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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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고린도 후서 1장 15-22절
서론 : 어제의 복습
오늘은 어제 약속대로 어제 다 말씀드리지 못한 부분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본론으로 넘어가기 전에 어제 함께 묵상했던 내용을 다시 한 번 정리하겠습니다. 우리가 오늘도 변함없이 살펴보는 말씀은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라는 위대한 성경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무엇이든지, 그리고 얼마든지 YES가 됩니다. 우리의 모든 과거는 우리가 알기도 전에 하나님의 손에 있었고, 그 분의 그 넉넉한 YES 안에서 이어져 왔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과거에는 NO가 없습니다. 끝까지 부정적인 것도 없고 끝까지 우리 삶에 해가 되기만 하는 것도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YES의 은혜요 또 능력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삶은 자유하지 못했으며, 부요하지 못했습니다. 그 은혜를 누리며 살지 못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러한 하나님의 YES에 대해서 YES하지 못한, 우리의 불신앙에 있었습니다. 그 불신앙 때문에 하나님의 YES의 능력과 은혜를 누리지 못한 것입니다.
참된 믿음,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믿는 믿음으로 나의 과거를 보면 거기에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그리고 완전하신 섭리만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나의 모든 과거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서 YES라고 말할 수 있을 때, 우리의 과거는 우리에게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과거에 대한 감정과 생각이 완전히 달라지게 됩니다. 이렇게 과거에 대해서 YES한 사람은 그 믿음을 가지고 자신의 현재에 대해서도 역시 YES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현재의 삶을 대하는 우리의 마음과 태도를 완전히 바꾸어 놓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바로 오늘 나의 하나님이심을 깨닫게 되고, 현재의 부족함과 연약함, 힘든 모든 것들조차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나에게 주어진 것임을 믿게 됩니다. 그 모든 연약함과 부족함 조차도 현재의 나에게는 충분한 하나님의 은혜이며, 그런 것들을 통해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가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됩니다. 웃으면서 자신의 연약함과 부족함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모두 과거의 은혜를 기억하며 그 은혜에 만족하게 될 때 일어나는, 그리스도 안이 아니고는 도저히 상상할수도 없는 기적입니다.
나의 미래에 대해서 YES하라
하나님의 은혜는 얼마나 풍성한지 모릅니다. 그 은혜가 무한하신 하나님, 영원하신 하나님에게서 흘러나오는 만큼 그 은혜는 다함도 부족함도 없습니다. 그 은혜는 우리의 처음부터 지금 그리고 미래, 나아가서 영원까지 계속됩니다. 언제나 풍성하게 흘러넘칩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우리의 과거의 모든 것들에 대해서 하나님께 YES라는 대답을 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우리의 현재에 대해서 YES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 YES는 놀랍게도 우리의 미래로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고, 현재는 지금 경험하고 있어서 덜할지 모르지만 미래는 여전히 미지의 영역에 속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미래에 대해서 걱정하고 두려워하게 됩니다. 미래를 생각한다는 것은 마치 빛 하나 없는 캄캄한 공간에 홀로 버려지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어디로 가야할지 또 거기에는 무엇이 있을지 아무 것도 모릅니다.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을 진행해 보지만 여전히 앞이 불확실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근심과 걱정은 우리가 미래를 생각할 때 반드시 우리를 찾아오는 불청객이 됩니다. 문제는 성도들 조차도 이 근심과 걱정을 우리가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이러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처리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갈 수도 없고, 새로워진 우리의 양심을 지키며 성령님의 인도를 받지도 못하고 다른 이들을 진실로 사랑하는 일에도 실패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대신 우리의 삶은 꼭 가야하지만 이것이 두렵고 저것이 걱정되어서 가지 못하는 선한 길들로 가득차게 될 것입니다.
