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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교회 설교/설교듣기

2010년 매일성경설교 17. 성중에 떡이 다할 때까지 이르니라

[사용법]

방문하시는 분 들 중에서 혹시라도 도움이 될까 적어봅니다. 

1. 읽기는 그냥 사이트에서 읽으시거나 마우스로 클릭하시면 다운로드 되는데, 그렇게 읽으시면 됩니다. 

2. 설교를 들으시려면 첨부되어 있는 mp3 파일을 위의 방법으로 다운로드 하셔서 들으시거나, 네번째 회색상자의 작은 화살표를 클릭하시면 들으실 수 있습니다. 단, 이 경우에는 중간에 스톱하시면 처음부터 다    시 시작합니다. 이 사이트의 서비스가 거기까지 밖에 안됩니다. 죄송합니다.

3. 다녀가실 때는 짧은 댓글 부탁드립니다. 예) 누구 누구 다녀갑니다. 

댓글은 저만 볼 수 있도록도 저장할 수 있습니다. 






본문 : 예레미야 37장 11-21절



서론 :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눈으로 인생을 보아야 한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고백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렇게 고백하는 모든 사람이 그 믿음이 가져다 주는 든든함과 풍성함을 알지 못하고 또 누리지는 못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추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 그 분을 믿으면서 살아간다는 것은 아주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것은 단지 그 분이 이 세상을 지으신 세상의 주인이시며, 우리의 구원자시라는 사실을 알고 동의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분을 믿는다는 것은 바로 그런 그 분이 내 인생 전체를 이끌어 가고 계시며, 그래서 내가 살면서 만나는 크고 작은 일들은 모두가 다 그 분의 섭리와 인도 속에 있다는 것을 진실로 믿는 것입니다. 단지 힘들고 어려울 때, 생각하면서 위로를 받고 힘을 얻는 정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아얘 나의 삶을 그러한 진리에 묶어놓고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 믿음이 삶의 중심에 자리잡게 하고 그런 믿음의 영향력 아래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믿음은 우리 삶을 바꾸지 못합니다. 우리 삶을 부요하게 하지도 못하고 기쁨 넘치게 하지도 못합니다. 우리가 믿는다고 하면서도 스스로의 삶에 대해서 답답해 하는 이유도 따지고 보면 바로 이런 믿음이 없고, 그 믿음에 의지해서 살아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흔히 인생을 멀리, 그리고 크게 바라보고 살아가야 한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더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고 당당하고 풍성하며 또 확신에 찬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겠지요. 그렇지만, 그게 말처럼 잘 되지 않습니다. 그래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그러고 싶어해도 우리의 시야는 여전히 좁기만 합니다. 바로 앞에 보이는 것만, 닥친 것들에만 이리 저리 반응할 수 있을 뿐이지 멀리 내다보질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러려면 반드시 나 자신의 시각이라는 좁은 틀을 벗어나야 하는데, 보통은 바로 그 일에 실패하기 때문입니다. 스스로의 눈으로 자신의 삶을 멀리 바라보고 살아가려는 노력은 원래부터 성공할 수 없는 노력입니다. 그래 봐야 자신의 눈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생을 멀리, 그리고 크게 바라보려면 내 시각이 아닌 하나님의 시각으로 내 삶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 밖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예레미야가 옥에 갇히던 당시의 상황

