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 2011-09-04
본문 : 사도행전 8장 4-25절
서론 : 성령충만함은 절실하다
저는 이번에 사도행전을 읽고 연구하면서 신앙적으로 작지만 굉장히 중요한 전환점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제가 지지난 주에 설교하면서 여러분에게 질문 하나를 드렸습니다. 오늘 그 질문을 다시 한 번 드려보겠습니다. “회원 여러분, 성도는 반드시 성령충만해야 합니까?” 그렇습니다. 성도는 반드시 성령충만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이번에 사도행전을 연구하면서 발견한 아주 중요한 영적인 포인트입니다. 뭐 그런 것 가지고 그러느냐고 하실 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저에게는 이것이 평생을 두고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며 기도해야할 영적인 목표중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전에도 저는 성도는 성령충만해야 한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게 필수적이라는 생각은 그렇게 절실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어찌보면 일상적인 수준에서 그래야 한다고 생각은 했지만, 항상 그렇지 못하다는 현실 때문에 약간의 안타까움과 신앙적인 가책을 느끼는 정도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 감정들을 느끼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내가 지금 성령충만하냐 하는 것’이고 ‘반드시 성령충만해야 하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제가 사도행전을 통해 복음이 전해졌던 곳에는 항상 성령의 충만하신 임재가 있었던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도 그 때처럼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는 성령님의 충만하신 임재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제가 그렇게 믿고 또 절실하게 소망하게 된 것입니다.
물론 성령충만함이라는 것이 마음대로 만들어 낼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에 그저 기도하고 간구할 수 밖에 없지만, 주님께서는 분명히 성령충만함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고 그것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하셨기 때문에 오늘날도 주님은 그 약속을 지키신다고 믿습니다. 성도들이 예수를 믿고 성령충만함을 위해서 기도한다면 분명히 주님의 때에 성령충만함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저에게도 성령의 충만한 임재를 허락하시고 제가 그 안에서 살아가고 또 사역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저와 함께 성령충만함을 여러분의 신앙적이고 영적인 목표로 삼고 기도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도행전은 약속성취에 대한 이야기이다
사도행전은 사도행전 1장 8절에 나오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라는 주님의 약속이 성취되어져 가는 과정에 대한 실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약속은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는 성령님께서 임재하실 것이라는 것과 두번째는 그렇게 되면 제자들과 성도들이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복음의 증인들이 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약속은 성취되기 시작했습니다. 오순절날 예루살렘의 한 다락방에 모인 제자들 위에 성령님의 강한 임재가 있었습니다. 첫번째 약속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사도행전의 1막입니다. 이제 2막 1장이 시작됩니다. 성령님의 충만한 임재 속에서 제자들은 거리로 뛰쳐나가 복음을 외치기 시작했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그렇게 해서 예루살렘에 교회가 생겨났습니다. 이제 두번째 약속의 첫번째 부분이 성취되었습니다. 사도행전의 제 2막 1장이 막을 내린 것입니다.
처음에 예루살렘에 복음이 선포되었을 때, 그 승리는 정말 영광스러웠습니다. 복음을 듣고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예루살렘 교회에 어려움이 찾아옵니다. 제자들은 투옥되고 매를 맞았고, 스데반 집사는 성난 군중들의 돌에 맞아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이 일을 시발점으로 해서 예루살렘 교회를 향한 공공연한 박해가 시작됩니다. 그 박해로 인해 성도들은 뿔뿔이 흩어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흩어진 성도들은 패잔병이나 도망자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복음의 정복자였습니다. 그들은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 일을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대대적인 핍박이 시작됩니다. 성도들은 여기 저리 쫓기고 흩어져 갑니다. 고향과 모든 삶의 기반을 버리고 떠나갑니다. 그러면 교회가 패배한 것일까요? 그렇게 교회는 없어지고 복음은 약해지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였습니다.
