로 하려고 애쓰고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 밖에는 다른 결론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목회자로서 제대로 한다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건 다름 아닌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증거가 되어주는 것이라는 답을 얻었습니다. 잘 하려면 말만 잘해도 되지만, 제대로 하려면 말만 가지고는 안됩니다. 말 속에 삶이 녹아들어가 있어야 하고, 삶은 그 말을 뒷받침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제대로 하는 것입니다. 목사는 믿음에 관계된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목회자가 진짜 해야 할 일은 믿음으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증거자로서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성도들 앞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사람으로 사는 것이 바로 목회를 제대로 하는 것이라는 답을 얻게 된 것입니다. 특히 목회란 본질적으로 사람 앞에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생각해 보면 제 대로 하는 일은 그 어떤 일보다도 더 중요한 일이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시는 분들이 계신 줄 압니다. 항상 감사드리고 있고, 생각할 때마다 너무 큰 힘이 됩니다. 그래서 기도제목 하나를 부탁드립니다. 저를 위해서 기도해 주실 때, 제가 잘 하는 목회자, 소위 말하는 성공한 목회자가 되기 보다는 그저 제대로 하는 목회자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해 주십시오. 저도 이런 저런 유혹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인간인지라 여러분의 그런 기도가 꼭 필요합니다. 제가 나답과 아비후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목회자가 되지 않으려면 여러분의 기도의 도움이 꼭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목회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모든 성도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목회자가 성도들 앞에 서 있는 사람이듯이 성도들은 세상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목회자가 성도들에게 믿음으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드러내고 증거하며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는 사람이어야 한다면, 성도들은 불신자들 앞에서 믿음으로 사는 삶에 대한 증거가 되어주고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영광을 보이게 해 주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나는 나를 가까이 하는 자 중에서 내가 거룩하다 함을 얻겠고, 온 백성 앞에서 내가 영광을 얻으리라”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오늘날의 제사장 나라인 교회와 성도가 감당해야할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가장 중요한 소명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 살아야 하며 무엇 때문에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가장 중요한 구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론 :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십니다. 이것은 우리가 좋아하든 좋아하지 않든, 이해가 되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는 신앙의 제일원칙입니다. 우리를 만드신 것도, 우리를 부르시고 구원하시고, 또 인도해 가시는 모든 것도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할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 몫의 영광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 분의 거룩하심을 드러낼 때, 우리도 다른 사람 앞에서 거룩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8절부터 10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너나 네 자손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는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아서 너희 사망을 면하라 이는 너희 대대로 영영한 규례라 그리하여야 너희가 거룩하고 속된 것을 분별하며 부정하고 정한 것을 분별하고 또 여호와가 모세로 명한 모든 규례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르치리라” 제사장들의 임무는 단순히 제사를 지내는 것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아주 중요한 임무는 거룩하고 속된 것을 분별하고, 부정한 것과 정한 것을 분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항상 정확한 분별력을 가지고 있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그 분별력을 가지고 모든 하나님의 말씀들을 정확하게 가르쳐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러려면 꼭 필요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이 독주를 마셔서는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포도주나 독주에 취해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여러분 앞에서 맡은 소명이며, 여러분이 세상 앞에서 맡은 소명입니다. 우리는 모두 다 정확한 분별력을 가져야 합니다. 거룩한 것과 속된 것, 정한 것과 부정한 것을 정확히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분별력으로 누군가에게 그런 구분을 가르쳐야 합니다. 말을 증명하는 삶으로 삶을 뒷바침해 주는 말로 옳고 그름에 대해서 가르쳐야 합니다. 그런데, 그러려면 취해 있어서는 안됩니다. 나답과 아비후처럼 자기 자신에게 취해 있어서는 안되고, 세상에 취해 있어서도 안됩니다. 그러면, 분별력은 사라지고 무엇이 속된 것이고 무엇이 거룩한 것인지, 무엇이 깨끗한 것이고 무엇이 더러운 것인지 분간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면 다른 이들을 가르치고 인도해야 하는 임무는 고사하고 자기 스스로도 무엇을 해야 하고 하지 말아야 하는지, 그리고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알 수 없게 되고 맙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보여주어야 하는 우리들의 가장 중요한 소명은 우리와 상관없는 일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내가 어느 위치에 있건 또 무엇을 가지고 누리고 있건, 자신에게 취하고 세상에 취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없고, 우리의 삶도 영광스러운 삶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 삶이 사람들 보기에는 훌륭하고 빛나는 삶처럼 보일지 몰라도 하나님 보시에게는 이미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인 삶일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회원 여러분, 우리는 제사장 나라입니다. 그 분의 제사장으로 살아야만 하는 그 분의 백성들입니다. “나는 나를 가까이 하는 자 중에서 내가 거룩하다 함을 얻겠고, 온 백성 앞에서 내가 영광을 얻으리라”라는 말씀을 언제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나를 통해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는 일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사람들이라면 더 잘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결과를 남기는 것보다 말할 수 없이 중요한 것은 바로 그 분 앞에서 제대로 하는 것입니다. 언제나 분별력을 유지하시기 바랍니다. 자기 자신에게 취하고, 세상에 취하지 않아서 예민한 분별력을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