     예레미야는 나라가 위태할 때 부름을 받아서, 그 사실을 동족들에게 알려야 하는 소명에 자신의 전부를 바친 사람이었습니다. 아무리 말해도 알아듣지 못하는 동족들에게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전하기 위해서 정말 이해할 수 없는 기괴한 행동들까지도 해내야만 했던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을 포위했던 바벨론 군대가 자신들을 치러 오는 이집트의 군대와 싸우기 위해서 잠시 포위를 풀었을 때, 갑자기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행동을 합니다. 자기 몫의 땅을 분할받기 위해서 예루살렘을 떠나서 고향인 베냐민 지파의 땅으로 가려고 한 것입니다. 이제 곧 예루살렘과 유다가 망하게 된다는 사실은 그 누구보다도 예레미야 스스로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대다수의 사람들과는 정반대로 유다와 예루살렘이 함락될 것이니 더 큰 피해를 보고 완전히 패망하기 전에 먼저 항복해야 한다고, 하나님의 징계를 그렇게 겸손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그대로 목숨걸고 외쳤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가 갑자기 그 짧은 틈을 타서, 그런 일을 한다니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그렇게 자신의 소명에 철저했던 사람이 갑자기 곧 빼앗겨 버릴 땅이 탐이 나서 그랬다고 볼 수도 없고, 우리는 이 일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그래서, 우리가 이것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성경 다른 곳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다행이 그런 본문이 있습니다. 바로 예레미야 32장입니다. 거기를 보면 오늘 본문의 사건이 있었던 당시와 꼭 같은 상황에 대한 또 다른 기록이 나옵니다. 32장 6절 이하를 보면 하나님께서는 시위대 뜰에 갇혀있는 예레미야에게 사촌 하나멜이 찾아오면 그의 땅을 대신 사라고 명하시는 내용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거기서 그 땅문서를 항아리에 담아서 오랫동안 보관하라고 하시며, 그 문서가 많은 증인들 앞에서 그렇게 공개적으로 거래되고 보관되듯이, 바로 그 자리에서 다시 거래될 때가 반드시 올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그 내용을 그 자리, 그러니까 시위대의 뜰에서 거래의 증인이 되었던 사람들에게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곧 망할 유다입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사촌 대신에 그 땅을 사 주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유다의 멸망을 믿지 않는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예레미야에게는 정말 말도 안되는 거래죠. 그렇지만, 그 거래 자체가 사실은 나중에 그 자리에서 다시 이루어질 그 땅에 대한 정상적인 거래를 보증하는 하나님의 약속이었기 때문에, 그 행동은 예루살렘과 유다를 다시 회복시키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전하는 가장 효과적인 도구가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당신의 약속에 인감도장을 찍어주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예레미야가 고향으로 가서 자신 몫의 땅을 받으려고 한 것은 자신의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이었고, 그것 또한 하나님의 약속이 확실함을 증거하시려는 하나님의 의도가 담긴 행동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32장의 기록과 오늘 본문의 기록을 하나로 조합해 보면 이렇게 됩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서 분깃을 받으러 고향 땅에 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중간에 수문장에게 잡혀 버립니다. 흠씬 두들겨 맞고 방백들에 의해 지하토굴에 갇힙니다. 그런 그를 시드기야가 몰래 빼냅니다. 예레미야는 시드기야에게 석방에 대한 청원을 하고 시드기야는 그 청원을 받아들이지만 다시 자기 왕궁의 시위대의 뜰에 감금합니다. 32장의 기록은 그렇게 그가 시위대 뜰에 감금되어 있을 때, 있었던 일로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결국 그 일을 통해서 예레미야로 하여금 사촌의 땅을 사게 하심으로써 원래 유다사람들에게 전하려고 하셨던 약속의 메시지를 전하셨던 것입니다. 이야기가 조금 길어졌지만 이렇게 해 놓고 출발하겠습니다.


옥에 갇히는 예레미야, 시위대 뜰의 예레미야

    하나님께서는 갑자기 예레미야에게 고향으로 돌아가서 땅을 상속받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침 이집트 군대 덕분에 예루살렘의 포위가 잠시 풀렸고 그래서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고향으로 향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을 채 빠져나가기도 전에 예루살렘의 성문을 지키는 수문장에게 검문을 당합니다. 그는 예레미야가 몰래 성을 빠져나가 바벨론에 투항하려고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껏 예레미야는 계속해서 유다와 예루살렘이 바벨론에게 망할 것이라고, 그러니 싸우지 말고 순순히 항복하라고 말해 왔습니다. 그런 그가 성을 빠져나가려 하니 그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우연도 이런 우연이 없습니다. 마침 그 수문장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그렇게 예레미야와 반대되는 메시지를 전하면서 예레미야와 싸우다 저주를 받고 죽었던 거짓 선지자 하나냐의 손자였습니다. 완전히 칼자루를 쥔 원수의 자식을 외나무 다리에서 맞닥뜨린 것입니다.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수문장 이리야는 믿지 않았고 또 믿으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예레미야를 방백들에게 데리고 갑니다. 이리야의 이야기를 들은 방백들은 화를 내며 예레미야를 심하게 때리고 지하토굴에 가두어 버립니다.