사마리아의 복음전도
오늘 본문은 그렇게 흩어진 사람들 중에 빌립 집사가 있었는데, 빌립은 사마리아에 가서 복음을 전했다고 말합니다. 박해를 받고 흩어지는 일은 과히 좋은 일이 아닙니다. 굉장히 힘들고 슬픈 일이죠. 그렇지만, 이 박해가 없었다면 사마리아에 이렇게 빨리 복음이 전해질 수는 없었을 것이고, 그 우울하고 칙칙하기만 했던 사마리아 도성이 기쁨으로 가득차게 되는 일은 그렇게 빨리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특히 우리는 빌립이 전도한 곳이 다른 곳이 아니라 ‘사마리아’라는 사실에 놀라게 됩니다. 사마리아는 어떻게 보면 지리적으로는 예루살렘과 그 어느 곳보다 가까운 곳이지만 심리적이고 영적으로는 결코 가까이 갈 수 없는 가장 먼 곳이었습니다. 그런 곳에 복음이 전해진 것입니다. 그것도 유대인인 빌립에 의해서 말입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1장 8절의 약속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거기에 사마리아가 있습니다. 이 일은 예수님의 약속 중에서 두번째 약속의 두번째 부분이 성취되는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성취에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예루살렘 교회의 승리가 아니라 고난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사도행전의 2막 2장이 막을 내리고 3장의 막이 오르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를 향한 박해는 결코 하나님의 징계나 교회의 실패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께서 아주 적극적으로 사용하신 구원의 도구였습니다. 악한 자들은 그렇게 이제 막 태어난 교회를 없애버리려고 했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약속을 더 온전히 그리고 효과적으로 이루어 가고 계셨던 것입니다. 교회와 성도가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해서 잊지 말아야 할 아주 중요한 것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분명히 바르게 가고 있는데, 진리와 양심을 따르고 있는데, 그 때 생겨나는 고통이나 어려움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징계가 아니고 오히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사용하시는 적극적인 도구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그 어려움들이 어떤 일을 위해 쓰이게 될지 잘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믿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악한 자들이 승리하는 것 같고, 우리는 패배하는 것 같아 보이는 순간에도 항상 그 뒤에서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시며 그래서 모든 것이 그 분의 뜻대로 되어져 갈 것을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제자들의 투옥, 스데반의 순교, 교회를 향한 핍박, 그리고 흩어짐... 그 어느 것 하나 좋은 일이 아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일들을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는 없어서는 안될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당신의 선하신 약속을 이루어 가시며 그래서 마지막에 승리하는 것은 항상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믿음으로 견고히 붙들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핍박으로 인해 성도들은 뿔뿔이 흩어졌지만 그것은 그들이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었습니다. 빌립 집사는 사마리아로 갔습니다. 그가 거기서 복음을 전하자 거기서도 복음은 예루살렘에서와 똑같이 일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믿게 되었고, 귀신이 쫓겨나고 수많은 병자들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성경은 그 결과 어둡기만 했던 사마리아 성에 “큰 기쁨이 있었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에피소드 1 : 시몬의 회심
복음이 사마리아 성에서 발휘한 능력이 얼마나 대단했는가 하면, 도저히 예수를 믿지 않을 것 같은 사람도 세례를 받고 전심을 다해서 빌립을 따라다게 만들 정도였습니다. 그 사람은 바로 마술사인 시몬이었습니다. 시몬은 그저 그런 동네 마술사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요즘으로 치면 아마 아주 유명하고 영험한 무당쯤되었을 것이고, 실제로도 아주 놀라운 일을 행하곤 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자칭 ‘큰 자, 위대한 자’로 행세했으며 사마리아 사람들은 빈부나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그를 ‘크다 일컫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부르며 그의 말을 따를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빌립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다른 사람들처럼 세례를 받았고 마음을 다해서 빌립을 따라다니게 된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시몬이 모든 면에서 완벽하게 변화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사람의 변화를 완전히 무시해서도 안됩니다. 마술로 모든 사람들을 휘어잡고 또 엄청난 경제적인 이익을 보았을 시몬이 세례를 받고 빌립의 추종자가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이 사람 속에는 이미 엄청난 변화가 시작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에피소드 2 : 사마리아성의 성령강림