몇 주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이 실은 모두가 다 이 두려움 때문입니다. 사탄이 이 두려움을 건드려 우리를 무기력하게 만들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결단과 소원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데 실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룩한 삶을 살아가려면 우리는 반드시 미래의 근심과 걱정을 다스리고 정복할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해야 합니다. 주님은 두려워하는 제자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이 말씀은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으면 근심할 필요가 없다, 근심하지 않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거꾸로 뒤집으면 근심은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불신앙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근심과 염려는 불신앙입니다. 그건 당연한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죄이기 때문에 항상 싸우고 처리해야만 하는 우리 영혼의 대적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우리의 미래의 삶의 불확실성이 가져다 주는 이 근심과 염려를 이겨낼 수 있을까요? 근심과 염려가 없는 삶을 살 수 있을까요? 물론 있습니다. 우리가 평생 계속해서 우리의 믿음을 무너뜨리려는 사탄의 공격에 맞써 믿음의 싸움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조건만 만족시킬 수 있다면 우리는 그렇게 살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근심에 관한 예수님의 모든 말씀은 거짓이 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한 번 따라해 보십시오. “믿음은 미래의 근심과 걱정을 충분히 이겨낼 수 있다.” “참된 믿음은 우리를 근심과 걱정이 없는 삶으로 인도해 준다.” 믿으십니까? 믿으셔야 합니다. 믿을 때에만 그런 은혜를 받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나의 과거에 대한 YES가 나의 미래에 대한 근심과 걱정을 이기게 해 줄 수 있을지 살펴보겠습니다. 여러분이 만약 이 믿음을 가지게 되고, 그 믿음을 위한 싸움을 계속하기만 한다면 여러분은 평생 여러분의 발목을 붙들고 늘어졌던 그 근심과 걱정으로 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입니다. 원리는 과거에 대해서 YES하는 것이나 현재에 대해서 YES하는 것이나 미래에 대해서 YES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삶 속에서 이루어질 모든 언약에 대해 이미 YES하고 하셨으며, 그 YES안에서 우리의 삶을 이끌어 가고 계십니다. 문제는 미리 말씀드렸다시피 미래가 아직은 미지의 세계이기에 미래에 대해서 그것을 믿기가 그렇게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 미래에 대한 무지가 우리를 불안과 근심 속으로 몰아넣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시간이란 게 무엇입니까? 우리에게는 이 시간이라는 것이 절대적인 것같습니다. 과거는 과거고 현재는 현재이며 미래는 미래인 것만 같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러분은 우리가 지금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속에 거의 동시에 거하고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지금 이 순간에도 시간은 지나가고 있습니다. 미래가 현재가 되고, 그 현재는 곧 바로 과거가 됩니다. 우리가 모르기 때문에 두려워하고 또 근심하게 되는 미래는 우리가 그 미래를 생각하는 순간 이미 이미 경험한 과거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되돌아 보는 과거의 어느 시점도 따지고 보면 언젠가는 우리가 전혀 몰랐었던 미래입니다. 그 미래가 현재가 되었고, 이름이 바뀌어 과거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시간은 언제나 그럴 것입니다. 우리가 과거, 현재, 미래를 나누어 놓아서 그렇지 그런 점에서 보면 시간이란 사실 한 덩어리입니다. 결코 나누거나 분리할 수 없는 한 덩어리입니다. 게다가 시간이라는 것이 항상 변하고 움직이는 사람들에게는 큰 의미가 있고 큰 문제가 되어도 영원하신 하나님께는 전혀 의미도 없고 문제될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시간에 매이는 분이 아닙니다. 그 시간을 만드신 시간의 창조자이시고 주인이시며, 그 시간을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시간과 상관없이, 시간 위에서 움직이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은 영원하시다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우리 신앙의 문제는 우리가 아는 하나님과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다르다는 것에서 생겨납니다. 하나님에 대한 진리는 우리 믿음의 내용이 되어야 하고, 우리 삶의 기초와 기둥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지를 못한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의 신앙이 빈궁해지고 능력없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은 항상 머리 속의 지식이 아닌 그 지식에 더해진 참된 믿음을 통해서 주어집니다. 