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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교회 설교/설교듣기

2011년 매일성경설교 30. 이 일이 어찌될까?


날짜 : 2011-08-28

본문 : 사도행전 5장 12-26절


서론 : 두려움의 이유들

사람이 제일 알고 싶어하면서도 반대로 가장 무지한 영역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미래’가 아닐까 합니다. 우리나라의 정치는 어찌 될까? 경제는 회복될 수 있을까? 내 건강은 앞으로 어찌될까? 내 노후는 어떨까? 자녀의 학교는, 결혼은, 취직은, 사업은, 직장은, 첫번 손주는 딸일까 아들일까? 그 아이는 건강할까? 공부는 잘 할까? 말썽없이 잘 자라줄까?... 아무리 고민하고 생각해도 그 어느 것 하나 어떻게 될지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단 한 가지도 없습니다. 또 모든 사람이 자신의 미래를 이렇게 혹은 저렇게 자신이 원하는 모양으로 만들어 가기 위해서 무진 애를 쓰고 있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오히려 역으로 깨닫게 되는 것은 미래는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라는 불편한 진실 뿐인 것 같습니다. 

미래에 대한 무지와 미래에 대한 무능력함... 이 두 가지는 인간의 가장 큰 한계인 동시에 두려움의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이 두 가지에 대처하는 올바른 방법을 아는 것이야 말로 미래를 맞이해야만 하는 우리들에게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일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은 본문을 통해서 그렇다면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이 두 가지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또 대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함께 묵상하며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본문의 맥락 :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

오늘 본문의 바로 앞에는 우리가 잘 아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의 무서운 비극은 어떻게 보면 교회가 최고로 이상적인 상태에 있을 때 일어난 사건이었습니다. 4장의 기록을 보면 그 당시 교회의 성도들은 말 그대로 모두가 하나이고 가족이었습니다.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없더라’라는 말이 그 사실을 증명해 줍니다. “정말 회개한 사람은 지갑이 회개한 사람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기 소유에 대한  태도, 경제생활을 하는 모습만큼 그 사람의 참된 변화 여부를 정확하게 드러내는 증거가 없다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그 당시의 성도들은 거의 모두가 참으로 회심한 성도들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100퍼센트는 없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비록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였지만 교회의 다른 지체들처럼 자신이 가진 것을 모두 내놓을 만큼 공동체에 대해서 열려있지는 않았습니다. 문제는 이런 상태에 있는 이 부부가 자신들로서는 준비도 안된 일을 하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남들이 다 그렇게 하니 자신도 그렇게 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일이 벌어졌습니다. 재산의 반을 내놓으면서 그게 다라고 교회를 속였고 하나님을 속이려 했습니다. 재산을 내놓지 않는다고 뭐라고 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자기 의를 증명해 보이고 거짓을 통해서라도 인정받고 싶어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몰라도 하나님은 그들에게 속지 않으셨습니다.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부부에게 정직해질 수 있는 기회,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애석한 것은 이들은 끝까지 고집을 부렸고 그러다가 둘 다 그 자리에서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이 일은 두 사람에게는 크나큰 비극인 동시에 교회에게는 교회 전체를 뒤흔드는 위기가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한참 성장하기 시작하는 교회, 성도들 간에도 너무 너무 분위기가 좋은 공동체, 그렇지만 아직 신앙은 어린 교회... 이런 공동체 안에서 성도가 하나님과 교회를 속이려는 일이 일어났고 그 결과 두 사람, 그것도 부부가 죽음을 당했습니다. 오늘날 어떤 교회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그 교회가 어찌 되겠습니까? 분명히 혼란에 빠지고 교회는 산산히 흩어지거나 적어도 헤어나올 수 없는 영적인 침체에 빠지게 되기가 쉬울 것입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교회는 전혀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정반대의 모습이 되었습니다. 12절 이하에 그것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이 일이 있은 후에 비록 어떤 사람들은 두려움 때문에 교회에 들어오는 일을 머뭇거리게 되기는 했지만 성도들의 결속력은 더 강해졌으며 드디어 공개적으로 모임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또 수많은 남녀가 주께로 돌아와서 주님께 헌신했고, 백성들은 교회를  칭찬했습니다. 병이 고쳐지고 귀신이 내 쫓아지는 일도 더 많아져서 하나님의 영광도 더 크게 빛나기 시작했습니다. 