    그 캄캄한 지하 토굴에서 며칠인지 모를 시간이 흐릅니다. 아직 하나님께서 시키신 일을 끝내지 못한 예레미야는 답답하고 조급해 졌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환한 빛이 예레미야의 눈을 비춥니다. 왕이 방백들 몰래 예레미야를 자신의 궁으로 데려오게 한 것입니다. 시드기야는 그 이전과의 태도를 바꾸어 예레미야에게 은밀히 질문합니다. “하나님의 다른 예언이 있느냐?” 이 질문은 그저 궁금해서 묻는 질문이 아니었습니다. 듣고 싶은 대답을 들으려고 한 질문이었습니다. 비록 그가 처음에는 바벨론의 꼭둑각시로 유다의 왕이 되었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그에게도 야심이 뒤섞인 애국심이 생겨났습니다. 바벨론으로부터 유다를 독립시키고 번듯한 왕노릇도 해 보고 싶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당시에 바벨론과 그 지역의 패권을 다투고 있었던 이집트를 이용하기로 했던 것입니다. 그는 이집트와 몰래 접촉했고, 그의 작전은 성공하는 듯했습니다. 이집트가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있는 바벨론 군대를 공격하려고 출정했고, 그로 인해 잠시 동안 바벨론 군대는 포위를 풀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시드기야가 듣고 싶었던 대답은 이집트로 인해서 예루살렘과 유다가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는 대답이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예레미야는 그런 그에게 대답합니다. “네. 있습니다.” 시드기야는 기대에 부풀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뒤를 이어지는 메시지는 이전에 그가 십년 넘게 듣던 메시지와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왕이 바벨론의 손에 붙임을 당할 것입니다.” 오히려 이전의 메시지 보다 더 직접적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시드기야는 반복되는 하나님의 말씀에도 전혀 태도를 바꾸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정치적인 역학관계만 이용할 줄 알았지, 전능하신 하나님의 굳건한 의지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자멸의 시간은 점점 가까워질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듣기 싫은 이야기를 해 놓고 예레미야는 시드기야에게 청원합니다. “내가 왕에게나 왕의 신하에게나 이 백성에게 무슨 죄를 저질렀길래 나를 옥에 가두었습니까? 이제까지 유다는 망하지 않을 것이고 예루살렘은 건재할 것이라고 떠들던 당신의 비위만 맞추던 선지자들은 다 어디 갔습니까? 그들이 하나도 남지 않고 다 도망쳤다는 사실이 이 도성의 멸망이 가까이 왔다는 것을 증명하지 않습니까? 왕이시여 저의 탄원을 들어주십시오. 저를 다시 옥으로 돌려보내지 마십시오. 제가 거기서 억울한 죽음을 당할지도 모릅니다.” 우리말 성경에 나오는 “두려워하나이다”라는 말은 원래는 없는 말입니다. 원래대로 번역하면 그저 죽을 가능성이 있다는 말 쯤으로 보면 됩니다. 왕은 공정하게 재판할 의무가 있습니다. 좋은 왕이라면 그렇게 해야 합니다. 우리말 성경으로는 예레미야가 비굴하게 벌벌 떨면서 자기 목숨을 구걸하고 있는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두려움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 정도는 아닙니다. 예레미야가 원하는 것은 자신을 공정하게 다루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잘못이 없는 자신을, 그것도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자신을 그런 식으로 죽도록 방치하는 일은 왕이 해서는 안되는 일이며, 죄없는 피를 흘리는 죄악임을 알려준 것입니다.

    뜻밖에도 시드기야는 예레미야의 청원을 받아들입니다. 물론 그를 완전히 풀어준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힘이 가장 강력하게 미치는 시위대 뜰에 거처를 마련하고 거기에 감금했던 것입니다. 성경은 그 시위대 뜰 안에 있었던 예레미야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떡 만드는 자의 거리에서 매일 떡 한 덩이씩 그에게 주게 하매 성중에 떡이 다할 때까지 이르니라 예레미야가 시위대의 뜰에 머무니라”


하나님의 섭리

    오늘 본문은 예레미야가 그의 소명을 감당하면서 짊어져야만 했던 짐이 어떠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시는 일은 그 무엇이든 감당했던 예레미야는 이번에도 당시의 상황으로는 전혀 중요해 보이지 않고 어찌보면 불필요하게 여겨질 수 있는 일을 명령받고 그것을 행하려고 막간을 이용해 예루살렘 성을 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중간에 붙잡히고 맙니다. 그것도 자신을 원수로 여기는 하나냐의 손자에게 말입니다. 그리고는 오히려 지금까지 자신이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목숨을 걸고 전했던 메시지 때문에 빼도 박도 못하는 변절자로 몰립니다. 그는 거의 죽기 직전까지 얻어 맞고 지하토굴에 갇힙니다. 모든 것이, 모든 상황이 하나님이 손에 있다면 어찌 그에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그것도 그리 중요해 보이지도 않는 이상한 일을 맡기시고 게가다 그 일을 하기도 전에 이런 말도 안되는 모함으로 인해 그런 일을 당하게 하실 수 있습니까?