우리가 어떤 하나님을 진실로 그런 하나님으로 믿으면 하나님은 우리 삶에 그런 은혜와 능력을 주십니다. 아주 풍성하게 부어주십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잘 압니다. 또 믿습니다. 그런데, 그게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걱정 속에서 현재를 살고 있는 나에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고 무슨 힘이 있습니까?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만약 하나님의 영원하심이 나의 삶에 구체적이고 생생한 영향을 미쳐 내 삶을 풍성하고 든든하게 만들지 못하고 있다면 나는 하나님을 영원하신 분으로 믿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그것에 동의하고 있을 뿐입니다. 성도 여러분, 시간에 매여있지 않고 시간의 지배를 받지 않으시는 하나님은 변함이 없으십니다. 그리고 그 변함없으심 속에서 우리의 삶을 다스려가시고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친히 우리의 공급자가 되어 주십니다. 과거가 그랬다면 현재도 그렇게 하고 계신 것이고, 미래도 그럴 것입니다. 아니 그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지 않으시다면 하나님은 결코 영원한 분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를 영원히 신실하신 사랑으로 사랑하시는 분으로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걱정에 빠져 살아가고 있다는 것은 지금까지 내 삶을 이끌어 오시고 채워오신 하나님과 하나님의 은혜를 부정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변함없으심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우리의 미래에 역사하시고 변함없이 함께 하실 그런 하나님으로 밖에는 달리 믿을 길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그렇게 믿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믿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제는 우리가 과거의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YES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왜 그것이 그렇게 중요합니까? 왜 우리가 반드시 그 믿음에 이르러야 합니까? 무엇보다도 그 믿음을 가질 때에만 우리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제대로 믿는 첫번 발걸음을 내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과 하나님은 변함없이 신실하시다는 믿음이 합해질 때, 우리는 우리의 현재 뿐만 아니라 우리의 미래에 대해서 기쁜 마음으로 YES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 YES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우리의 미래로 흘러들어오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이 YES가 있다면 우리가 결코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는 미래에 대한 고질적인 근심과 걱정, 그것으로 인한 불안함과 두려움, 그리고 욕심과 집착은 자연적으로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아닐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한 번 해 보십시오. 분명히 그렇게 됩니다. 내 건강, 내 삶, 내 죽음, 내 자녀, 내 구원, 내 사업... 이런 것들에 대한 두려움과 근심이 점점 희미해 지고 힘을 잃게 됩니다. 그러면 그런 것들로 우리 삶을 얽어매고 있었던 사탄의 시험들도 힘없는 시험이 되고 맙니다. 이론이 아닙니다. 실제입니다. 이건 제가 경험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있게 그렇다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에게 가능했다면, 여러분에게는 더더욱 가능하겠기에 더 자신있게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혹시 난 걱정이 없기 때문에 이미 저런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여러분 제가 이 말씀 덕분에, 그리고 이 약속이 믿어지기 시작하면서 깨달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건 걱정할 것이 없거나 혹은 걱정거리가 생겨도 그것을 커버할만한 다른 무언가가 있기 때문에 걱정이 되지 않는 것은 진실로 걱정이 없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건 평안을 가장한 불안입니다. 언제든지 깨어지고 없어질 수 있는 모조품 평안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평안은 그런 평안이 아닙니다. 그런 종류의 근심없음이 아닙니다. 미래를 전혀 모르지만, 그 미래를 위한 아무런 보장도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혼 속에 생겨나는 근심없음입니다. 그건 하나님께서 어느 상황에 가져다 놓으셔도 그 분의 선하심과 그 때 공급해 주실 완전한 은혜를 믿기에 생겨나는 평안입니다. 바울의 고백처럼 죽음도 하나님의 완전한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임을 알기에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여길 수 있는 평안입니다.