사마리아 성에 이렇게 놀라운 일이 벌어졌지만 아직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복음을 믿고 세례를 받기는 했지만 아직 단 한 사람도 성령충만함을 받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 소식이 예루살렘까지 들려졌고 예루살렘 교회는 베드로와 요한을 파송했습니다. 실제로 이 두 사람이 사마리아에 왔고 또 그들을 위해서 성령의 임재하심을 간구했다는 것은 너무나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복음이 전해지기 전에는 결코 있을 수 없는 기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전에는 결코 상종도 하지 않았던 사람들, 신앙의 변절자, 가장 경멸스러운 부정한 자로 취급했던 사람들을 위해서, 그 먼 거리를 달려가고 또 그렇게 간절히 기도한다는 것은 이전에는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 제대로 선포되고 또 제대로 믿어지는 곳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개인적인 일같지만 실은 개인적인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나 혼자 예수 믿고 구원받는 일이 아니라, 그 믿음 안에서 같은 믿음을 가진 모든 사람들과 진실로 하나가 되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 차이가 얼마나 크든지, 서로의 감정이 어떠하든지 간에 복음 안에서는 하나요 동등한 자임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그렇게 행동하는 것, 그것이 복음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순종이고 또 복음만이 일으킬 수 있는 기적입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이 하나될 수 있다면, 유대인이 사마리아인에게로 다가갈 수 있다면 세상에 하나가 되지 못할 사람들은 없습니다. 복음이 하나로 만들지 못할 사람들은 없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가장 놀라운 능력 중의 하나이고 나아가서 우리가 순종해야 할 복음의 명령이기도 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명백한 악을 행하는 사람들을 무조건 용납하고 그들과도 스스럼 없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사람들을 제외하면 우리는 그 누구와도 하나될 수 있고 또 하나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복음 안에 있고, 그 복음을 믿는 한 믿음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에피소드 1-1. 시몬의 범죄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 성도들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자 예루살렘에서와 마찬가지로 성령님께서 충만하게 임재하셨습니다. 빌립을 따라다니던 시몬도 그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이것은 마술사였던 시몬에게는 충격적일 정도로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순간적으로 자신도 그런 능력을 가지고 싶어졌던 것 같습니다. 그는 그 마음이 너무 앞선 나머지 거액의 돈을 사도들 앞에 내놓으며 그런 능력을 자기도 가질 수 있게 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시몬은 이것이 별 것 아닌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이것만큼 하나님 앞에서 악한 것은 없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자 마자 베드로는 불같이 화를 내며 말합니다.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 하나님 앞에서 네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이 도에는 네가 관계도 없고 분깃 될 것도 없느니라” 물론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기는 했지만 이 말은 사실 엄청난 저주와 징벌을 선고하는 것이었습니다. 구원이 취소된다는 이야기이고 복음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그래서 복음이 주는 모든 유익과도 상관없어 진다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복음때문에 유대인이라는 장벽을 넘어서 사마리아에까지 온 베드로의 입에서 이런 이야기가 나왔다는 것은 시몬의 실수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의 이러한 반응에 주의를 더더욱 주의를 기울어야 합니다.
베드로가 시몬을 그렇게 심하게 나무랐던 이유는 그가 성령님을 돈을 주고 사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그것을 “하나님 앞에서 마음이 바르지 못하다”고 정죄하며 그렇게 심하게 꾸짖었던 것입니다. 시몬은 이미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었으며, 세례까지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건 추측이기는 하지만 그도 사마리아 교회의 일원이었다면 사도들이 그들을 위해서 기도할 때, 그도 성령충만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가 그 짧은 시간에 참된 신앙과 하나님, 그리고 성령님에 대해서 온전한 이해를 가지게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마음과 생각 속에는 믿기 전에 가지고 있었던 세속적이고 물질주의적인 사고방식이 변화되지 않은 채로 그대로 자리잡고 있었고 이것이 이런 커다란 문제를 일으켰던 것입니다.
마술사 시몬 사건의 의미와 교훈
오늘 시몬의 이야기는 우리가 예수를 믿은 후에도 우리 속에는 여전히 영적인 성숙과 온전함을 방해하는 심각한 장애물이 있을 수 있으며, 그것은 생각보다 굉장히 뿌리 깊고 다루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알게 해 줍니다. 그리고 더불어서 여러가지 장애물 중에서도 힘과 부를 향한 인간의 욕망이야 말로 가장 집요하고 치명적일 수 있다고 말해 줍니다.
자연상태에서의 인간은 본능적으로 더 큰 힘을 원하고 더 많은 것을 소유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힘과 소유를 확대하기 위해서 애쓰며 살아갑니다. 문제는 예수를 믿은 후에도 이런 욕망과 사고방식, 그리고 삶의 태도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며 거기에 맞춰서 살아가는 성도들이 상상외로 많다는 것입니다. 본문의 시몬처럼 아직도 거듭나지 못한 사고방식에 사로 잡혀서 오히려 신앙마저도 눈에 보이는 복을 받는 도구로 생각하며, 교회 생활을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사람들의 인정을 받는 과정으로 이해하는 분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신앙은 결코 우리에게 ‘너의 욕망을 채우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기독교의 신앙은 ‘너의 욕망을 다스리고 내려놓아라’라고 말하며 ‘그렇게 해서 너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 너를 채우시도록 하라’고 선포합니다. ‘그게 인간의 되찾아야 할 원래의 삶의 방식이며 그럴 때에만 그토록 원하는 진정한 만족을 알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기독교가 말하는 참된 회개의 의미이며 또 그 회개가 주는 유익이기도 합니다. 베드로는 시므온에게 “네가 물질중심적인 사고방식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물질과 함께 망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저는 이것이 당시의 시몬 뿐만 아니라 오늘을 사는 성도들 모두를 위한 아주 중요한 경고이기도 하다고 생각합니다. 특별히 우리들 같이 모든 것을 경제중심, 돈 중심으로 생각하는 사고방식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더더욱 말입니다.