    그가 그렇게 옥에 갇힌 후 한참 동안 그 누구도 그에게 신경 써 주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 일과 전혀 직접적인 상관없는 왕이 그를 은밀히 부릅니다. 사실 그 왕은 그 동안 예레미야의 메시지를 무척 귀찮게 여기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메시지가 자신의 자존심과 야망과는 전혀 일치되는 점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예레미야를 은밀히 부르고 그에게 부드럽게 하나님의 뜻을 묻습니다. 왕이 뻔히 무슨 대답을 듣고 싶어하는지 알면서도, 그리고 그 왕이 살릴수도 있고 죽일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는 그 왕에게 다시 직언을 합니다. 하나님의 뜻만을 가감없이 전합니다.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을 해 줍니다. 그렇지만, 왕은 예레미야의 청원을 받아들여 그를 다시 지하토굴로 돌려보내지 않았고, 오히려 가장 안전한 시위대 뜰에 두고 그에게 양식을 공급해 주며 그를 보호해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식으로 방백들과 알력가운데 있었던 시드기야의 자존심을 이용해서 그 성이 가장 위험하고 힘든 시기에 예레미야를 보호해 주셨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레미야가 매일 빵 한덩어리씩을 공급받을 수 있었는데, 그것이 성안에 떡이 완전히 떨어질 때까지 계속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이 완전히 망할 때까지 느헤미야는 가장 안전한 곳에서 매일의 양식을 공급받으며 보호받을 수 있었고, 동시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맡기셨던 일을 만천하에 드러나게 행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비록 그가 완전한 자유를 보장받지는 못했지만, 21절이 그가 시위대 뜰에 머물렀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가 그 안에서는 어느 정도의 자유를 누릴 수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가 그 보호를 받으며, 그렇게 양식을 공급받으며 무엇을 했겠습니까? 그저 놀고 먹었을까요?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왕과 가장 가까이 있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얻었던 그는 왕에게 끊임없이 하나님의 뜻을 전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처음 그에게 맡기신 일을 완수할 수 없는 처지가 된 예레미야를 위해서 사촌이 그를 찾아오게 하셨고, 그 궁 한 가운데서 모두가 보는 앞에서 사촌 하나멜의 땅을 대신 사게 하시고, 모두에게 그 자리에서 그 땅이 그렇게 다시 거래될 날이 올 것임을 선포하게 하심으로써 원래의 하나님의 목적도 더할나위 없이 완벽하게 이루어지게 하셨던 것입니다.


소명과 현실

    성도에게는 누구에게나 소명이 있습니다. 구체적인 직업이나 역할에 대한 소명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성도로서 성도답게 살아가야 하는 소명,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살아서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드러내야 할 소명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소명을 따라 살기가 그저 쉽지만은 않다는 것입니다. ‘소명’은 우리가 ‘현실’이라고 부르는 것과 부딛힐 때가 많습니다. 소명은 변하지 않지만, 그 소명을 이루어 가야할 환경과 상황은 시시각각 그것도 긍정적이기 보다는 부정적으로 변할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현재를 두려워하고 미래를 근심하게 됩니다. 무엇이 옳은지 알지만 그것을 택하기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려면 뻔히 손해보고 불편하며 오해받을 길을 가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소명대신 현실 쪽으로 기울게 됩니다. 소명에 따라 사는 것보다는 현실을 따라가는 삶이 더 안전하고 더 풍성하며, 더 확실하다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성도의 소명을 따라 살아가는 삶보다 현실을 따라가는 삶이 더 안전하고 더 풍성하며 더 확실히 보장받은 삶이 될까요? 반대로 소명을 따라 사는 삶은 위험하고 불안하며 손해보고 궁핍한 삶이 될까요?