위기 뒤의 복... 이어지는 위기, 제자들의 투옥

이렇게 가장 큰 위기는 오히려 가장 큰 기회가 되었습니다. 아나니아 삽비라 사건 이후의 교회는 점점 더 칭찬받는 공동체가 되어가고 있었고, 믿는 사람들은 기하급수적으로 더해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엄청난 기적들이 일어났습니다. 일이 이렇게 풀려나가는 것을 보게되면 우리는 그 다음에 무엇을 기대하게 됩니까? “야, 이제 교회는 부흥하는 일만 남았구나, 앞으로 하나님의 교회는 승승장구하겠구나!”하고 기대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일은 예상대로 그렇게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성도들은 믿음이 더 확고해져 가고 있었고, 교회는 더 든든해져 갔지만, 그 일이 눈에 보이는 교회의 승리로 이어지지는 않았습니다. 비록 많은 사람들은 교회를 칭찬했지만, 반대로 이런 현상을 아주 위험한 일로, 그리고 위협적인 일로 바라본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그 사람들이었습이다. 이들은 복음이 퍼져가고 제자들의 영향력이 확대되어 가는 일을 시기 가득한 눈으로 바라 보았고 그래서 자신들이 가진 힘을 사용해서 사도들을 잡아다가 가두었습니다. 드디어 기독교에 대한 공식적인 핍박이 시작된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선한 일이 항상 선한 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세상을 이루고 있는 사람들이 악하고 이기적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선한 일이 나와 상관없는 일일 때는 선한 일을 칭찬하지만 그것이 직접적으로 자신의 이익에 어떤 형태로든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때는 그것을 반대하고 방해합니다. 그것이 사람들의 본능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선한 일을 할 때, 어떻게 보면 그런 반대를 예상해야 하고 그런 방해를 예측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오히려 그런 모습들을 어느 정도는 당연히 그렇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오히려 그 반대와 방해에 휘말려서 자신이 해야할 선한 일들을 끝까지 이루지 못하기 쉽습니다. 

교회는 이 사람들 때문에 다시 한 번 위기에 빠집니다. 막 세워지기 시작한 교회의 지도자들이 복음을 전하다가 다 감옥에 갇히게 된 것입니다. 이 일은 일 자체로만 본다면 아직은 믿음이 어리고 약한 성도들을 두려움에 빠지게 하기에 충분한 일이며,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흔들기에 충분한 일입니다. 예수를 믿고 그 예수를 전하다가 나도 저런 꼴이 된다면 어떻게 하나 하는 두려움에 빠지게 만들고, 하나님에 대해서는 하나님은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저런 꼴을 당하는 것조차도 막지 못하는 신이구나하고 의심하게 만들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잡히던 날 밤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셔서 쥐도 새도 모르게 제자들을 풀어주신 것입니다. 제자들을 풀어주신 하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성전에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고 제자들은 풀려나자 마자 쉬지도 않고 새벽같이 성전에 가서 복음을 전합니다. 

아침이 되자 아무 것도 모른 채로 잠에서 깬 제사장과 사두개인들은 느지막하게 제자들을 심문하고 벌 줄 요량으로 부하들을 감옥으로 보내 그들을 데려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옥에 다녀온 부하들은 믿지 못할 이야기를 합니다. 가 보니 잠긴 문도 그대로고 옥을 지키는 옥졸들도 그대로인데 죄수들만 없더라는 것입니다. 도저히 자신들이 생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일을 바라보면서 “이 일이 어떻게 될까?”하고 걱정하기 시작합니다. 그 때 다른 부하 하나가 뛰어들어오면서 어제 잡아넣은 사람들이 성전에서 사람들을 가르치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제사장 무리와 사두개인들은 부하들을 보내어 이들을 잡아오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미 전세는 역전된 이후였습니다. 만약 제자들이 감옥에 있다가 잡혀오는 것이라면 이들은 전혀 다른 사람들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하고 싶은 대로 제자들을 마음대로 함부로 다루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이미 제자들이 복음을 전하다가 잡혀갔지만 천사가 풀어주었으며 그래서 성전에서 다시 복음을 전하게 되었다는 증거를 들은 이후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제자들을 잡아가면서도 그들을 함부로 다루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들을 옥에 가두었던 그 일이 큰 증거가 되어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의 신뢰와 지지를 얻게 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잡혀가고 있는 사람들은 제자들이었지만 오히려 두려워하고 조심스러워 하는 사람들은 제사장 무리와 사두개인들이 되어버린 아주 아이러니한 일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첫번 투옥 사건의 의미와 결과