이런 메시지를 듣고 또 받아들이는 것이 우리들 모두에게 그리 달갑지 않은 일인 것은 사실입니다. 우리들 또한 떵떵 거리며 부족함 없이 잘 살고 싶은 욕망이 있고, 어느 정도는 그 욕망을 따라 살고 있으니까요. 그러나, 우리가 정말 천국을 소망하며 진정으로 그 나라에서 영원한 영광을 누리기를 바란다면 이 메시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리고 순종해야 합니다. 베드로는 시몬의 행동을 지적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네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발견하게 됩니다. 죄라는 것은 단순히 행동의 문제가 아닙니다. 죄는 내가 하던 행동을 그만둔다고 해서 당장 끊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죄가 무서운 것이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죄는 그 사람의 마음과 생각의 표현에 불과합니다. 이미 그의 마음과 생각 속에 그러한 죄의 동기와 욕망이 숨어있었기 때문에 죄를 짓게 되는 것이죠. 그런데, 죄와 죄의 동기는 서로를 강화하는 역할을 합니다. 죄된 마음과 생각이 죄를 만들어 냅니다. 그런데, 이렇게 저질러진 죄는 또 다시 마음과 생각에 영향을 미쳐서 그 마음과 생각 속에 죄가 더 깊이 뿌리내리게 합니다. 이렇기 때문에 죄가 그렇게 끊어지기 힘들고 죄를 떠나기가 그렇게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마음과 생각의 수준까지 내려가서 다루지 않는 한 죄를 해결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항상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온전히 드러낼 수 있어야 합니다. 정직하고 투명하게 자신의 온전치 못한 마음과 생각, 숨겨진 동기까지도 내놓고 처리해 갈 수 있는 용기를 지녀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 속에 뿌리내린 거듭나지 못한 사고방식과 하나님 앞에서 바르지 못한 마음의 문제까지도 처리할 수 있고 단순한 성령충만의 경험을 넘어서서 성령의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됩니다.
결론 : 믿음과 성령충만 안에서 성숙해 가자
사마리아성의 사람들은 이미 복음을 믿었습니다. 그런데도 사도들이 일부러 거기까지 와서 성령님께서 임재하시기를 위해서 간구했습니다. 이것이 말해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복음을 믿는 자들은 누구나 성령충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예외가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안됩니다. 우리 또한 성령충만해야 합니다. 하나님으로 부터 그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한 번의 성령충만함이 신앙의 모든 것을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 그것은 우리의 참된 거듭남과 영적인 성숙을 보장해 주지 못합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성령충만함 가운데 살아가면서 자신의 마음과 생각까지도 살펴야 합니다. 마음 속에 깊게 뿌리 박고 있는 ‘하나님 앞에 옳지 않은 것들’을 하나 하나 처리해야 합니다. 성령충만함이 그렇게 사고방식과 가치관의 변화까지 이어지도록 해야합니다. 그것이 우리를 예수믿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시는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온갖 방해와 장애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하나님의 일을 해 나가십니다. 사탄이 막아서면 하나님은 오히려 그것을 하나님의 목적을 위한 가장 좋은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은 항상 이루어지고 결국에는 선으로 끝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믿어야 합니다. 또한 이 믿음에 있어서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믿음 가운데 성령충만해야 합니다. 언제나 성령님의 충만한 인도하심 속에서 마음과 생각까지 새롭게 되어 성령의 열매를 맺어가야 합니다. 하나될 수 없었던 사람들과 하나되며, 버릴 수 없었던 욕망까지 내려놓는 자리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초대교회의 역사가 보여주듯이 우리가 이런 성도들이 되어갈 때,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영광을 받으실 것이고, 우리는 복음과 성령의 참된 능력 가운데서 살아가는 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항상 하나님을 향한 흔들리지 않는 믿음과 성령충만함 가운데 머물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참된 성숙을 이루어 가는 참된 성령의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