사랑하는 회원 여러분, 하나님께는 과거나 미래가 전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우리의 과거에 대해서 충분히 YES라고 하지 못했을 때에도 하나님은 우리의 실수, 우리의 연약함, 우리의 부족함, 심지어 우리의 죄로 인한 결과까지... 그 모든 것들을 사용해서 우리의 삶을 지금까지 이렇게 실수없이 인도해 오셨다면, 우리가 우리의 과거에 대해서 YES하고, 그래서 현재와 미래에 대해서 YES한 이후에 그런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완전하신 은혜 가운데 이루어져 갈 우리의 삶은 얼마나 풍성하고 얼마나 든든하며 얼마나 만족한 삶이 되겠습니까? 제가 장담하건데 여러분이 이런 믿음에 이른다면, 여러분 스스로도 “세상에 이런 삶도 있나?”할 정도로 놀라고 감탄하게 될 것입니다. 정말 흔들리지 않는 평안 가운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수많은 사탄의 유혹에 대해서도 훨씬 쉽게 승리하게 될 것이고, 무엇보다도 그 믿음을 통해 우리의 미래의 삶을 믿는 자에게만 주시는 특별한 은혜들로 채워가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로 인하여 아멘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얼마든지 예가 되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느니라” 이 구절의 뒷 부분을 보면 “아멘”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성경은 헬라어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아멘 만큼은 히브리어로 그냥 씁니다. 그것은 “예”라는 말이 “아멘”이 담고 있는 의미를 모두 담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멘은 단순한 동의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진지하고 깊이있게 동의하는 긍정입니다. 마음 깊은 곳으로 부터 나오는 신중하고 확고한 하나님을 향한 “예”가 바로 “아멘”입니다. 본문은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은 우리 삶의 가장 중요한 목적입니다. 그리고 그런 삶만이 진정으로 영광스럽고 만족스러운 삶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우리의 아멘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말합니다.
아멘은 언제 사용합니까? 보통 때도 사용하지만 특히 기도할 때 많이 사용합니다. 기도를 마칠 때, 아멘합니다. 그렇다면 이 아멘은 무슨 의미로 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기도 끝에 무엇을 긍정하면서 아멘하게 되는 것일까요? 또 그 아멘은 어떤 아멘이어야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아멘이 될 수 있을까요? 기도는 주로 우리의 미래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비록 현재의 부족함이 문제일지라도 그 미래의 은혜를 통한 해결을 기대하면서 기도드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특별히 미래의 은혜를 간구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이런 아멘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향한 모든 약속에 대해서 충분히 YES하셨으니가 우리가 할 수 있고, 또 해야만 하는 것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저 아무런 근거 없이, 기도했으니까 다 잘 될 것으로 믿고, 내 원대로 될 것으로 확신하면서 아멘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나의 모든 삶에 대해서 YES라고 하셨다는 것을 알고 믿기 때문에, 미래의 은혜를 구하면서도 그 믿음으로 하나님의 그러한 YES에 대해서 충분히 아멘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 드릴 때 실은 우리 기도 속에서 다음과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 저를 변함없이 사랑해 주실 겁니까?” “그렇다.” “하나님 항상 저와 함께 하시겠습니까?” “그렇다.” “하나님, 항상 저를 보호해 주시겠습니까?” “그렇다.” “하나님, 항상 저의 공급자가 되어주시겠습니까?” “그렇다” “하나님, 항상 가장 적절한 때에 가장 적절한 은혜를 주시겠습니까?” “그렇다” “하나님, 저의 믿음을 지켜주시겠습니까?” “그렇다.” “하나님, 저를 천국으로 인도해 주시겠습니까?” “그렇다.” 우리의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YES는 영원히 그리고 지루함이 없이 계속됩니다. 우리가 듣게 되는 것은 언제나 “그렇다”입니다. 우리의 기도 중에 드리는 아멘은 바로 하나님의 “그렇다”는 말씀에 대한 아멘입니다. 단순히 우리의 기도를 그대로 이루어 주실 것을 믿는다는 아멘이 아니라 하나님의 그렇다에 대한 아멘입니다.