이렇게 될 것 같은데 저렇게 됩니다. 저렇게 흘러갈 것 같은데 반대로 이렇게 흘러옵니다. 이것이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초대교회의 일들입니다. 그렇다면 일이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왜 초대교회의 역사는 우리의 생각과 추측을 깨는 방향으로 이루어져 갔을까요? 그것은 그 모든 복잡한 일들, 어찌보면 결코 좋지 않아 보이는 모든 일들 속에서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미래가 불확실하다는 것, 그리고 그 미래에 우리의 의지나 바램과는 상관없이 우리가 싫어하고 피하고 싶어하는 일들이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은 분명히 우리를 불안하고 두렵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지금도 일하시는 것이 분명하고 우리가 그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갈 수만 있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그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고, 오히려 그 일들이 아니면 얻을 수 없는 기적같은 유익들을 누릴 수 있습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선하신 하나님께서 왜 누가 보기에도 악한 일, 좋지 않은 일을 우리의 삶에 허락하실까 하고 말입니다. 제가 이 질문에 대해서 얻은 답은 한 가지입니다. 그 선하신 하나님께서 그런 일들을 허락하실 때는 우리에게 그 일이 아니고는 주실 수 없는 아주 아주 중요하고 값진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해야 할 유일한 일은 바로 그렇게 일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기록되어 있는 제자들의 투옥사건은 그것을 보여주는 아주 전형적인 사건입니다. 누가 하나님의 일, 그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일을 하며 선을 행하면서 자신이 옥에 갇히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겠습니까? 그렇지만 제자들은 잡혔고 옥에 갇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기적적으로 풀어주셨고 다시 복음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본문의 기록은 그게 다 이지만 우리가 이런 일을 겪으면서 제자들과 교회가 얻게된 영적인 유익을 생각해 본다면 그 유익은 하나님의 위한 선한 일을 하다가 당한 고난의 크기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엄청나게 크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먼저 제자들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처음 제자들이 복음을 전하다가 잡혔을 때, 아마 이들도 당황하고 어안이 벙벙했을지도 모릅니다. 내가 무슨 죄가 있어서 하나님이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게 하시나 하고 하나님을 원망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밤에 갑자기 뭐가 어떻게 된 영문인지도 모른 채로 천사들이 이들을 풀어주는 경험을 합니다. 이런 일을 모두 겪은 후에 이들이 깨닫게 된 것이 무엇일까요? 첫째로 자신들이 복음을 전하는 일은 항상 승승장구, 탄탄대로가 이어지는 일이 아니라 언제든지 죄없이 옥에 갇히는 것 같은 고난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을 전하는 자가 감당해야할 짐이라는 현실감각을 얻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분명히 앞으로 닥쳐올 수 있는 환란과 핍박에 대한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게 해 주었을 것입니다. 또 한 가지 가장 중요한 것은 비록 자신들이 복음을 전하다가 옥에 갇히고 핍박을 당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언제든지 원하기만 하시면 자신들을 건져주실 수 있다는 사실을 배우고 그런 하나님을 확신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런 일을 들은 것이 아니라 자기 몸으로 직접 경험한 제자들로서는 이제는 옥에 갇히는 일쯤은 아무 것도 아닌 일로 여길 수 있는 담대함을 얻게 되었을 것입니다. 본문 뒤에 이어지는 기록을 보면 제자들이 그런 담대함을 가지고 자신들을 핍박하는 사람들을 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만약 이런 과정이 없었다면 이들이 이런 담대함을 갖는 일이 무척 어려웠을 것입니다. 

교회의 입장에서도 이 일은 커다란 유익이 되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믿음이 어렸기 때문에 성도들은 처음에는 분명히 제자들보다도 더 절망하고 실망했겠지만 제자들이 그렇게 풀려나고 오히려 전보다 더 당당하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는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의 위대함을 실감했을 것이고 그런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더욱 더 견고해지고 담대해졌을 것입니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은 언제나 앞으로 나아가려는 우리들의 발목을 붙잡고 늘어집니다. 그래서 그 두려움을 이겨내지 않는 한 우리는 영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의미있고 용기있는 삶, 그리고 성도로서의 거룩한 삶을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실제로 우리가 하나님께 더 헌신하지 못하고 또 더 온전히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못하는 이유도 바로 이러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 있습니다. 이러다가 나만 손해보면 어쩌나, 이러다가 내 삶이 망가지면 어쩌나 하는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 실은 일어날지 어떨지도 모를 일들에 대한 근심과 두려움이 우리를 더 온전한 성도의 삶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두려움에 지는 이유는 그렇게 해야 자신이 원하는 만족과 안전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두려움은 우리를 그렇게 속입니다. 이 두려움을 받아들이고 이 두려움이 요구하는 것을 선택해야 평안하고 만족스러운 삶을 살 수 있다고 이야기 합니다. 미래에 대한 우리의 무지와 불안함을 미끼로 그런 말로 우리를 꼬득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말도 안되는 속임수에 속아 넘어가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회원 여러분, 두려움은 그 어떤 면에서도 우리를 유익하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두려움을 느끼고 그 두려움 때문에 주저 앉는다고 해서 결코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만족스러운 삶을 살게 되지 못합니다. 현실적으로도, 영적으로도 그것이 우리에게 만족을 주지 못합니다. 오히려 더 두렵게 만들고 더 불안하게 만듭니다. 그렇게 해서 더 자기 자신에 사로잡히게 만듭니다. 