    제가 얼마 전에 교회의 한 청년과 이야기를 하면서 참된 믿음이 무엇이고, 그 믿음의 진짜 능력이 무엇인지 설명해 주고 나서 “그런데, 정말 이 믿음을 가지고 싶어요? 정말 이 믿음을 원하나요?”라고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네. 가지고 싶어요. 그렇지만, 솔직히 겁나요?” 속으로 ‘어라? 그 겁을, 그 현실을 향한 두려움을 이기게 하는 것이 참 믿음인데 오히려 그 믿음을 가지는게 겁이나다니 무슨 말이지?’라고 생각하면서 “왜 그렇죠?”라고 물었더니 “그 믿음이 좋기는 할 것 같은데, 그래서 가지고 싶기는 한데, 그런 믿음을 가지면 지금까지 누리고 있는 것들을 다 포기해야 할까봐 겁이 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도 이런 걱정을 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그래서, 참된 믿음을 원하기는 하면서도 선뜻 원하노라고, 주십사하고 기도하며 좇아가지 못하는 분이 계십니까? 소명을 따라 살아가는 삶이 좋은 것은 알겠는데, 그런 삶을 살게 해 줄 믿음이 생겨나면 지금까지 나를 지탱해 주고 있었던 것, 내가 누리고 있었던 것들을 내려놓아야 할까봐 걱정이 되시는 분들이 계십니까? 혹시라도 아주 작은 부분이라도 그런 근심과 염려 때문에 믿음의 길로 나아가지 못하시는 분들, 그리고 소명의 길을 따르지 못하시는 분들이 계시다면 오늘 본문에 귀를 기울여 보시기 바랍니다.

    회원 여러분, 오늘 본문은 우리의 그러한 생각이 진짜 현실과는 정반대의 기우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성경의 확실한 증거입니다. 흔히들 전시에 가장 안전한 곳은 군대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전쟁의 최일선이 사실은 상식적인 판단과는 다르게 가장 안전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한국전쟁 때 일부러 군대에 입대한 사람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현실에서는 어떤지 모르지만, 영적으로 볼 때 이 말은 틀림없는 진리입니다. 소명을 따라 살아가는 삶, 참으로 성도답게 살아가는 삶이야 말로 가장 안전하고 든든하며 또 풍성하기까지 한 삶이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거기가 바로 가장 치열한 영적인 전쟁터이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두신 우리의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얼핏 생각하면 정반대일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위험을 피하고 모험을 피해야 가장 안전할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가장 위험한 곳, 그래서 가장 많은 영적인 모험이 기다리고 있는 곳이야 말로 가장 안전한 곳입니다. 왜냐하면 그 만큼 거기는 하나님의 함께 하심과 편들어 주심이 절실한 곳이고, 그래서 하나님은 거기서 가장 강력하고 확실하게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소명 때문에 기꺼이 거룩한 싸움에 뛰어들고 그 소명을 따라 사느라고 우리가 안전이라고 부르는 것, 풍요라고 부르는 것을 내려놓는 선택을 할 때, 하나님은 그 강한 팔로 우리를 더 강하게 붙들어 주시고, 친히 우리의 완전한 방패와 산성이 되어 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이 아닌 믿음 안에서만 누릴 수 있는 은혜의 역설입니다. 은혜를 상식적인 수준에서 이해하니 이러한 은혜의 풍성함을 놓치는 것입니다.

    모든 거짓 선지자들이 왕과 백성들이 듣고 싶어하는 말들만을 늘어놓을 때, 예레미야는 홀로 서서 그들과 정반대의 메시지를 외쳤습니다. 그게 그의 소명이었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핍박과 오해를 받았지만 그래도 그는 그 일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게 그의 소명이었기 때문입니다. 또 거의 모든 거짓 선지자들이 유다와 예루살렘을 버리고 도망칠 때, 예레미야는 그 성에 남아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게 그의 소명이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는 시드기야 앞에서도 그는 결코 타협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게 그의 소명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렇게 그를 부르시고 그에게 하나님의 일을 주신 길에서 끝까지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그의 소명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가 그렇게 소명에서 벗어나지 않고 인내하자 하나님은 그를 특별하게 보호해 주셨습니다. 모함을 받고 고통을 받았지만 끝까지 자신의 소명에 충실한 그를 하나님께서는 가장 안전하고 풍성하면서도 오히려 가장 효과적으로 사역할 수 있는 환경 속으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런 그를 통해서 하시고자 하셨던 모든 일을 뜻대로 이루어 가셨습니다.