하나님의 그렇다는 응답은 단순히 우리가 원하는 것을 다 주시겠다는 허락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 보시기에 가장 좋은 것을 주시겠다는 허락입니다. 네가 믿기만 한다면 결코 너의 삶에는 영원한 NO는 없게 하겠다, 결국 YES가 될 것들만, 가장 크게 YES될 것들만 네 삶에 허락하겠다는 의미의 YES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것에 대해서 이미 YES하셨음을 믿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YES에 대해 우리의 YES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런 아멘은 참된 믿음의 표현이기 때문에 그러한 아멘을 통해서 우리 삶은 하나님께서 믿는 자에게 주시는 가장 선하고 좋은 것들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은 바로 이런 아멘이 하나님께 가장 큰 영광이 된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아멘함으로써 득을 보게 되는 것은 우리 쪽인데 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게 됩니까? 주신 쪽은 하나님이신데 어떻게 그러한 주심이 그 분께 왜 가장 큰 영광이 됩니까? 그것은 이런 이치입니다. 우리에게는 우리가 느끼는 당장의 필요가 있습니다. 미래에 대한 필요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필요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 미래에 배푸실 은혜를 구합니다. 그것을 기도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참된 성도는 압니다. 내가 원하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내 삶에 허락하실 것들이 훨씬 좋고 완전할 것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래서 지금 내가 기도를 드리는 것들이 그대로 이루어져도 좋지만, 다르게 응답되는 것은 오히려 더 좋고 완전한 것이라는 것을 확신합니다. 그래서, 아멘 합니다. 하나님이 내 기도를 그대로 들어주실 것에 대해서가 아니라 내 기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주실 가장 좋은 것, 가장 풍성한 것, 가장 완전한 은혜에 대해서 아멘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YES하신 것들에 대해서 아멘으로 응답하는 것입니다. 이런 아멘은 하나님께 대한 완전한 신뢰의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베풀어 주실 은혜에 대해서 완전히 만족한다는 만족의 고백입니다. 이것은 결국 나는 하나님으로 충분하며, 하나님의 은혜로 충분하다는 고백이 되는 것이고, 하나님만이 최고의 만족이 되신다는 고백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하나님을 유일하신 나의 하나님으로, 내가 믿고 따르며 섬길만한 가치가 있는 보배로운 분으로 영접하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라고 자주 말합니다만, 하나님께서 가장 큰 영광을 받으시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이런 하나님으로 믿고 의지할 때입니다. 온전한 의지로 참된 만족을 표현할 때입니다. 하나님의 YES에 대해서 아멘으로 응답할 때입니다. 그래서 이런 아멘은 하나님께 가장 큰 영광을 돌려드리는 아멘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면, 하나님의 은혜는 얼마나 놀랍고 큰지요? 이 진리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은 또 얼마나 다함없이 풍성한지요? 하나님은 어떤 일이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 그리고 하신 약속들에 대해 만족할 때, 그 믿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장 적절하고도 완전한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또 바로 그 일을 통해서 가장 큰 영광을 받으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필요가 완전히 채워지는 것을 경험하며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시면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실로, 진실로 하나님을 신뢰하며 믿는다면, 그래서 그 분으로 인하여 만족을 누린다면 이 놀라운 두 가지 일이 동시에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마다 이런 아멘을 드릴 수 있다면, 우리는 그 기도를 통해 우리의 유익과 만족,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동안 그렇게 풀기 어려워했던 숙제가 한 번에 풀리게 되는 것입니다. 회원 여러분, 세상에 이렇게 유익하면서 쉬운 일이 어디에 있습니까? 또 이렇게 영광스러운 일이 어디에 있습니까?