두려움이 우리를 유익하게 하는 유일한 경우는 우리가 그 두려움에 굴복했을 때가 아니라 그 두려움을 넘어섰을 때입니다. 그 두려움을 신앙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이고, 그 두려움을 더 큰 믿음의 재료로 사용할 때, 그 때만 두려움은 우리에게 유익이 될 수 있습니다. 

이제 막 예루살렘의 성도들은 믿음은 견고해져 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복음의 능력을 깨달아 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보시기에 이런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탄탄대로나 계속적인 승리가 아니었습니다. 만약 이들이 계속해서 이렇게 나아갔다가는 언젠가 믿음과 복음 때문에 고난을 당하게 되면 힘없이 무너지게 되기가 쉽습니다. 더 쉽게 하나님을 의심하고 하나님께 실망하게 되기 쉽습니다. 마치 실패를 모르며 살았던 사람이 가장 심각하게 무너지기 쉬운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신앙의 초기에 그런 어려움을 주셨고 그 어려움을 하나님 스스로 해결해 보이셨던 것입니다. 그것은 이런 경험을 통해서 믿음의 현실을 이해하고 나아가서 하나님과 그 분의 능력을 더욱 온전히 신뢰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사도행전의 기록을 보면 이러한 하나님의 목적이 멋지게 이루어져 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결론 : 두려움을 넘어 더 견고한 믿음으로

두려움은 부인하며 안됩니다. 두려움은 두려움으로 인정해야 합니다. 그것이 그 두려움을 이기는 첫 걸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거기서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두려움은 우리가 거기 주저 앉아야 할 편안한 의자가 아닙니다. 그것은 반드시 극복해야 하는 장애물입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그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 그 두려움을 오히려 더 큰 유익으로 바꿀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처음 예루살렘 성도들과 제자들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를 향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를 두렵게 하는 일은 항상 있다. 그러나 그 두려움 때문에 주저 앉아서는 안된다. 두려울 때 나를 바라보고 나를 믿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쥐도 새도 모르게 제자들을 풀어주었던, 그래서 그들을 더 큰 믿음의 사람들로 만들었던 나를 믿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갈 때, 우리 앞에 탄탄대로만 열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더 많은 반대에 직면할 수 있고 더 큰 어려움을 당할 수 있습니다. 이런 가능성이 우리를 근심하게 하며 두렵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언제나 주님이 계십니다. 언제나 동일하신 하나님이 계십니다. 오늘 제자들의 투옥 사건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해 가시는가를 보여주는 하나의 패턴입니다. 나는 항상 변함없이 이렇게 일한다고 우리 귀에 대고 외치시는 하나님의 커다란 외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너희는 내가 언제나 이렇게 일할 수 있다는 것을 믿느냐?”고 물으십니다. “2000년전 뿐만 아니라 21세기에도, 그 때 뿐 아니라 오늘도, 예루살렘에서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대구에서도, 제자들에게 뿐만 아니라 장유진 너 개인에게도 그렇게 행하는 하나님임을 믿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오늘도 내가 내 뜻을 따르는 종들의 옥문을 언제든지 열어줄 수 있다고 믿느냐?”고 물으십니다. 

회원 여러분, 미래의 불확실함은 두려움의 이유가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더 큰 믿음을 위한 필수재료입니다. 우리는 미래의 불확실함이 아니라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그 불확실함을 허락하신 아버지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두려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 불확실함을 넘어서서 하나님을 신뢰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담대하고 순결하며 당당하고 거룩한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제사장과 사두개인들처럼 우리의 예상대로 되어지지 않고 예측조차 할 수 없는 미래를 생각할 때 “이 일이 어찌될까”하는 근심과 두려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두려움에 지지 마시고 그 두려움을 믿음으로 이겨내고 그것을 더 큰 믿음의 재료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그 근심과 두려움을 통해 ‘그래도 나를 믿을 수 있겠느냐’고 물으시는 하나님께 ‘아멘’으로 응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미래의 불확실함은 오히려 더욱 더 하나님은 신뢰할 수 있는 이유가 될 것이며, 그 믿음은 여러분에게 하늘의 비밀한 복들을 가져다 주는 통로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미래의 불확실함을 통해 더 견고하고 더 풍성한 믿음의 복을 허락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