    여러분이 어떤 기업의 오너라면 여러분은 어떤 사람을 최선을 다해 지원하고 또 지지하겠습니까? 자신의 현실과 상황을 핑계로 회사 일에 게으르고 적당히 일하는 사람이겠습니까?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묵묵히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겠습니까? 물으나 마나죠. 누구나 답은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하나님이라고 다를까요? 하나님은 어떤 사람에게 더 강력하고 특별하며 풍성한 능력과 은혜를 공급해 주시겠습니까? 어떤 사람을 더 최선을 다해서 보호하시고, 더 강한 팔로 완벽하게 인도해 가시겠습니까? 그러한 인도하심과 보호하심을 믿으며 보이는 현실이 아니라 부르신 소명과 목적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아닐까요? 끝까지 그 길을 가는 사람들 아닐까요?

    물론 소명을 따라 살아가는 삶, 소명을 위해서 모험하며 살아가는 삶은 결코 쉽고 편안하지만은 않습니다. 그 길은 험하고 거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만큼 하나님께서도 특별하고 강한 은혜로 함께 해 주십니다. 특별한 보호와 빈틈없는 인도를 허락하시고, 그 속에서 그런 사람들만이 아는 확신과 비밀스런 기쁨을 누리게 하십니다. 상상할 수 없었던 놀라운 섭리를 경험하게 하십니다. 악을 변하여 선이 되게 하시고, 죽음의 위기가 오히려 가장 안전한 보호로 바뀌게 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그렇게 자신을 위해 일하시는 것을 직접 볼 수 있는 특권을 주십니다.

결론 : 소명의 삶이 가장 참되고 가장 견고한 삶이다. 믿자! 믿음을 더하자!

    우리의 인생을 멀리보고 살아가게 하는 눈, 그래서 우리를 더욱 온전하게 만들어 주는 눈은 우리 안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눈은 언제나 온전치 못하며, 세상이 씌워주는 일그러진 랜즈는 우리의 시력을 더욱 망가뜨릴 뿐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눈이 아닌 하나님의 눈으로 우리의 삶을 볼 수 있을 때라야 비로소 멀리 보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눈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의 랜즈를 통해 바라보아야 우리의 삶이 제대로 보이며, 그 안에서 나를 가장 완벽하게 인도해 가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밝히 볼 수 있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그러한 삶이 어떤 삶이 될 것인지를 우리에게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거부할 수 없는 증거가 있는 영원한 하나님의 약속으로 우리 눈 앞에 들이밀고 있습니다.

   회원 여러분, 믿음의 열매는 아무런 땅에서나 자라나지 않습니다. 믿음의 열매는 인내라는 토양에서만 자라납니다. 그 인내가 믿음의 진지함을 판가름하는 시금석이 되기 때문입니다. 끝까지 견디는 자만이 참 믿음의 열매를 맛 볼 수 있습니다. 그 열매가 너무 귀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마지막까지 믿음을 가지고 소명의 길을 가는 자에게만 허락해 주십니다. 그런 줄 알지만, 너무 잘 알고 있지만 그래도 걱정 되십니까? 여전히 두려우십니까? 그렇다면 오늘 본문의 예레미야를 기억하십시오. 하나님 안에서 그 어리둥절한 행복과 만족을 누렸던 예레미야를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가장 위험한 와중에 가장 확실한 보호를 공급해 주셨던 하나님, 가장 궁핍하고 불안한 시기에 가장 풍성한 기적의 공급자가 되어 주셨던 하나님을 기억하십시오. 언약의 하나님은 영원히 변함이 없으십니다. 예레미야의 하나님은 우리들의 하나님이십니다. 성중에 떡이 다할 때까지 예레미야를 먹이셨던 그 하나님이 바로 오늘 저와 여러분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가 변치않고 소명의 길을 간다면 하나님도 우리를 변치않고 보호해 주실 것입니다. 그 소명의 길을 가게 하시기 위해서라도 가장 강한 팔로 붙드시며 가장 기이한 섭리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이 진리의 약속에 여러분의 믿음을 합하십시오. 약속은 믿어야만 합니다. 믿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위로는 될지 몰라도 능력은 될 수 없습니다. 약속은 믿는 자에게만 효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그 약속을 믿고 자신의 삶을 거기에 의탁하는 자에게만 능력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이런 특별한 은혜를 누리며 사는 행복한 소명자들이 되시기를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