기도 중에 하나님께 드리는 그 분을 향한 아멘은 과거에도 그러했으며 지금도 그러하시고 또 장래에도 동일하실 하나님께 대한 최고의 만족의 표현이며 믿음의 고백입니다. 이제 우리의 YES는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아멘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과거에 대해서도 아멘해야 하며, 현재에 대해서도 아멘해야 하고 또 미래에 대해서도 아멘 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그 아멘이 하나님께 최고의 영광이 되어지기 때문이지만, 거꾸로 그 아멘이 없다면 우리에게 참된 믿음은 없는 것이고, 그 아멘만이 우리의 과거를 새롭게 하고, 현재의 불만을 잠재울 수 있으며 나아가서 나의 모든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근심을 사라지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아멘만이 지극히 풍성하시고 완전한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의 삶을 채우는 능력있는 믿음의 표현이 되기 때문입니다. 왜 나의 미래에 대한 아멘이 우리에게서 미래에 대한 걱정과 근심을 사라지게 할까요? 이제 그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건 과연 누가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 온전히 아멘할 수 있는가를 생각해 보면 금방 분명해 집니다. 누가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 진실로 아멘할 수 있습니까? 답은 자신의 미래를 향한 하나님의 미래에 대해서 온전히 만족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어떤 미래가 되었건 그 미래는 하나님의 완전한 은혜 가운데 있기에 거기에는 결코 NO가 없을 수 없다는 사실을 진실로 믿기에 자신의 그런 미래에 대해서 만족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아멘할 수 있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증거가 바로 만족입니다. 충만한 만족이 그 사람의 마음을 채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만족이 그에게서 근심과 걱정을 사라지게 합니다. 우리의 근심과 걱정은 무엇에 대한 것들입니까? 모두가 다 미래의 결핍과 부족에 대한 것입니다. 지금은 있습니다. 그렇지만 미래에는 어떨지 확신이 없습니다. 미래에 나에게 꼭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게 나에게 주어질지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근심이 생기고 걱정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미래에 대한 만족이 있으면 어떨까요? 이미 충분한 만족이 있다면 어떨까요? 그래도 근심과 걱정이 설 자리가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미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 만족하는 사람에게는 근심과 걱정이 설 자리가 없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풍성하심과 완전하심 속에서 이루어져 갈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 만족하게 되면 어떻게 보면 근심과 걱정하고는 더 이상 억지로 싸울 필요가 없어집니다. 근심과 걱정은 우리 안에서 자신이 살아갈 집을 얻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또 한 가지 정말 신기한 복을 얻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수많은 죄의 유혹으로부터 적어도 이전보다 훨씬 쉽게 자유로워질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저절로 말입니다. 믿기지 않으시죠? 에이, 내가 수 십년 동안 죄와 내 죄와 싸웠어도 그런 일이 거의 일어나지 않았는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어?라고 생각되시죠? 그러나, 그건 모르는 사람이 모르는 세계에 대해서 하는 말입니다. 회원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잘 이기지 못하는 죄들에 대해서 우리가 취약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이 우리에게 만족을 주겠다고 약속하고 있고, 적어도 만족을 줄 것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 아닙니까? 실은 죄가 아니라 그 죄가 가져다 줄 만족 때문에 우리가 그 죄를 그렇게 버리기 어려워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말입니다, 여러분. 만약에 이미 마음이 꽉 차있다면 어떻겠습니까? 그래도 죄가 여전히 거부할 수 없는 힘을 가지게 될까요? 그럴 수가 없겠죠? 죄가 유혹하는 힘의 근원은 만족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만족에 대한 거짓 약속입니다. 사람이 그 약속에 속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왜 그렇게 속을 수 밖에 없을까요? 만족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그 만족을 어디서 얻어야 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만족을 주겠다고 약속하는 것들, 그리고 만족을 줄 것처럼 생각되는 것들이 있으면 그리로 기울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으로, 그 분이 베풀어 주실 미래의 은혜로 만족할 수 없는 사람들이 왜 죄와 싸워 이길 수 없는지 아시겠습니까? 그리고 왜 그런 만족이 있으면 죄를 훨씬 쉽게 이길 수 있는지 아시겠습니까? 여러분이 취약한 유혹이 무엇입니까? 어떤 유혹이 여러분을 가장 쉽게 무너지게 합니까? 돈 입니까? 명예입니까? 지식입니까? 능력과 힘에 대한 욕심입니까? 자존심입니까? 자기 의로움입니까? 그것이 무엇이든 우리로 우리의 미래에 대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아멘할 수 있게 해 주는 그 놀라운 만족은 그 모든 유혹에서 우리를 훨씬 더 자유롭게 해 줍니다. 어찌보면 치열하게 싸울 필요도 없이 말입니다. 이건 기적이 아닙니까? 정말 이해할 수 없는 기적 아닙니까?
우리는 어떤 죄가 있으면 그 죄와 직접 싸우려 듭니다. 그것도 너무 귀한 싸움이지만 실은 그런 전략으로는 절대로 죄를 이길 수 없습니다. 죄가 우리의 미래에 대한 우리의 불안을 이용한다면, 우리도 그 불안을 만족시킬 수 있는, 온전히 만족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세상에는 없습니다. 우리를 가득 채우고 그래서 영원히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은 하나님 밖에 없으며, 그 하나님께서 주시는 풍성한 은혜, 다함이 없는 은혜 밖에 없습니다. 믿음은 바로 이 은혜를 우리에게 가져다 주는 통로입니다. 우리가 믿을 때에 미래의 삶에 대한 만족이 현재의 우리의 영혼 속으로 흘러들어와 미래에 대한 근심과 걱정을 사라지게 하고, 그것들을 이용해서 우리를 유혹하는 죄의 힘을 무력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물론 제가 한 번 이런 만족을 얻으면 그것이 그냥 내버려 두어도 천년만년 남아있다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다들 은혜는 받기보다 지키기가 더 어렵다고 말씀합니다. 이 은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만족이라는 은혜도, 그리고 이 은혜가 가져다 주는 능력도 계속해서 지키려는 힘씀이 없다면, 그 싸움이 없다면 곧 바로 사그라들고 맙니다. 왜냐하면 사탄은 언제나 우리의 영혼을 밀 까부르듯이 하려고 청구하며, 우는 사자처럼 호시탐탐 노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과 그 분의 은혜로만 만족하려는 믿음의 싸움을 계속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다시 제 자리로 돌아갈 수 밖에 없게 됩니다. 그러나 그 싸움을 그만두지 않는다면 그 만족은 계속해서 더욱 커져갈 것이고 우리를 진실로 자유케 할 것입니다.
최종결론과 요약
어제와 오늘, 우리는 한 가지 믿음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 믿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나의 모든 인생에 대해 YES하신 하나님의 YES에 대해서 YES하는 믿음이며, 우리의 미래에 주실 하나님의 은혜로 만족하며, 그 은혜로 충분하다고 아멘할 수 있는 믿음”입니다. 저는 이 믿음만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믿는 믿음이며 그래서 참된 믿음이라고 불릴 자격이 있는 믿음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구원하기에 충분한 믿음, 그리고 우리를 만족과 능력 가운데 거하게 하기에 충분한 믿음이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사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믿음의 진수라고 믿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말씀드린 모든 내용은 저의 작품이 아닙니다. ‘야, 장목사 설교 잘한다’라고 감탄하시라고 말씀드린 것이 아닙니다. 이 모든 진리는 바로 어제 제가 말씀드린 “장래의 은혜”라는 책에 들어 있습니다. 물론 제가 말씀드린 모양대로는 아닙니다만, 저도 그 책을 통해서 얻은 진리이며 그 진리에 대한 증거입니다. 제가 이 진리에 저의 믿음을 더하기 시작했을 때, 제가 여러분에게 증거했던 모든 놀라운 일들이 저의 현실이 되었던 것처럼 여러분도 제가 어제와 오늘 여러분에게 들려드린 진리, 그리고 그 책을 통해 접하게 될 진리에 여러분의 믿음을 더하고 그래서 이 바라는 것을 여러분의 실상이 되게 하고, 여러분의 믿음의 증거가 되게 하는 일을 위해서 말씀드린 것입니다. 제가 드린 말씀을 머리로 듣지 마시고, 혹시 그 책을 읽으신다면 절대로 머리로 읽지 마십시오. 그러면 아무런 득도 없습니다. 여전히 삶과 믿음을 온전케 하지 못하는 공허한 지식만 늘리는 셈이 될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이 믿음에 대해서 더 많이 궁금해 하고 갈급해 햐며, 또 계속해서 하나님으로만 만족하려는 영적인 싸움을 계속해 나갈 때,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바로 이런 믿음을 주실 것이라 확신합니다. 그 풍성한 길로 인도해 주실 것이며, 흔들림 없는 평강 가운데로 이끌어 주실 것이라 믿습니다. 그동안 끊고 싶고 떠나고 싶어도 그러지 못했던 죄악들도 훨씬 쉽게 이겨낼 수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이제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기로 작정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어 근심을 넉넉히 이겨내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한 날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다고 말하며 먼저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며 사시는 영광스러운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서 참된 믿음이라 인정하시는 그 믿음의 소유자가 되게 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